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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6/25 23:23:47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6.25] 폭풍 - 1. 개성, 문산지구 전투
생각해보니 어제 올렸던 글을 오늘 올리고 [개전]한 후 내일부터 그 후의 전투를 올릴 걸 그랬나 보네요. 뭐 -_-a 이미 지나간 일이죠.
많이 늦었습니다. ( - -)a 봐 주세요~ 그림이나 사진 자료 구하는대로 추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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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작전은 총 3단계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1단계는 서울을 점령하면서 국군의 주력을 포위 섬멸한다는 것, 여기에는 전방에 있는 5개 사단 뿐 아니라 후방에서 증원될 병력까지 포함돼 있었습니다. 경기도를 맡은 1군단은 서울을 직접 치고 김포 반도를 통해 서울의 후방을 포위, 이후 수원까지 진격하는 것이었고 강원도 춘천에서 내려오던 병력은 국군 6사단을 격파한 후 수원까지 가는 것이었죠. 이렇게 될 경우 국군 주력이 개전 3~5일만에 완전히 전멸했고, 그 후에는 남조선 인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진격할 수 있는 것이었죠.

2, 3단계 계획은 1단계와 상당히 다릅니다. 2단계의 경우 군산-대구-포항까지 진출하는 것이었고 3단계는 부산-여수-목포까지 점령을 완료해 적화 통일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여기에는 정확한 기간과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았고, 모든 부대가 합쳐 포위 기동을 하는 1단계에 비해 서로 돕지 않고 따로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즉, 1단계만 무사히 끝나면 그들을 막는 국군은 없이 잔당 처리만 하면서 내려가면 되고, 인민들이 알아서 후방에서 게릴라를 펼쳐 줄 것이며, 미군은 개입하더라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거였죠.

실제 서울은 3일 만에 함락됐고, 국군 수뇌부의 삽질 끝에 이들이 바라던 결과가 어느 정도 만들어졌지만, 실속은 없었습니다. 1사단은 문산에서 어떻게든 막고 있었고, 김포에서는 한강을 건너 포위를 시도하는 북한군을 막아냈으며, 춘천에서는 대규모 북한군을 격퇴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막았습니다. 국군은 항복하지 않았고, 병력이 흩어지고 패하고 한강교가 무너진 상황-_-에서도 강을 건너 어떻게든 합류했습니다. 국군은 한강에 강력한 방어선을 쳤고, 미군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투입됐죠. 그리고 당연히 호응할 줄 알았던 남조선 인민들은 열심히 피난만 갈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능력 부족도 컸습니다. 남한 전역을 빠르면 2주일, 늦어도 8월 15일까지 점령할 수 있고 미군을 고려하면 빨리 점령해야 된다고 소련식 전격전을 폈지만 그들은 이걸 수행할 능력이 없었죠.

북한의 1단계 작전은 이렇게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작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나리오의 많은 부분이 어긋나게 됩니다. 이걸 위해 목숨을 던진 장병 하나하나가 나라를 구했고, 북한군의 삽질 하나하나로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고 참 많은 희생과 절망이 있었지만, 나라가 망한다는 위기에서 그나마 희망이 보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38선 일대의 모든 북한군 부대에 '폭풍'이라는 암호가 하달됩니다. 동시에 무선망으로 224라는 숫자가 타전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갈 곳은 개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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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파견 중인데 지금 사단으로 가서 지휘해도 좋겠습니까?"

1사단장 백선엽 대령이 남침 소식을 듣고 집에서 나온 것은 25일 07:10이었습니다. 차도 없었던 그는 지나가는 차라도 잡으려다 실패, 다행히 지나가는 군용 지프를 잡아 탈 수 있었죠. 그냥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몸으로 막았다고 합니다. 용산의 육군 본부로 간 그는 채병덕에게 저런 질문을 합니다. 채병덕은 이렇게 대답했죠.

"그게 무슨 소리야. 어서 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질문이기에 이걸 그가 얼 탄 거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a 뭐 그래도 아무리 당연한 거라도 명령이 확실해야 되는 게 군대니까요. 근데 사단 본부로 갈 차가 또 없었습니다. -_-; 다행히 미 고문관의 차를 얻어탈 수 있었죠.


