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나이를 자셨는지 - -a 30대 중반일 텐데요.
1. 준비된 임금
"이 나라는 산수(山水)가 기절(놀랄 만큼 신기함)하므로 이런 아름다운 인물이 난다" (세종 7년 윤 7월 19일)
임금 대신 사신을 맞는 자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때 세자의 나이 겨우 열 둘. 여덟 살에 세자의 자리에 오른 이후 벌써부터 나라의 두 번째 서열로서의 일을 하고 있었던 거죠.
세자라고 검색하면 뜨는 수는 무려 1340건입니다. 이보다 많은 건 선조와 영조죠. 선조의 경우 광해군이 분조로 많이 놀았고 그 후에도 중국에서 인정을 안 해 줘서 온갖 일들을 겪었고, 영조의 경우 -_-; 말 할 필요 있나요. 이외에도 숙종이 그 수가 비슷한데 그는 재위기간이 10년은 더 길죠.
세종실록에 세자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는 건 나름 특별한 경우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두각을 드러냈다는 것이죠. 세종대왕 역시 그를 가르치는 데 열정적이었습니다. 열 살에 제왕 교육인 서연을 시작하고 열여섯 살에 정사에 참여할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자 역시 그 기대를 잘 따라 줬죠. 워낙에 기사가 많아서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 수 없네요 -_-; 세종 11년부터 이미 각종 행사나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자리에 세종대왕을 대신해 계속 참가한 걸 보면 정사에서도 비슷했을 것 같네요. 그 자신도 학문을 열심히 배워서 집현전에 심심하면 갔는데, 어느 날은 성삼문 등이 세자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자려고 하는데 밖에서 세자의 소리가 들려 허겁지겁 일어났다고 합니다. 아니 아버지만으로도 벅찰 판에 아들마저 이러면 어쩌란 겁니까.
효성도 지극해서 아버지의 수라상을 친히 살피고 세종대왕이 앵두를 좋아하자 후원에 직접 길러서 따다 바쳤다고 합니다.
[용재총화]에는 "그 때문에 지금도 온 궁 안 나무가 앵두나무"라고 적고 있죠.
학문에만 잘 난 게 아니었죠. 측우기를 만들었다, 혹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하는 사람이 문종이었습니다. 비 올 때 땅을 파서 쟀다가 정확하지 않자 통을 만들었다고 하죠. 장영실의 공을 가져갔다는 생각이 들지만,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세자가 그런 걸 만들었다고 딱히 자랑할 일이 아니거든요. 세종대왕의 행장 등을 보아도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얘기가 아예 없거나 정말 단 몇 줄입니다. 측우기 역시 문종의 작품으로 봐야겠죠. 제대로 실용화 시킨 거야 장영실이겠지만요.
군사 분야에 대해서는 오히려 아버지보다 잘났습니다. 세종대왕의 경우 초기에는 군사 부분에서 정말 약했죠. 이건 밑에서 다시 얘기하죠.
천문 관측에서도 빼어난 기량을 보여서 북극 고도를 잴 때도 참가했고, 날씨를 예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세종대왕도 밖에 나갈 때 물어봤다고 하죠. 기록에서야 "자잘한 기예에는 마음 두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게 무슨 도술도 아니고 얼마나 공부를 했다는 걸까요?
세자 생활만 30년. 10년이 넘는 현장 실습, 거기에 7년간의 정식 대리 청정. 수염이 길어서 관우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고 재주는 아버지를 그대로 쏙 빼닮았죠. 거기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적통이었습니다. 조선 역사상 이보다 더 준비된 왕이 있었을까요?
+) 임진왜란 때 궁을 정리하다가 어진 하나가 나왔는데 누군지 몰랐다고 합니다. 누가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하니 문종이라 했는데 조사해 보니 정말 문종이었죠.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크게 다른 겁니다.
