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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에 간만이니 이전글 링크 해 놓습니다.
백범. 백수 아니 백정과 범부. 그의 호는 이런 뜻입니다. 노태우가 대선 때 했던 보통 사람을 그는 자기의 호로 정한 것입니다.
반면 이승만은 자기가 이씨 왕족의 후예라는 것을 심심하면 드러냈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왕이 된 것처럼 스스로를 "과인"이라 칭했다고 하죠.
해방을 대표하는 두 지도자는 이렇게 달랐습니다.
1947년부터 48년이 돼 가면서, 한국에서 유명한 독립운동가 출신 지도자는 이 둘밖에 남지 않기도 했습니다. 여운형은 비명에 갔고, 박헌영은 관에 실려 북으로 갔으며, 친일파 의혹도 강한 한민당계 지도자들은 김구가 범인으로 유력한 암살을 당해 갔으니까요. 남은 이들은 아무리 유명해도 이들에 밀릴 수밖에 없었죠.
귀국 때부터 우익 계열의 넘버 1, 2로 함께 했던 이들이 갈라진 것은 장덕수 암살 사건 이후, 한민당과 미국이 그 암살범으로 김구를 뽑으면서 이승만도 김구를 버렸습니다. 그 이전가지 김구는 친일파 청산이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해 그렇게 나쁘지 않은 태도를 보였죠.
"소련의 방해로 인하여 북한의 선거를 실시하지 못할지라도......방해가 제거 되는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남한이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요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1947년 11월 14일, UN에서는 한국의 총선거 및 한국임시위원단의 결성을 결정합니다. 이 때 김구는 김규식과 만나 자신의 주장을 전합니다. "6개항의 의견서"였습니다.
이것은 김구가 자신의 노선을 바꿨다는 것을 확실히 알린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반격이 이따릅니다. 한민당은 동아일보를 통해 이렇게 주장합니다.
"총선거를 반대하는 3대 집단이 있다. 제 1은 공산파요, 제 2는 중간파요, 제 3은 법통파다"
제 2야 좌우합작 세력이거 3이 김구의 임정 적통을 내세운 파를 뜻 하는 것이었죠. 이에 맞서 김구는 그 유명한 성명을 발표합니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었습니다.
그는 이후부터 친일파와 이승만에 대한 공격을 계속합니다. 솔직히 너무 늦긴 했어요. 한민당과 사이가 별로 좋진 않았지만 김구는 그 한민당을 흡수하려 하기도 했었고, 이승만과는 쭉 같은 노선을 달려 왔으니까요.
하지만, 늦은 만큼 그 열정은 그 누구보다 거셌습니다. 마치 초심으로, 독립운동할 때로 돌아간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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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의 이른바 "2월 서신", 여기서 그는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의 개최를 제안합니다. 이것이 남북협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 남북협상은 4김(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 남북이 각각 '애국정당대표회의'를 소집, 협상의 대표 선출
- 협상의 기조는 민족자주로 하되 '우방의 호의'는 접수 => UN 감시 하의 전국 총선거 수용
이 때 흥미로운 점은 김구보다 김규식 쪽이 남한의 단정에 호의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단정 얘기를 가장 먼저 꺼낸 건 그였기도 했죠. 그는 조봉암을 원래 공산주의자였다는 이유로 우익 진영에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인물로, 좌우합작은 찬성하지만 (박헌영이 보여 준 모습처럼) 공산당에서 다른 모습을 보일 경우 남한에서 단정을 수립하는 게 낫다고 여기던 인물이었습니다. 그 역시 몇 차례의 좌우합작 과정에서 박헌영 등의 좌익이 보여준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던 거죠. 그래도 우선은 분단을 막아야 했고, UN의 총선거 결정에 낙관적이었죠.
하지만 이 UN의 감시단을 북한과 소련이 거부합니다. 결국 UN은 미국에 이끌려 선거가 가능한 지역, 즉 남한 단선을 우선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맙니다. 그 동안 남로당은 최대한 이 선거를 막으려 했죠. 이승만은 좋구나 하며 남한 측의 대표를 보내 UN과 협력했고, UN에서는 김구에게도 단정에 협력하라는 권유를 합니다. 이와 함께 미군정의 하지에게도 김구를 설득하게 하려 했지만 하지가 거부합니다.
