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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6/15 12:19:02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닭과 나의 이야기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가족끼리 치킨 한 마리 사서 뒷 산으로 소풍 간 것이었습니다. 그거 외에 제사 후 닭을 직접 분해(...)해 주시던 아버지의 손길이 기억나는군요. 중학교 들어갈 무렵부터는 제가 직접 했죠.

언제부터 그렇게 빠졌던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뭘 먹는다 하면 닭이었죠. 피자? 맥도날드? 롯데리아? 다 필요 없었습니다. 학생 때 애들끼리 가기 제일 만만했던 곳이 유가네 닭갈비집이었는데 그 영향도 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돼지국밥과 함께 외식을 책임져 준 곳이었죠 _-)b

서울에 올라와 자취를 하게 된 후, 제 속의 마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야 가족이랑 같이 먹어야 되지만 자취라는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면서 혼자 먹을 수 있게 된 것이었죠. 친구들 집에서 같이 놀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배랑 재수한 형이 있어서 형들이 막 사줬죠(응?). 주로 피자+치킨 즉 피치를 시켰는데 닭은 물론 제가 다 먹었습니다.

그러다 군대를 갔죠. 군대에서 닭 먹을 일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ㅡ.ㅡa 마 그래도 가끔 치킨이 반찬으로 올라오긴 했죠. 그러다가 태안 기름 유출 사건이 있은 후, 기름 닦느라 고생한다고 BBQ에서 어마어마한 지원을 해 줬습니다. 그 때 저희는 일부를 파견하긴 했지만 직접 나선 건 아니어서 좀 미안하긴 했습니다.

근데 저희 부대는 좀 먹을 게 풍족한 편이었고, 격오지라서 치킨이 와도 식을대로 식은 눅눅한 것들 뿐이었습니다. 다들 많이 못 먹더군요. 당연히 대부분 제 입으로 들어갔습니다. ㅡ.ㅡ 그래도 일말상초라서 조금은 마음대로 해도 될 때였고, 선임들도 안 먹으니까 별 신경 안 쓰더군요. 참고로 그 때 기지원 40명 중에 밑에서 37번째였습니다. ㅠㅠ 지금 생각해도 참 꼬인 군번...

아무튼 참 열심히 먹어대는 저를 보면서 한 선임이 이렇게 말 하더군요.

"넌 닭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증오하는 거다."

그렇습니다. 그 때에야 저는 저의 성 정체성, 아니 전생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케이건 드라카를 아십니까. 네크로맨서 리의 소설 눈마새의 주인공이죠. 어차피 나온 지 한참 됐으니 스포 신경 안 쓰겠습니다. (...) 거기서 그는 자기를 속이고 나라를 망하게 했으며 아내를 죽인 나가에게 복수하는 것만을 목표로 삽니다. 그 복수의 방법은 원수를 먹는 것이었죠.

그렇습니다. 제 전생은 지렁이였던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는 날에 마음이 동해 당신을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가 닭에게 콕콕 쪼여 죽음을 당한 것이었죠.

뭐 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닭뼈가 목에 걸려 죽어 한을 품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전생의 굴레는 이어지고 이어져 저는 닭에 대한 증오를 그대로 간직한 채 원쑤의 각을 뜨면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 참고로 고문관이었던 저의 별명은 128차원이었습니다. 강세는 뒤쪽으로 붙여야 됩니다. 뭐 더 흔히 쓰이던 별명이 있었습니다만.

국방부의 시계는 참 느리게 가도 결국 가서 제대를 하게 됐습니다. 선배나 동기들이야 애초에 저를 잘 알고 있었고, 후배들도 얼마 안 돼 저를 알게 되었죠.

제가 심심하면 시키던 가게가 있었습니다. 모아 놓은 쿠폰이 아깝기도 하고 가격도 착한데다 맛도 괜찮아서 매번 시켰죠. 위에서 말한 선배+재수생 형과 간만에 모여서 그 형 집에서 이것저것을 시켜먹을 때였습니다. 물론 닭은 그 가게에서 시켰죠. 제가 제일 짬이 안 됐기에 ㅡ.ㅡ 제가 받으러 나갔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의 말씀,

"이사하셨어요?"

... 그 말이 참 전설로 오래오래 남았죠. 이 가게 -_-; 이젠 외상하고 싶으면 마음껏 외상도 하게 해 줍니다. 대체 몇 마리를 먹은 건지... 주문 후 배달시간 13분도 찍어봤어요. 저라는 걸 안 밝히면 30분은 걸리는데 말이죠.

