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2/06/26 23:40:57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폭풍 - 2. 옹진 함락,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옹진반도는 분단으로 인해 섬이 돼 버린 곳입니다. 이 곳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국군도 이례적으로 대병력을 집중했고, 북한 역시 남침시 옆구리를 찌르는 형국이었기에 국지전으로 점령하려 시도했었죠. 49년 말 은파산을 중심으로 한 전투가 모두 끝나고 50년 3월에야 옹진지구 전투 사령부가 해체됩니다. 옹진에 있던 18연대는 수경사에 배속됐고, 17연대만 남아서 방어를 하고 있었죠.


17연대가 맡았던 범위는 45km, 연대장 백인엽은 1대대는 좌측에, 3대대는 우측에 배치하고 2대대는 후방에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병력은 연대 병력 2719, 7 포병대대 500여명, 기타 지원부대까지 합쳐 3600 정도였습니다.

+) 참고로 당시 미군 교리에서 한 개 사단이 맡기에 적정한 방어 전면은 10km였습니다. 38선이라는 대충 그은 선 때문에 안 그래도 부실한 국군의 방어 계획은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었죠.

전쟁 한 달 전에는 북한 포병대의 작전참모 강창남 소좌가 귀순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남침 징후를 모르고 있어서 큰 도움은 안 됐습니다. -_-; 연대장 백인엽은 그래도 여러 징후를 찾아내는데 일반 주민들이 사라지고 차량 이동이 많아졌다는 것이었죠. 6월 24일 자정 경계령이 해제됐지만, 그는 여전히 외출 외박과 휴가를 통제합니다. 문제는 이 때 UN 한위에서 연대를 방문해 이를 문제삼았죠.

"38선상이 이렇게 평온한데 긴장감을 조성케 하는 것은 역효과만 날 뿐, 특별 경계태세를 취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렇게 해서 17연대의 비상조치는 해제됐지만, 그래도 전방에 있는 1, 3대대는 여전히 통제했습니다. 거기에 배로 나가지 않을 바에야 옹진 내에서 돌아다니게 되니 개전 당시 대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래봐야 갇힌 섬이라는 거였죠.

-----------------------------------------------------------

북한에서는 38경비대를 모체로 한 3경비여단과 6사단 14연대를 투입합니다. 이 14연대가 1사단에 아예 들어갔다는 말도 있고 그냥 6사단인채로 투입됐다는 말도 있는데 굳이 어느 쪽을 택할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25일 04:00, 30분간의 포격 후 이들이 옹진으로 밀어닥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주공은 좌측의 1대대로 보였습니다. 국군은 이에 맞서 예비대인 2대대를 좌측으로 보냈는데, 이게 바로 적의 함정에 빠진 것이었죠.

다시 소개하자면 6사단장은 방호산, 그는 팔로군에서 많은 활약을 했던 이였습니다. 14연대부터가 중공에서 들어왔던 바로 그대로 편성됐던 것으로 전투력에 있어서 국군은 물론 북한군에서도 우월했죠. 국군이 열심히 싸울수록 그의 작전에 넘어가는 형국이었습니다.

당시 국군은 고지전의 방침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고, 각 대대는 협동작전보다는 각 고지에서 소대부터 분대 단위까지의 방어전만 계획돼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대대의 주요 방어선이 뚫리긴 했지만, 2대대가 투입되면서 나름대로의 역습에 성공했죠. 하지만 북한군의 작전은 고지 한두개 차지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옹진 자체를 먹는 것이었죠.

조공인 줄 알았던 14연대는 그 순간을 노려 3대대를 맹공, 동시에 1대대와 3대대의 사이로 침투해 국군을 양분시킵니다. 최종 목표는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각개격파를 시도하는 것이었죠.

백인엽은 이를 알게된 후 3대대에게 최대한 방어하게 한 후 1, 2대대에 후퇴하라는 작전을 짜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명령이 도착하기도 전에 3대대는 붕괴, 17연대는 산산히 흩어집니다. 결국 1, 2대대는 예정됐던 부포항이 아니라 사관항으로 철수하게 되죠.

