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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7/02 10:50:20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남한산성 - 6. 정묘호란의 시작


장만은 도원수가 된 직후 변방의 상황을 보고합니다. 거기에는 모문룡이 심심하면 병력을 출동시켜 포를 쏘고 기세를 돋군다고 했죠. 그 외롭고 약함이 눈에 보이는데 말로는 큰소리 쳐서 "조선이랑 연합해서 요동에 들어가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장만은 이에 대비해야 되는데 군량이 부족하다면서 지원을 강하게 요청합니다.

그 중 일부입니다.

"저 호랑(虎狼)같은 오랑캐가 노여움을 우리에게 옮겨 올 것이 뻔한 일입니다. 필시 군사를 나누어 우리를 침입하여 자기들의 후면을 치려는 계책을 끊어버리려 할 것입니다."

1. 미봉책
이괄의 난이 끝난 후, 조정은 잘 싸운 자에게 포상하고 죄 있는 이들을 벌 주며 관서의 백성 및 군사들을 달래기에 힘 씁니다. 이 때 공신으로 임명된 게 장만, 정충신 등 27명이죠. 또한 수도방비를 철저히 할 것을 명하죠. 이 때부터 남한 산성의 축조가 시작됩니다. 그 이전부터 있기는 했던 모양이고 유사시 충청도 병사들이 주둔하기로 돼 있었죠. 이후에 보면 유사시 수도권에서 바로 2만을 뽑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한 모양인데, 따져보면 유일하게 잘 한 거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고찰해 볼 점이 있습니다. 이괄의 난 이후에는 일관적으로 군량이 부족해서 병력을 줄여야 되고 남쪽의 병력을 올려보내지 말고 유사시에 동원한다는 거였죠. (이건 이전 글에서 장만을 도원수로 삼을 때부터 한 말이었구요) 그런데 인조는 첫 해에 대대적으로 병력을 북방으로 올렸습니다. 이괄이 부원수로 갈 때 이끌고 간 병력이 1만 5천이었고 하삼도에서 끌어올린 병력이 6천이 좀 넘는데 이건 이괄의 병력에 포함돼 있지 않은 듯 합니다. 이전 글에서 적었듯 명분은 모문룡과 합세해서 때를 보아 요동으로 진격하기 위함이었고, 그 때까지는 병력을 늘려 수비를 굳힌다는 거였죠.
말이 뭔가 다릅니다. 일단 전 이 기사에서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요즘 5∼6년 동안 남쪽의 군사를 징발하여 멀리 서쪽 변방을 방수(防戌)하게 하였으므로 나라 안이 소란해지고 백성의 힘이 소진되어, 적이 오기도 전에 나라가 먼저 피폐해졌습니다. 따라서 올해 묘당이 의논을 정하여 남쪽의 군사를 징발하지 않기로 한 것은 참으로 좋은 계책이었습니다" (24년 9월 1일)

광해군이 문제가 됐던 것은 병력을 올리라는 명령에 반대한 거였죠. 하지만 이 기사의 어감은 그 동안 계속 병력을 올려보냈다는 것입니다. 일단 심하 전투 이후로 남쪽에서 병력을 올려서 부족한 병력을 채웠다고는 하지만, 그건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죠. 애초에 각 도에서 삼천명 정도씩 고르게 뽑았으니 북방의 병력이 부족하다 해야 수천 정도. 이걸로 저런 말이 나왔을 것 같진 않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인조 1년, 23년에 뽑아 올렸던 수준을 광해군이 계속 했던 게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전 글에서 언급했듯 중국은 조선을 다시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조선 단독으로 치게 할 궁리까지 하고 있었죠. 광해군이 반대했던 건 이거라는 거죠. 실록에서 이렇게 광해군이 병력을 올려보낸 부분은 일부러 누락시킨 것 같습니다. 반면 인조는 이걸 대대적으로 강조하면서 이괄에게 더 많은 병력을 주어 보냈구요. 친정까지 할 것 같던 인조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이와는 다른 일 때문입니다.

24년 3월 15일, 북경에 갔던 이경전, 윤훤은 마침내 중국의 논의가 타결되었다고 전했습니다. 마침내 황제가 인조의 책봉을 결정했고, 다만 바다를 건너야 돼서 오려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고 했죠. 인조가 노리던 것은 이거였죠. 병력을 보낸다, 요동을 수복한다 외친 이유입니다.

