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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8/10 02:46:46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남한산성 이후 - 5. 북벌의 깃발


시작하기 전에...
좀 쉬어가면서 잡상 하나 쓰려고 했는데 그냥 버렸습니다. -_-; 영 제대로 써 지지가 않네요; 요새 글쓰기 얘기가 나와서 드는 생각인데, 저는 뭔가 얘기를 나열하고 풀어 쓰는 건 어느 정도 되는 거 같은데 요점을 정리하고 간단하게 쓰는 건 약한 거 같습니다. 애저녁에 포기한 글쟁이 기질이 아직 남아 있나 봐요. 글 자체야 써 놨으니 나중에 다시 정리해서 올릴지도 모르겠네요.

북벌에 대해서 제대로 더 얘기하고 싶지만, 그러려면 이제까지 쓴 것만큼의 조사와 분량이 필요할 것 같네요. 아쉽지만... 이 정도로 하려고 합니다. 효종 대에는 북벌에 대해 구체적인 걸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현대의 이미지는 모두 송시열이 효종 말에 독대했던 걸 숙종 대에 밝힌 거죠. 이것이 사관도 들이지 않고 얘기했던 "기해독대"입니다. 송시열이 워낙에 "효종 = 북벌"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놔서 이걸 파고 들어가기가 정말 힘드네요. - -;

1. 대의
"이 세상을 삼대(三代)의 시대로 만회하고 대의를 천하에 펴려고 하였으니 , 이는 실로 선왕의 뜻으로서 평일 수립한 커다란 규범이다. 그런데 지금 이 행장 중에는 그다지 거론하지 않았다. 이 한 조항을 명백하게 써서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

현종의 행장에 나온, 효종의 행장을 쓸 때 내용을 추가하라고 지시한 부분입니다.

"대의를 밝히고자 하신 것이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았습니다 (중략) 전하께서 반드시 선왕의 뜻을 잘 이어야 효도를 한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현종 9년 10월 30일, 송시열이 간만에 올라와서 한 말입니다.

"대의(大義)를 밝히는 것을 제일건으로 하였기때문에 첩지(貼紙)하여 비밀로 했다 한다"

효종 즉위년, 송시열이 상소를 올렸을 때 부연설명된 부분이죠.

"선왕께서 언젠가 이르시기를, ‘만약 30만 정병(精兵)만 있다면 대의(大義)를 천하에 펼 수가 있을 것이다"
현종 즉위년, 송준길이 한 말입니다.

"당시에 상이 수양(修攘)하는 방책에 뜻을 두고 바야흐로 융정(戎政)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육의 의논이 들어가지 못했다."

효종 3년 6월 29일. 김육이 어영군을 늘리는 것에 반대했을 때 효종이 이를 듣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부연설명입니다.

"처음에 관무재를 정지하려 하였으나, 대신들이 모두, 지금 정지하면 융정(戎政)이 이로부터 영영 폐지될 것이라 하였다."

효종 3년 7월 27일, 도승지 정유성이 민응형을 탄핵했을 때 효종이 한 말입니다. 관무재는 왕이 어명을 내려서 여는 무과입니다. 민응형이 이걸로 뽑힌 모양인데 행동이 영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먼저 융정(戎政)을 일으켜 크게 정비를 더하셨으니, 아, 전하의 뜻을 신도 압니다. 어찌 부질없이 위 영공(衛靈公)이 공자(孔子)에게 진(陣)치는 것을 물은 것이나 양 혜왕(梁惠王)이 전쟁을 좋아한 일과 같겠습니까."

효종 7년, 민유중의 상소입니다. 여기서 융정은 군정, 즉 "군사 문제에 대한 행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실록 곳곳에 이런 식으로 군정을 개혁하겠다는 것과 대의를 밝히겠다는 표현이 있는 모양입니다. 일단 제가 찾아낸 건 저 정도네요. 하지만 그 어디에도 북벌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없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하죠. 청나라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걸 대 놓고 얘기하면 결과가 빤히 보이니까요. 이런 식의 언급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공공연히 얘기했던 모양입니다만, 그것과 실체 추진은 다르죠.