전면전이 터졌는데 사단장은 현장에 없었습니다. 사단장 대리로 있던 11연대장 최경록 대령 역시 수색의 연대본부가 아닌 집에 있었구요. 급히 최경록을 차에 태운 그는 수색의 사단사령부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이미 개성이 함락됐을 때였습니다.

+) 설상가상으로 정면의 13연대장 김익렬 대령은 외출 중이었습니다. 4.3 사건 때는 조병옥과 직접 싸우면서도 무장대와의 협상을 시도하고 전선에서는 부하들과 함께 먹고 자며 고생하는 덕장으로 유명했던 그 역시 개전 때는 이렇게 아무런 역할을 못 했죠.


1사단은 개성-문산-서울에 이르는 축선을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정면의 범위만 해도 94km, 이 넓은 곳을 1만명 정도가 지키고 있었던 것이죠. 전방에는 12연대와 13연대가 방어하고 있었고, 11연대는 예비대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정면이 너무 넓었기에 유사시 개성을 포기하고 문산으로 가서 방어하고, 거기서도 여의치 않으면 파주에 만든 예비진지에서 막는다는 계획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 북한군은 참으로 대담한 작전을 시도했고 성공했습니다.

개성에 기차 타고 온 것이었습니다. -_-;

원래 이 철도는 철마는 달리고 싶었는데도 소련군이 다 끊어놓은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밀리에 복구해서 개성시로 온 것이었죠. 국군은 인민군이 늘 그랬듯 송악산으로 올 줄 알았고 실제 그렇게 병력이 투입돼서 막고 있었으며, 개성에는 경찰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이걸 시도한 것은 6사단을 이끌던 방호산, 그는 팔로군에서 게릴라전으로 명성을 떨치던 이로 여기서 참 대담한 도박을 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지뢰 하나라도 심어놨으면 1개 연대가 날아가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 도박은 성공했고, 국군은 협공을 받으며 큰 타격을 입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다만 이건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립니다. 이게 있었다는 것과 없었다는 것으로요. 일단 지금은 있었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것 같은데 확신은 못 하겠군요. 어쨌든 이게 있었다면 정말 제대로 허가 찔린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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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이 임진강에 도착한 것은 10:00, 이미 개성은 북한군이 점령 중이었습니다. 전방의 12, 13연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특히 12연대는 와해되고 포위돼 흩어진 채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1사단 본대에 제대로 합류하지 못 하고 다수가 강을 건너 김포 반도로 가거나 아예 서해로 빠져나갔습니다. 여기에 더 큰 일이 벌어지니 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후퇴 중 사고로 부상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김익렬의 13연대는 검열 준비와 훈련 때문에 대부분의 병력이 대기해 있었고, 지형적으로도 유리해 나름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죠.

"예나 지금이나 임진강은 묵묵히 흐른다. 삼국시대 때도 고구려와 백제·신라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면서 피를 흘렸던 곳이 임진강 지역이다. 깊고 푸른 강 너머로 이제 김일성의 군대가 몰려오고 있었다. 이제 나가서 적을 막아야 할 때다. 나는 몇 대째 뽑아 물었는지 모를 럭키스트라이크 담배를 비벼 껐다"

12연대는 잃었지만 13연대는 무사히 후퇴해 임진강 동쪽 방어선으로, 예비대였던 11연대는 임진강 서쪽 방어선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어떻게든 막을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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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군사고문단이 철수한다면 그들에게 무기와 장비 등을 의존하는 국군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한국을 지키기 위해 왔다면서 가장 위급한 순간에 철수명령을 내린 군사고문단의 의도는 무엇인가. (중략) 눈물은 여러 종류다. 기쁠 때와 슬플 때, 그리고 불안감이 마구 커져 감내하기 어려울 때도 그 눈물이 나오는가 보다. 서울 쪽으로 돌아가는 로크웰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군의 후퇴가 완료된 상황에서 할 것은 다리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12연대 병력을 기다리고 한 상황, 이 때 그와 같이 왔던 로크웰 중령이 떠납니다. 남은 백선엽과 국군 장교들은 대군을 지휘하는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믿었던 고문관이 떠나자 그 충격은 컸죠. 하지만 어쩝니까. 우리나라 우리가 지켜야죠 -_-;

"그러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려 애를 썼지만 이 겪어 보지 못한 전쟁 앞에서 나는 아직 떨고 있었던 것이다"

12연대와 13연대의 후퇴가 완료됐다고 판단한 그는 다리 폭파 명령을 내립니다. 문제는 이걸 책임진 공병 3중대장 김동일 대위가 없었습니다. (...) 어쩔 수 없이 공병대대 작전장교 정극서 대위에게 폭파 명령을 내렸습니다만...