몸이 아픈 것과 부부 문제라는 정말 사소한 문제만 빼면 말이죠... 이 두 개가 그렇게 치명적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2. 세 번째 세자빈
세자의 아내, 후에 국모가 될 세자빈은 일찌감치 정해졌었습니다. 세종 9년에 책봉된 휘빈 김씨였죠. 하지만 그 생활은 2년 정도였죠. 세자는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그녀는 남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일을 벌입니다. 세자의 마음에 든 궁녀들을 투기하고 남편의 마음을 얻는다는 물건들을 구하고 도술에 의지했죠. 남편만 바라보고 살아야 될 아내에게 무슨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그런 일을 벌인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다시 들인 것이 봉씨였습니다만 이 역시 4년을 가지 못 했습니다. 이번에도 금슬은 좋지 못 했고, 후궁 권씨가 임신하자 그녀를 핍박했습니다. 소헌왕후가 나서서 그녀를 꾸짖어야 했죠. 그녀는 제대로 무너지기 시작해서 거짓 임신 소동을 일으켰고 레즈비언 행각을 벌이게 됩니다. 왕실에서는 세자에게 흠이 될까 내쫓지 않았지만 이게 발견된 이상 어쩔 수 없었죠.
-_-; 솔직히 두 번이나 실패한 거 보면 세자 쪽에서 원인을 찾는 게 맞는 거 같긴 합니다. 결국 세자의 딸을 낳았던 후궁 권씨를 빈으로 올렸고 스물 여덟이라는 제법 늦은 나이에야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왕세자빈 권씨가 졸하였다. 빈은 아름다운 덕이 있어 동정과 위의에 모두 예법이 있으므로, 양궁의 총애가 두터웠다. 병이 위독하게 되매, 임금이 친히 가서 문병하기를 잠시 동안에 두세 번에 이르렀더니, 죽게 되매 양궁이 매우 슬퍼하여 수라를 폐하였고, 궁중의 시어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 이 없었다." (23년 7월 24일)
세자는 그녀를 정말 사랑했는지, 네 번은 심하다 생각했는지 더 이상 아내를 맞지 않았습니다. 비극의 씨앗은 이 때부터라고 봐도 되겠죠.
3. 짧았던 치세
아직 성군을 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한 가지 일을 추진합니다. 병서를 만드는 거였죠. 여기에 수양대군과 김종서 등이 동원됩니다. 그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죠.
"내가 생각하건대 육전은 반드시 강할 필요가 없으나 병서는 강하고 싶다. 병서는 문장의 뜻을 알기 어려운 것이 많이 있으나, 만약 경연에서 강론한다면 거의 찾아서 연구하여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안 된다고 하자) "너의 말이 옳다. 그러나 병서도 또한 부정한 책이 이니기 때문에 이를 강하고 싶을 뿐이다" (문종 즉위년 11월 23일)
... 문종이라구요. 文이라구요? 武종이 아니구요? -_-? 대신들이 왕에게 유학을 가르치는 경연 자리에서 병서를 논하자고 합니다. 결국 이뤄지진 않았습니다만.
짧은 그의 치세 전반에 나타나는 것은 군사적인 업적입니다. 각종 무기들을 개량하였는데 특히 화차 덕후였죠. 화차의 여러 버전 중 문종 화차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세종대왕에 이어 그가 노력한 것은 바로 북방 개척, 너무 힘 드니 포기하자는 논의를 강하게 배척하며 4군 6진 개척을 완료해 버립니다. 거기다 고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전쟁사를 정비해 동국병감을 냈고, 병장도설도 만들었으며, 군제를 5사로 정비해 5위의 기본이 되게 합니다. 조선 전기 군사의 기본은 다 이 짧은 문종 치세 때 나온 것입니다. 몸이 아무리 좋아도 몸은 종합병원인 사람이 많죠. 그가 병이 많긴 하지만, 병과 약, 혹은 문약은 언제나 함께 있는 건 아니죠.
이외에는 그의 업적이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세종대왕 때 이룩한 게 너무도 많으니 이를 정리해야 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기엔 시간이 짧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군사 쪽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그게 부왕의 업적 중에서 부족하다고 여겨서 그랬을 것이고, 그 자신이 군사에 대한 관심이 깊었기 때문일 겁니다.