후금을 괜히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은 광해군도 인조도 인조 대의 신하들도 다 공감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문제가 된 것은 황제의 명을 듣고 후금을 아래로 대하는, 전통적인 사대교린에 대한 것이었다고 봐야죠. 인조는 명에서 자기를 긍정적으로 여기게 되자 곧바로 후금을 건드리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거구요. 24년에도 전년처럼 북치고 장구치고 홍보하진 않았어도 "평소처럼" 보내려고 한 모양입니다만 수많은 반대에 부닥치네요.

아무튼 광해군이 명에 그렇게 까칠하게 군 이유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모문룡이었죠.

2. 모문룡의 전횡
모문룡의 요구는 일정한 지역을 둔전할 수 있게 내 달라, 은이 있으니 무역하자, 배 고프니 밥 도 뭐 이런 거였습니다. 그의 요구는 실록에서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말투도 변해서 나중에 가면 그냥 협박 수준이었죠. 가도를 비롯 평안도에 산재한 요민들은 수십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계속 중국으로 보내기 위해 광해군 때도 인조 때도 노력했지만, 배로 보내는 건 역부족이었죠. 한 해 조정 예산의 1/3을 보낸 해도 있다고 하며 흉년 때문에 공급을 줄이면 서해안에 상륙해서 마구 약탈해 갔다고 합니다. 그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조 26년 8월에 이미 15만 석 넘게 줬다고 하네요. 인조 초기의 6만석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아진 양이었습니다.

+) 8월까지 15만석, 그리고 겨울에 또 2만석을 더 준 모양입니다. 가을에는 추수하니까 안 줬는지 몰라도 대체 얼마나 퍼 준 걸까요 -_-;

당시 의주 부윤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완은 이 때문에 명 장수 하나를 잡아서 곤장을 쳤을 정도였죠.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계속 요동 수복을 외쳤다는 거죠. 실제 26년에는 안산역과 사르후까지 치고 빠지면서 후금에게도 골칫거리가 돼 버립니다. 그런데 이 때 조선과 함께 요동을 수복할 거라며 동네방네 소리치고 다니고 실제 조선에도 병력이나 길잡이를 요구하죠. 인조는 보내더라도 명군 옷을 입혀 보내라고 합니다. 당시 후금은 영원성에서 패했고, 몇 달 후 누르하치는 실의에 빠져 죽은 상황이었습니다. 한 명의 카리스마에 의해 세워진 나라는 그 카리스마가 없어지면 위험해지죠. 안 그래도 명 외에도 남쪽의 조선, 북쪽의 몽고가 있었고 내부도 조선인, 한인은 물론 항복한 다른 여진인들까지 섞여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인구와 농경기술이 부족한 후금에게 그들의 존재는 필수적이었죠. 모문룡의 능력과는 별개로 그의 존재는 후금 내부의 한인들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했구요.

평안도는 요민들의 횡포에 백성들이 도망치고 수령들은 그것을 막지 못 했습니다. 광해군 정권에서 병사 한 명도 안 보낸다면서 욕 했던 모문룡은 이번에는 평안도의 병력이 8만이라면서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다고 명에 보고해 버립니다. 물론 말은 뻥뻥 치면서 밀무역과 조선, 명 사이에서 뜯은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살고 있었죠. 인조는 이것 때문에 한탄하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 합니다. 그의 책봉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으니까요. 후금도 몇 차례 소규모 병력을 보내 이 곳의 요민과 모문룡의 병력을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사실상 이 시기 청천강 이북에 조선의 영향력은 없었습니다.

3. 이괄의 그림자
정묘호란 전에 이미 조선의 정예병력은 두 번이나 큰 타격을 받습니다. 첫번째는 심하 전투, 만 명이 넘는 병력이 돌아오지 못 했고 그 중 최소 오천은 조선이 애지중지 키운 조총병이었습니다. 특히 평안도의 피해가 컸다고 하며 이를 채우는 과정에서도 많은 잡음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이괄의 난이죠.

24년 3월부터 북방의 병력들이 크게 줄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전사자도 그렇지만 도망친 자들이 많아서 남은 병력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죠. 군기와 물자는 바닥나고, 군기는 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문제는 조정이 이에 대한 문제점을 자각했으면서도 고치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것이죠.

