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2/06/22 00:35:53
Name 자이체프
Subject [일반] 역사, 그 후의 이야기 - 홍종우, 세번째
https://pgr21.com/?b=8&n=37774 - 요건 첫번째

https://pgr21.com/?b=8&n=37774 - 이건 두번째입니다.

어, 그러니까 백수지만 나름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다보니까 할 엄두가 나지 않게 되니까 그냥 이 글을 쓰게 되더군요. ㅡ.ㅡ;;;;
오늘은 절단신공 같은건 발휘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야기를 다 보시고 백년전 이땅의 격동기를 겪었던 분들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기억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자, 이야기 시작합니다.

역사의 전면에 홍종우가 등장하는건 두번입니다. 첫번째는 김옥균의 암살이고, 두번째가 바로 황국협회를 이끌고 만민공동회를 습격한 것이죠. 김옥균의 암살이후 조선으로 돌아온 홍종우는 청일전쟁이 터지면서 잠적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종의 특명(?)을 받고 러시아, 혹은 북쪽에서 모종의 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적어도 일본은 그렇게 믿었죠. 아관파천 이후 일본세력이 급격히 몰락하면서 홍종우는 중앙무대로 컴백합니다. 몇 차례 사직과 재임용을 거치지만 대체로 궁내부에서 일하게 됩니다. 당시 조선은 정치적인 격변기였고, 외세는 물론 야심이 있는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음모가 활개쳤습니다. 아관파천시기의 홍종우는 대체로 고종의 명령을 받고 친일파 관료들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선 것으로 보입니다. 갑오경장때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의 암살계획에 가담했다는 일본측 신문기사가 보입니다만 이 시기 홍종우는 궁내부 참서관으로 근무중이었습니다. 박영효의 암살계획은 사이온지 긴모치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될 정도로 일본의 관심을 끌었다고 합니다.  

고종이 환궁한 이후에는 김홍륙의 후임으로 비서원승에 임명됩니다. 이용익 같은 최측근은 아니지만 나름 인정받는 측근의 반열에 오른 것이죠. 조재곤 교수는 대한제국의 선포와 황제 즉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당시 직책이나 위상을 보면 독자적인 정책을 입안할 정도는 안되는 것 같습니다. 이후 같은 암살동기(?)였던 이일직의 공금횡령사건에 휘말립니다. 얘기가 길어지니까 최대한 짧게 말씀드리면,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을 다시 환궁시키려는 음모가 친일파 대신들과 일본인들에 의해 꾸며집니다. 이들은 경운궁으로 잠깐 나들이(?)온 고종을 납치해서 궁궐로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외국인들을 러시아군으로 변장시키고, 친위대 일부를 포섭합니다만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면서 실패로 돌아갑니다. 당시 고등재판소 판사였던 이일직은 이 사건의 배후에 일본인들이 있다고 얘기하지만 몸통에 대한 수사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와중에 이일직이 공금을 횡령한게 들통이 나면서 궁지에 몰리죠. 더불어 고종에게 홍종우를 경무사로 임명하라고 무례하게 청탁한 것도 문제가 됩니다. 홍종우는 이일직의 공금횡령 사건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고, 경무사 청탁건에 개입한 흔적도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누가봐도 영혼의 파트너였기 때문에 책임을 지고 물러납니다. 1897년 4월 홍종우는 비서원승을 사직하고 사라집니다. 그리고 1년만인 1898년 3월 다시 돌아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말이죠.



조선시대 상소는 중요한 정치적인 행위였습니다. 특히 지방에서 상경해서 상소문을 올리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시위나 파업정도의 파급효과가 있었죠. 이런 시위를 주도하는걸 소두라고 부릅니다. 물론 머리 작은 사람을 얘기하는건 아닙니다. ^^



홍종우는 을미의병출신인 채광묵등, 지방 유립들과 함께 상소문을 올립니다. 독립신문에 나와있는 상소문 내용은 군대의 확충과 도성에 주둔한 외국군의 철수, 그리고 한청은행 설립 반대등 외세의 배격과 자주독립에 대한 얘기들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달에는 쌀 수출 금지, 외국 돈의 유통 반대, 절영도 조차 반대등을 담은 두 번째 상소를 올립니다. 그리고 함께 온 무리 - 무려 천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 들을 이끌고 경운궁 인화문 앞에서 나아갔습니다. 경무사 휘하의 순검들이 홍종우를 체포하려고 했지만 워낙 기세가 등등한 탓에 결국 손도 대지 못했다고 합니다. 관료에서 소두로의 변신은 지금으로 치면 공무원이 사표쓰고 나가서 시민운동을 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왜 이런 방향전환을 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만 확실한 것은 홍종우는 김옥균을 처단할 때 처럼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세상과 싸웠던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홍종우의 이런 행동들에 대해서 독립신문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는 겁니다. 독립신문은 홍종우의 이런 행동을 지각이 없고, 문제 제기만 했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공격합니다. 그리고 외국군의 주둔과 외국상인들의 활동을 옹호합니다. 그리고 홍종우가 이끄는 상소부대원(?)들이 상소를 핑계로 지방에서 강제로 돈을 걷었다고 보도했다가 항의를 받고 정정보도를 합니다.