김구는 이에 맞서 3월 12일, 7 거두 성명을 발표합니다. 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였습니다. 김규식과 홍명희를 제외하면 모두 김구와 함께 온 한독당 계열이었습니다.
"반쪽 강토에 중앙정부 수립하려는 ‘가능한 지역 선거’에는 참가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통일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생을 바칠 것을 동포 앞에 굳게 맹세한다"
한편, 북한에서도 좀 다른 움직임이 나옵니다. 11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4가지 대응 방안을 선정하는데, UN 감시하 총선거 거부와 미소 양군 철수 후 남북 총선거까지는 다를 바 없었지만, 1항과 4항은 달랐죠.
1. 임시 통일헌법의 제정 공포
4. 남북의 통일세력 조직화
1의 경우야 북한이 쭉 해 왔던 북한 단독정부 수립의 마지막 단계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를 반대하려고 북한에 남은 우익세력이 뭐라도 할려고 했지만 사전에 발각, 그 결과야 뻔했죠 -_-; 근데 4항은 이것과 전혀 다른, 남한의 통일세력, 즉 김구와 김규식에 대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까지 남로당과 북한은 홍명희까지도 배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김구를 받아들일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죠.
2월 26일, "가능 지역만의 선거 실시"가 결정된 상태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결정을 내립니다. 이 때도 김규식은 소극적이었고 김구와 홍명희가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아직 김구 편에 남아 있던 임정 인사들 역시 적극적과 소극적으로 나뉘었고, 아예 이를 말리던 이들 역시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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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남북회담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는 사람도 많고 낙관하는 사람도 있으나 참으로 금차(今次) 회의는 큰 기대를 가져야 할는지 단언하기 어려움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과거 미소 양국의 힘으로써 조선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상이 같고 피부가 같고 언어와 피가 같은 우리 민족끼리 서로 앉아서 민족정신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나 하여 보자는 것이 진의이며,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깨끗이 조국통일독립에 바치려는 것이 금차(今次) 북행을 결정한 목적이다"
1. 어떠한 형태의 독재정치도 배격하고 민주주의 국가를 건립할 것.
2. 독점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배격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할 것.
3. 전국적 총선거에 의해 통일된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4. 외국에 어떠한 군사기지를 제공하지 말 것.
5. 미소 양군의 조속한 철퇴에 관해서 미소 양국이 협상하여 공표할 것.
김규식이 정한 남북협상 5원칙입니다.
4월 20일, 김구와 홍명희가 평양에 도착합니다. 김규식이 도착한 것은 21일, 이 때 김일성은 이미 자기가 원하는 무대를 준비합니다. 남북대표자연석회의였습니다. 김일성과 김두봉은 연석회의 참석을 요구했지만, 김구는 거부하고 자신들의 요구였던 지도자회담을 제안합니다. 계속된 회담에서야 김구는 한 발 양보, 연석회의에 참석하지만 김규식은 참석하지 않습니다.
이 회의에서 이승만, 김성수 등의 "매국노 반동분자"와 UN을 조종한 미국에 대한 비난과 북한 인민들에게 호의를 베푼 소련군에 대한 찬사가 쏟아집니다 - -a 그 결론은 이랬습니다.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실현시키기 위해 강력히 투쟁하자"
이 '결정서'는 만장일치로 채택되지만, 남한에서 온 이들은 자기의 이름이 아닌 비서의 이름으로 서명을 합니다.
이 연석회의가 폐회된 후에야 김구와 김규식이 요구했던 지도자 회담이 열립니다. 여기서 결정된 것은 이랬죠.
- 미소 양군 철수, 내전 방지를 위한 지도자들의 확인, 전국총선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 남한의 단선 단정 반대
이 때 북측에서 미 제국주의자로 매도하기만 하던 미국을 김구와 김규식은 최대한 막으며 평화적 외교의 상대로 인정하는 선까지는 성공합니다. 이렇게 이른바 4김, 남북의 지도자가 만난 처음이자 마지막 회담이 끝났고, 남측 지도자들은 남으로 돌아옵니다.