굳이 찾자면 고려 왕씨들을 복권시켜 준 정도일 겁니다. 더 이상 왕씨를 괴롭히지 않아도 조선이 굳건해졌다는 것, 그리고 그걸 태연히 할 정도로 정통성에 아무 하자가 없다는 거겠죠.
이렇게 보자면 저번 편에 했던 의문에 대한 답이 나올 것입니다. 문종이 수양을 두려워 했던 걸까요?
4. 형과 아우
저번 편에서 수양이 문제가 됐던 부분은 언제나 불교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직책을 맡자 대신들이 반대했는데, 그 역시 딱히 실권이 있는 게 아닌 음악 분야였죠. 이들은 어디까지나 잡학일 뿐이었죠. 수양 역시 지나치게 유능했고 그런 일들을 맡길 만 했죠.
이 부분에서 둘이 대립할 만한 상황이 만들어질 수가 없습니다. 문종은 둘도 없는 효자에 불교를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신하들은 부지런히 불교에 대한 험담을 했고 문종이 이에 "진실은 아닌 거 같다"라고 유교 편을 드는 말을 했는데, 이게 행장까지 기록돼 있습니다. -_-; 정말 이 끝간 데 없는 억불... 이런 상황에서 불교를 좋아한 세종대왕의 불사를 앞서서 주도하는 수양은 오히려 큰 방어벽이요 아군이었습니다. 수양이 욕 먹은 것 역시 언제나 이 쪽이었죠. 이 일을 통해 수양이 인망을 더 얻을 순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종친들 사이였고, 신하들에게서는 더 멀어질 뿐이었죠. 문종 역시 이 때문에 그를 계속 감싼 것일 거구요.
수양이 "문종 실록 속에 (자기) 과실을 삭제하지 마라"는 명령을 내린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문종 실록에서 둘의 갈등이 생략됐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수양에 대한 욕으로 가득 차 있고 불교를 혐오하는 부분들을 보면요. 수양이 그 이상의 권력을 가졌다면 자기 공을 자랑하기 위해 남겨 뒀겠죠. 문종 실록을 둘러보며 얻은 결론은, 수양 때 만들어졌다 하지만 신뢰할 만 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 때 수양은 문종에게 덤빌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수양의 힘은 그리 크지 않았고, 문종이 보호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친불 성향으로 그를 따를 이도 그리 많지 않았죠. 무언가를 넘보기에는 문종의 힘이 너무도 강력했고, 정통성은 확고했습니다. 문종이 그를 경계했다 하더라도 아직은 그럴 필요도 시간도 없었구요.
문종이 그를 경계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수양이 불안 요소이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 수준일 뿐이었죠. 결국 그의 죽음이 모든 것을 가른 것입니다. 수양과 안평이라는 막강한 종친, 후견인 없는 어린 세자, 문종 자신의 병까지... 단지 하나 하나의 불안 요소일 뿐이었던 것이 그의 죽음으로 모두 드러난 것이었죠.
5. 문종 독살설
이 때문에 고개를 쳐 드는 것이 문종 독살설입니다. 하지만... -_- 조사해 보니 떡밥 투성이더군요. 에휴... 좀 까 보겠습니다.
- 문종의 내의 전순의는 종기에 안 좋은 기름진 음식과 활 쏘기 구경 등을 권유했다.
- 문종이 죽기 몇 일 전에도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면서 상황을 왜곡했다.
- 이후 그는 '1등공신'에 오른다.
- 수양은 후에 그를 중용했다.
이것이 문종 독살설의 요점입니다. 그런데... 그 속을 보면 어이 없을 정도로 왜곡돼 있거든요.