개인적으로 역사를 배우면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그리고 만민공동회입니다. PDF로 서비스되는 독립신문에는 외국군의 주둔이나 개발권의 양도에 대해서 찬성하는 논설이 자주 실립니다. 우리가 못난 탓에 제대로 개발을 못하니 외국에라도 줘서 개발하면 좋지 않느냐는 식이죠. 교과서에는 독립협회의 장점(?)에 대해서만 나오지만 사실 이중적이거나 혹은 편파적인 시선이 적지 않게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외국군의 주둔은 찬성하면서 정작 고종이 외국인들로 구성된 친위대를 만들려는 일에는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식이죠. 거기다 만민공동회를 열면서 정부에 대해서 공공연한 적대감과 반감을 드러냅니다. 물론 입헌군주제의 입자도 못 꺼내게 한 고종의 완강함이 일을 키운 측면이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혜성처럼 등장한 홍종우에게 고종은 전직 관리로서 나라를 소란스럽게 하는게 옳은 일이냐는 비답을 내리고 지방 군수직을 내립니다.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얘기지만 홍종우는 부임을 거절합니다. 고종은 이런 홍종우를 미워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이때를 '짜고치는 고스톱 판'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당시 상소를 올리기 위해 올라온 지방 유림들이 머물던 곳이 충훈부라는 관청이었고, 궁궐과 황제의 측근들이 공공연하게 음식과 활동비를 지급해줬기 때문이죠.  사실 독립협회는 초기에는 정부 관리들이 세운 관변단체였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같은 과격파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사실상 반정부단체로 변했고, 고종은 이들과 대응할만한 세력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게 바로 전통적인 유림세력이었습니다. 고종은 이들을 한번도 신임하거나 중용하지는 않았지만 이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1898년 여름은 대한제국 역사상 가장 뜨거웠습니다. 홍종우는 그 한복판에 있었고 말이죠.



독립협회는 지방에서 올라온 유림세력들을 고종과 한패라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고, 유림세력들은 독립협회를 왕권을 부정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와중이었던 1898년 7월 홍종우는 자문기관인 중추원 의관에 임명됩니다. 하지만 안경수의 고종퇴위 음모가 벌어지고 여기에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가 개입한 사실이 확인됩니다. 그러자 홍종우는 중추원 의관을 사직하고 황국협회를 조직합니다.



사극에 엑스트라로 자주 나오는 보부상들은 장사꾼이면서 우편배달부였고, 간이 세금징수원이었으며, 군인들이었습니다. 조선정부는 교통이 불편하고,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이 시대에 자유롭게 팔도를 떠돌아다녔던 보부상들을 이런저런 용도로 잘 써먹습니다. 대신 이들의 독점권을 인정해줍니다. 이런 공생관계는 개항이 되고, 외국물건들과 상인들이 들어오면서 깨지게 됩니다. 독점권이 깨지고 밀려날 위기에 처했던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단체행동에 나서게 되고, 이들이 모인게 바로 황국협회였습니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철저한 친정부성향이었고, 지휘했던 이들 역시 홍종우나 길영수, 이기동같은 전직관료들이었죠. 이들은 하의원을 개설하지는 운동을 펼치는등 나름대로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독립신문은 이런 이들을 향해 무식한 놈들이 날뛴다는 식의 비난을 퍼붓습니다.