효종이 이런저런 개혁을 시도하긴 했습니다. 군사 부분에서 보면 잘 드러나죠. 훈련도감 등 중앙군을 최대한 늘리려 했고, 자주 훈련을 시키고 참관했습니다. 남한산성부터 서북의 성들을 보수하고 축성한 후 물자를 쌓아 대비하게 했구요. 이완을 등용하는 과정에서의 일화 - 무관들을 부른 후 화살을 쐈는데 이완은 갑옷을 입고 있어서 도망가지 않고 화살이 꽂힌 채로 왔다네요 - 나 무관들에게 시합을 시켰는데 부정출발을 계속 하자 결국 한 명을 군율로 다스려 효시한 것 등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금군의 조련에 대해 얘기하면서 "오랑캐들이 비웃는다"면서 하나하나 다 꼬집어서 고치자고 한 적도 있고, 사대부의 자제들을 무과로 끌어들이는 방안부터 속오군에게 세금을 면제해서 최대한 부담을 줄어주려고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북벌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으로까지 이어졌냐는 거겠죠. 지금부터 효종 대의 북벌에 관련된 일들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2. 북벌?
(1) 김자점
병자호란 때 도원수로 있으면서도 한 달 동안 병력을 움직이지 않았던 인물이 김자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조는 그를 중용합니다. 그는 살기 위해 친청파로 변신, 조정의 거두가 되죠. 효종이 들어서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효종은 집권하자마자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부릅니다. 이들은 청에 항복한 것에 실망해 지방으로 숨은 학자들, 이른바 산당이었죠. 분위기는 급변합니다. 김자점은 지속적으로 탄핵당하기 시작했죠. 이 때 김자점은 정명수 등을 통해 청에 구원을 청합니다. 효종 1년 3월, 청에서 정명수를 포함해 다섯 명의 사신을 보내 "성을 보수하는 것"과 "세폐를 감해 달라는 것", "구신들을 쫓아내고 척화파를 등용한 것"에 대해 거세게 따집니다. 척화신들에 대한 사(死)죄를 논하는 등의 강력한 으름장에 조선도 긴장해서 이런저런 의논을 하죠.

이를 북벌과 연관지어서 "효종이 북벌을 위해 김집 등 척화신을 불러 계획을 짜려 했고" "김자점이 이를 청에 고발해서" 이런 사건이 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 의문입니다.

청에서 관심을 가진 것은 이런 문제가 아닌 도르곤이 조선의 공주와 혼인하고 싶어한다는 거였습니다. -_-; 조선에서 이에 응하자 상황은 아주 좋아집니다. 이경석과 조경이 성 수축과 세폐에 대한 문제를 모두 짊어졌고, 이들은 백마산성에서 몇 달 유배됐다가 풀려납니다. 문제 된 김상헌, 김집에 대해서는 아예 얘기도 나오지 않았죠. 효종은 이에 기뻐하며 이렇게 말 합니다.

“혼사를 쾌히 허락하자 저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사문(査問 사건 조사)도 하지 않았으나 오늘날의 일이 상당히 완화된 것이다. 이런 뜻을 대신에게 전하라.”

이 때 금림군 이개윤의 딸이 뽑혔는데 도르곤이 못생겼다고 화 내서 "또" 청사가 옵니다. 이번에도 왜 군사를 키우냐며 따지는데, 역시 다른 여자를 바치라는 거였습니다. -_-;;;;;;; 다행히 도르곤이 죽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피해는 없었습니다. 먼저 갔던 의순공주는 다른 왕에게 보내졌다가 6년 후에 돌아오죠. 마지막 피로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자점이 고발한 게 정말 북벌이었다면 이 정도로 끝날 수가 없죠. 이후 효종은 계속 산당들을 등용하려 했습니다. 청에서는 이걸 거의 문제삼지 않았죠. 김자점이 역모를 일으킨 죄로 처형당했을 때도 청에서 따지긴 했지만 잘 넘어갔습니다.

이게 정말 북벌에 대한 문제였다면, 청은 조선이 "역적질 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방관한 게 됩니다. 후에 피로인 한 명이 도망쳤다는 것만으로도 현종이 무릎 끓을 정도로 따졌던 것을 생각하면 영 설득력이 없죠.

