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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0/24 13:19:32
Name 중년의 럴커
Subject [일반] 그 차장 누나들은 어디 계실까?
'차장' 이라고 불리던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6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서민들의 발을 책임지던 교통수단은 버스였습니다.  70년대 후반부에 지하철이 개통되었지만, 2호선이 개통될때까지 실제로 이동할 수 있는 지역은 종로일부 지역뿐이었고, 대부분은 시내 버스가 대중 교통의 핵심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기억되는 가장 오래 전 버스 요금은 5원이었고, 5원짜리 동전 하나로 탈 수 있는 버스지만, 그것도 없어서 한두 정거장은 걸어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5원짜리와 함께 10원짜리 버스, 15원짜리 버스가 공존하였는데, 5원 버스의 좌석은 요즘 지하철 방식, 10원짜리 버스는 두명이 앉는 좌석 위주, 나중에 나온 문이 2개 달린 '도시형 버스'가 15원으로 요즘 일반적인 버스 좌석 방식이라고 기억됩니다.  그리고 이 기억의 한편에는 '차장'이라고 불리던 슬픔과 희망을 함께 양 어께에 짊어지고 다녔던 수 많은 여성 분들이 계셨습니다.

적게는 15살정도?  많아보았자 20대 초반의 연령대로 구성된 이 '차장'분들은 상당수가 무작정 상경을 통해 서울로 올라온 시골 출신 여성분들로서 정말 먹을게 없어서 입하나라도 줄여보려고, 서울가면 돈번다는 소문에 홀려서, 혹은 다른 이유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기차 입석표한장 달랑 사들고 집을 떠나와 서울역앞에 떨어져서 보자기짐 하나 들고 멍하니 서있던 분들이었습니다.

누구 아는 사람 없이 이렇게 서있던 여성분들은  처음 말걸어주는 사람을 따라 일부는 공장으로, 일부는 식모로, 일부는 술집으로, 그리고 차장으로 이렇게 흩어졌습니다.   차장으로 취직했던 그녀들은 그렇게 합숙소에서 또래 여자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기름밥을 먹고, 얼마안되는 월급을 모아 시골에 돌아가는 꿈을 꾸며, 비좁은 공간에 끼여 모자란 잠을 자면서 새벽부터 덜컹거리는 버스에 올라 문에 매달려가면서 힘차게 버스 차체를 두들기면 '오라이' '오라이' 외쳤습니다.

저 '오라이' 가 'all right' 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같이 국민학교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버스에 의지해 통학을 하던 남학생들에게는 그 차장 누나들은 묘한 감정의 대상이었습니다.   왜 하나같이 차장 누나들의 제복은 그렇게 꼭 끼는 옷이어야 했는지, 아마 삥땅을 방지하기 위해 옷속 공간을 없에야 했을거라 짐작은 하지만, 왕성한 호르몬의 사춘기 남학생들에게는 묘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수 없었고, 돈대신 종이로된 회수권을 사용하던 학생들 중에서는 색볼펜으로 정밀소묘 실력을 발휘, 위조 회수권을 만들어 속일 수 없나 걸리냐를 승부하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동전 주머니를 차고 거스름 돈을 바꾸어 주다가 나중에는 토큰이 도입되어 은색, 구리색 구멍뚤린 주화가 돈대신 사용되었고,  어떻게든 박한 월급이외에 조금이라도 돈을 모으려는 마음으로 몰래 돈을 빼돌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버스 발판에 덜컹덜컹 찍히는 계수기를 장치하는 바람에 승객들이 타고 내리다 두번 이상 찍히면 회사에서 추궁당할까봐 절절매는 얼굴을 해야했던 분들입니다.   그래서 저나 다른 학생들은 누나를 도와준다면서 일부러 계수기가 설치된 중간판은 안 밟고 건너뛰기를 시전하곤 했었습니다.

출근 시간에는 사람들이 많아 문이 안닫히면 양팔로 문 좌우를 잡고 다니던 모습은 매우 흔했고, 모자란 잠때문에 졸다가, 아니면 힘이 부쳐서 그렇게 움직이는 버스에서 길가로 떨어져 안타까운 삶을 마감한 경우가 생각보다 많이 있었습니다.  앉기는 커녕 서있을 공간도 없는 버스 안에서 남자들 사이에서 끼어서 짗궇은 손장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을테고, 유부남 버스기사 아저씨와 자의일까 강제일까 사단이 났다가 둘이서 연탄불 피우고 자살한 뉴스를 본 기억도 납니다.    뉴스 대상도 되지 못한 슬픈 사연들이 한두가지였겠습니까?

그렇게 한국 경제의 역동기 한편에서 나름대로 가장 큰 역할을 하면서 젊음을 보낸 그 많던 '차장' 누나들은 지금 아마 50대에서 60대 초반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지하철 버스에서 그렇게 앉을 자리를 찾는 여성분들이 혹시 예전에 그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안에서 손님을 더 받기 위해 차장에게는 자리하나 마련해주지 않아 손잡이 막대기에 겨우 엉덩이를 걸치는 것이 유일한 휴식이었던 그분들일지도 모르니 차라니 저는 서서 가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몇일전 아들과 함께 제가 오래전 모아둔 동전들을 우연한 기회로 정리하다가 구멍뚫린 버스 토큰 몇개를 발견하고 해주었던 이야기를 정리해서 pgr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어 잠깐 끄젂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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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기쁨이
11/10/24 13:32
수정 아이콘
이영자의 안계시면 오라이가 생각나네요
저또한 아주어렸을적 엄마 손잡고 시장나갈때 가끔 탈때 기역이 나지만 어느세
사라지고 없어진 그분들 잘 지내시고 계시겠죠 ^^
11/10/24 13:40
수정 아이콘
처음으로 피지알에서 추천한방 날립니다
Pathetique
11/10/24 13:47
수정 아이콘
훈훈한 글 잘 봤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군요...
가만히 손을 잡으
11/10/24 13:56
수정 아이콘
옛날 생각 나네요.
11/10/24 14:18
수정 아이콘
오랫만에 [추게로] 버튼을 눌러보네요...
곡사포
11/10/24 14:36
수정 아이콘
'안내양'이라고도 했죠. 누님들 포스가 좀 있었죠.
껌을 '짝짝' 씹으시기도 하고, '오라이~!'하면서 버스 문옆을 탕탕 두드라는 소리가 장난아니었습죠.
관련 유머도 있습니다.

Q. 산 사람을 태우는 무서운 여자는~~?
A. 안내양
11/10/24 16:5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 [m]
Abrasax_ :-)
11/10/24 17:18
수정 아이콘
저는 그 세대는 아니지만, 어릴 때 집에서 읽었던 <작은책> 같은 잡지를 다시 읽는 기분이 나네요.
훈훈한 글 감사합니다.
뚱사랑
11/10/24 18:29
수정 아이콘
초등학교 때 생각이 나네요. 한 5학년때 쯤으로 생각되는데 어느날 버스에 못보던 벨이 달릴것을 발견하고 안내양에게 '누나 이거 뭐예요?' 하고 물어봤는데 안내양 누나가 씁쓸한 듯 미소만 지어주고 대답을 안해주더군요. 나중에 알고보니 안내양 대신 그 벨이 설치 된걸 알게되었습니다. 그 뒤로 안내양 얘기가 나오면 그 때 그 누나의 씁쓸한 듯 지어준 미소가 생각나더군요
birkenau
11/10/24 19:21
수정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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