"다리를 폭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적이 다리 건너편에 나타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불발이었습니다. -_-; 그리고 적은 이미 임진강 저편에 나타나고 있었죠. 급히 공병들을 보내 뇌관을 다시 연결하려 했지만 적의 치열한 사격으로 실패합니다. 이 상황에서 북한군은 다리를 건너려 했지만 다행히 포병이 나서서 이들을 막았고, 다리를 확보하는 북한군과 이를 막으려는 국군 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천만다행히도 이들의 전면에 전차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전차가 나타난 건 26일 오후, 13연대의 방어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국군은 전차에 대한 충격을 제대로 느끼게 됩니다. 미군이 자신했던 2.36인치 로켓포를 쐈지만 튕겨낼 뿐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13연대 1대대는 대전차 특공조 18명을 선발합니다. 육탄 공격의 시작이었습니다. 여기에 놀란 북한군 전차가 움찔하는 동안 국군이 쏜 예광탄이 초가집에 맞아 불이 났고, 그게 전차로 옮겨 붙은 모습을 본 후속 전차대는 철수했죠.

주공은 13연대 쪽으로 계속 왔습니다. 그들은 전차까지 동반된 공격을 목숨을 걸고 막았지만 더 이상의 방어는 불가능했죠. 좌측에 있던 2대대는 전차에 의해 방어선이 돌파됐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방에서도 북한군이 침투해 왔습니다. 남은 방법은 후퇴였습니다.

이 때 적의 공격이 덜 했던 11연대는 적에게 밀려 후퇴했다가 역습을 가해 다시 임진강 근처까지 도착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13연대가 후퇴하는 상황에서 11연대 역시 후퇴해야 했죠.

+) 이 때 13연대가 계속 막아서 철수 때까지 임진강을 지켰다는 책들도 있는데 후퇴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백선엽의 회고록에도 후퇴했다고 돼 있구요.

다음 방어선은 봉일천, 26일 19:00에 시작된 철수는 무사히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임진강 다리 폭파에 실패한 공병대대가 21명의 특공대를 뽑아 육탄 돌격을 할 작전을 세웠습니다만, 적 전차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전차 대신 적의 정찰병들을 공격한 후 돌아왔죠.

어느새 이틀, 하지만 이 봉일천이 뚫리면 바로 서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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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특공대란 인간과 인간의 싸움에서 모든 전술과 기계(계략)을 써도 안 될 때 비로소 대를 살리기 위해 소를 희생 (그것도 지원자로서의 생환을 전제조건으로)시키는 수단이라고 하나 전술교범에는 없는 인간 최후의 비인간적 방법이다. (중략) 적을 알고도 대책을 세우지 못 한 상부와 나에게 재삼 그 책임이 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전후에 틈을 쪼개어 당시의 격전지를 찾아 산화한 김 대위와 부하들의 명복을 빌 때마다 늘 자책감이 앞서 몸 둘 바를 모르게 한다." - 최영

이런 상황에서 첫 증원군이 도착합니다. 최영희 대령이 이끄는 5사단 15연대 3대대와 20연대 3대대, 여기에 태능교도대와 시흥 보병학교 등에서 온 이들이었죠. 여기에는 육사 생도들까지 포함돼 있었습니다. -_-; 왜 생도들이 전선에 투입됐는지는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태능 교도대의 경우 미리 증원돼 13연대와 함께 싸웠지만 같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전쟁 훈련을 받지 않은 이들이니 더 빨리 밀릴 수밖에 없었죠.

"봉일천 저항선 뒤편에 있던 노재현 소령의 포병대대는 정확한 사격으로 이들 전차를 저지했다. 정확하게 가해지는 포격에 적의 전차가 주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육탄돌격도 이어졌다. 증원을 위해 도착한 15연대도 육탄 돌격 대열에 합류했다. 적의 포격을 뚫고 이들은 용감히 앞으로 나아갔다. 적 전차에 하나 둘씩 뛰어들면서 이들은 장렬하게 산화했다.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희생으로 적들은 봉일천 저항선으로 감히 다가서지 못했다."