하나 더 생각해 볼 점은, 후에 송시열이 이경석을 욕 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북벌에 관한 것이었다면 그 책임을 진 이경석은 스승 김집을 비롯 그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거나 다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경석에 대해 "오랑캐에게 구차하게 무릎 끓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잘 살았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2) 군사보단 백성을
다음은 이런 군비에 대한 신하들의 태도입니다. 맨 위에 인용한 말들을 보면 거의 전부가 그에 대해 반대하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백성들을 먼저 생각할 때라는 거죠.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대동법을 계속 주장해 결국 성공시킨 김육부터 그런 주장을 했죠. 호란 때문에 나라가 쑥대밭이 된 게 얼마 전이었습니다. 청이 북경을 점령하고 도르곤이 죽고서야 청의 요구가 줄어들었고, 겨우 숨통 돌리게 된 거죠. 그런 상황에서 숙종 대까지 심심하면 가뭄이 덮쳤습니다. 우선은 피폐해진 나라를 복구하는 게 먼저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볼 경우 왜 북벌을 그리 강조했는지 의문입니다. 북벌이라는 단어가 금지어였던 그 때, 대신 꺼낸 명분이 "외적 방어"였습니다. 북벌보다 몇 단계나 낮았지만 호란 직후라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거였죠. 신하들은 이것조차도 반대한 거였습니다.

효종이 고려의 의복과 비교하며 조선의 갓과 옷이 너무 길고 높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신하의 말은 "고려가 오랑캐의 습속을 버리지 못 해서 그렇다"였고 사관의 평은 "상이 호복을 숭상해서"였죠. 효종이 시도한 개혁에 대한 신하들의 인식을 대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선두에는 북벌의 핵심 인물이었다던 송시열이 있었습니다. 하나만 더 얘기하고 그에 대한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3) 나선 정벌
시베리아에서 만주로 남하하려 했던 러시아는 청과 부딪히게 됩니다. 둘 사이에 계속 소규모 갈등이 계속되죠. 이에 청은 조선에 도움을 청하는데, 1654년이었습니다. 요구한 건 조총수 100명이었습니다. 북우후 변급이 뽑혀나가죠. 그가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데 300석을 실을 수 있는 크기의 대형선 13척과 소형선 26척이 있었으며 수는 400명 미만이었다고 했습니다. 조청연합군은 대선 20척, 소선 140척 등 1천 명 안팎이었죠. 다만 -_-; 이 대선이라는 놈이 17명 정도 탈 수 있는 배였고, 소선은 그저 나룻배 수준이었습니다. 청이 러시아군에 밀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죠. 러시아군도 주변 부락을 약탈해서 급조한 배였습니다만, 그 정도에도 밀린 거였습니다. 변급은 방패를 만들어 적의 총격을 막고 공격했는데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군은 퇴각합니다.

그 다음 원정은 1658년이었습니다. 청은 러시아군의 근거지 근처까지 갔다가 패해서 후퇴한 상황이었죠. 이 때 요구한 병력은 조총수 200명 등을 포함한 260명이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동원되는 군량도 조선이 책임져야 했다는 것이죠. 청은 자기들이 쓸 군량도 지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효종은 반대했지만, 그게 쉬워야죠. 이번엔 우후 신유가 뽑힙니다.

이 때 러시아군은 대선 11척 에 병력 500정도였다고 합니다. 조청연합군은 총 52척에 2500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했죠. 여기서도 조선군의 활약은 돋보였습니다. 신유는 북정일기를 통해 이 상황을 잘 적고 있습니다. 양쪽이 대포로 싸우다가 접근해서 총을 쏘기 시작했는데 신유가 기회를 봐 집중곡격하자 적이 배 안으로 숨거나 배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늘 하던 것처럼 갈고리로 끌어들여 불지르려 하자 청의 사이호달이 전리품을 차지하려고 막죠. 이 과정에서 숨어 있던 적이 반격하면서 피해가 발생합니다. 결국 불화살을 쏘아 불태우죠. 신유는 11척 중 7척을 불태웠다고 적고 있는데, 러시아측의 보고서에는 도망간 게 단 한 척, 인원은 95명 뿐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조선군의 전사자는 7~8명에 부상자는 25명, 청은 1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습니다. 역시 지휘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는 전투죠.

화약 무기와 수전에 청이 약한 것도 컸겠지만, 조선군의 전투력이 어땠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전투였습니다. 그 때 청은 계속 패하고 있었는데 이 전투로 그나마 전황을 바꿀 수 있었겠죠. 하지만... 이 역시 북벌과 연관짓는 건 무리라고 봅니다.