+) 이 때 참 특이한 일이 벌어지는데, 대전차포로 적 전차를 파괴한 것이었습니다. 대전차포 4문을 궤도에 집중사격해 전차 3대와 장갑차 2대를 격파한 것이었죠. 이후 처음 투입된 미군도 못 한 것이었습니다. (근데 나중에 투입한 미 해병대는 합니다 (...)) 옹진 반도에 배치된 부대가 실전경험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경험은 역시 무시 못 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다른 전선에서도 적긴 하지만 이렇게 대전차포로 전차를 격파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미 25일 오전부터 전 부대의 해상 철수가 계획됐고 1, 2대대는 퇴로가 막혀 예정에도 없던 사관항으로 갔던 상황, 이런 상황에서 하루를 더 버틴 것만도 기적이었습니다. 지연전을 펼치면서도 계속 싸웠던 국군과 진격 자체가 그리 원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북한군의 합작이었죠. 애초에 북한군은 옹진은 최대한 빨리 치고 주력을 서울로 돌려야 되는 상황이었고, 14연대는 26일 옹진의 장악을 확인하고 바로 개성의 본대에 합류합니다. 이후 3 경비여단이 마무리를 했죠.

-----------------------------------------------

애초에 옹진은 전면전시 버려질 수밖에 없던 곳이었습니다. 3월에 만든 국군의 계획에도 국지전의 경우 최대한 버티면서 증원을 기다리는 것이었지만, 전면전 때는 해상 철수를 하도록 계획돼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철수 계획을 제대로 짜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전면전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때문에 철수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백인엽의 임기응변에 맡겨야 했고, 북한군이 국군을 각개격파하면서 1, 2대대는 계획하지 않은 곳으로 가 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26일 육본에서 정식 철수명령을 내려서 해군 LST가 도착해 3대대는 비교적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 2대대는 달랐죠. 애초에 사관항이 계획되지 않은 곳이기도 했고, 급히 해군을 보냈지만 잔뜩 긴장해 있던 1, 2대대 패잔병들은 이를 북한군으로 오인해 공격합니다. (...) 이런 일은 5일간이나 계속됐고 1, 2대대는 목선과 기관선 등으로 철수해야 했죠. 이런 상황에서 17연대는 무려 90%가 철수에 성공합니다. 끝까지 항복 안 하고 어떻게든 돌아가려고 노력했던 국군과 이들을 놓친 북한군에 감사할 따름이죠. 하긴 3경비여단의 경우 본격적인 전투병력은 아니니 옹진 시내의 민심을 다독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을 겁니다만.

그런 점에서 참 안타까운 것은 옹진 시민들의 철수입니다. 애초에 군의 철수도 제대로 준비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시민들의 철수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죠. 그냥 남겠다는 이들도 많았겠지만 같이 가려고 하는 이들이 없었겠습니까. 거기다 이들은 방어선 축조에 연인원 6만이나 동원될 정도로 (자발적이든 강제든) 군을 도왔던 이들이고, 국군이 후퇴하더라도 이들을 어느 정도라도 책임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안 됐죠. -_-;

뭐 어쨌든 탈출한 이들은 있어서 이들이 서해 5도나 인천에서 살고 있습니다만.

그 외에 군사적으로 아까운 점은 포병대대입니다. 당시 포병대대는 국군에 단 5개밖에 없었죠. 나머지 4개는 1, 6, 7, 8사단에 배속됐고 나머지 하나는 17연대에 배속됩니다. 하지만 후퇴과정에서 이들은 가지고 있던 대포 전부를 버리고 와야 했습니다. 이렇게 국군 자체에도 큰 손실이었던 것이죠. 정치적인 의미로 포병을 추가한 것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어차피 전면전 때 포기할 지역이었으면 보다 철수 계획을 확실하게 짜서 국군과 시민, 물자의 철수도 원활하게 했어야 됐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포기했을 지역에 많은 병력을 배치했다는 것부터 적절한 지역에 적절한 병력을 배치해야 된다는 교훈으로 쓰이죠.

