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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4/13 01:16:29
Name nickyo
Subject [일반] 꽃 피는 춘삼월, 봄과 친하지 못한 사람아.

우리 집 주소는 새로 개정된 이름에 의하면 '벚꽃길'이라고 불린다. 봄이 온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 주는게 바로 '꽃'일텐데, 가지각색의 봄 꽃중에서 우리집 근처에는 벚꽃나무가 길을 따라 쭈욱 이어져 있어서 이맘때만 되면 동네가 연분홍빛으로 물들곤 한다. 거리에 든 연분홍빛은 곧 사람얼굴에도 옮겨가는지, 유독 이 맘때가 되면 이 거리에 연인들이 늘어난다. 꽃 피는 봄이오면, 사람들의 마음은 들썩들썩 설레는 것일까.


사랑이 뭘까를 지나니 사랑이 하고 싶다고, 언젠가부터 여자가 더 이상 적처럼 생각되지 않을 무렵에도 난 봄과는 친하지 않았다. 다들 봄에는 연애하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지금은 모르는 어떤 사람이 반가움이 넘치는 사람이 되어 이 봄날을 맞이하고 싶다같은 말들을 하고는 하지만, 나는 참 봄과는 연이 없었고 여전히 그렇다. 내가 한 여인을 사랑했을 때 마다, 봄은 나에게 이별을 주는 계절이었다. 우리 집 근처의 벚꽃길은 정말 예쁘지만 난 단 한번도 여자와 꽃 구경을 해본 적이 없다. 내게 연분홍빛 벚꽃은 그저 내가 도저히 놓고싶지 않았던 사람들을 조금씩 밀어낼 때에 함께 앙상히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사실 스물 중반에 가까워 지는 내 나이쯤 되면, 사지 멀쩡한 남자들 대부분은 서너번의 연애는 하는 것 같다. 특히 봄에는 참 사랑하기도 쉽고, 그럴 기회도 많다. 날씨가 쌀쌀한 발렌타인 데이부터 화이트 데이, 그리고 4월이 되면 찾아오는 꽃피는 나날들. 소풍가기에 더 없이 좋은 계절에, 때때로 황사가불면 차분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할 수있는, 새로운 것들이 시작되고 설렘이 두렵지 않은 우리들. 그래서 다들 서로에게 멋진 사람을 만나 행복함을 느낀다. 나야 사지는 멀쩡하지만 멋진쪽은 아니어서 서너번까지 연애를 해 보지 못했지만, 역시 내게 봄은 언제나 혼자였다. 심지어 더 신기한건, 봄에는 내가 이 사람과 사랑했으면 좋겠다 하는 경우도 없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난 봄날에 사랑하는 벅차오름이 아닌, 그 벅차오름을 긁고 긁어 가라앉을 앙금 없이 마음을 비워야 했다. 예전도 그리고 여전히 지금까지도.




내게 찾아온 첫 이별은 2월이었다. 봄이라고 하기엔 추운 날, 하루를 노곤함에 끝마칠 때 걸려온 익숙한 번호. 반가움에 받은 그 너머에서 통보받은 이별. 할 말을 잃었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했던, 차라리 통보를 했으면 전화를 끊던지 계속 이어지는 침묵. 그 사이사이 침묵 너머에서 들려오는 키보드 소리. 내 첫 사랑의 이별이란 이런거구나, 누군가와는 채팅을 하며 그저 아무렇지 않게, 마치 변기의 물을 내리듯 이별이란 말을 던져버리면 꾸르릉 하고 내 속으로 넘어가버리는거구나. 그게 2월에 맞이한 내 이별이었다. 첫 사랑아 안녕, 그 해의 봄은 정말 최악이었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은 죄다 자기혐오와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 피어오르는 것이었고, 그때 처음으로 사랑이 뭐냐, 그건 그냥 지랄나는거라고 생각했다. 좋을 땐 좋은대로 내 스스로를 제어 못해서 지랄난거고, 헤어짐에는 도저히 익숙해 질 수 없어서 지랄나는 거라고.





두번째는 이별이 아니었다. 이별을 겪은 그 다음 해 3월, 그냥 차인거다. 정말 좋아했던 아이에게 마음을 전하고, 그 아이의 마음을 듣고. 그렇게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좋은 친구가 되자던 그 애의 표정에 고개를 끄덕여 버린 내가 밉던 그때. 반팔에 셔츠만 입어도 되던 날씨에, 다들 사랑을 속삭이기 시작할 그 날에 난 내 감정을 죽이길 바라는 그 아이의 말을 그저 그러겠노라고 꿀꺽, 삼켜버렸던 것이다. 한심함에 치를 떨고, 슬픔에 화가나고, 그럼에도 그 희망의 끊을 놓지 못하는 바보같은 내가 있었다. 해가 지나도 여전히 내게 봄은 따스하지 않았다. 겨우내내 사랑하는 감정이 차올랐다면, 내게 봄이란 따뜻한 날씨 바깥으로 그 벅차오름을 죄다 쏟아내어야 했던, 그래서 정말 괴로웠던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심지어 좋아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어쩌면 이게 내 20대에 가장 평안한 봄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게 남 일같았으니까.




그러다가, 그 다음해의 여름부터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학습능력도 없는 놈 같으니 하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가장 느리게 내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확신이 없었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마음의 모양새에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가장 느리게, 마치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게 들어온 사람은 그 깊은 발자국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깊게 마음에 새겨넣었다. 이제까지 사랑했던 사람들이 무색할 정도로 그 사람의 족적은 깊었다. 한 번의 봄을 건너뛰어 조금 늦게 찾아온 사람이라 그랬던 것일까. 가장 만난 회수도 적었고, 가장 나눈 말의 수도 적었다. 외모도 가장 별로였고, 심지어 연상에 바쁘기까지 했었다. 객관적으로 내가 이렇게 까지 빠질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는데도 시간을 들여 조금씩 마음을 헤집어 놓은, 이제까지 다시는 그렇게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겠노라고 수백번을 다짐하며 꽁꽁 얼려놓은 곳을 산산히 조각낸 그녀가 그 해 가을과 겨울에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 올해.
꽃 피는 춘삼월 봄이왔다.