먼저 효종은 이 원정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260명을 동원하는 데에도 군량 보급을 어려워했죠. 또 두 전투 모두 강에서 벌어진 것으로 조선군의 능력이 발휘되기엔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청과의 전투에 대한 노하우를 쌓을 순 없습니다. 쌍방의 병력도 합쳐야 수천 수준으로 대규모 정규전을 시험하기엔 역부족이었죠. 애초에 호란 때도, 그 후의 명나라 원정에도 소규모 조총수는 큰 활약을 했습니다. 그 능력이 더 두드러지게 드러났을 뿐이죠.

사이호달은 조선군의 활약을 보고 더 남아 주기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신유는 명령과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죠. 이를 보면 조선이 원한 것은 북벌에 대한 예비 훈련이 아닌 피해를 최소화하고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오는 거라고 봐야 될 겁니다.

WBC에서 우승했다고 한국이 야구 최강이라고 할 순 없죠. 조선군의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한 전투입니다만, 이것과 북벌을 연관지을 순 없습니다.

3. 송시열
효-현-숙종대를 대표할 사람으로 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송시열입니다. 그리고 북벌에 대한 얘기에서 송시열은 언제나 중심에 있죠. 현종 때에 효종의 북벌에 대해 조금씩 드러내던 그는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기해독대의 내용을 밝히며 아예 입에 달고 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의문이 듭니다.

송시열은 계속 벼슬을 거부했습니다. 신하들은 계속 송시열을 부르라 했고, 효종도 애타게 불렀죠. 그는 끝까지 거부하다가 9년이 되어서야 올라옵니다. 뭐 그렇게 벼슬 거부하는 게 그 시대 트렌드죠. 하지만... 효종이 북벌을 그렇게 주장했고 그가 함께 일 했다면, 그는 9년 동안 뭘 했던 걸까요? 김집이 죽은 후 그는 사실상 산당의 중심이었고, 효종과 현종이 신하들에게 받았던 압박은 상상 이상입니다. 송시열을 부르라, 송시열을 부르라 이런 식이었죠. 송시열이 애초에 올라왔고 효종의 군사에 대한 정책을 도왔다면 대신과 대관들이 군정에 대해 그렇게 반대할 리가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송시열이 효종에게 진언한 것은 다른 거였죠.

"지금부터는 성상께서 이 점에 깊이 유의하고 아울러 자신을 살피는 공부를 더하여 기뻐하고 노하는 데 따라 동요되지 않게 하여 신민으로 하여금 해처럼 사랑하고 하늘처럼 두려워하게 하소서."

송시열의 상소입니다. 이 때 송시열이 요구한 것은 "수신" 몸을 닦으라는 것으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거죠. 물론 그가 병사를 길러야 된다는 상소를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것에 대한 논의는 없다시피했고, 양반에게 군포를 징수해야 된다는 등 실질적인 정책에 대해서는 반대하거나 노코멘트였죠.

무엇보다 그들이 함께 했던 기간은 단 10개월이었습니다. 효종이 갑자기 죽었던 것도 있지만, 설사 효종이 오래 살았더라도 송시열이 북벌을 계속 외쳤을지는 의문입니다. 송시열이 북벌에 대해 얘기한 걸 보면요.

4. 효종의 사업
현종 초에 다시 낙향했던 그는 9년이 되어서야 올라옵니다. 그 때야 남인들이 슬슬 반격하기 시작하고 그를 싫어하는 쪽도 생길 때였지만, 여전히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죠. 현종이 침을 맞고 눈병이 좀 나아지자 약방 부제조 조형이 한 말입니다.

"성상의 증후가 갑자기 더하였을 때 뭇 신하치고 그 누가 허둥지둥 서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송시열은 현재 멀리 있으면서 우려만은 남보다 갑절이나 더할 것입니다. 만약 상께서, 병 중에 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하니 꼭 올라와 서로 보았으면 좋겠다고 유지를 내리시면 그 어찌 감동을 않겠습니까" (현종 1년 2월 12일)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올라오지 않던 그가, 효종 때처럼 9년이 되어서야 올라온 겁니다. 올라오자마자 한 얘기가 효종의 뜻을 이어야 한다는 거였죠. 이 때 대신들은 그를 중용해야 된다고 거듭 주장했고, 그 자신도 대 놓고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소용 없다"면서 압박했습니다. 현종은 이를 따르지 않았고 송시열은 다시 낙향합니다.