그 외에 3대대와 함께 LST로 철수했던 백인엽 대령은 철수 직전 권총으로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후퇴 엄호를 위해 남았던 중대와 소식이 끊긴 1, 2대대를 남겨두는 죄책감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역시 마음에 들진 않네요. 무슨 일본군 따라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철수 작전도 분명 중요한 작전이고 철수 후 패잔병을 정비하기 위해서는 대장이 꼭 필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죽는다는 건 그냥 "쪽팔려서" 수준일 뿐이죠. 아예 퇴로가 끊겼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형이 만주군 장교였다지만 -_-;

이 백인엽은 전에도 후에도 맹장으로 알려져서 참 많은 활약을 했고, 형인 백선엽에 따르면 이승만이 자기보다 더 기억하는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좋게 보기는 힘들죠. 적에게도 강했지만 아군에도 참 강했거든요.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후에도 참 개차반 같은 일을 많이 저질러서 형의 이름에 먹칠을 많이 합니다. 군사정권 시절에도 일단 미화되고 보는 다른 장군들에 비해 많이 까였죠 -_-;

+) 이런 자결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고, 이걸 단지 일본군의 잔재로만 보기는 그렇습니다. 애초에 동양에서 항복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으니까요. (우금을 생각해 봅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간에 좋게 볼 순 없습니다. 특히 살아서 철수하는 자기 휘하 병력을 계속 통솔해야 됐던 연대장이라는 위치를 생각하면요. 일본군이 왜 망했는지 다시 생각해 봅시다. -.-

이렇게 옹진은 함락됐고, 이후 짧은 북진 과정을 빼면 다시 찾지 못 합니다. 옹진이라는 행정구역은 인천에 편입됐고, 현재 서해 5도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죠.

여담이라기엔 중요한 얘기지만, 이 옹진 반도 전투는 국군의 북침설의 가장 큰 마지막 근거가 됩니다. 헌데 이 과정이 또 막장입니다. 당시 옹진에 있던 연합통신의 최기덕 기자는 옹진을 떠나기 전에 백인엽과 인터뷰를 했고,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백인엽 대령과 헤어질 때 그가 말하길 '서울 가거든 이 한 마디만 해 주시오. 백인엽이는 부대를 지휘해 해주로 올라가겠소!'라 했다"

그 나름대로의 호기로운 대답일 수도 있는데, 최기덕은 국방부에 들러 이렇게 말 한 것이었죠.

"내가 옹진을 떠날 때 철수명령이 내려진 모양인데, 17연대 장병들의 사기는 해주를 공격하고도 남는다!"

이러면서 각 신문에는 국군의 해주 돌입이 실립니다. -_-

실제 유사시 해주로 돌파해 철수한다는 계획은 있었습니다. 해주만 넘으면 개성이었으니까요. 개전 직후에 이런 신문 외에 국군이나 미군의 입에서 해주로 돌입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백인엽의 인터뷰와 이런 계획의 산물일 뿐입니다. 애초에 개성이 멀쩡할 때나 가능했던 것이었고, 진격이 아니라 철수 작전이었을 뿐이었죠. 옹진 전투 당시 17연대는 집결해 해주를 돌파할 정도의 상황도 아니었고 개성은 이미 점령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전후 백인엽은 자기가 이런 인터뷰를 했다는 걸 부정합니다. (...) 지금도 심심하면 볼 수 있는 기자의 과장일수도 있는데, 진짜라면 자기 자신도 꽤 쪽팔렸나 봅니다. 하긴 죽을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



당시 국군에 있어서 김포 반도는 버려진 상태였습니다. 전방을 맡고 있던 1사단은 임진강으로 후퇴한다는 계획만 세워놓고 있었고, 한강 하구가 하폭이 2~3km에 이르고 조수간만의 영향이 크다는 점 등으로 인해 병력을 배치하지도 않았고 방어계획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죠.

분명 도하는 어려웠지만, 도하에만 성공한다면 바로 한강 남쪽으로 진격, 서울의 후방을 포위할 수 있었습니다. 의정부에서 계속 밀리는 상황에서 이 방면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죠.