세상이 그리 넓진 않아서 저희 과에는 저처럼 닭을 좋아하는 선배가 한 분 있었습니다. 헌데 저랑은 마인드가 달랐죠. 그는 오로지 치킨만을 섬길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말 했다고 하죠.

"백숙은 이단이다."

그는 백숙 같은 타락의 길로 빠지지 말고 그 시간에 치킨을 한 마리라도 더 먹으라고 주변에 포교하고 다녔습니다. 저는 이것을 그냥 넘길 수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 아니겠습니까. 치킨이라는 방식은 분명히 아주 맛있고 취향을 존중하는 게 맞죠. 하지만 그게 아니면 모두 이단이라니요. 중요한 것은 닭이라는 것, 그리고 닭을 한 마리라도 더 먹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백숙이든 삼계탕이든 대체 뭐가 그리 중요하다는 겁니까. 외형은 그저 껍데기일 뿐, 본질이 중요한 걸 왜 몰랐던 걸까요. 닭 멸절이라는 대의 앞에 이건 바람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외형에만 집착하는 모습에 맞서려 했고 많은 선배나 동기들도 우리의 대결을 보고 싶어했지만 아쉽게도 성사되진 않았습니다. 만약 성사됐다면 예송논쟁 쯤은 한낱 키배로 만들 수 있었을텐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지금도 저는 닭을 아주 좋... 아니 증오합니다. 아마 이 세상의 닭을 다 먹기 전에 제가 죽겠습니다만, 이건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 아마 이 증오를 버려야 저를 속박하는 지방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만 orz 역시 증오는 더 큰 아픔만을 낳는 것 같습니다.

이상, 저와 닭의 이야기였습니다. _-)/~



------------------

좀 많이 써 놨는데 -_-a 집에 놔두고 오고 책도 안 들고 와서 아래 k'님 글 보고 삘 받아서 써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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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12/06/15 12:45
수정 아이콘
하하하 이젠 유머까지 진출하시는 건가요? 재미있게 잘 읽었네요.
PoeticWolf
12/06/15 12:46
수정 아이콘
아하하하하!!
백숙은 이단이다에 한표요!
상견례 하던 날 장모님이 끓여주신 첫 음식이 백숙이라;;; 제 믿음을 저버리긴 했습니다만.
눈시BBver.2
12/06/15 13:41
수정 아이콘
전 군대에서 그 맑은 국물의 백숙도 닭이라고 마구 먹었거든요 >_<;;;
아니 장모님의 음식은 닭보다 위죠 0_0! ... 내 장모님은 어디에
그리메
12/06/15 12:53
수정 아이콘
K님 닭회도 함 드셔보세요. 영양보충이 크크크....눈시비비님은 전공이 유머일듯
12/06/15 13:01
수정 아이콘
제가 만든 닭볶음탕도 끝내주는데.. 저도 닭 증오합니다. 요즘 미친듯이 살쪄서 좀 멀리하지만요.
레몬커피
12/06/15 13:02
수정 아이콘
친구들과 주로 만나서 노는 거리에 8500원 무제한 치킨집이 두개나 생겨서 하도 자주 갔더니 살이...
정지연
12/06/15 13:08
수정 아이콘
요즘은 토리 카라아게(일본식 닭튀김)과 닭강정이 좋더군요...
카라아게는 이자카야 아니면 먹기가 힘들어서 집에서 만들어볼까 하는데 튀기고 나서 기름 처리가 힘들어서....ㅠㅠ
닭강정은 마침 집근처에 하나 생겼던데 퇴근길에 사가야지 하다가도 배를 만지면서 참고 있습니다..
눈시BBver.2
12/06/15 13:43
수정 아이콘
호오 맛있나요 +_+) 편의점 도시락으로밖에 안 먹어봐서 orz;;
전 닭강정은 성에 안 차요 ㅠ_-a
12/06/15 13:10
수정 아이콘
몸 관리 하려면 닭가슴살만 먹으라는데, 그딴 거 없고, 저도 기름 줄줄 흐르는 튀김닭을 숭배합니다.
ComeAgain
12/06/15 13:11
수정 아이콘
흐, 저는 족발 매니아라서... 대학 때 계속 한 집에 시켜먹었는데,
나중에는 벨도 안 누르고 그냥 문 열고 들어와서 놓고 가더군요;;;
가을독백
12/06/15 13:23
수정 아이콘
이런 글 좋아요!!-지나가던 닭장사꾼-
아키아빠윌셔
12/06/15 13:24
수정 아이콘
어무니가 누나랑 저를 임신했을때 매번 닭 먹고 싶다고 했다고 그러시고, 그 결과(?) 누나랑 저는 닭이라면 다 좋아합니다; 아부지는 치킨도 좀 질린다던데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질린다는건 닭이랑은 거리가 먼 단어라고 믿고있기에-_-;;;