그가 효종과 독대한 것을 공개했을 때는 숙종 초,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때였습니다. 이 내용이 송자대전에 있는데, 효종의 뜻이 잘 드러나 있긴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송시열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효종이 북벌에 뜻을 품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유일한 사료입니다.

숙종 때 그는 심심할 때마다 북벌 얘기를 꺼냈죠. 경신환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는 북벌 상소를 가장 먼저 올렸습니다. 하지만 숙종 때는 윤휴가 이미 북벌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조정의 모든 정책을 북벌을 위해서 추진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거부당하고, 같은 남인들도 그에게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서인들 역시 이를 반대하고, 심심할 때마다 병력을 줄이자고 건의하죠. 그렇다면 송시열이 숙종 대에 북벌에 대해 주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북벌"의 정통성이 효종과 함께 했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효종 = 북벌이라는 공식을 만든 것은 송시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모습들을 찾아 보면 그가 북벌에 적극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의 정치생명이 위험해지면서 효종과 함께 계속 드러냈다고 봐야겠죠.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며, 사업은 마땅히 효묘(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을 주로 삼을 것이다."

그가 사약을 받으며 남긴 유언입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효종이라는 대의를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후, 그는 송자(子)가 됩니다.

5. 효종
그렇다면 송시열이 그렇게 떠받들었던 효종은 어땠을까요?

북벌로 인해 강인한 이미지를 가진 효종이지만, 그의 시대는 군약신강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뜻에 마르면 왕명조차도 지체될 수준이었죠. 효종은 이를 견제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특히 송시열에 대해서는 찰진 애정이나 다름 없는(-_-) 신뢰를 보여주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소현세자 대신 왕위에 올랐고,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으니까요. 소현세자의 비 강빈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면 인조와 다름 없는 광기가 느껴집니다. 그는 강빈에 대해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역모로 다스렸죠. 송시열 등 산당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 것 역시 "내 조정에서 벼슬하고 싶어하지 않아서"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산당들은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었고, 나라를 운영함에 있어서 이들을 절대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효종이 선택한 것은 이들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거였죠. 이 점에 있어서 북벌은 최고의 카드였습니다. 명의 복수를 원하며 대의를 지키자는 이들에게 북벌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이었거든요. 친청행보를 보였던 소현세자가 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던 송시열이 9년에 올라온 것은 그걸 더 이상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봐도 되겠죠. 정작 올라온 그는 북벌 대신 수신을 계속 요구하지만, 효종은 화를 내기는커녕 "니들이 없어서 나라가 이렇게 됐다" "그건 니가 나를 시험하는 거다"고 하면서 계속 끌어들입니다. 결국 효종의 정통성을 해소해 줄 명분이 "북벌"이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효종이 죽은 후에는 반대로 송시열이 이 명분을 이용한 거죠.

그렇다고 북벌에 대해 아예 무시할 수 없는 게, 효종이 확실히 군제를 개혁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대신, 대간들이 병력을 늘리는 걸 계속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꿋꿋이 밀어붙였죠. "북벌"이라는 명분 하에서 이들이 그릇돼 보이지만, 그걸 빼고 본다면 이게 영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현대에도 북벌이라는 이상에 사로잡혀서 복구할 생각은 안 하고 백성들 더 고생시켰다는 평가가 나오는 판이니까요.

그렇다면 효종이 한 일에서 "북벌"이라는 명분을 뺀다면 어떨까요?

어쨌든 나라가 한 번 무너졌던 상황에서 군비를 튼튼히 하는 건 필요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반대에 부딪혔죠. 여기에 북벌이라는 목표가 끼어든다면? 특히 송시열을 대표로 한 산당들은 반대할 명분이 부족해집니다. 오히려 이에 따라야 그들이 말하는 대의에 맞죠. 그리고 북벌을 단지 명분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확실히 문약한 조선을 바꾸려 했던 개혁가의 모습이 됩니다. 그렇다면 효종 말의 기해독대는 효종이 자신의 심복인 송시열과 북벌에 대해 비밀 회의를 한 것이 아닌, 군사 개혁에 반대하는 송시열을 북벌이라는 명분으로 끌어들여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개혁에 동참하게 하려 한 것으로 봐야겠죠.

