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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5/24 12:03:14
Name 눈시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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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정유재란 - 10. 꿈의 끝




퇴원이 늦어지네요. 잘 하면 내일 내지 모레 퇴원할 듯 싶습니다. 가기 전에 하나 더 올리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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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슬로 와서 이슬처럼 가는
9월 15일. 경상우병사 정기룡의 장계까 올라옵니다. 지리산 근처에 나타난 적 10여 급을 베었다는 보고부터 시작한 후, 적에게 붙었다가 돌아온 자들이 말하기를 "관백이 이미 죽었고 어린 자식이 즉위는 하였으나 모두 그 자리를 빼앗을 계획을 하여 현재 철수하여 돌아가려고 한다. 10일에서 15일 사이에 철수하여 돌아갈 것을 결정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전쟁의 이유가 사라진 것이고, 조선과 명 역시 적의 괴수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 이전에도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8월 5일에는 탈출했던 포로 정성근이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보고를 하기도 했고, 경상좌병사 성윤문, 경상관찰사 정경세 등이 히데요시가 죽었다느니 중태라느니 하는 소문을 보고합니다. 아예 헛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 이 때 히데요시의 목숨은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3월 15일, 히데요시는 교토의 다이고라는 절에서 꽃구경을 합니다. 이 날 강 공가와 무가들이 조선에서 약탈한 보물과 기타 지역의 물품들을 진상하였고, 이것이 봉래산처럼 쌓였다고 합니다. 꽤나 즐거웠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행보였습니다.

7월까지 그의 병은 심해지기만 했고, 15일 다이고지에서는 기도제를 올렸습니다. 이 날 세이쇼는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 서약문을 거대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보입니다. 이 둘에 이어 다른 다이묘들 역시 충성을 서약하죠. 25일에는 궁중의 사람들과 공경대부, 다이묘들에게 유산을 배분하죠. 둘 다 죽음에 대비한 조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6월 27일에 조선 왕이 그냥 사과만 하면 전쟁 끝내주겠다고 가토 기요마사에게 전한 걸 보면 대체 뭐라고 해야 될 지 모르겠습니다. -_-a

8월 5일에는 오대로, 오봉행에게 유언을 내리고 17일에 오봉행은 유언비어를 강력히 다스리겠다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마침내 히데요시는 눈을 감습니다.

히데요시의 죽음에 대해서는 요즘 많이 들어 온 전국시대 관련 매체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저 원숭이 한 마리의 죽음일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결국 전국을 통일했던 이의 죽음이요, 가장 개성적이었던 인물의 죽음이며, 또 다른 혼란의 시작과 함께 전국시대의 마지막 장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죠.

맨 첫 부분에 얘기했듯 그는 정말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처세술과 그 누구보다 백성들과 가까웠던 부분은 에도 시대부터 더욱 꾸며졌죠. 맨 밑에서 일어나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던 천하인, 초라했던 마지막 모습조차도 그 누구보다도 인간다웠다는 찬양을 받기도 하죠.

임진왜란에서 그가 보여 준 모습 역시 그냥 노망으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특히 화의가 깨지고 정유재란에서 보여 준 너무나도 현실적인 모습은 이전에 내밀었던 음모론, 강화 회담은 그저 시간
끌기 뿐이었고 자기 요구가 통하지 않은 것을 모른 척 한 것 역시 재침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 더 다가오는 부분이죠. 이를 갈 수밖에 없는 인간 재해만 없었다면 그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고, 그 후에도 울산성 전투 이외에 조명연합군이 함부로 들어오기 어려울 정도로 일본군은 강력했고, 왜성은 장기전을 대비해서 견고했습니다. 하삼도 점령이라는 목표와 그에 따른 군사 작전은 죽기 직전까지도 전략적인 사고를 했다는 것을 말 해 줍니다.

뭐, 그래도 너무 명분에 집착해서 10만이 넘는 병력을, 그것도 알토란 같은 자기 병력을 그렇게 축소시킨 것은 이해가 안 가지만요. 히데요시에 대해 말 하려면 그걸로도 글 몇 개가 더 필요할 테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것일 겁니다. 그게 노망이었든, 신의 한 수였든 그 피해자는 우리였다는 거죠. 그렇다고 그 한 때문에 단순히 노망으로 치부해서도 안 됩니다.