"담벼락 같은 곳에는 '김구, 이승만 타도'라고 썼던 글씨를 지운 흔적이 있더라고요. 굴뚝 같은 데도 그렇고. 지웠는데도 흔적이 그대로 있었어요." - 선우진
하지만... 그들 역시 걱정했던만큼 북한은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북한의 아이들과 김구가 같이 사진을 찍은 후) 우리 할아버지랑 다름이 없는데, 왜 타도하라고 했을까 하는 반응이었어요. 의아스러웠던 거죠. 김구 선생 일행이 멀리 사라지고 안 보일 때쯤 되자 우리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더니 말했어요. (중략) 우리는 공산당에서 사람을 붙여 감시한 줄은 꿈에도 몰랐고, 저렇게 위대한 분과 사진을 찍게 되다니 정말 영광이라고 떠들고 있었던 겁니다. 남자는 가까이 오더니 우리에게 엄포를 놓듯 말했어요. (생략) 그러더니 어느 학교에서 왔고 이름이 뭔지 조사했어요." - 함상식, 당시 북한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이 사건으로 붙잡힐 뻔하다 은사의 구원으로 풀려남. 이후 월남
+) 참고로 이 때 그의 은사가 공산당에게 했던 말은 이렇습니다.
"아직 나이가 젊어 철없이 아이들하고 사진을 찍은 모양이다. 그렇지만 잘못될 사람은 아니다. 내가 그렇게 가르친 사람이 아니다."
... -_-; 김구와 사진 한 번 찍은 게 "잘못되는" 것이었던 거죠.
김일성은 이런 남북협상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하며 김구와 김규식을 기만합니다. 남한에 맞춰 북한에서도 단정 수립이 계속되고 있었고, 이승만 역시 이걸 아주 잘 이용해 먹었죠.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북한은 2차 남북지도자회의를 개최합니다. 여기서 김구와 김규식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홍명희 등만 참가하고 그대로 북에 눌러앉았죠. 김구는 이에 대해 "일방의 독단"이라고 비판하며 공동성명서의 합의내용을 따르라고 했지만, 실패합니다.
한편 남한에서는 여순 사건을 이용해 김구를 파묻으려 합니다. 이범석은 여순 사건을 "극좌와 극우가 저지른 일"이라고 하며 김구 쪽으로 혐의를 몰아가려 했지만 실패했죠.
당시 남한의 중도파는 여러 개로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홍명희 같은 북한 정권 지지파, 남한 정부 지지파, 남북 모두를 비판하고 독자적 통일을 주장하는 파와 그냥 세상 더럽다고 은퇴하는 이들까지 있었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은 세번째였죠. 그들은 자기 내의 북한 정권 지지파를 최대한 몰아내며 2차 남북협상을 비난하고 1차 때의 성명서에 위배되는 북한의 태도를 거부한다고 합니다.
한편 제헌국회에서 소장파들도 이런 중도파와의 연대를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김약수와 조봉암, 하지만 이들의 주장도 반민특위 해산과 국가보안법 제정 등의 물결에 휩쓸려 버립니다.
+) 이 조봉암에 대해 한 번 제대로 다뤄보고 싶은데... 쓸 만한 타이밍이 없네요. 언제가 되든 꼭 다뤄보고 싶습니다.
이 이후 김구가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참 말이 많습니다. 첫째는 그냥 건국된 남한의 정치에 참여하려고 했다는 것, 헌데 이게 이승만의 입에서 나옵니다. 자신은 남북협상을 한 쪽이니 지금 들어가기는 그렇고 자기 파 3명을 넣어달라고 했다는 것인데, 미국 기록에 남아 있지만 이승만의 입에서 나온 것이니 확단하기 힘들죠.