가을이 되면서 독립협회와 정부의 갈등은 점점 심화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만민공동회가 열린 것도 이때였습니다. 지금도 광화문에 사람들이 모이면 왜 모였는지는 관심도 없으면서 혀를 차면서 나라꼴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며 혈압을 올리시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물며 백년, 아니 백 이십년전에는 어떠했을까요?  궁궐의 코 앞인 종로에 모인 수천명의 군중들을 본 고종은 특단의 대책을 세웁니다. 1898년 11월 21일 수천명의 보부상들이 물미장이라는 나무작대기를 들고 철야농성중인 만민공동회를 습격합니다. 이 블록버스터 난투극은 보부상들의 승리로 끝이나지만 이 광경을 본 백성들이 흥분해서 만민공동회에 가담하면서 오히려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백성들은 홍종우와 길영수의 집을 부수고, 나아가 다음날에는 도성 밖인 마포로 물러나있던 보부상들을 공격하러 갑니다. 하지만 보부상들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 와중에 독립협회측에 가담했던 빈민 한명이 사망하고 맙니다. 하지만 혼란은 점점 극에 달했고,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구를 수락하는 한편 황국협회를 해산하고 홍종우를 비롯한 관련자들에게 유배형을 내립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고종이 이들을 버릴리가 없었죠. 유배형을 받은 홍종우는 가지 않고 버텼고, 보부상들에게는 일당이 지급되는 등 숨고르기에 들어갑니다. 독립신문은 홍종우와 길영수, 이기동을 일컬어 '홍길동' 같은 놈이라고 비난합니다. 홍종우 역시 지지 않고 독립협회를 이끄는 고영근과 윤치호등을 죽여버리겠다고 떠들고 다닙니다. 독립협회는 정부가 약속한 개혁안을 시행하지 않고 차일 피일 미루자 다시 만민공동회를 열어서 철야점거농성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아예 왕십리 일대의 빈민 천여명을 고용해서 경계를 서게 만들죠. 하지만 이런 와중에 독립협회의 무리수가 터집니다. 독립협회 회원들로 구성된 중추원에서 각 부 대신들로 누가 적적합한지 투표를 한 겁니다. 중추원에게는 없는 각료 추천권을 행사한 것이죠.



거기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각료 후보로 박영효를 천거했다는 겁니다. 거기다 아주 많은 표가 나왔죠. 당시 박영효는 일본에 망명해있었고, 공식적으로 역적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뚜껑이 열렸고, 동시에 독립협회에 대해서 동정적이었던 시중의 여론도 차갑게 식어버립니다. 당시 정황이 가장 잘 나온 정교의 대한계년사에도 이 일을 계기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고 나와있습니다. 1898년 12월 23일 기회를 잡은 고종은 군대를 움직입니다. 당시 만민공동회에 나와있던 사람들이 불과 수백명 수준이라  큰 충돌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큰 골치거리인 독립협회를 제거한 고종은 구본신참으로 대표되는 광무개혁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리고 홍종우는 다시 관직으로 돌아옵니다.