오히려 조정에서 궁리한 것은 수도 방위였습니다. 인조 정권 초기에는 중앙군의 수는 65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괄의 난 이후에 그 수는 급증해서 500명이던 호위청과 260명이던 어영청을 각기 1000명으로 증강하고 경기도의 병력도 증강해서 총융청으로 통합합니다. 유사시 경기 북부를 맡는 병력으로 그 병력은 이만에서 이만 오천에 달했다고 하죠. 남한산성 축조도 이 때 시작됩니다. 뭐 이것 자체야 잘 한 거고 그 효과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서북면에는 병력 확충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죠. 만 명도 안 되었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한민족전쟁사에서는 팔천오백으로 설명하고 있네요) 이게 이괄의 난 직후부터 정묘호란 반년 전까지 계속됩니다. 군량 부족, 병력 부족 등으로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인조부터가 지방군을 키우는 걸 원하지 않았다고 봐야겠죠. 이괄의 난 이후 기찰이 강화됩니다. 의심가는 자를 감시하는 거였죠. 특히 군권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더 했습니다. 무관들은 훈련도 최대한 기피하면서 몸을 숙이고 지냈죠. 정묘호란 당시 남이흥은 안주성에서 전사했는데, 그 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조정에서는 내가 마음대로 군사들을 훈련시키거나 기르지 못 하게 만들었다. 강한 적을 대적하게 되었으니 죽는 것은 내 직분이나 다만 그것이 한으로 남는다."

남이흥은 무관들을 기찰하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고 하는데 그 역시 무관이자 평안도 병사로 있던 자, 그 역시 기찰을 피해갈 순 없었습니다. 의심할까 두려워 단 한 번도 훈련을 하지 못 했다고 하네요.

26년 8월, 모문룡에 대한 의심과 걱정이 짙어져 가고 후금의 동태도 심상치 않다는 걸 알게 된 조정은 특별히 하삼도의 병력 오천과 훈련도감 병력 250명을 뽑아서 북으로 보냅니다. 11월에는 함경남도의 병력 이천도 추가로 투입하고 나머지 병력도 항시 대기하게 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해서 서북면에 갖춰진 병력은 만육천명이었습니다.



4. 홍타이지의 등장
26년 2월, 누르하치는 영원성을 공격하다 패배합니다. 명 최후의 명장이라 할만한 원숭환의 활약이었죠. 산해관을 맡게 된 그는 영원성의 가치를 깨닫고 진을 옮겼고, 방어에 성공한 것입니다.

"25세부터 정벌에 나선 이래로 싸움에 이기지 못 한 것이 없고 공격하여 굴복시키지 않은 일이 없었다. 오직 영원성 하나만은 함락시키지 못 하는가.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만주와 요동을 떠들썩하게 했던 누르하치는 그 해 8월 11일 사망합니다. 향년 67세였죠. 특이하게 그는 과두정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장자 상속을 부정하고 팔기로 하여금 능력자를 선출하게 한 것이죠. 뭐 청의 역사가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았습니다만, 주색과 탐오를 망국의 절대적인 원인으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대단한 인물이긴 했던 모양입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였습니다. 조선에 온건했던 누르하치와는 달리 홍타이지는 시종일관 조선에 강경한 주장을 했죠. 심하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들을 다 죽이자고 하거나 명나라를 치기에 앞서 조선부터 치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왕이 되었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전통적인 약탈 민족 만주족이 조선을 칠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홍타이지부터는 확실하게 자신들을 만주족이라 칭합니다)
1) 우선 명에게 큰 패배를 입었기에 조선, 몽고, 후금에 속한 한인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화풀이죠.
2) 모문룡의 활약이 한창이었던 건 딱 이 시점이었습니다. 후금의 영향력이 줄어들 무렵에 여기저기를 찌르면서 후금 내의 한인들을 동요시켰죠. 소규모 병력으로 찌르는 건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뒤를 확실히 정리해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3) 그리고 모문룡의 병력을 조선이 확실히 후원하고 있었죠. 조선이야 아니라고 하더라도 모문룡에게 식량을 주는 곳도 조선이요 모문룡이 활동하는 곳도 조선이었습니다.
4) 그런 상황에서 후금은 영토가 급격히 늘어나는 반면 생산량은 거기에 따라주지 못 했습니다. 주로 곡물을 얻던 명과의 교역이 끊기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문제는 심화됐죠. 곡물을 얻고 교역을 할 상대가 필요했습니다. 줄이면 삥 뜯을 상대가 필요했던 거죠. 마침 25, 26년동안 만주에 대기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17세기의 소빙하기와 연관짓기도 하네요.
5) 이런 이유들과 홍타이지의 성향이 맞물리면 결과야 간단하죠. 어쨌든 조선은 확실히 배금을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들에게는 최고의 네비게이션이 있었습니다. 이괄의 난의 주동자 중 하나였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었죠. 한윤 역시 역모에 몰려 죽을 목숨이었고 반란이 실패하자 강을 건너 투항한 인물입니다. 그의 주장은 이랬습니다.