"'이번 방북 길은 완전히 실패다. 우리가 완전히 모욕당하고 들러리를 섰다"
좌우합작 및 남북협상이 끝난 후 홍명희처럼 북한으로 간 이가 이는가 하면 조소앙처럼 남한 정부에 참여한 이도 있습니다. 그는 애초에 남북협상의 성과가 없을 거라 예측했고 그 후에 이렇게 길이 갈라진 것이죠.
한편으로 남북협상 같은 자주통일 운동을 계속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김구가 예전처럼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근거는 찾지 못 했습니다. 사실 남북 양쪽에서 인정받지 못 한 상태에서 그럴 수 있었을 것 같진 않구요. -_-;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 이는 그가 암살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전 이 쪽이 아닐까 합니다.
1948년 12월, UN 총회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합니다. 이후 다시 한국위원단을 파견해 다시 남북한 총선거를 모색했지만 이게 될 리가 없었죠. 북한은 거부할 것이고 남한은 북한의 거부를 이용할 것이었으니까요.
이 때 김구는 대한민국의 승인을 막으려 했습니다. UN에 직접 했다고 합니다.
남북협상 후 약 1년, 김구의 모습은 좀 의기소침해 보입니다. 이래저래 말이 엇갈리니 미싱 링크라 할 만 하고, 정치적으로 얘기할 때 절대 빠질 수 없기에 그 진면모를 파악하기도 참 힘들 겁니다.
일단 마지막까지 이승만과 대립하고 통일을 얘기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계 제 약소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자결권을 유린하려는 낡은 제국주의세력의 침략정책을 배격하고, 당면한 역사적 과업의 최고 목표인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최대의 열의를 경주하며 투쟁할 것이다" - 1949. 6. 15
그리고 여기에 주목해야 될 사건이 하나 더 있죠. 6월 6일에 있었던 반민특위 특경대 습격 사건이요. 특경대는 반민특위의 조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조직, 이들이 경찰에 대한 체포를 시작하자 (4일 최운하) 바로 행동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무력 행사 및 특경대 해산령과 함께 6월 9일에 이승만이 직접 체포된 경찰들에 대한 선처를 요구하였죠.
김구가 암살된 것은 바로 이 달 6월 29일이구요.
자, 결론을 얘기하기 전에 한 가지 더 돌아볼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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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에서 1948년 초, 김구가 노선을 전환하기 전까지 추진하던 것이 있습니다. 실속도 현실성도 없긴 했지만, 스케일은 참 컸죠.
이른바 "만주 계획"입니다.
1947년 4월 27일, 심양에서 "장연지구민주자위군"이 창설됩니다. 이른바 장연군이었죠 이들은 5개 대대 900여명, 김구는 이들과 접촉합니다.
그 목적이 참 컸죠.
1. 만주 동북지방의 한국교민 보호 및 선무활동
2. 조선의용군 포로 수용 및 교도
3. 유사시 남한 국방경비대와 협공하여 북한 공산군을 섬멸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기여
이는 중국 내에 남아 있던 광복군 출신과 국내 임정 계열의 백의사, 미국과도 연결된 상태였습니다. 또한 그 때 창설되고 있던 남한 국방경비대 내에 있던 장교들과도 연락이 닿은 상태였죠.
남북협상 전까지 임정 계열의 통일 원칙은 이승만의 북진보다 더 한 것이었습니다. 아예 스케일을 한미중으로 키워 북한의 공산당 및 중국의 공산당, 소련이 있던 만주의 공산 세력까지 모두 쓸어버린다는 것이었죠.
이것이 깨진 것이 김구의 남북협상입니다. 그리고 이 이후부터 광복군 계열과 김구의 관계 역시 완전히 깨집니다.
장연군에서는 많은 이들이 이탈해 한국으로 향합니다. 이들이 빠지면서 장연군은 위축돼 국민당이 밀린 후 중공군에 의해 해산됐죠. 이들의 목표는 김구를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김구는 요지부동이었고, 김학규처럼 반대하면서도 김구 곁에 남은 이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이승만에게로 완전히 가 버립니다.