  1899년 2월 의정부 총무국장으로 임명된 홍종우는 얼마 후에 평리원 재판장으로 갑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역사적인 인물과 마주치죠. 바로 이승만입니다. 독립협회에 가담한 죄목으로 갇혀있던 이승만은 탈옥을 하다가 도로 붙잡혔습니다. 이와중에 함께 탈출하던 동료가 총질을 했고, 간수가 다쳤습니다. 이승만은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거기다 재판관이 다름아닌 독립협회라면 이를 갈던 홍종우였으니까요. 하지만 홍종우는 이승만이 탈옥을 주도적으로 이끌지 않았고, 총기를 소지했지만 쏘지는 않았다며 가벼운 처벌을 내립니다. 나름대로의 소신과 원칙을 가지고 판결을 내린 것이죠. 만약 이때 홍종우가 이승만을 처형했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이 판결 직후 홍종우는 평리원 판사에서 법부로 옮기게 됩니다.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명백한 좌천이었고, 홍종우는 이후 고종과 슬슬 멀어지게 됩니다. 법부에서 사직한 홍종우는 중추원 의관으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다시 1900년 5월 평리원 재판장에 임명됩니다. 다시 기회를 준 것일까요? 하지만 두 달 후인 7월 다시 해임됩니다. 명목상 이유는 재판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아마 법부 대신 민종묵과의 갈등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홍종우는 해임 직전 올린 상소문에서 법부대신 민종묵이 자신을 무시하고 인사권에 개입한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고종은 여전히 홍종우에 대한 신임을 버리지 않았는지 비서원승에 임명합니다. 하지만 홍종우는 다시 장문의 상소를 올려 고종의 회전문인사를 비판하는 한편 대신들의 나태함을 질타합니다. 그리고 고종과 사실상 결별하게 됩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홍종우가 비록 보부상들을 이끌고 행패를 부렸지만 옳은 소리를 했다며 칭찬하는 글을 남깁니다. 홍종우가 무한 충성경쟁을 벌이던 고종의 측근들과 분명히 비교되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은 하지만 옳지 않다고 하는 일은 비록 출세에 지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적하고 넘어간 것이죠. 개인적으로 홍종우의 삶을 지켜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렇게 권력의 핵심에서 배제된 홍종우는 비서원 승이나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는 등 자리를 보존하기는 하지만 이후의 정치적인 활동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리고 1903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 러일 전쟁이 터집니다. 1년간의 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면서 한반도의 운명도 결정됩니다. 그리고 홍종우의 운명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지죠. 이때 홍종우는 한반도의 남쪽 제주도에서 제주목사로 있었습니다. 이때에도 홍종우는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특별세를 걷는 것을 금지시킵니다. 다른 지방관들이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것과는 비교되는 일이죠. 거기다 일본 어민들의 불법 어로 행위도 금지시킵니다. 일본 정부는 이에 항의하기 위해 군함을 파견합니다. 홍종우는 이런 무력 앞에 일단 굴복하지만 외부에 전문을 보내 일본인들의 행패를 막아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이런 꼬장꼬장한 성격의 관리는 오래버틸 수 없는게 당시 대한제국의 현실이었습니다. 적어도 제주목사 홍종우는 제주민들 편이었습니다. 궁내부의 내장원에서 세금을 내라고 거듭 독촉하지만 홍종우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납부를 거부합니다. 당시 분위기로 봐서는 출세를 포기한것은 둘째치고 목숨까지 걱정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거기다 러일전쟁 이후 주도권을 잡은 일본이 홍종우를 가만 놔둘리가 없죠. 결국 홍종우는 1905년 5월 해임됩니다. 뮈텔 신부의 일기에는 그 해 10월 홍종우가 자신을 방문한 기록을 남겨놓습니다. 공식적인 기록은 여기까지입니다. 홍종우의 운명이 종말을 고할즈음 대한제국 역시 을사늑약의 체결과 동시에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집니다. 이후 홍종우는 전라도 지방에 거주합니다. 이때 기록을 남긴쪽은 주로 그를 감시하던 통감부쪽이었습니다. 통감부는 홍종우가 종종 경성으로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갑니다. 망명을 준비했던 것일까요? 하지만 말년의 삶에 대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경성에서 구걸을 하면서 김옥균을 암살한 일을 후회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만 제가 아는 홍종우라면 구걸을 했을 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일본 세상이 되면서 처참하게 죽었던 김옥균은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일본이 김옥균을 추켜세웠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런 위대한 인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의 손으로 죽인 너희 민족이 얼마나 바보같으냐는 비웃음이죠. 오늘날 우리가 김옥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 역시 일본의 이런 입김 때문입니다.



