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보실 때 단순히 전투가 벌어진 지역만이 아니라 어디까지 진출했는가를 따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2차 출동에서는 부산 사하
구에 있는 몰운대까지 갔었습니다. 부산포에서 코 앞이죠. 그런데도 적은 요격 시도도 못 했죠.
링크였지만 저번 편 bgm 생각하면 이번 편은 어떤 걸 할 지 대충 예상하셨겠죠. ^_^)
시작하겠습니다.
1. 2차 출동
다시 바다로 나갈 계획을 세운 건 6월 3일. 하지만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았죠. 5월 27일 원균에게서 급한 공문이 옵니다. 적선 10여척이 곤양으로 들이닥쳐서 노량으로 피했다는 내용이죠. 이억기를 기다릴 시간은 없었습니다. 급히 병력을 모아서 29일에 출전, 노량에서 원균을 만납니다. 전라좌수군 23척과 경상우수군 3척이 합친 26척의 연합 함대였습니다. -_-; 1차 때보다 적네요.
서로 의논을 하던 중 곤양에서 나온 적 한 척을 포착, 방답첨사 이순신과 남해 현령 기효근이 달려들어 불태워 버립니다. 연락선인지 싸울 생각은 않고 육지로 도망가 버렸죠. 그렇게 연합 함대는 사천으로 향합니다. 여기서 보이는 표현이 "누각과 같은 것" "대선"이라는 표현이 쓰이면서 비교적 큰 전선들이 투입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게 우리가 잘 아는 안택선, 아다케후네라고 봐야 될 지는 의문입니다. 안택선은 거의 대장선 용도로만 쓰였고,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과 맞서기 위해서 배를 크게 키우자! 하면서 계획했던 안택선도 겨우 20척 수준이었거든요. 이는 한산도 편에서 다시 쓰겠습니다.
"누각과 같은 배 12척"과 산 위에서 진을 치고 있는 400명, 장계에 기록돼 있는 적 수입니다. 붉고 흰 깃발들이 난잡했고 적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작전 지휘를 받는 것 같았다고 하죠.
하필 썰물이어서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나기도 힘들었죠. 그래서 일부러 적을 꾀어내는 쪽을 택합니다. 채 1리나 갔을까, 적은 뛰쳐 나옵니다. 통설로는 적들이 배를 타고 쫓아왔다고 하지만 장계에 기록된 거로는 그냥 산에서 내려와서 반은 배에 타고 반은 앞에서 신나게 좋아했다는군요. 어느 쪽이든, 이걸 본 이순신은 진격 명령을 내립니다. 마침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죠. 여기서 조선 수군의 비밀 병기가 출동합니다.
"그런데, 신이 일찌기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능히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하여 비록 적선 수백척 속에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이 있는 곳으로 돌진케 하여 먼저 천.지 현.황등 여러 종류의 총통을 쏘게 하자, 산위와 언덕 밑과 배를 지키는 세곳의 적들도 철환을 비오듯 난발하는데, 간혹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서 쏘고 있었습니다.
신은 더욱더 분하여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 바로 그 배를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일시에 운집하여 철환과 장편전. 피령전. 화전 및 천.지자 총통 등을 비바람같이 발사 하면서 저마다 힘을 다함에 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습니다. 왜적들은 부상을 당하여 엎어지는 자와 부축하여 달아나는 자의 수을 알 수 없었으며, 높은 언덕으로 도망쳐 진치고서는 감히 나와 싸울 생각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북선의 등장을 알리는 기록입니다. 겨우 나와서 붙어보려 했던 적들은 그 길로 도망가 버렸죠. 이렇게 적선 11척을 잡았습니다. 적은 멀리서 부르짖으며 발을 구르고 대성 통곡했다고 하죠. 이후 모자랑포, 현대의 삼천포-_-;에서 하루를 묵습니다.
6월 1일, 원균이 "어제 남겨 둔 적선이 도망쳤는지 확인해 볼 겸 죽은 왜놈 목 베고 오겠다"고 해서 허락합니다. 두 척을 일부러 남겨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당포 해전에서 보이듯 적이 배를 타고 도망갈 때 바다에서 붙잡으려고 한 걸로 보입니다. 육지로 도망가면 잡을 수 없으니까요. 아무튼 원균은 돌아와서 "육지로 도망가서 빈 배 불태우고 죽은 놈 목 세 개만 가져옴"이라고 해서 고성 땅 사량까지 간 다음에 밤을 지냈죠.