27일, 북한군 전차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1사단은 도로를 중심으로 두 겹의 방어선을 짰고, 후방의 포격 지원과 전방의 육탄 돌격에만 의지했습니다. 그 이상의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저 오면 목숨으로 막을 뿐이었죠.


이 날 오후 서울에서 손님이 옵니다. 김홍일 소장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충격적인 말을 전해주죠. 의정부의 7사단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이었습니다. 1사단은 측면이 완전히 뚫린 상태였고, 홀로 버텨도 남은 건 포위 뿐이었죠. 김홍일은 그에게 철수를 제안합니다. 하지만 명령이 없었습니다. 백선엽은 그에게 후퇴 명령을 받게 해 달라고 했고, 그는 곧바로 육본으로 돌아갑니다.

... 그리고 육본으로 돌아간 김홍일은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죠. 그 상황이 어땠는지는 그 날 저녁 백선엽에게 내려온 명령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현 진지를 사수하라"

-_-...

명령은 명령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사단은 또 하루를 버팁니다. 하지만 이미 28일 새벽에 한강교는 폭파됐고, 북한군은 미아리를 넘어 서울로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우측이 완전히 뚫리고 후방 서울이 점령된 상태에서도 1사단은 오히려 반격 계획을 짜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적의 공격은 계속됐고, 밤을 틈탄 우회 야습으로 13연대는 후퇴해야 했으며, 11연대 역시 새벽에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상황까지도 어떻게든 버텨냈으며, 날이 밝자 반격 작전을 본격적으로 짜게 됩니다.

+) 08:00를 기해 반격을 "개시"했다고도 하는데 정작 백선엽 회고록에는 작전을 짜는 정도였다고 돼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상황을 보면 회고록 쪽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역습 자체는 한 것 같지만 이건 밤 사이 뺏긴 지역을 탈환하는 정도였구요. 다만 적의 공격이 약해져서 반격이 가능하겠다는 생각 자체는 했던 것 같습니다.

28일 아침, 탄약 보급을 받으러 갔던 트럭이 빈 손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죠.

"“서대문 녹번리까지 적이 벌써 진입해 있었고,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는 보고였다. 서대문 형무소 죄수가 풀려나고 거리에는 적기가 휘날리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우리는 앞만 보고 싸우고 있는데 후방은 아무 전갈도 없이 철수한 것이다."

불행은 하나만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포병대대장 노재현 소령은 포탄이 다 떨어진 것을 보고합니다.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앞에 있던 노 소령을 나도 모르게 끌어안았다. 또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이미 북한군은 코 앞까지 들이닥친 상태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이다. 나흘 동안 적과 마주친 상황에서 1사단 병력은 충실히 싸웠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의 항전은 불가능했다. 나는 각 연대장과 참모장, 직할 부대장들을 한군데에 모았다."

이 때 그나마 하늘에서 희망이 나타납니다. 미군의 폭격기였죠. 끝난 것은 1사단의 전투 뿐, 전쟁은 이제 시작됐을 뿐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서 전쟁을 계속해야 했죠. 그는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그동안 잘 싸워줘 고맙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 각자 살길을 찾아서 후퇴할 수밖에 없다. 마침 미군 비행기가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미군이 참전했다는 표시다. 희망을 갖자. 그리고 끝까지 싸우자. 병력을 잘 챙겨서 한강 남쪽으로 가자. 1차 목표는 시흥이다.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 시흥이 불가능하다면 마지막으로 지리산에서 만나 게릴라가 되어 적과 싸우자."



사단의 후퇴는 무질서했습니다. 일단 11연대는 이산포로, 15연대는 행주나루로 도하했지만 배를 구하기도 힘들었던 상황에서 질서정연한 후퇴를 기대할 순 없었죠. 중장비는 모두 두고 몸만 빠져나가는 길이었습니다. 백선엽부터가 사단 지휘부끼리 탈출해야 했고, 지프도 나룻배에 실었지만 적에게 노출될까 두려워 강에 버리고 걸어서 도망가야 했습니다. 남은 것은 게릴라가 돼서라도 계속 싸우자는 맹세 뿐이었습니다.

+) 이 때 김익렬은 철수 중에도 강아지를 품에 안고 갔다고 합니다. (...); 백선엽은 이상한 취미라고 하면서도 그 여유를 부러워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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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25~28일까지 이어진 1사단의 작전은 끝 납니다.