처음에 그가 탄핵당할 때에는 다른 말 없이 두 번째 이유만을 들어 공격당합니다. 어찌 보면 합리적입니다. 괜찮다 괜찮다 했는데 갑자기 죽었으니까요. 왕이 죽으면 내의가 탄핵당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순서였구요. 이 때 처방을 잘 못 했다는 말이 나오긴 합니다만... 그게 구체화 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재밌는 건 이 때 전순의를 옹호한 것은 수양 쪽이 아닌 대신들이었습니다. 내의를 잠시 귀양 보내는 정도가 아닌 큰 죄를 주는 것은 전례가 없었거든요. 이 때 실록에는 "대신들이 조원희(전순의를 탄핵한 대간)에게 감정이 있어 오히려 그를 욕 했다"는 식으로 적고 있죠. 그 대표주자는 수양의 편인 신숙주였습니다.
"전순의 등의 죄는 과연 대간의 말한 것과 같으니 반드시 그 정상을 논할 것이 아니다. 정부에서 어찌 그렇게 하는가?" (단종 즉위년 5월 21일)
전순의에 대한 탄핵은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귀양이 일시 이루어졌다가 방면되게 되죠. 이 모두는 수양이 배제되고 대신과 안평대군이 주를 이루고 있던 상황이었구요. 계유정난 이후에는 "황보인 등이 그를 감쌌다"는 말이 추가됩니다.
기름진 음식과 운동이라고 하는데... 그런 정확한 언급이 나오는 건 사헌부 기건의 상소입니다. (1년 5월 1일) 여기서 그가 언급한 건 "종기에 안 좋은 꿩 고기를 주었다" "안 좋은 게 분명한데 괜찮다고 했다" "약을 제대로 안 썼다" "침을 잘못 놨다" 등이죠.
이 때문에 꿩 고기가 종기에 안 좋다는 말이 많습니다. 여기에 한의대 교수(하필 우리 학교 -_-; )가 인증까지 해 줬죠. 그런데... 이런 게 있네요?
http://blog.naver.com/lemondori?Redirect=Log&logNo=120100410277
중간 쯤에 보시면... "여러가지 종기를 치유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뭘까요 이건?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아예 반대 되는 걸 찾을 수 있을 정도면 -_-; 어찌해야 될 지 모르겠네요. 이걸 제대로 파려면 한의학 지식은 물론이고 그 당대 지식을 찾아야 됩니다. 마침 전순의가 의방유취, 향약집성방 등을 만든 한의학계의 거두긴 하지만 이것까지 찾아보...라고 하진 마세요. orz; 아무튼 이렇게 찾아 본 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전순의가 한 처방이 정말 어땠는지를 봐야 됩니다. 실제 실록에서 그가 뭘 처방했는지 나오는 건 저 정도밖에 없어요. 그리고, 문종 독살설에는 그 정도로 깊은 고찰이 없습니다.
애초에 활 쏘기 구경이나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걸 그가 권유했다고 하는데, 이는 왕의 의무입니다. 거기다 문종은 아픈 가운데서도 악착같이 정무를 하고 세종대왕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골골대던 2년만에 조선 군사 체계의 기본을 만든 사람한테 의원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을까요? 솔직히 핑계로 보여요. 거기다 이 기건이라는 사람이 한의학에 지식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과연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게 맞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왜곡이 있습니다.
전순의는 후에 공신에 오르긴 하는데... 이 공신이라는 게 "원종공신"입니다. 수양이 임명한 공신들보다 한 단계 낮은, 그야말로 개나소나 준 거예요.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요. 원종공신 1등의 명단만 79명이고, 수양 때의 공신을 모두 합치면 2000명이나 됩니다. 이들이 모두 수양을 도왔으면 애초에 그렇게 일을 거창하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수양이 왕위에 오른 것 다음으로 욕 먹는 것은 공신을 미친듯이 남발한 것 때문입니다.
원종공신보다 높은, 좌익공신 1등에 오른 게 그 유명한 성삼문입니다. 그가 수양을 도와서 1등을 한 걸까요? 그렇다면 단종 복위 운동은 배반인가요? 그 외에도 공신 중에서 단종 복위를 시도한 사람이 많습니다.