일단 출동의 원인이 된 사천의 적을 없앤 상황, 조선 수군은 1차 출동 때처럼 Search and Destroy를 가동합니다. 수색섬멸전이죠. 아마 화포 사거리가 20% 쯤 늘어났을 겁니다.
... 믿지 마시구요.
2일 아침 적이 당포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니 육지에는 또 다수의 적이 대기하고 있었고 적선 21척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크기가 판옥선과 같은 것 9척"이라는 말로 보아 역시 여기도 제대로 싸움배를 동원한 것 같네요. 그 중에 한 대선 위에는 높은 층루가 솟아 있고 각종 비단 휘장을 둘렀다고 합니다. 딱 봐도 대장선이죠. 이순신은 거북선을 층루선에게 돌격시키고 조선 수군 전체가 돌격합니다. 여기서 권준이 왜장을 쏘아 맞추었고, 나머지도 신나게 두들겨서 불태워 버립니다. 이번에도 적은 육지로 도망가 버렸죠. 이 때 거제도에서 적 20척이 온다는 말을 듣고 급히 바깥으로 나가지만, 적은 조선 수군을 보자마자 도망쳐 버립니다.
창신도에서 하루를 묵은 수군은 3일에 여러 섬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적을 보지 못 했고, 4일 아침 당포에서 토병 강탁이 "도망간 적들은 거제로 향했다"는 말을 해서 이를 쫓아 거제도로 향합니다. 이 때 그렇게 기다리던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오죠. 그가 끌고 온 병력은 25척, 이렇게 판옥선만 51척인 연합함대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당항포로 가는 과정에서 또 아군을 만나게 되는데 유숭인의 기병 1100명이었습니다. 장계에는 그저 그것만을 적었지만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하지만 적을 깨뜨리는 것밖에 관심이 없는 통상께서는 -_-; 당항포의 지리를 묻고는 쳐들어 갑니다. 여기서도 신나게 깨뜨리고 적이 육지로 달아나자 상륙해서 추격, 머리 43급을 베고 돌아옵니다. 여기서도 배 한 척을 남겨놔서 낚으려고 했는데... 이번엔 낚이죠. 방답첨사 이순신이 매복하고 있다가 잡았는데, 배 한 척에 탄 수가 백여명이고 24~5살 정도 돼 보이는 왜장이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지휘했다고 하는군요. 화살을 10발이나 맞고서야 전사했다고 합니다.
7일에는 웅천에 이르러 가덕도를 정찰했고, 율포에서 부산으로 도망가던 적을 포착해서 모두 없애버리죠. 이후 몰운대까지 수색했지만 적은 없었고, 9일까지의 수색 끝에 돌아옵니다.
29일에 시작해서 10일간이나 지속된 2차 출동은 이렇게 끝납니다.
2. 적장은 누구인가?
이 과정에서 잡은 적은 총 72척이었습니다. 사천 13, 당포 21, 당항포 26, 율포 7척 해서 67... 어라 6척이 남네요. -_-; 이 중 한 척은 사천으로 가는 길에 잡은거 하나, 당항포에서 "다른 왜선 네 척"이라고 한 걸로 보아 이건 따로 계산한 거 같고 나머지 하나는 남겨뒀다가 나중에 불태운 거겠죠.
여기서 재밌는 건 나름 반격하는 느낌이 들던 2차 출동에서도 적은 포구에서 맞서 싸우고 밀리면 도망갔다는 겁니다. 당항포 전투에서 싸운 적은 이걸 증원한 것 같은데, 역시 마찬가지로 도망갔다가 당항포까지 몰린 후에야 싸웠죠.
이를 볼 때 일본 수군은 아직도 조선 수군과의 전면전보다는 상륙 호위에 더 집중한 걸로 보입니다. 한 번 매운 맛을 보긴 했으니 나름 경상도 해안을 뒤졌겠습니다만... 적은 전라도에 있었던 거죠. 마침 방침을 바꿔 조선 전역을 완전 점령하기 위해 경상우도에서도 한창 공격을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조선 육군 역시 이에 맞서 의병과 관군이 함께 반격하던 중이었고, 유숭인의 경우 고성까지 진출한 상태였죠.
2차 출동의 장계에서 이순신은 적의 깃발들이 서로 다른 것에 집중하며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왜인들의 깃발에 물들인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전일 옥포는 붉은 깃발이었고, 이번의 사천은 흰 깃발이고, 당포는 누른 깃발이며, 당항포는 검은 깃발인바, 그원인을 생각해보면 필시 그들의 부대를 분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뿐 아니라, 피를 발라 맹세한 글이 또 이와 일치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우리를 깔보고 침범하려는 마음을 품고서 군병을 준비한 상황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각 가문마다 깃발을 다르게 썼고, 그걸로 상대가 누군지 구분하였습니다. 가문의 깃발, 군기는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거였죠. 이를 통해 각 전투마다 누가 참전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순 있죠.