백선엽 자신의 명성 때문인지 이 1사단의 초기 방어 작전은 미화가 많이 되는 편입니다. 일단 버텼다는 점이 크기도 하지만요. 하지만 그 내용은 참 엉망진창입니다. 사단장부터 연대장이 부재 중인데다 12연대는 연대장과 함께 초반에 아웃돼 버렸고, 임진강 다리가 폭파되면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었을 것인데 그게 안 됐죠. 전차는 도저히 맞설 수 없었고 육탄 돌격으로 장병들의 목숨을 뿌리면서 막았고, 계속 밀렸습니다.

오히려 백선엽의 회고록이 미화가 적은 편입니다. 다른 데서는 임진강에서 끝까지 버텼다고 한 것을 봉일천까지 철수했다고 하고 있고, 1사단이 편제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정작 회고록에서는 다 흩어졌고 시흥에서 김홍일 덕분에 다시 편제를 갖출 수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겸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전체 전황을 보면 이 쪽이 맞는 것 같습니다. 1사단이 이후에도 계속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홍일이 아군의 혼란을 수습하려는 노력과 그런 가운데서도 도망가지 않고 시흥에 모였던 1사단 장병들 덕분이었죠.

1사단을 공격한 북한군은 그래도 조공이었고, 임진강 방어선이 구축된 후에는 또 다시 병력이 나뉩니다. 덕분에 1사단은 비교적 만만한 적을 상대할 수 있었죠. 그런 점에서 초기 작전에서 1사단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버텼다는 것 자체로도 대단한 것이죠. 북한군이 얼마나 밀려왔는가 하는 문제는 그 때 전차 앞에서 수류탄을 던지던 장병들과는 무관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앞으로 온 적을 목숨을 걸고 막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단 한 발만 어긋나도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을 6.25 초기, 만약 1사단이 뚫렸다면 그 영향이 얼마나 컸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의정부 쪽으로 투입돼 부대 자체는 물론 많은 사상자를 냈던 다른 사단에 비해 1사단은 몸만 후퇴했더라도 많은 장병들이 살아서 내려왔습니다. 이후 1사단은 시흥에서 재편, 지연전을 계속 하며 후퇴합니다. 이 때는 햇병아리 사단장도, 그 휘하의 장병들도 전쟁에 단련돼 있었고, 이들은 다부동에서 말 그대로 나라를 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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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그가 몰랐던 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리 주목 받지 않는 전투가 있죠. 전쟁 초반에 와해됐던 12연대는 임진강으로 오기도 했지만 아예 김포 반도로 가기도 했습니다.

1사단 주력이 임진강으로 향하는 동안 한강 하류는 뻥 뚫려 있었습니다. 애초에 이 곳은 방어 계획이 없었고, 만약 북한군이 한강을 건너 김포 반도로 간다면 서울 후방이 속절없이 포위되는 상황이었죠. 그리고 북한군에는 그런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투입되는 병력도 무려 1개 사단이었죠. 1사단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대군이 임진강 대신 다른 곳으로 투입된 것도 큽니다.

하지만 이들은 한강을 건너지 못 합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고 지금도 별로 주목을 받지 못 하는 김포에서 전황을 바꾼 일이 일어납니다.

다음 편은 이 김포와 고립돼 있던 옹진으로 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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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12/06/25 23:28
수정 아이콘
선추천 후리딩
이뿌니사과
12/06/25 23:41
수정 아이콘
정말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12/06/25 23:49
수정 아이콘
김익렬 대령의 강아지는....비상식량이었다는 거에 한표 걸어봅니다(...)
거기까지
12/06/25 23:50
수정 아이콘
시작이군요.
가을독백
12/06/25 23:56
수정 아이콘
알기 쉬운, 확실한 전쟁역사를 연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부러 찾기도 힘든 자료들을..
예나 지금이나 윗선은 왜 안될거같으면 후퇴를 명령해야지 안되는걸 알면서도 진지 사수를 명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까운 피들이 저 명령을 지키느라 얼마나 죽어갔을지를 생각하면.. 에고고.
이제 시작인데 너무나도 힘겨운 분전이 눈에 보이는군요.
전차가 들이닥쳣을때 초가집이 옆에 없었다면, 그래서 전차부대가 증원이 더 되었었다면 낙동강 방어선도 못만들어졌을듯 하네요;; 이것도 운인지..
12/06/26 00:14
수정 아이콘
저 시절에서 멀지 않은 과거로 우리의 힛쨩이 있죠.