이슬로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나의 몸인가. 나니와(오사카)의 영화도 꿈 속의 꿈인가

히데요시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심유경이 몸에 좋은 환약을 먹는 척 해서 독약을 히데요시와 나눠 먹었고, 자기는 숙소로 돌아가 해독제를 먹어서 자기는 낫고 히데요시는 천천히 죽어갔다는 음모론이 있는데... 심유경의 죽음과 히데요시의 죽음까지의 기간을 생각하면 그저 한 편의 음모론이라고 봐야겠죠.

2. 진군
히데요시의 죽음 직후, 오대로와 오봉행은 명과의 평화조약을 맺은 후 전면 철수할 것을 명령합니다. 히데요시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말은 없고 오히려 나아지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지만 이미 조선에 있던 장수들 역시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런 전면 철군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명군 역시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기다리던 사로병진이 마침내 시작된 것은 이것 때문이라고 봐야겠죠. 그렇게 한 9월 20일쯤부터 신나는 진격이 담겨 있나 싶더니만... 딴 얘기가 있네요 -_-;

이 때 양호는 울산성 전투에서 완전 대승을 거뒀다고 보고를 했다가 탄핵당합니다. 그런데... 조선이 이를 돕다가 구라치고 있다고 모함까지 당하죠. -_-; 이걸 변명하기 위해 명으로 진주사를 보냈는데 여기서 류성룡이 가기를 거부해서 영의정에서 잘리기도 합니다. 이해가 안 되진 않는 게, 이 때 류성룡은 악성 치질에 시달리고 있었거든요. 한창 중요한 시즌에... 실록에는 이렇게 선조의 누명을 벗겨내기 위한 왕과 대신들의 논의로 뒤덮여 있습니다. -_-; 양원 때도 그랬는데 참 잘 하는 짓이네요. 도주죄로 참수당한 양원의 목이 10월 8일에 본보기를 위해 조선에 도착하는데, 정작 얘네들은 제사지내 주자고 합니다. 자알 하는 짓입니다.

각설하고, 9월 7일 한 번 크게 편제를 나눈 조명연합군은 17일부터 점차 진군을 시작합니다. 대외적으로 퍼뜨린 말 20만, 기존 계획상 14만, 실제로는 10만인 사로병진 계획이 마침내 시작된 것이죠.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초라했습니다.
마귀의 경우 18일 경주에서 동래로 전진한 후 약간의 적을 잡고 20일 한의 땅-_-; 울산 도산성에 도착합니다. 난중잡록에서는 이를 두고 "적의 형세는 배나 성하여 계책을 쓸 수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아주 독을 품고 제대로 성을 완공시킨 모양입니다. 결국 27일 마귀는 철수하고 권응수는 "단지 외책을 불살랐을 뿐"이라고 하면서 계속 공격을 해도 적이 나오지 않고 조총을 쏴서 명군의 피해가 심하고 성이 너무 견고해서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는 것을 보고합니다.

실록의 10월 20일자를 보면 10월 4일 마귀가 경주로 완전히 철수했고 이후의 계획을 어떻게 할 것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동로는 이렇게 별다른 전투도 해 보지 못 하고 끝납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 때 항왜병 사야가가 울산왜성으로 들어가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하고 돌아오면서 조정에게서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정도일까요. 이는 실록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3. 귀석만자
18일 동일원은 삼가->진주로 진격하였고 선봉이 적 50여 급을 베는 성과를 거둡니다. 남은 적들은 사천의 본성으로 돌아가죠. 이후 순조롭게 진격하면서 28일에는 사천 구성을 공격하여 80명을 참획하자 적은 사천 신성으로 후퇴합니다. 이 과정에서 유격 노득공이 전사하기는 하지만 화려한 승전이었죠. 기세를 탄 동일원은 계속 남하하여 사천 본성에 도달합니다. 그야말로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죠. 10월 2일, 그는 "아침을 든든히 먹어라! 저녁은" 이 아니라 "저들을 전멸시키고 아침을 먹자!" 면서 아주 신나게 진군을 명 합니다.
화포가 하늘을 가르며 성문을 때리고, 성문이 열리고 전군이 돌격하려는 순간!