이걸 생각해 본다면 국군의 대응은 의외로 빨랐습니다. 북한군의 도하 징후가 보였던 26일 오전, 남산학교의 계인주 대령이 급히 김포로 투입됩니다. 북한군은 이미 반대편 영정포에 집결해 도하지점을 정찰했고, 도하를 시도했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 그대로 남아 한 놈이라도 적을 쏘아 죽이고 우리도 죽겠다. 무기는 못 버린다." - 한 공용화기 사수. 거룻배로 가기엔 무기가 너무 무거우니 버려야 된다고 하자



시작은 패잔병에다 본대에 가지도 못 했던 1사단 12연대, 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3대대장 박광윤 대위가 이끄는 병력과 합류해 600명으로 이루어진 혼성 대대가 됩니다. 이들은 명령이 없었음에도 도주하지 않고 한강에 병력을 배치했고, 25일 저녁에 2개 중대로 추측되는 북한군의 도하를 막습니다. 이들은 정찰병이었고, 국군의 존재를 알게 된 북한군 14연대는 포기하지 않고 26일, 밤과 흐린 날씨를 이용해 교두보를 마련해 버리죠.

이들의 기습을 당한 국군은 분산됐고, 당시 막 만들어졌던 김포사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 합니다. 그 틈을 타 북한군의 주력이 한강을 건넙니다. 이렇게 국군이 후퇴함에 따라 동쪽에 배치됐던 조강리의 남산학교의 병력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죠.

북한군의 기습에 밀린 한순화 소령은 대대 예비인 2개 중대를 지휘해 27일 08:00에 역습을 감행하지만, 북한군은 그 위치에 곡사포를 대대적으로 배치,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합니다. 북한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맹렬히 추격, 이들의 철수를 엄호해야 될 보병학교 후보생대대도 적의 화력에 밀려 13:00에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쭈우욱 밀리고 있었던 것이죠.

-----------------------------

"내가 무슨 면목으로 상관이나 부하를 대할 수 있겠느냐" - 12연대 10중대장 조기백 중위. 이후 부하들이 막음. 죽지 말라니까요 =.=



12연대 2대대는 급히 소미산에 방어진지를 만들고 북한군을 기다립니다. 그 동안 북한군 기마대가 운유산까지 진출, 여기서도 방어진지가 돌파당해 김포까지의 길이 뚫려 버립니다. 다행히 이 때 증원돼 오던 기갑연대가 이를 격퇴해 겨우 막을 수 있었죠. 겨우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본대에 합류하지 못 하고 시흥에서 부평으로 탈출한 병력들도 많아서 이 때 소미산-운유산을 지키던 병력은 1개 대대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육본에서는 예비대로 대기해 온 3사단 22연대 3대대와 휴가 갔다가 복귀한 병력으로 구성된 수경사 8연대 3대대 등 남는 부대를 긁어모아 김포사로 보냅니다.

하지만 이들은 급히 투입된데다 통신 장비도 부족해서 각 부대간의 연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령부도 이들의 위치를 제대로 모르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의 도하는 계속됐습니다. 이젠 전차도 함께였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뭘 해도 전차를 파괴할 수 없었고, 수류탄을 들든 폭탄을 들고 뛰어들든 몸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죽어라 막고 있던 그 시점에서 한강교 폭파 소식이 들려 왔고, 전차에 의해 방어선이 뚫렸다는 소식이 들려왔죠.

28일 11:00, 사령관 우병옥 중령은 김포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바로 이 직후 국군의 패잔병들을 규합한 시흥전투사령부가 창설됩니다. 김홍일은 바로 김포사를 흡수, 병력 재정비 및 김포 비행장 탈환에 들어가죠. 이 때 명령 없이 철수했다는 이유로 우병옥이 잘리고 임충식 중령이 사령관을 맡게 됐지만 우병옥은 그 후에도 김포사 참모장으로 계속 싸웁니다.