...운동한답시고 닭가슴살 꾸역꾸역 먹을때 몇번 따라먹던 친구놈은 저를 독한 놈이라고 하더군요. 그저 닭에 대한 애정이 클 뿐인데;;
낭만토스
12/06/15 13:28
수정 아이콘
그렇습니다. 백숙은 이단이었던 것입니다. 치멘

+덧붙이자면 다른 고기에 비해 닭고기는 치킨 외에는 딱히 메리트를 낼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닌것 같아요.
뭔가 닭고기 고유의 맛이 없다고나 할까요? 닭갈비를 먹어도 그냥 양념+닭고기를 먹는다는 느낌이지
제육볶음이나 불고기처럼 물론 양념맛도 있지만 고기의 맛도 느낀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Darwin4078
12/06/15 14:58
수정 아이콘
닭가슴퍽퍽살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래서 치킨보다 백숙류를 더 좋아하죠.

선배분께 꼭 전해주세요.
후라이드 치킨이야말로 튀김옷으로 치장한 거짓닭요리일뿐이라고.
진정한 닭의 육질과 맛을 느낄 수 있는 건 백숙과 닭죽뿐이라고.

새이되 날지 못하는 한을 품은 닭이 하늘을 보며 비행의 꿈을 담아 날개를 퍼덕일때
닭가슴살은 꿈을 담아 더더욱 쫄깃한 육질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구밀복검
12/06/15 15:34
수정 아이콘
전 전기구이 통닭이 좋던데 생각보다 선호하시는 분들이 별로 없더라고요 쩝.
정지연
12/06/15 16:00
수정 아이콘
저도 전기구이 스타일을 제일 좋아합니다!
로스트 치킨이 닭요리중에서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는데 파는데도 잘 없고 튀긴거에 비해 다들 별로 안 좋아하네요..
특히 기름이 다 빠져서 얇아진 껍질이 예술인데.. 쩝..
사티레브
12/06/15 15:43
수정 아이콘
아 스포당했다! 이번 여름에 눈마새 피마새 읽으려했는데!!!!!
가슴살도 좋고 아 닭가슴살이요 다리가 제일 좋아요 아 닭다리요

오늘 밤엔 치느님이나 영접해야겠네요
나름쟁이
12/06/15 15:58
수정 아이콘
황금옷을 두르신 배꼽이 배밖으로 튀어나온 프랜차이즈 치킨집들과 크리스피치킨맛에 질려있다가 얼마전 걸어서 20분거리에 수원통닭골목 통닭집들 처럼 가마솥에 튀기는 통닭집을 발견했습니다. 같은가격에 양부터 비교가 안되고 옛날통닭맛이 참 좋더라구요. 거기에 닭똥집 닭발튀김은 덤으로..
2년후 이사갈때까지 치느님은 그집에서 조달해 먹을 생각입니다.
Bequette
12/06/15 22:04
수정 아이콘
그럼 나는 술을, 맥주를 증오하는 걸까요.... ㅠㅠㅠㅠㅠ
12/06/15 22:58
수정 아이콘
아니 이 글을 왜 못봤지? ;;

참고로 눈시BBver.2 님.. 아래 글에서 보셨던 부위가 바로 가슴살이랍니다.. 회로 먹으면 아주 부드럽지요..

그리고 혹 방문 하시려거든 여친님이랑 같이 오세요.. 아니면 맛난 거 없음..~
12/06/16 14:18
수정 아이콘
요스비같은 닭이 나타난다면..!? [m]
12/06/16 15:57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저는 어릴적에 트라우마가 있어서 백숙 삼계탕을
못먹습니다. 그런데 또 튀김과 닭갈비는 엄청 좋아합니다.
역시 치맥이 최고라 그런가봅니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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