거대한 폭발음이 들립니다. -_-; 이게 화약이 실수로 폭발했다는 말이 있고 적이 화약을 묻어놨다가 터뜨렸다는 말이 있죠. 시마즈 가문 기록 정한록에서는 그저 조총으로 격퇴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한 번의 인해 중로군은 완전히 궤멸됩니다. 중국의 기록에는 3~4천, 시마즈 요시히로가 자랑하는 기록에는 무슨 조명연합군 전체를 잡았는지 사만에 가까운 기록을 적고 있지만 과장으로 보이고 실록에 있는 7~8천이 그나마 중간이네요. 뭐 중국 기록과 실록의 기록 중간 어디쯤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마즈 요시히로가 대군을 유인했고, 이를 격퇴했다는 것은 공통적이죠.

이로 인해 시마즈의 이름은 단숨에 가토급으로 올라갑니다. 중국식 음차 석만자에 귀신 귀자를 더한 귀석만자는 명군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며, 노량해전에서 잡은 왜장 목록에 들어갑니다. -_-;;

동일원은 품계상으로 정 1품으로 (이순신과 함께 -_-a) 조선에 온 무관 중 가장 직품이 높았습니다. 나름 프라이드도 있었고 잘 싸운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돼 버렸죠 뭐. 이후 시마즈 가문에서는 정한록을 쓰며 칠천량 해전 및 남원성 전투, 사천성 전투에 대해서 신나게 자랑하고 다녔다는군요.

4. 왜교성 수륙협공
유정은 18일에 곡성을 떠나 순천으로 향하는데, 여기서 길을 빙빙 돌았다고 합니다. 이 때 "배신 이하가 온갖 고생을 하며 그를 따랐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싸우기 싫어 일부러 천천히 간 냄새가 나네요. 한편 수로군은 왜교성 바로 앞인 유도를 점령, 수륙협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맞서 고니시는 늘 하던 것처럼 화의를 청했고, 유정은 이를 받아들이는 척 하며 함정을 준비합니다. 성 밖으로 나오게 한 뒤 양쪽에 매복을 둔 것이죠. 하지만 고니시도 잔뼈가 굵은 무장, 바로 경계해 버립니다. -_-; 이 과정에서 매복한 병력이 실수로 불화살 내지 화포를 쏴 버렸고, 고니시는 도주하죠. 이를 추격하면서 98급을 베었지만 명군 역시 많이 당했다고 하는군요. 뭐... 잔머리 굴려봤습니다만 남은 건 전면전 뿐이죠.

21일부터 22일까지 유정은 성을 공격하는 척 하다가 물러서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한편 수군은 성 코 앞까지 들이닥쳐 맹렬하게 공격을 가했죠. 유정은 22일을 끝으로 공성병기를 준비해야 된다며 공격을 멈추었고, 23일에는 신나게 함성을 지르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이 때 수군은 유격 계금이 총상을 입었고 10여 명이 전사합니다. 조선 수군 역시 지세포 만호와 옥포 만호가 총상을 입죠. 육군이 따라 주지 않는 수륙협공이 어떤지 잘 보여주는 결과였습니다. 이 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있던 다이묘 중 아리마 하루노부, 마쓰우라 시게우라 등 북규슈의 영주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의 수군과는 별도로 고니시에게 소속되거나 아예 고니시가 고용했을 수 있는 해전의 프로, 진짜 "왜구" 출신들이라고 합니다. 명량 후 붕괴된 일본 수군 대신에 이들이 어떻게든 바다를 지킨 것으로 보이며, 고니시가 그나마 버티기라도 한 것 역시 이들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뭐 그래봤자죠 -_-; 간간이 바다로 나와 결사항전을 벌이던 적들은 허무하게 당하죠.

이후 육군이 움직이지 않는 동안 수군도 유도에 머무는데, 27~28일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크게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어째요. 기다릴 수밖에. 나중에 군문 형개가 수군의 빠른 진격을 치하하기도 합니다.