현위치사수.....아...
사티레브
12/06/25 23:58
수정 아이콘
[오늘]이 가기전에 댓글부터 달고!
읽을게요!
12/06/26 00:03
수정 아이콘
귀신같은 타이밍이네요.
greatest-one
12/06/26 00:06
수정 아이콘
아오...완전 익숙한...저 마크...
그리고 임진강...
전진부대 1사단 15연대 3대대 10중대 2소대
그 자랑스러운 평양선봉입성부대..라지요...
대놓고 중대이름이....
평양선봉입성 중대 쌍호중대 청명소대...
저희가 선봉으로 본평양에 깃발 꽂았다고 하는데...
7사단도 선봉입성이라고 하네요...서평양쪽 입성으로...
뭐가 맞는건지...궁금했습니다...나중에 북진때 알려주시겄지요??
백선엽이라는 한국전쟁에서 발굴한 걸출한 장군의 지휘로...
주요 격전지에서 역할을 한 나름 메이커(?) 부대 출신으로...잘 보고 있습니다.
친일파인명사전 등재에...간도특설대 출신...특집다큐 불방까지 시위까지..
참 논란의 인물이네요...눈시님은 그래도 어느정도는 인정하신다고 하셨는데...
다부동에서는 병사들 사기 올리려고 하다가 포탄이 옆에 떨어저서 간신히 살았다고 하는데...
그래도 군생활 했던 부대였고...선배들이 열심히 싸워준덕에...후임으로 군생활 마치고
다시 편하게 발뻣고 잘수 있게됬으니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어쨋든 목숨걸고 싸운건 중요한 사실이긴 하네요...
Je ne sais quoi
12/06/26 02:1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양념반후라이
12/06/26 08:36
수정 아이콘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네요.
노재현. 혹시 12.12 때 그 분과 동일인물인가요 ? [m]
파벨네드베드
12/06/26 08:39
수정 아이콘
1사단 포병연대 629대대출신인데
안보시간에 죽도록 들었던 이야기네요 크크
앉은뱅이 늑대
12/06/26 08:53
수정 아이콘
6.25 전쟁을 평화로운 우리 나라를 침공한 적군에 맞선 눈물겨운 투쟁이라는 구도 하에서 역사를 본다면 또다른 반공교육과 뭐가 다를지 의문이네요.
12/06/26 09:16
수정 아이콘
뭐 당장 창군편만 읽어도 6.25 전쟁 이전의 우리나라가 평화롭다는 말은 못할테니까요.
사악군
12/06/2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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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를 침공한 적군에 맞선 눈물겨운 투쟁'이 아닌가요? 그럼 뭔가요? 조국통일의 기회를 미제 앞잡이들 때문에 놓친 안타까운 전쟁이라고 하진 않으실테고 늑대님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시는 지가 궁금하군요. 아 위에 댓글에 있는 그대로인가요?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말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얘기네요.
12/06/2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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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단 12연대본부 인사과 출신입니다.
외출끊고 서울 가는 애들한테 만두 한봉지에 휴가증 넘기곤 했는데...
사병들을 개처럼 부리던 군수과 상사가 지 아들 신검받을 때 면제 받으려고 개지랄 떨던거며 기름 팔아 먹던거,
당연하다는 듯 부식을 집으로 가져가던 주임원사, 비 오는 날이면 눈이 노래져서 괴롭히던 행보관,
날 영창보내려고 기를 쓰던 중대장. 인사과장한테 욕만 쳐먹고 결국 자체 군기교육대를 만들어서 일과 후 계속 돌렸었지.
이 미친놈이 휴가를 계속 짤라서 11개월동안 밖에를 못 나갔었네. 아오, 깊은 빡침.
날 정말 싫어하던 30살 대머리에 연대 회계사 출신 '김용남'이 근무 투입시 너 대가리 찍어 버릴려다 한번 참고,
너 행불자 만들려고 집주소 외우고 있었는데... 그냥 참고 있다.

동란시 연대장이 죽은 적도 있는데 한번도 패한 적 없는 부대라고 뻥카치는거 보고,
비웃던 기억도 나고... 참나, 군대 생각하면 좋은 기억이 없는거 같네.