애초에 원종공신을 "공신"이라 해서 크게 대우한 것처럼 한 것, 이건 왜곡입니다. 이런 짓거리가 하나 더 있었죠. 정기룡. 그 역시 원종공신에 올랐는데 "
이순신, 권율, 원균에 이어 네 번째 1등 공신"이라면서 띄워 주죠. 공신에 대한 개념을 잘 모르는 일반인을 상대로 한 낚시일 뿐이죠.
오히려 전순의를 옹호한 것은 수양의 반대파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로 보입니다. 문종의 죽음으로 인한 혼란은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때문에 문종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괜찮다 괜찮다"고 할 것을 강요한 게 대신들이었으며, 그 때문에 후에 대신들이 전순의에 대해 쉴드를 쳐 줬다는 것, 오히려 이게 더 설득력 있지 않나요?
그 후에 전순의가 다시 중용된 것은 따로 보면 너무 쉽게 이해 됩니다. 수양은 재위 내내 "잡학"을 크게 융성하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썩혀 둘까요? 그럴 이유는 없죠. 그리고 대간들은 나중에 이를 탓 하지 않았습니다. 단종 복위가 일어나기 전이었는데도요. 결국 그가 잘못한 게 아니었거나, 잘못했더라도 그게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게 되겠죠. 현대에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건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때는 달랐을까요?
음모론의 가장 큰 문제점 두 가지는 "우연을 무시하는 것"과 "왜곡"입니다. 문종 독살설은 사실 관계를 무시하고, 공신이라는 걸 과장해서 왜곡합니다. 그것과 문종이 일찍 죽은 것, 전순의가 탄핵 당한 것이라는 우연을 더 해서 하나의 거대한 음모론이 탄생하는 거죠.
이런 점에서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독살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독살설은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6. 혼란의 시작
아버지를 빼 닮은 듯 한 능력, 풍부한 실무 능력, 확실한 적통까지... 문종이 건강했다면 그 치적은 정말 잘 되면 대왕 세종 시즌 2요 적당히 해도 명군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죽음과 너무 늦은 후견인 없는 아들이 이 모든 것을 깨뜨린 것이죠. 이 때문에 조선 시대에 붙을 두 번째로 큰 if가 이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장군님이 명량에 안 계셨다면)
문종은 효성이 지극했고, 죽은 후에 계속 빈전(장례 치르는 곳)을 찾아가려다 "님 몸부터 챙겨요"라며 반대를 먹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찾아가죠. 건강이 좋아질래야 좋아질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은 죽어라 했죠. 의원이 이걸 권유했다느니 하는 건 "이걸 목숨 걸고 막지 못 했다"는, 임금의 잘못을 덮어 씌운 것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몸도 안 좋은 상황에서 이렇게 과로하는데 몸이 축 나지 않는 게 이상하죠.
확실히 그가 죽을 때의 모습이 의문인 건 사실입니다. 몇 일 동안 좋아졌다 좋아졌다 하다가 한 방에 훅 간 거니까요. 당시 수양, 안평 등은 명승지와 절을 돌면서 기도하고 있었고, 주변은 대신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문종을 직접 만나는 사람은 의원들 뿐이었죠. 이런 점에서 차후의 혼란에 대비해 대신들이 문종의 상황을 숨겼을 가능성은 있을 겁니다. 문종이 수양을 두려워 했다면, 바로 이 때였겠죠. 대신들에게 맡기는 것으로는 불안한 상황인데도, 그 이상을 할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후견인 없는 어린 아들. 종친들보다 믿을 건 적자 상속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대신들이었을지도요.
애초에 종친들을 경계해 왔으며 이제 어린 왕을 지키기 위해 더더욱 경계해야 되는 대신들. 그리고 거기에 밀린 종친들. 어린 왕을 보호하는 종친들.
어린 왕을 중심으로 한 싸움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
공주의 남자 언제 따라잡죠 -_-; 에휴 저 인물들 최후를 다 아니 웃긴 장면도 씁쓸하기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