-------------------------------------

이렇게 각 부대끼리도 처음 보는 사이에다 사령관도 예하 부대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이들은 27일까지 버팁니다. 이 기간은 짧았지만 국군 전체에는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전 편에서 썼듯, 국군 1사단은 바로 한강 건너에서 작전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김포가 조기에 뚫렸다면 이들은 동서남북으로 완전히 포위돼 버렸을 겁니다. 그들의 철수는 김포사가 퇴각했던 29일, 아직 북한군의 김포 장악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인데다 김포 탈환 작전이 진행중이었죠. 이 때에도 그들은 북한군을 피해 조심해서 철수해야 했습니다. 만약 이전에 김포가 완전히 장악됐다면 이들의 운명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죠. 서울 후방이라 하니 잘 와닿지 않지만, 이 때 북한군의 목표는 영등포였습니다. -.-a

이들은 1사단이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고, 한강 이남에서 국군이 재집결하는 시간을 벌었으며, 시흥전투사령부가 한강 방어선을 완성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소련 붕괴 후 발견된 문서에서 보면 이 전투의 진정한 의의를 알 수 있습니다.

국군에서는 이 때 상륙하려던 병력을 6사단 14연대로 파악했습니다. 헌데... 라주바에프 보고서에 나왔던 북한의 작전계획에 따르면, 이 때 한강을 도하하려던 건 북한군 6사단 전체였습니다.

+) 6사단 14연대 계속 나오니까 왠지 이번편 주인공은 얘네 같아요 -.-

그들의 계획에 따르면 6사단 전체가 영등포를 향해 한강 남쪽을 장악하려던 것이었고, 이렇게 1사단에 대한 공격이 비교적 약했던 게 드러난 것이죠. 달리 말 하면 김포사는 1개 사단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도하가 제대로 된 것 같진 않습니다. 병력만 조금씩 보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국군의 예상대로 한강 하류 도하는 그리 쉽지 않았고, 북한군에는 도하 장비가 제대로 없이 나룻배 같은 걸로 해야 했죠. 이는 북한군의 한계가 컸다는 걸 말 해 줍니다. 하지만 이것도 김포사가 없이 편하게 도하했다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태였죠. 첫 교전에서 정찰대를 쫓아내지 않았다면 북한군은 26일 낮에 아무 방해 없이 대대적인 도하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던 것이죠.

이들은 12연대의 패잔병부터 남산학교의 기간요원들, 보병학교의 생도들까지 보낸 (이건 맘에 들진 않습니다 ㅡㅡ) 복잡한 부대였고, 전투력은 물론 각 부대간의 연계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잘 훈련된 북한군과의 교전에서 계속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밀리는 가운데서도 1분 1초를 벌었고, 그 영향이 컸던 것이죠.

이후 시흥전투사령부가 창설되고 김홍일은 김포사에 병력을 증원했으며, 한강에서 국군이 철수하기까지 이들은 계속 자리를 지킵니다.

군사전문가 김병륜(신재호나 번동아제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하죠)은 이들의 활약을 6사단과 동급으로 평가하며 6사단이 북한군의 왼쪽 날개를 꺾었다면 이들은 오른쪽 날개를 꺾은 것이라 평가합니다.

혼란만 계속됐던 육본에서 나름 제대로 일을 하기도 했고, 패잔병으로 언제 도망가도 이상하지 않았던 1사단 12연대 병력이 자기들끼리라도 병력을 규합해 맞섰으며, 이후 전투력은 약해도 끝까지 맞서 싸웠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저는 군인입니다. 상관의 명령 없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게 군인입니다. 철수 명령이 있기전까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겁니다"

여담으로 이들이 시흥사에 들어갔던 29일에 맥아더가 시흥사에 찾아옵니다. 그와 후퇴 명령이 없었다며 충분한 총알을 달라던 한 국군 병사의 대화가 참 유명하죠. 이 신동수옹이 김포사에 증원됐던 18연대, 진백골부대의 일원이었습니다. 그가 지키던 곳은 6사단이 목표로 하고 있던 영등포였습니다.