아~덜 낳으면 무선 일이 이서도우~
군대 뺀다고우~ 다짐 다짐 했었지. 컴온`
그치만 난 딸이 있쥐. 것도 예쁜 딸 ! 예~ 베베~
자이체프
12/06/26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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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 늑대 님// 역사의 전후단락을 살펴보고 판단을 내려야 하는게 맞지만 한국전쟁은 북한의 명백한 남침이며 한반도 전체에 큰 비극을 안겨준 일입니다. 이념 문제를 떠나서도 벌어져서는 안될 전쟁이었고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광복이 된지 5년밖에 안된 때였습니다. 사람들 중에 몇 명이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고 있었겠습니까? 총들고 싸운 국군 병사중에 자본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자기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 겁니다. 개인의 신념은 지켜져야 하고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걸 잣대로 지나온 역사를 멋대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온 사람들 중에 눈시님의 글을 읽고 반공교육의 재탕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눈시님의 글에서 정치적인 의도가 조금이라도 읽혔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다음 글을 기다리고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이체프
12/06/2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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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 늑대 님// 한국전쟁은 30년전쟁이나 백년전쟁처럼 남의 일이 아닙니다. 명백하게 침략한쪽이 있고, 직간접적으로 겪은 사람들이 주변에 생존해있는 현실이죠.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 한국전쟁을 북한쪽 입장에서 서술할수는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그리고 대다수의 병사들은 민주주의라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총을 든게 아니라 후방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싸웠다는 의미입니다. 역사를 관점없이 볼수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기계적인 중립을 의미한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눈시님의 글이 정치적인 의도가 없다고 판단하셨다면 한쪽으로 기울어진 시선이 안타깝다느니 다른 관점에서 바라봐야한다느니 하는 식의 댓글을 달 필요가 없으실텐데요?
눈시BBver.2
12/06/2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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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 늑대 님// 글쎄요. 이렇게 바꿔 볼까요?
5.18 민주화 운동을 독재자가 쓰러진 상태에서 나타난 또 다른 독재자에 맞선 눈물겨운 투쟁이라는 구도 하에서 역사를 본다면~ 뭐가 다를지 의문이네요.
지난 3.1부터, 4.3에서든, 5.18에서든, 근현대가 아니라도 그 옛날 얘기들을 함에 있어 우선 관점을 정하고 그 아래에서 서술을 했습니다만, 왜 6.25만 문제인지 모르겠네요.
나루호도 류이
12/06/26 16:00
수정 아이콘
자꾸 이념적인 논쟁쪽으로 가는데 저는 군사적인 시각에서 리플을 달아볼까 합니다.

전쟁 초반 국군이 그야말로 무질서하게 무너진건 사실이였지만 그건 남한측 입장이고 북한측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또 달랐죠.

전쟁이 벌어지면 미군이 참전할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고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을 한달~한달 반 정도로 잡고 있었던 그들 입장에서는 국군뿐만 아니라 1초도 쉼없이 돌아가는 시간 역시 적이였으니까요.

즉 제 아무리 그들이 전선에서 국군을 격파하고 와해시켜도 50일 이내에 한국을 완전 점령하지 못한다면 북한 입장에서는 실패요. 반대로 남한 입장에서는 국토의 대부분을 빼앗겨도 버티고 버텨서 미군이 올때까지만 낙동강 방어선을 유지한다면 결국 승리하는 전쟁이죠.

그렇게 본다면 북한군의 무능.. 이 우리나라를 구했다고도 볼 수 있었을듯 합니다. 물론 전선이 밀리고 밀리는 와중에도 그들과 치열하게 맞서 싸운 국군 장병들의 역활도 컸구요.

사실 소련참모부는 눈시님의 글에서 나와있듯이 북한군에게 '전격전'을 기대했다고는 하지만... 북한군으로서는 무리였겠죠. 탱크와 비행기등 중화기도 크게 부족했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걸 지휘할 장군과 참모진(2차대전시 만슈타인과 히믈러) 그리고 실제로 전선에서 진격할 야전사령관(구데리안)이 없었으니까요. 만약 북한군에 이런 장교진이 있었다면? 역사는 뒤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암튼 이 6.25 전쟁에서 북한군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그들 역시 꽤나 많은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전쟁이 일어나고 3일 동안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것이 목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전선을 돌파한 이후 멍때리고 있던 부대도 있더군요.
3시26분
12/06/2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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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님이 6.25를 보는 구도가 문제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구도를 말하셔야죠 ?
그런것 없이 계속 태클만 거시고 계시네요.