10월 1일 재개된 공격은 3일까지 계속됩니다. 이 때 유정은 "독전하지도 철수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_-; 때문에 휘하 병력은 명령을 기다리다 지쳐 잠 들기도 했다고 하죠. 이 틈을 타서 적이 기습, 크게 피해를 받는데 여기서도 유정은 철수 명령을 내리지도 않는 이상한 지휘를 보입니다.
한편 수군은 사도첨사 황세득, 이청일이 전사하고 제포만호 주의수, 해남현감 류형 등이 부상당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반격은 정말 악착같았죠.

3일에는 계속되는 포격 끝에고니시의 막사를 포격하는 데 성공합니다. 적은 바다쪽으로 쏠렸고, 유정이 서쪽에서 공격하면 성을 점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여기서도 유정은 나서지 않습니다. 이 날 진린이 너무 독촉하는 바람에 썰물이 오자 명의 사선과 호선 각기 19, 20여 척이 갯벌 위에 갇혀 버립니다. -_-; 이들은 모두 불 타고 수백 명이 전사하죠. 조선 수군 역시 기록에 따라 세 척에서 일곱 척이 역시 갯벌에 갇혔는데 높고 견고해서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 했다고 합니다. 이순신이 책망 (명 수군만 버려뒀다는) 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올려놓았다는 말도 있죠. 이 날 안골포만호 우수가 적탄에 맞습니다.
4일에도 수군이 진격하여 마구 포를 쐈지만 적의 저항이 강력했고, 유정은 전혀 나갈 생각이 없어 돌아와야 했습니다. 열 받은 진린은 아예 유정에게 찾아가서 대장 깃발을 찢어버리고 욕 하죠. 다음 날에는 적이 아예 성 밖까지 진출해서 마구 조총을 쏴 댔지만 대응하지 못 할 정도였습니다.

6일에 사천성 전투의 결과가 유정에게 알려졌고, 유정은 퇴각을 명령합니다. 한 밤중에 급히 진을 물러 도망가는데, 남은 식량들이 모두 적의 손으로 갔다고 합니다.

5. 적을 놓아주려 하는가
이렇게 사로병진은 정말 허무하게, 정말 병진 같은 결과로 끝났습니다. 셋 중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적에게 겁이나마 준 것은 수군 뿐이었죠. 명의 장수들 역시 진린 말고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 했습니다. 매복에 걸렸다는 동일원이 잘나 보일 정도죠 -_-;
진린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것에는 유정에 대한 라이벌 의식과 이순신에 대한 흠모가 뒤섞여 있다고 합니다. 모르죠. 유정에게 가서 욕 한 게 이순신이 시킨 걸지도요 ( - -)

동일원과 유정이 도착한 직후에 작전이 시작되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히데요시의 죽음을 확신하고 작전을 시작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책마다 평가가 다르더군요. 어쨌든 그들은 히데요시가 오늘내일하는 걸 알고 있었고 적이 철수할 움직임을 보이자 그 뒤를 친다는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만한 생각으로는 일본과 상대하기 힘들죠.

일본군은 이후 줄기차게 강화를 제안합니다. 마지막 명령서는 적과 평화 교섭을 성공한 후 11월 중순까지 무사히 철수하라는 것이었으니까요. 명도 이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일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 울산성 전투 이후 다시 한 번 일본군의 강함을 알게 되었고, 적이 알아서 물러나겠다는데 마다하기 힘들긴 하겠죠. 약탈이니 강간이니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해도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을테니까요. 애초에 석성의 뒤를 이은 병부상서 형개는 싸우는 한편 화친하라고 하면서 명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려고 했죠.
선조 등 조선은 이 움직임을 포착하고 막으려고 하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의 강화회담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죠. 원수가 도망가는데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가슴만 치는 동안 각 방면의 지휘관들은 뇌물을 받고 적들을 돌려보내기로 합의합니다. 웃긴 건 이래놓고 나중에 재조지은을 강조하면서 그저 명의 장수들이 적의 꾀에 넘어간 것 뿐이라고 실드를 치죠.

조선에는 이걸 막을 의지는 있어도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것에 반대할 의지도 능력도 있었던 이는 단 한 명 뿐이었죠.