이는 국내에 들어와 있던 광복군 출신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범석, 지청천, 장준하 등 광복군이라 한다면 바로 이름이 떠오를 이들은 이승만에게 이미 기울어버리거나 양 쪽 사이에서 갈등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완전히 이승만에게로 가 버립니다.
+) 흔히 광복군이라 통칭하긴 하지만 사실 파벌은 둘째 치고 하나로 모인 움직임 자체가 없긴 했습니다. 그리고 명성 좀 있는 사람들은 정치인의 길을 갔고, 몇몇 빼면 솔직히 없는 사람들이 군대에 들어갔죠 (...) 그 때도 군대 가긴 참 싫었나 봅니다. 창군 때 제대로 얘기하겠습니다.
창군의 역사를 보면 의외로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광복군+중국 국민당군, 즉 우익 계열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 중 장성으로 진급한 이는 21명입니다. (보통 23명으로 세는데 이에 대한 비화가 또 있어요 -.-) 그 외에 영관급까지 가면 200명이 넘어요. 이 밑까지 찾아보진 못 했는데, 장성급 인사들의 경력을 보면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들의 절반 이상이 48년 이후 군대에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군 경력도 있고 장교도 부족했고 광복군 특혜까진 아니더라도 군 경험자라서 다 일주일 정도의 훈련만 받은 특별임관입니다. 이들이 들어가고 싶었다면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었을 거란 말이죠.
예전에 김구가 광복군 출신에게 국군에 들어가지 못 하게 했다고 말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풀려도 뭔가 풀렸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바로 남북협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광복군 출신의 임관은 계속돼 가장 유명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폭탄을 준 김홍일이 49년에 입국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아직 김구가 살아 있었던 시절, 그는 바로 국군으로 가 준장(당시 가장 높았습니다 =.=)으로 바로 임관하죠.
이 쯤 되면... 짐작이 가실 것 같습니다.
증오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습니다.
일제에 대한 무력투쟁을 계획했고, 그렇게 싸웠던 김구, 그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는 이런 임정 세력과 일제에 무력투쟁한 이들이었을 겁니다.
그들이 남북협상을 기점으로 김구를 떠납니다.
이건 국내에서 조직한 백의사 역시 마찬가집니다. 안두희가 백의사 출신이라는 설은 일단 부정되고 있지만, 백의사 역시 그를 버린 것은 확실합니다.
그가 남북협상으로 열심히 뛰어갈 때, 그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들은 계속 그를 떠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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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6일, 그는 안두희의 총에 암살당합니다. 사실 이건 두 번이나 실패했던 계획이 세 번째에 성공한 것일 뿐입니다. 여운형이 그랬듯이, 남북협상에 발을 딛은 순간부터 그의 운명은 결정돼 있었습니다.
김구 암살의 원인은 대한민국 승인 과정에서 있었던 그의 반대 움직임, 그리고 국회 내에서 시작된 소장파들의 중도파와의 합작 및 친일 청산 움직임이 그와 연결되지 않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통일을 반대하고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려 했던 이승만과 친일파의 탓이라고 모는 것은 일부를 보는 것 뿐입니다.
뭐, 실제 저지른 것은 그들이라고 봅니다. 아마 한민당도 알았을 거고, 몰랐더라도 좋아했겠죠.
하지만 한민당의 경우 오히려 정상참작이 됩니다. 그들의 지도자 두 명이 김구의 명령에 죽었다는 의혹이 있으니까요. 장덕수라면 모를까 송진우라면 확실하다고 보구요. 친일파 청산과 관련됐다면 모를까 한 명은 자기 말 안 들었다고 바로, 다른 한 명은 한민당을 흡수하려는 것에 반대해서였죠.
중요한 것은 그와 함께 싸웠던 동지이자 그의 지지자들이 그에게서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좌우합작 세력과의 동맹과 남북협상 과정은 그가 우익에게서 고립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남에서 고립되고, 북에서는 이용당했으며, 그 후에는 양 쪽에 다 몰리며 소외되다가 그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판단이 내려졌을 때, 죽었습니다.