이 김포 반도 전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웅이 딱히 없었으니까요. 계인주 대령은 김포사 창설 후 바로 우병옥으로 바뀌었고, 우병옥은 전투를 제대로 못 했다는 이유로 잘렸으며, 그 이후로는 임충식과 최영희로 하루만에 계속 바뀌었거든요. 개전 초에는 6사단의 활약에, 그 이후에는 시흥사에 배속된대다 소련의 문서가 발견된 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구요.

+) 참고로 이 계인주는 국방장관 신성모의 간첩 혐의를 조사하다가 잡힙니다. 흐음..................

그 때도 지금도 그리 주목받지 않았던 김포, 하지만 여기서 목숨을 바쳤던 장병들의 공은 북한군의 계획을 완전히 막았고, 전황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영웅이 따로 있는 게 아니죠. 그 때 그 분들 한 분 한 분이 영웅이었습니다.

============================

다음은 동해로 가 보겠습니다. 동쪽 끝에 배치돼 있던 8사단과, 한국전쟁 최초의 해전 대한해협 해전입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자유수호애국연대
12/06/26 23:52
수정 아이콘
무더운 나날이 이어지네요.
62년 전 이맘때는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더웠을지...
불지옥같은 하루하루를 끝끝내 버텨내며 현재 제가 누리는 삶을 지켜주신 모든 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Je ne sais quoi
12/06/27 00:09
수정 아이콘
아무래도 초반이니... 계속 밀리는 이야기만 나오겠군요 -_-;
smile again
12/06/27 00:21
수정 아이콘
보병학교에서 봤던 전투들이 이제 새록새록 나오겠네요
보병학교에서 전술조교하면서 많은 것들을 듣곤 했었는데 크크
추억 돋는 재밌는 얘기들 많이 써주세요 크크
내일은
12/06/27 00:23
수정 아이콘
대전차포로 전차를 파괴한게 신기한 일인가요? (원래 그러라고 만든게...) 아마 자료상에서 일반 야포를 수평각으로 놓고 전차를 격파했다는 것을 잘못 옮기신 듯 합니다.
세미소사
12/06/27 00:54
수정 아이콘
다음편은 8사단이군요. 8사단은 영천전투 말곤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나름 개전초기부터 편제유지하고 활약한 부대인데 재밌겠네요.
rechtmacht
12/06/27 10:40
수정 아이콘
패장이 자결을 쉽게 생각하는건 동양적 전통(?)인건가요? 눈시님 2차대전 글 보면 미군쪽은 거하게 말아먹은 후에도 오히려 다시 중임을 맡겨 전선에 보내는 일이 많았던거 같은데..
눈시BBver.2
12/06/27 14:45
수정 아이콘
서양의 경우 용병들 위주로 전쟁하다가 근대 들어와서 민족주의 및 국민 개병제로 바뀌어서 그래도 항복 자체는 그리 나쁘게만은 보지 않았습니다. 독소전쟁의 경우 예외였지만요.
동양의 경우... 전근대에는 삼국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듯 (항복한 장수는 일단 평가 절하) 그런 게 전통이었고 여기에 일본이 무사도 + 유교 + 근대 어쩌고를 짬뽕했죠. 한국은 이런 전근대적 전통에 일본군 전통까지 다 이어 받아버렸으니... 계백부터 해서 전장에 투항 않고 죽은 이들은 일단 좋게 보지 않습니까.
하지만 휴머니즘을 떠나서도 작전 구사 능력과 기술 등이 중요한 현대전에서 이런 장교들이 부끄럽다고 죽는다는 건 전력에 큰 손실이죠. 차라리 포위당해서 투항 대신 죽었다면 모르겠는데 그냥 패한 게 부끄러워서 죽는다는 식이 많거든요.
말씀하신대로 잘못된 걸 개인은 물론 군 전체에서도 반성하는 전제 하에 다시 중임을 맡기는 게 낫다고 봅니다. 뭐 그렇다고 국군에서 이게 잘 됐냐 하면 그것도 아니구요 (...);
군인동거인
12/06/27 10:50
수정 아이콘