"모문룡은 오합지졸이고 그 곳에는 재화가 많으며, 의주를 잡으면 안주도 무너진다."
"광해군 때는 사절이 끊이지 않았는데 새 임금은 모문룡을 믿고 사자를 보내지 않는다."
"지금 화의의 글을 보낸 다음 군사를 평양에 진주시켜 항복을 권하면 응할 것이다. 새 임금은 인심을 잃었고 백성들은 먼저 임금을 그리워한다."
"우리 아버지와 이괄이 겨우 3천명을 거느리고 서울을 빼앗았는데 새 임금을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대금국의 칸이 조선관원을 거느리고 왔다고 하면 누가 항복하지 않겠는가."

광해군을 쫓아냈다는 결정적인 명분이 여기서 나온 것이죠. 거기다 한윤이 혼자 항복했을 리가 없죠. 그들은 서북면에서 근무했던 이들로 조선의 지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들은 이미 겨우 만이천의 병력으로 한양을 털었던 자들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GPS는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이전에 항복한 강홍립, 박난영 등이 있었고 역시 조선 출신으로 명군이었다가 항복한 유해도 있었습니다. (유해에 대해서는 나중에 할 말이 더 있겠네요) 그리고 그들 자신부터가 몇백년간 심심하면 강을 건너가 약탈하던 곳이 조선이었고, 조선이 강할 때는 고개를 숙여서 한양까지 가서 조공을 바치고 그 가족들을 인질로 보내던 곳이 조선이었습니다. 일본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들은 지리에 너무나도 익숙했고, 조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죠.

5. 전쟁의 시작
이제까지 다루었듯 후금이 쳐들어 올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인조 정권은 모문룡을 제어하지 못 했고, 후금과의 사신 교환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누르하치가 죽었다는 말도 조선 스스로의 첩보나 후금과의 외교가 아닌 모문룡에게서 들은 것이죠. 그 외에 후금에서 도망친 이들도 전했다고는 하지만요. 인조는 그저 막연하게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서북면에 병력을 증원하기를 꺼렸습니다. 양반에게도 군역을 책임지게 하자거나 공신 및 왕족의 재산을 줄여야 된다느니 하는 논의가 있었지만 모두 무시되었고, 전쟁 직전에는 낙방한 학생들에게 군역을 부가해야 된다는 얘기가 계속 오갔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적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 했습니다.

1627년 1월 17일, 조정에는 급보가 도착합니다.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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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실컷 하고 정작 전쟁은 들어가지도 못 했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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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떡집
11/07/02 12:00
수정 아이콘
드디어 m으로 가는 첫걸음이 시작되었군요.

홍타이지 말고 다른 왕자가 즉위했으면 하는 가정은 무의미하겠죠. 제일 유능해서 뽑힌 걸테니...

병력 확충을 제대로 하지 않고, 정보를 경시했으며, 보급도 제대로 못해 남한산성 안에 식량이 부족했으니,

패배의 조건이 모두 모였네요.

답이 없네요. 이성계라도 불러와야 하려나요...
물여우
11/07/02 12:39
수정 아이콘
북방의 이순신 장군은 없었던 것일까요..
상황을 보니 이순신 장군이 있었어도 뭔가 해볼만한 여건이 아니라서 힘들어 보입니다만...암울한 파트의 시작이네요.
무리수마자용
11/07/02 14:24
수정 아이콘
캡도어드래곤 이녀석이 육할은 원인제공을 했군요 ㅡㅡ 이괄도 몫이 있구요 저렇게 데였는데 지방에 군대 놔두기가 저라도 껄끄러웁니다
그리고 인조는 왕이 될 수업이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왕이 되어서 나오는 문제점이 좀 느껴집니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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