이런 점에서 "효종은 북벌이라는 이상을 내세워 문약한 조선을 개혁하려 한 현실적인 군주"라는 평은 옳다고 봅니다.

그가 정말 북벌을 꿈꿨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목표라는 게 하나만 되리라 법은 없으니까요. 실제 그가 더 살아 있었다면 초기에 쌓아 올린 것을 통해 그 후에 북벌을 꿈 꿀 정도의 병력을 양성했을지도 모르죠. 송시열의 말에 따르면 그가 목표로 한 건 10년이었습니다. 그가 그 중 단 1년도 채우지 못 한 걸 생각한다면, 그의 진심에 대한 확언은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북벌은 가능하지 못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에 가려 주목을 못 받는 현종이지만, 그 역시 효종의 사업을 충실히 계승했습니다. 몸이 안 좋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하지만 대신들은 여전히 이에 반대했고, 숙종 대까지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효종은 훈련도감 1만명, 어영청 2만명 등으로 크게 늘리려 했지만 죽기 전까지도 절반도 미치지 못 했습니다. 이마저도 신하들이 반대했죠. 현종이 이를 잘 계승하고, 신하들도 여기에 힘을 더 했다면 효종의 목표에 어느 정도 이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현실은 그 반대였고, 그 중심은 송시열이 이끄는 산당이었죠.

숙종 초에는 윤휴가 아예 "북벌"이라는 말을 대 놓고 외칩니다. 삼번의 난으로 청이 혼란하다는 배경도 확실했죠. 하지만 이 때도 서인은 물론 청남, 탁남으로 날린 남인들도 비현실적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이게 구체적으로 논의된 북벌의 유일한 사례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송시열은 효종의 사업을 계승하자고 하면서도 서인들은 병력을 늘리는 걸 최대한 막았습니다.

결론을 얘기하면, 효종부터 현종까지도 실제 북벌을 꿈 꿨어도 사대부들의 반대로 불가능했을 거라는 거죠. 청에서 놀릴 정도로 조선은 군약신강의 사회였고,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만든 건 효종이었습니다.

그가 정말 북벌을 꿈 꿨다는 생각을 하고 이완을 보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이완에 대해 "효종의 뜻과 함께 한 유일한 신하"라는 평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게 맞다면... 효종은 정말 외로운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송가대전에 나오는 "조총수 5만으로 북경 정벅" 운운 하는 것과 달리 송시열이 따로 숙종에게 상소한 내용이 실록에 있습니다. 거기서도 효종과 독대한 얘기를 적었는데, 상당히 현실적인 얘기들로 이루어져 있죠. 주로 군제 개혁에 대한 모습입니다. 뭔가 피 끓는 이상적인 얘기로 가득 찬 송가대전에 나온 "독대의 모습"과 실록에 나온 현실적인 개혁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독대의 모습", 이 둘을 합치면 효종이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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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게 정말 힘들었던 편입니다. 원래는 확실히 결론을 내지 않으려 했는데, 일단 제 생각에도 이게 맞는 것 같네요.

다음 편은 "역사는 흐른다"입니다. 할 얘기는 다 했으니 정리하면서... 후일담이나 써 볼 생각입니다. 이렇게 또 하나가 끝나 가네요.

하필 한국 문명이 제 생일날 나오다니 묘하네요. 최고의 혹은 최악의 생일 선물인 걸까요. 그래도 절대 안 살 겁니다. -_-; 기념으로 세종대왕 특별편이나 하나 써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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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11/08/10 02:5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세종대왕 특별편과 함께 송시열편도 좀... ^^;
11/08/10 03:03
수정 아이콘
와우! 고기덕후님 써주세요!!!
무리수마자용
11/08/10 05:30
수정 아이콘
문명은 특히 역덕에 치명적입니다 조심하시고요 간단하게 토탈워정도나 삼국지11정도 하면서 달래시길 바랍니디 [m]
11/08/10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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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특별편 써주신다면야... 크크
호떡집
11/08/10 14:48
수정 아이콘
미리 생일 축하드립니다.

열심히 써주셨는데 죄송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편은 단숨에 이해가 안되서 스크랩 해두고 녹차우리듯 반복해서 읽어봐야겠네요.

효현종 시대의 카리스마 송시열을 깔끔하게 킬해버린 숙종이 왠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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