참담하고 암울한 시절의 얘기니까 마냥 재밌어 하는게 좀 찔리긴 하지만 진짜 재미지네요 하하... 항상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12/06/27 12:43
수정 아이콘
김포사 사령관이던 계인주 대령은 홀로 도망쳐서 일본으로 밀항하려다가 부산에서 체포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미군의 필요로 인하여 복직되었다는 기록을 보았는데, 계인주 대령에 대해서는 별 기술이 없네요. 혹시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요? 만일 사실이라면 잘못을 제대로 들춰야 하는 것 아닌지라는 의견을 가져봅니다. 본문에서 계인주대령에 대해서는 별 기술이 없어서요.
12/06/27 14:39
수정 아이콘
우병옥 중령이 소사동 근처에서 자결했다는 얘기를 인터넷에서 봤는데 그냥 자살시도를 한거였군요. ;;;;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8905 [일반] 낙동강 - 6. 다부동으로 [20] 눈시BBver.27367 12/08/29 7367 0
38895 [일반] [드라마] 안타까운 드라마 '신의' [31] 슈슈8781 12/08/29 8781 0
38509 [일반] [스포츠] 한 주간 <스포츠 + 런던올림픽> 뉴스 올립니다.. [35] k`7527 12/08/06 7527 2
38375 [일반] 희망과 절망 - 3. 한강 방어선 붕괴 [6] 눈시BBver.27341 12/07/29 7341 0
38318 [일반] 희망과 절망 - 2. 적과 아군, 누가 더 빠른가 [27] 눈시BBver.27553 12/07/25 7553 5
37882 [일반] 폭풍 - 2. 옹진 함락, 김포지구전투사령부 [19] 눈시BBver.28048 12/06/26 8048 2
37868 [일반] [6.25] 폭풍 - 1. 개성, 문산지구 전투 [58] 눈시BBver.28966 12/06/25 8966 8
36689 [일반] 북한 광명성 3호 발사 + 김정일의 유언 [98] 눈시BBver.28842 12/04/13 8842 0
36413 [일반] [오늘] 4.3 (1) [14] 눈시BBver.28730 12/04/03 8730 11
36283 [일반] 19대 총선 D-13 각종 언론 여론조사 [21] 타테시6951 12/03/29 6951 0
36076 [일반] 검푸른 해협 - 완. 원 간섭기 [22] 눈시BBver.26919 12/03/21 6919 4
35234 [일반] 대몽항쟁 4부 끝과 시작 - 1. 최씨 정권의 끝 [4] 눈시BBver.24888 12/02/10 4888 1
35210 [일반] 도대체 왜죠? [38] polt9489 12/02/08 9489 0
34458 [일반] [국내야구] KIA 로페즈 , SK 행! [30] 본좌5548 12/01/05 5548 0
32775 [일반] [국내야구]이글스의 안방마님이 FA를 신청했다고 합니다. [27] Animako6523 11/11/02 6523 0
32694 [일반] 고려의 마지막 명장 - (완) 조선의 첫 번째 왕 [14] 눈시BBver.26325 11/10/29 6325 2
32651 [일반] 고려의 마지막 명장 - (6) 정몽주 [16] 눈시BBver.29879 11/10/27 9879 1
32627 [일반] 고려의 마지막 명장 - (5) 폐가입진, 해가 이미 저물었구나 [5] 눈시BBver.25936 11/10/26 5936 1
32564 [일반] 고려의 마지막 명장 - (4) 위화도 회군 [12] 눈시BBver.28028 11/10/24 8028 1
32388 [일반] 고려의 마지막 명장 - (3) 이인임, 최영, 그리고 잠룡 [12] 눈시BB7084 11/10/16 7084 2
32366 [일반] 고려의 마지막 명장 - (2) 신돈, 개혁의 끝 [12] 눈시BB7530 11/10/15 7530 1
32327 [일반] 고려의 마지막 명장 - (1) 공민왕 [12] 눈시BB7746 11/10/13 7746 2
32241 [일반] 글을 써 보아요. [24] 눈시BB5476 11/10/10 5476 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