6. 마지막 출격
유정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합의는 정말 잘 진행되어서 명군과 일본군의 사적인 거래까지 진행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평화의 장이네요. 그리고 이 평화를 깨뜨리기 위해 일본군 최악의 재앙이 다시 등장합니다.

11월 8일. 이순신은 도독부를 방문해서 위로연을 베풀고 돌아옵니다. 이 때 좋게든 나쁘게든 설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있다 진린이 다시 찾아와서 "11일 사이에 철퇴한다는 기별이 육지에서 나왔으니, 빨리 진군해서 적들의 길을 끊어 막으라"는 말을 듣게 되죠. 진린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조명연합 수군은 급히 진군해서 10일에는 좌수영 앞바다에, 11일에는 유도에 도착합니다. 집에 갈 거라 생각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다시 퇴로가 막힌 것이죠. 13일에 적의 선봉이 후퇴를 위해 나타나지만 수군에 막혀 돌아가고 맙니다.

방법이야 하나였죠. 뇌물. 이 때 진린은 유정과 고니시 사이에 맺어진 강화를 몰랐다고 합니다. 한 달이 넘었는데도 몰랐다는 게 이상하긴 한데, 일단 진린은 그 대가로 순천성을 요구했지만 이미 유정에게 주겠다고 한 것을 물릴 수는 없었고, 고니시는 남해성을 제안했다고 하죠. 진린은 이를 거부합니다. 글쎄요... 진린이 정말 몰랐을까요 - -a

이후 뻔질나게 고니시의 사신이 진린의 배에 드나들었습니다. 돼지 두 마리와 술통 두 개를 줬다고 하지만 그것만 줬을까요. 16일까지 고니시의 진영에서 진린의 배로 드나드는 사자가 계속 왔다갔다 했죠. 17일에는 중선 한 척이 도망가길래 발포만호 소계남 등이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갔다가 적은 뭍으로 도망갔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들고 오다가 명군에게 뺏겨서 돌아옵니다. 군량을 실었다는 것으로 봐서 이것이 전령선인 것 같진 않지만, 진린은 구원을 청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과연 이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난중일기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네요. 그나마 유일하게 믿는 것이 진린에게 기대는 것인데, 그래도 잘 해 주던 진린이 이렇게 돼 버린 거죠.

그래도 답은 하나였죠. 18일, 남해의 적이 바다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를 듣게 됩니다. 이에 따라 조선 수군은 그들을 먼저 요격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적을 놓아주자고 했던 진린은 이번에는 군말 없이 따라 왔습니다.

내 저들을 베고 도성을 칠 여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적은 지금도 별 피해 없이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로 잡은 조선인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단 한 척이라도 더 잡아서 복수를 해야 했습니다.

행록에서는 18일 자정, 배 위로 올라가 손을 씻고 무릎을 끓은 후 하늘에 빌었다고 합니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그렇게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적이 다가오고 있는 노량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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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유재란은 단 한 편만 남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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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없어요
11/05/24 12:30
수정 아이콘
언제 올라오나 기다렸는데 드디어 올라왔군요.
다음이 마지막편이라니 엉엉 ㅠㅡㅠ
마지막편은 퇴원하시고 컨디션 좋을 때 올려주세요!!
11/05/24 13:59
수정 아이콘
히데요시가 인간적으로 어떤 인물이건 간에, 우리 입장에선 이순신 장군 말씀대로 그거 '고얀놈'일 뿐이죠.(먼산)
벤카슬러
11/05/24 20:59
수정 아이콘
몸도 성치 않으신데 글 쓰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Je ne sais quoi
11/05/24 22:36
수정 아이콘
어서 나으세요~~ 그래야 더 많이 쓰십니.... 후다닥~~
무리수마자용
11/05/25 05:15
수정 아이콘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읽는 순간 팔뚝에 닭살이 쫙!!!
구국강철대오
11/05/25 11:00
수정 아이콘
진린이 충무공을 대우했던건 워낙 명조에서 충무공을 우대 한 탓도 있지만 사실 실용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출동=공적인 수군의 상황에서 그저 충무공 옆에만 슬슬 따라다니면 출세가 보장이 되요! 이러니 이야 이야 할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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