애초에 반공우파였고 김일성 암살까지 꾀했던 그, 그런 그가 길을 바꾸자 소외될 정도로 증오는 깊었습니다. 그를 따르던 이들은 그가 반공을 멈추는 순간 그를 버린 것이죠.
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는 그렇게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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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를 보면서 오히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게 돼 갑니다. 좌우합작을 계속 추진하던 김규식도 남북협상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고, 계속 김구를 따랐던 조소앙 역시 비관적인 주장을 하다 결국 남한 정부에 들어가게 되죠. 6.25 과정이나 이후 평화통일을 주장하던 (그리고 죽은 -_-) 조봉암 역시 이 때는 남북협상을 비관하고 이승만의 편을 들어 남한 정부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김구와 싸우고 뜻을 같이 했던 우익 계열 독립운동가들 역시 김구가 남북협상으로 가니 그대로 이승만에게로 갔구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은 이승만과 그를 따르는 일부 친일파의 작품이 아니라, 우익 계열 내에서 전반적으로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죠. 좌익이야 쓸린 지 오래구요 (...)
마지막으로, 그렇게 미리 정부를 세우고 군을 준비할 수 있었기에 북한의 남침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자는 믿을 수 없고, 그들을 막기 위해서 남한이라도 제대로 세워져야 한다는 생각은 김일성의 선택에 의해 맞아 떨어졌습니다.
뉴라이트가 이승만을 그렇게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한 것이죠 -_-;
뭐 뉴라이트 그런 게 아니더라도 단독정부를 지지했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줬다면 인정하고 존경해도 된다고 봐요. 어차피 얼마 안 되는 좌우합작 세력 외에 우리가 존경할만한 위인들은 거의 단정을 지지했습니다.
네, 거기엔 이승만도 해당됩니다.
"역시 과인은 국부..."
참으로 다행히도 이승만은 단정 외에도 온갖 삽질을 저질러줬으니 그럴 일은 없겠습니다만 -.- 국부(局部)를 걷어 차삘까.
참 짜증나는 걸 인정해 버렸으니 한국전쟁 얘기할 때는 이승만을 더 가열차게 까 줘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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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김구에 대한 얘기를 마무리 지어 보죠.
그가 지금 최고의 평가를 받는 것이 과장됐다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독립운동 때도 그가 한 방법은 분명 테러였고, 그것이 항일을 위해서라는 보충설명만 한다면 이 말을 굳이 부정할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가 국내에서 저지른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테러였구요. 그 때문에 그를 싫어한 이도 많구요. 이런 점에서 그가 대통령이 됐을 때 평화적인 인물이었을 것 같진 않습니다. 북한부터 만주까지 쓸어버릴 가공할 반공 계획을 짠 걸 보면 좌익 계열에게 잘 했을 것 같지도 않고, 송진우 암살에서 보듯 정적에게도 잘 대했을 것 같진 않거든요.
하지만, 이 남북협상 부분에서는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그가 이승만과 결별 후 남북협상을 택한 것이 이승만 공격 및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일 순 있습니다. 그리고 전 이 쪽을 생각해 왔구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추진력은 상상 이상입니다.
그는 자기가 임정 때부터 품었던 반공이라는 신념을 이 때 완전히 내려놓습니다. 이를 위해 자기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들의 반대와 결별도 개의치 않았죠. 그렇게 그는 자기가 죽이려 했던 이를 만나기 위해 38선을 넘어 북으로 갑니다. 북에서의 기만과 그 이후 남에서 쏟아진 온갖 정치적 공격 및 비웃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고, 마지막까지 남한 단정 수립을 반대했습니다.
김일성과 만났을 때도 간도 쓸개도 다 넣어줄 것처럼 고개만 끄덕인 게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합의점을 최대한 찾도록 했죠. 그리고 그 무엇보다 동족상잔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돌아옵니다.
평화 통일을 위해서요.