3월의 중순에, 날씨가 아직은 춥지만 그래도 봄이 오나보다 싶을 무렵 처음 그녀의 체온을 느꼈을 때, 새벽녘의 공기에 맞닿아 약간 차가웠지만 그걸 모를 정도로 너무 따스했던 그 사람. 촉촉히 젖은 눈에 마주쳤을 때, 불쑥 사랑한다고 말할 것 같아 차마 오래 마주볼 수 없었을 때. 벅차올랐던 겨울을 겨우 지나서도 가라앉지 않은 당신에게 그 마음을 어떻게 온전히 전해야 할지 무서워 당신앞에서 노래했을 때. 살면서 그때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해 본 적이 없을 때. 그 늦은 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당신과 나눈 말들이 하나하나 또렷히 기억났을 때. 그 3월의 중순에. 그게 당신의 마지막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때. 당신이 다시 또 오자던 그 거리의 이야기가 거짓이라고는 한치의 의심조차 없었을 때. 그 봄날의 늦은 밤에.





그렇게 칼같이 나를 자르고 떠나간 당신아, 하고 울부짖으며. 당신이 들을 리 없는 곳에서 애타게 당신을 찾았을 때. 쪽팔림도 없이 그저 당신만이 알 거라는 희망에 몇 줄의 글을 남겨가며, 대답없는 당신을 계속 두들기던 내게. 이유도 모른 채 시소같은 맘으로 그 깊은 족적이 무색하게 떠나간 당신아. 하고 그 발자국을 지우느라 온갖 허세를 필사적으로 떨어가며, 그렇게 밤만 되면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두 손으로 쥔 채 고개를 파묻고 제발 다시 돌아오라는 말을 수백번 삼켰을 내게 단 한번도 대답없던, 내가 무얼 잘못했냐는 말에 미동도 하지 않던 당신아. 원망스럽고, 화가나고, 실망하고 당연히 당신이 싫어질 거라 생각했는데도 이 모든 마음을 지나 그저 다시 한 번만, 제발 다시 한 번만 하고 되뇌이게 한 나쁜 사람아. 하며 절망밖에 토할 수 없었던 봄날의 나날들.




그렇게 꿀렁이는 괴로움 속에도 시간은 지나 4월이 온다. 만우절을 빌어 당신에게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고, 우린 이제 모르는 사람이 되자고. 그렇게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필사적으로 한 줄 한 줄 채워서 마지막 편지를 보냈을 때. 그렇게 힘들게 쓴 말들을 거짓말이라고 치부해도 좋으니 차라리 그렇게라도 한심한 꼬라지가 되어도 좋으니 한 마디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쓴 말들에. 처음으로 그렇게 괜찮은 척 하는 내게, 눈치 빠른 당신이 제발 그 한 줄 한 줄 사이에 있는 끝내 전하지 못한 말을 알아주기를 바랬던 그 때가 벌써 지나고 결국 벚꽃이 만개한 봄이 왔다. 2월, 3월, 그리고 4월. 20대의 봄은 내게 있어서 괴로움밖에 찾을 수 없는 날들이 되어간다. 아직도 눈을 뜰 때도, 감을때에도 선명히 떠오르는 당신이 주고 간 것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벌써 꽃 피는 봄날의 한가운데에 내가 있다.





오늘 일을 끝내고 오는 길에 한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건네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을 꼭 이 거리로 데려오고 싶었는데.
저 연분홍 벚꽃나무 아래에서 만나고 싶었는데.
그렇게 내게도 봄이란 이런거구나 하고 알게 될 그날이 있을 줄 알았는데.
봄과 친하지 못한 사람아.
꽃 피는 춘삼월이 온다 한들
여전히 봄날을 모를 사람아.


봄만 되면 피어오르는 꽃잎에
피어오르는 봄 내음을 맡기도 전에 떠나버린 그 사람들이 그리워
다들 사랑하느라 정신없는 이 날들에
그저 빨리 이 계절이 지나기를, 지는 꽃잎에 당신이 함께 떠나가기를 무색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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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13 01:54
수정 아이콘
벚꽃길로 새주소 개정된 길이 전국에 참 많나보네요~
가치파괴자
11/04/13 03:39
수정 아이콘
아직도 눈을 뜰 때도, 감을때에도 선명히 떠오르는 당신이 주고 간 것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벌써 꽃 피는 봄날의 한가운데에 내가 있다.

이구절이 참 와닿으면서 가슴이 찡하네요,

이별이란 것은 아픈건, 특히..
가슴에 지속적으로 남아 있는 잔상떄문에 더욱 그런거 같아요,
지워 볼라고 다른 사람으로 채워 보지만, 새로운 잔상이 남고,

요즘은, 다시 사랑을 할수 있을까 라는 염세주의에 빠지고 있어서
두렵네요,

글 잘봤습니다
나의왼발
11/04/13 22:25
수정 아이콘
봄이되면 꽃이 항상 아름답게 피어나듯이 제 사랑도 피어날꺼 같았지만
현실은 제법 호락호락하지않더군요, 그래서 현재 만개한 벚꽃이 떨어지는 것도 무심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남일같지 않아서 가슴한구석이 먹먹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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