현재 사천 해전에서 적장은 도도 다카도라, 가토 요시아키 등의 수군 병력으로 보고 있는 듯 합니다. 당포 해전의 경우 노획한 금부채에 "우시축전수"라는 말이 적혀 있어서 (풍신)수길이가 우시축전수라는 애한테 줬을 거다, 그러니 이번에 죽은 적장은 우시축전수다라고 예상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죠. 우시축전수는 히데요시가 성을 바꾸기 전의 성(하시바=우시)이었고 뒤는 관직명이었습니다. 저 부채는 히데요시가 가메이 고레노리라는 무장에게 준 것이었고, 결국 그가 이번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봐야죠. 하지만 그는 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는 걸로 보아 그는 아닌 듯 합니다.
당포 해전에서 전사한 왜장은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형인 구루지마 미치유키 쪽으로 결론이 나는 듯 합니다. 그의 다른 이름은 도쿠이 미치토시(다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700명을 이끌고 수군 장수로 참전합니다. 구출한 포로의 말에 따르면 화살이 빗발치는데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아무튼 이 전투에서 수군 주요 장수 중 하나가 당한 거죠.
당항포 해전은 불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순신이 묘사한 군기가 너무 개성적이네요.
"또 왜대선 4척이 포구 안쪽으로부터 나와서 한곳에 모이는데, 모두 검은 깃발을 꽂았고 기마다 흰 글씨로 「남무묘법연화경」이라는 일곱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남무묘법연화경. 이것은 가토 기요마사의 군기입니다. 이 때쯤엔 한창 함경도로 가고 있던 가토군인 거죠. 지휘하는 장수가 누구였든 위에서 나온 가메이 고레노리와 이것을 보아 2차 출동에서부터 육군 장수가 참전했다고 봐야 될 겁니다. 다만 저 네척을 다른 왜선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보아 수군+육군인 듯 하며 맞서 싸웠던 다른 적들과 달리 저들은 도망치려 했습니다.
율포는 넘어 가죠 -_-a
3. 후일담
1차 출동은 역시 처음이라는 상징성으로, 3차 출동은 대첩이라 불리는 한산도 해전으로, 4차 출동은 적의 소굴인 부산포에 뛰어든 것으로 유명하죠. 그렇다면 2차 출동은? 거북선 출격이죠. 거북선에 대해 길게 글을 쓰다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따로 글 하나로 돌리겠습니다. 4차 출동 이후에 나올 듯 하네요.
글 중에서 언급했듯 2차 출동에서도 적은 수세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맹렬히 맞서고 화살비가 쏟아져도 의연했다는 왜장들이 나오긴 하지만요. 이유는 둘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우선 위에 적었듯 아직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 바다에서 싸울 정도로 나가지 못 했다는 거겠죠. 거의 포구에 틀어박혀서 방어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사천 해전의 전장은 지름으로 2km, 조선 수군이 움직이기 힘든 환경에 썰물이었는데도 적은 육지에 상륙해서 싸웠습니다. 질 거 같으면 안쪽으로 도망가구요. 그 때문에 일부러 유인책을 쓰고 작은 배를 남겨 놔서 적이 타고 도망가게 해야 했죠. 당시에는 경상우도에 대한 공격과 조선 육군의 반격이 활발할 때였습니다. 조선 수군보다는 우도를 점령하는 게 먼저였겠죠.
다른 하나는 조선 수군의 공격이 그만큼 빠르고 비밀스러웠다는 것이겠죠. 최대한 적을 정찰하고 아군은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 모습, 임진왜란 내내 보여 준 이순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일본군에게 시간이 더 있었다면 어떻게든 병력을 모아서 대응할 수 있었겠습니다만, 그거조차 차단해 버린 거죠. 당항포에서 무찌른 적은 정황상 증원군으로 보입니다만, 이들이 나타나기 전에 당포의 적을 쓸어버렸고, 새로 나타난 적은 도망가 버렸습니다.