단지 정치적인 계산이라고 생각한 제가 정말 부끄러울 정도죠. 아니 정치적인 계산이라 하더라도 지지자들에게도 개의치 않는 이런 엄청난 추진력이 있다면 그건 정말 훌륭한 정치인인 거죠. 국민들이 무엇을 원했는지 알고 그걸 가장 강하게 밀어붙인 거니까요. 솔직히 이쯤 되면 이승만 편 들긴 했어도 이 부분에서 가장 견해가 갈려 갈라졌고,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남북협상을 추진한 걸지도 모르겠구요.
"달리는 열차에 중립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때 써도 되는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운형과 김구의 삶은 이념갈등이 극에 달했던 한국에서 남도 북도,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보다 더 우선한 걸 말 하는 게 얼마나 위험했고, 쓸쓸한 길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솔직히 결과를 알고 남과 북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나게 된 지금, 저도 이런 중립에 설 수 없습니다. 까딱했다가 적화됐으면 정말 큰일났겠다는 생각만 들거든요.
하지만 그들은 그 길을 의연히 걸어갔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암살 위험을 받았고, 결국 죽었습니다. 남은 이들은 파편화 됐고 6.25 전쟁으로 아예 넘을 수 없는 길이 생겼으며, 그래도 그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도 탄압받고 죽어갑니다. 이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게 된 게 정말 얼마 안 되죠.
현실성 없었다, 그래도 공산주의는 싫다, 6.25가 곧 오는데 그 때까지도 정부 수립 안 됐으면 어떡할 뻔 했나... 이런 생각이 듦에도 그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김구 (1876~1949)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처음 김구 얘기를 꺼낼 때 생각했던 것과는 참 동 떨어진 결론입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이렇게 결론내겠습니다. 그는 지금 흔히 알려진 것처럼 문제 없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위대한 독립운동가였으며, 마지막까지 분단을 막기 위해 싸운 위대한 정치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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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조리 알아보면서 참 짜증나는 것 하나.
이전부터 썼지만 이런 김구를 지금처럼 신격화 한 것은 박정희입니다. 단지 이름만 신격화 한 게 아니라 이승만 때 탄압당했던 김구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복권되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게 바로 그 때였죠. 마찬가지로 이승만에게서 멀었거나 이승만 편이더라도 소외당했던 독립운동가들을 대접해 준 것도 박정희 때였죠. 그래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의 편을 든 것일 거구요. 당장 독립운동가들을 검색해 보면 왠만한 사람들은 다 62년, 63년에 독립운동 관련 훈장을 받았느니 합니다. (...) 박정희야 자기 정권 정통성을 위해 그런 거였다지만, 이승만 대체 뭐 한 겁니까 -_- 당연히 좌익은 찬밥이었지만, 그래도 초기엔 여운형도 인정해 주긴 했습니다.
박정희로서는 김구를 띄우는 게 최선이었을 겁니다. 반공우파이면서도 남한 단정을 반대했고, 남한 단독 정부 및 통일이 실패한 건 다 이승만 잘못이었고 자기는 김구의 뜻을 잇겠다고 한 거죠. 그러니 반공을 내세우면서도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었던 거구요.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했을 때 하던 연설도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런 거였죠.
뭐 그래도 좌익 계열 독립운동+통일 운동가들에 대한 재평가만 한다면 그가 사람을 제대로 선택하긴 했습니다. 하긴 우익 계열 중에 선택할 만한 사람은 몇 없긴 했습니다만 ^^; 한민당 쪽 선택하자니 친일 문제는 둘째 치고 자기 정적이 그 쪽 후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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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김구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통일 운동에 대해서 작게나마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방식은 이념을 떠나고 남도 북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비교하면 남도 북도 인정할 건 인정하고, 남도 북도 비판할 건 비판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이들의 방식은 남의 문제는 비판하고, 북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로 따진다면 북 쪽이 더 커요. 남은 과거의 일이지만, 북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현재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 몰아내야 되는 대상이다는 건 말도 안 되죠.
그리고 더 크다고 보는 것은, 북에 대해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이 통일에 정말 도움이 되냐는 것입니다. 김일성 개새끼, 김정일 개새끼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이야 만날 수 없겠지만 직접 만나서 인사도 할 지도 모르는 대상을 향해 직접 욕 한다는 것은 만나지 말자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