밑도 끝도없이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이게 올바른 6.25 관점인지 참 ..
자기 생각은 없이 남의 의견만 반공교육 운운하면서 씹고있네요.
12/06/26 17:16
수정 아이콘
반공이란 부분이 어딘지 찾을 수가 없군요. 제가 보기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자연다큐처럼 느껴지는데요.
저도 우국기사단 급으로 세뇌교육이 되었나 봅니다.

쓸데없는 태클을 받는 필자임을 위한 제언 하나를 드립니다.
이렇게 쓰시면 됩니다.

예) 위대하신 령도자 김일성 동지께서는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들을 무찌른 XX부대에 치하의 말씀을 내리시고
직접 폭풍이라는 암구호를 전 부대에 하달하시었습니다.
12/06/2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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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리플이 많나 했네요. -_- 익숙한 분이 보이네요
12/06/26 20:05
수정 아이콘
헐 눈시님 상처 받지 않으시길 빕니다.

늑대님은 첫번째 리플과 마지막 리플의 뉘앙스간에 안드로메다수준의 거리가 있군요. 물론 본인은 부정할 것 같습니다만.
또한, 지금까지 수천시간을 들여서 연재물을 올리는 분한테 딴지를 걸 거면 적어도 자기 생각 정도는 올리면서 정당하게 논쟁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일 것 같습니다.
블레이드
12/06/2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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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리중에는 김일성의 범죄를 지적하는게 불쾌한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식으로 작성자를 힘빠지게 하면 아무래도 앞으로 연재될 글에도 영향을 미치겠죠?
눈시BBver.2
12/06/26 20:25
수정 아이콘
뭐 그냥 앞으로 적을 국군과 우익의 양민학살 건도 이승만의 잘못을 탓 하지 말고 그냥 비극 정도로만 다루면 되겠죠. 좌우의 대립이 문제였지 이승만 같은 국부께서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희생당한 분들이야 억울하겠지만 그 가해자나 관련 없는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당연한 것일 테니까요
자이체프
12/06/26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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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승만이 독재자인 것과 북한의 남침과의 연관성이 뭔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따지면 사담후세인이 독재자였으니 그 정권을 타도한 미국의 침략은 정당한 겁니까? 김일성은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나 김규식이 대통령이었어도 남침을 했을 인물입니다. 당시 남한에 살던 사람들이 북한의 공격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판단했다면 들고 일어나서 정권을 타도했겠죠. 하지만 국군은 끝까지 싸웠고,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제발 본인의 생각과 당대의 보편적인 역사적 인식을 혼돈하지 마십시요. 최소한의 역사적 근거라도 언급하면서 얘기한다면 모를까 본인의 생각이나 추측만 가지고 논하기에는 한국전쟁은 너무나 큰 비극입니다. 천년전의 일인 백제와 신라의 싸움과 반세기전의 한국전쟁이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한국전쟁이 그렇게 선악을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광주민주화운동이나 그 이후의 6월 항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잣대로 판단하시리라 믿습니다. 진영논리로 역사를 함부로 판단하지 마십시요.
12/06/26 21:49
수정 아이콘
주장은 둘째치고 예의가 없으시군요.
이 정도의 자료를 모으고, 시간을 투자해서 쓴 글에 딴지를 걸려면, 그에 상응하는 논리와 자료를 갖추셨어야죠.
다짜고짜, "이거나, 반공교육이나..." 해버리는건 글 쓰신 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아닙니다.
smile again
12/06/27 00:16
수정 아이콘
유익한 글 항상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정성스레 쓰신 글에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너무 다른 쪽에 신경쓰지 마시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계속 좋은 글 써주세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탈분리 되서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겟습니까? 크크
좋은 글 계속 기다릴게요. 많이 배우고 있어요 크크
12/06/28 01:12
수정 아이콘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사람 또 나타나셨네요. 귀는 막히고 코도 막히고 소나 키우는게 나으실듯 한데. 정말 보다보면 이런 말이 안나올수 없네요. 그럼 마음의 고향으로 가시지요 쿨하게 보내드릴테니
Tristana
12/06/30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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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보다가 리플 보고 기분 더러워지네요.
뭐 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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