특이할 점은 가메이 고레노리, 가토 기요마사 휘하 병력 등 육군 병력들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상륙을 위해 배에 탄 것일 수도 있지만, 이미 여기서부터 육군 병력이 참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2차 출동의 장계에서부터 이순신은 "수급이 아닌 적선 격침으로 공을 따진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방답첨사 이순신을 강조하면서 목을 베는 데 욕심을 가지지 않고 잘 싸웠다고 했죠. 꽤나 여유롭게 싸운 2차 출동에서도 상선(기함)에서 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이건 상선이 딱히 후방 안전지대에서 싸우지 않고 전진해서 싸웠다는 걸 의미합니다. 편제상 상선 앞에는 언제나 중군선이 호위를 맡으며 전체 함대를 지휘합니다. 그런데도 전사자가 발생했죠. 이순신 자살설의 가장 큰 이유가 "대장이 총을 맞을 정도로 앞으로 나가겠는가?"인데 이미 이 때부터, 혹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전방에서 싸운 겁니다.
여기서 이미 이순신은 총탄을 한 방 맞죠. 다행히 중상은 아니었습니다만... 바꿔 말하면 언제 전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참고로 2차 출동에서 전사자는 열 한 명입니다.
... 그리고 여기서 원균은 "병력이 없으니 전투 후 목을 베는 임무를 맡았다"고 적습니다. 원균이 맹장인 척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목을 벤 게 많았기 때문이죠. 최대한 부하들의 공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이 부분을 집어 넣은 것 같습니다만... 역시나 위에서는 목을 벤 것만으로 잘 한다 한 것 같군요.
1차 출동으로 가선대부에 오른 이순신은 이 전투의 승전으로 자헌대부에 오릅니다.
4. 조선 수군의 전투 방식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가 "원거리에서 안전히 싸웠다"입니다. 어느 정도는 맞는 얘깁니다만... 그 안전한 원거리가 어느 정도일까요?
천자총통의 사거리는 길면 1km가 넘고, 그 아래의 총통들도 그보다 못 해도 상당한 사거리를 가지고 있다고 기록돼 있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최고 사거리일 뿐입니다. 현대 소총도 최고 사거리야 1km를 넘는다고 하죠. 하지만 사람의 시각 등의 이유로 실제 사격은 길어야 250m죠. 당시 조총도 최고 사거리는 100미터를 넘었습니다. 명중률 때문에 유효 사거리를 50m로 하고, 탄막을 형성하는 쪽으로 방침을 잡았을 뿐이죠.
1보의 정확한 거리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계산한다 해도 모두 최고 사거리일 뿐 전투 때 이렇게 멀리서 사격할 수는 없죠. 특히 해전의 경우 배가 흔들리는 것 때문에 명중률이 더 떨어졌구요. 거기다 천자총통은 그 무게와 거기에 드는 화약의 비용 때문에 중요한 배에 1~2문, 그것도 반동 때문에 선수에 달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력이었던 것은 한 급 떨어지는 지자, 현자총통으로 배의 옆인 현측에 다수를 배치했습니다. 그나마 정유재란 때는 수군이 몰살당하면서 현-황자총통으로 급이 더 떨어지죠.
사료들을 보면 240보에서 포격을 시작하고, 100보가 되면 배를 한 쪽으로 돌려 현측으로 포격을 했다고 합니다. 1보가 한 걸음이라는 걸 생각할 때 정확히 얼마로 계산하든 절대 "안전한 원거리"가 될 수 없죠. 조총을 쏘는 게 100보, 활을 쏘는 게 90보였다고 합니다. 당시 포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근거리였던 겁니다. 이런 거리에서도 명중률은 확신할 수 없고, 조선의 화포는 연사력이 꽤나 낮았습니다. 우수한 화포를 보유하고도 후장식(뒤로 장전합니다. 당시 모든 조선 화포는 전장식이었습니다) 화포인 불랑기포를 도입한 것도 그것 때문이겠죠. 거기다 적은 판옥선에 비해 날렵하고, 접근전을 선호했습니다. 기습을 당한 옥포해전에서부터 적은 돌격해 왔죠.