홍종우와 김옥균 모두 애국자였습니다. 주어진 삶을 뿌리치고 모험에 나섰던 김옥균이나 자신의 신념을 위해 총을 들었던 홍종우 모두 말이죠. 하지만 이들이 꿈꾸던 조국이 사라지면서 둘의 운명은 극단적으로 갈리게 됩니다. 한명은 안타까운 영웅으로, 다른 한명은 비겁한 암살자로 말이죠. 이들은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꿈을 용납하지 않았던 시대가 그들을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각기 어떤 인간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다음 글을 쓰게 될 여유가 생긴다면 그때는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의사에 대한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서는 장인환 의사의 얘기는 스티븐스가 죽었다는 데서 끝납니다. 하지만 재판과정도 흥미로웠고, 이후의 삶도 그러했죠.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그의 무죄를 이끌어낸 변호사의 이름조차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미국에 이민가 있던 한인들의 단결과 애국심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가 형기를 마치고 무사히 나와서 잘 지냈다는 식으로 얼버무립니다. 하지만 아일랜드계 변호사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백인을 살해한 황인종에게 관용따위는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현장에서 스티븐스의 저격 직후 흥분한 백인들이 장인환과 전명운 의사를 목 매달려고 했었습니다. 다행히 경찰의 만류로 시도로 끝났지만 말이죠.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Je ne sais quoi
12/06/22 01:5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인물인데 전혀 몰랐군요. 좋은 글 감사드리고 어서 다음 이야기도... (자 다들 댓글로 재촉하세요... ^^;)
12/06/22 02:39
수정 아이콘
김옥균이 암살당했다는것은 어렸을적 위인전을 읽어서 알고 있었는제 누구에게 암살 당했는지는 이번에 새로 알게 되었네요.
그저 누군가의 하수인이겠거니 여겼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어느 누구도 '누군가의 하수인'으로 치부될만한 사람은 없는거겠죠.
지금이야 시간이 흐르고 그 뒤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으니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는것이 옳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당시엔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이 옳은 선택이란 확신을 가지고 다들 행동했겠죠.
그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던지 그의 최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스스로에겐)우울한 것은 아니리라 생각해봅니다.
12/06/22 06:07
수정 아이콘
저도 홍종우를 김옥균을 암살한 인물.. 프랑스로 최초로 유학간 인물.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많은 것을 알게 되었네요.
pgr에서 이렇게 재미있게 글을 읽는 건 눈시님의 임진왜란 시리즈 이후로 처음인 거 같습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다음 이야기도 많이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정말 잘 이해가 안 되는 게 왜 독립협회는 박영효를 추천해 기껏 얻은 지지를 한순간에 다 날려먹은 걸까요..
글 안의 모든 인물들의 각기 행동들이 다 이해가 가는데 유일하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네요.
자이체프
12/06/22 12:52
수정 아이콘
원래 어떤 갈등이 오래 지속되면 강경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기 마련이죠. 이 당시에는 독립협회가 사실상 고종을 굴복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기세가 하늘을 찔렀을 겁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Mactuary
12/06/22 13:53
수정 아이콘
와... 좋은 글 감사드리고 다음 글도 기다리겠습니다!^^ [m]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7879 [일반] 마이클 잭슨이 떠난지 3년이 되었네요. [24] Typhoon5076 12/06/26 5076 1
37857 [일반] [스포츠] 한 주간 <스포츠 뉴스 & 유로 2012 골 모음> 올립니다.. [34] k`6155 12/06/25 6155 2
37815 [일반] 역사, 그 후의 이야기 - 홍종우, 세번째 [5] 자이체프4168 12/06/22 4168 2
37803 [일반] 황우여씨는 사과해야 할까요? [17] happyend5554 12/06/21 5554 2
37383 [일반] MC몽 사건 끝났네요. 고의발치 무죄, 입영연기 유죄 [102] 타테시8754 12/05/24 8754 0
37140 [일반] 오이디푸스의 윤리 [21] 팟저5606 12/05/07 5606 3
36934 [일반] 경찰과 검찰을 믿지 마세요(부제:조서 작성시 대처법) 참고 - 글이 깁니다. [38] 닭엘10380 12/04/25 10380 76
36920 [일반] 내 인생에서 후회하는 한 가지: 이상용 - 남을 돕는다는 것 [8] 풍경3519 12/04/24 3519 2
36904 [일반] 판결문 내용과 재판 내용 올려봅니다. [80] 슈페리올7777 12/04/24 7777 0
36737 [일반] 노회찬씨 의원직이 위기네요 [74] 카림시아9247 12/04/15 9247 0
36256 [일반] 음란성과 표현의 자유 (박경신 교수 재판 쟁점정리) [7] 슬라이더4523 12/03/27 4523 0
35990 [일반] 표현의 자유? 논의의 영역 구별하기. [18] 슬라이더3690 12/03/17 3690 0
35959 [일반] 검푸른 해협 - 5. 인생은 실전이다 [2] 눈시BBv34946 12/03/15 4946 2
35636 [일반] 법조계, "기소청탁은 황당한 주장,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 [48] 마르키아르6524 12/02/29 6524 0
35614 [일반] 김재철 MBC사장의 법인카드 내역, 토즈ㆍ구찌ㆍ프라다ㆍ특급호텔 [56] 아즐6298 12/02/28 6298 1
35478 [일반] 삼별초 - 4. 격류 [2] 눈시BBver.24611 12/02/22 4611 0
35096 [일반] 나꼼수는 공지영을 고소하라. [45] 캐터필러5959 12/02/03 5959 0
34961 [일반] 지금 그것이 알고싶다...좀 심하게 충격적이네요.. [5] 옹겜엠겜7858 12/01/29 7858 0
34848 [일반] 부러진 화살과 형사소송 이야기. [28] 슬라이더5740 12/01/22 5740 1
34667 [일반] 대한민국 검사 다 족구하라 그래...! [34] 아우디 사라비아6046 12/01/13 6046 0
34551 [일반] 허위사실공표죄의 법리 파헤쳐보기 [20] 슬라이더4578 12/01/09 4578 7
34440 [일반] 곽노현 교육감 사건과 형사재판 이야기 [12] 슬라이더3843 12/01/05 3843 2
34276 [일반] [정치] 헌재, SNS 선거운동 규제는 위헌 [17] ㈜스틸야드3683 11/12/29 3683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