분명 유리한 환경으로 진행한 해전이었지만, 조선 수군은 결코 안전한 상황이 되지 못 했습니다. 상선에서조차도 전사자가 발생하는 상황, 아직 통제사가 되지 못 했지만 조선 수군의 중심이나 다름 없는 전라좌수사가 적 탄을 맞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없다고 봐도 될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것은 모두 이순신의 능력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조선 수군은 포격 후 불화살로 적을 불태우고, 전리품을 챙기는 과정을 매 해전마다 반복했습니다. 목선은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불화살을 계속 쏘거나 아예 불을 질러야 했죠. 포격 후 반쯤 부서진 배를 들이받아서 상대 배에 옮겨 타는 과정이 계속 됐을 겁니다.이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적들이 반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우혁의 왜란종결자에서는 적선을 들이받는 게 아예 말이 안 된다고 하지만 이런 과정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아주 작은 배를 들이받은 게 아니라면 들이받은 것, 당파만으로 적선을 깨는 건 힘들었죠. 애초에 당파의 뜻 자체도 그냥 깨뜨렸다는 뜻입니다. 워포그에 보면 이거에 대한 우스개소리로 "총통으로 당파했다"고 하는 걸 보니, 수군이 화포를 손에 들고 휘둘러서 적선을 깨뜨렸다고 하죠 - -;
임진왜란 이후의 해전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조선 vs 일본 수군의 객관적인 전력을 가늠하기는 어렵긴 합니다. 하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영웅사관을 부정하다가 너무 나가서 "판옥선이 킹왕짱이니까"라는 건 접어둬야겠죠. 어차피 판옥선이 무적이 아닌 건 원균이 증명합니다. 칠천량 해전 이전에 말이죠 -_-;
5. 그리고...
2차 출동의 의의는 간단합니다. 이제 더 이상 적은 서쪽으로 감히 올 생각을 하지 못 했고, 부산포 근처까지 조선 수군이 나타나면서 보급로도 위험해졌습니다. 거기다 한창 공격 중이던 경상우도 공격도 쉽지 않았고, 이를 위해 각 지방으로 병력을 실어날라야 될 수군이 망해 버린 거죠. 수륙병진 이전에 이미 문제가 심각해진 겁니다.
거기다 6군의 전라도 침공과 함께 확실히 구상한 수륙병진, 그것을 위해서는 조선 수군의 격멸이 최우선 순위였습니다. 거기다 일본은 2차 출동 중에 조선 수군이 50척으로 증원된 것도 봤겠죠. 더 이상 20~30척의 소규모 함대로 상대할 수 없다는 게 확실해졌고, 수륙병진을 위해서 조선 수군을 격멸시켜야 한다는 것 역시 확실했습니다.
결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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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BB님 말씀처럼 조선수군의 화포가 원거리에서 안전하게만 싸울 수 있을 만큼 전능한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지만 설사 조선해군의 화포 사거리가 기록만큼 좋고 포수들의 높은 명중률의 능력치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이순신 장군의 능력이 폄하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화포를 이용한 수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적과 적절한 거리를 조절한 다음에 함대의 진형만들고 전 함대가 일제히 화망을 형성해서 잘 쏘아야 합니다. 이건 말이 쉽지 보통능력치가 아닙니다. 그당시 기준으로는 스타크래프트에서 입스타를 손스타로 구현하는 것 만큼 말은 쉬워도 행하긴 어려운 겁니다. 그만큼 장수의 통솔력과 그 통솔력을 소화할 만큼 잘 훈련된 병사가 필요한 것이고 그 토대를 만들어 온 것이 이순신 장군이지요.
만약에 적과 적절하게 거리 유지 못하고 진형도 엉성하며 포수들은 화망을 형성하지 못해 명중률까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접근전 허용하고 병사들은 어육이 되겠죠.(하긴 그나마 접근전이라도 해서 싸우면 다행입니다. 싸우지도 않고 도망간 장수는 또 얼마나 됩니까;;)
프로이트의 일본사에 보면 일본 수군이 하도 깨지니까 가토 기요마사, 하치스카 이에마사가 함대를 꾸려 지원했는데 또 깨졌다는 내용이 있죠.
물론 프로이트 이사람은 조선땅에 직접 와서 본 게 아니라 들은 이야기를 받아적은데 가깝다보니 살짝 신뢰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당항포해전의 경우 가토측이 자기가 보유한 배들 중 일부와 함선 경비병력을 태워 수군을 지원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제목이 '거북선 출격'인 만큼 거북선의 스펙에 대해서 좀 자세히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근데 너무 바라기만 하니 도둑놈 심보 같기도 하네요. 흐흐)
당시의 개념으로 본다면 거북선이 정말 무섭기는 할 겁니다. 밖에서 조총이나 화살로 쏠려니 배 자체가 완벽한 은폐·엄폐물이지,(물론 판옥선 자체가 일본배들 보다는 높아 마치 성위에 있는 느낌이긴 했지만요.) 접근해서 올라가려니 지붕은 기름칠해 미끄러워, 거적으로 숨겨 둔 칼날에 찔려, 좌우에 화포는 근접 사격해;;;
정말 완벽한 돌격선 역활을 했고 정보가 부족한 시절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과장을 덧 붙이면 거북선은 그야말로 괴물이였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