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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2/28 00:02:17
Name 공안
Subject [일반] 두 소설가의 소설 같은 이야기
  콩쿠르상.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가장 권위 높은 상으로, 한 해에 단 한 명의 작가에게만 주어지며 이미 한 번 수상한 사람은 다시 수상할 수  없다.




  1974년 어느 날, 한 무명작가가 프랑스 최고의 출판사인 갈리마르 사에 《그로칼랭》이라는 소설을 투고했다.  《그로칼랭》원고를 읽은 편집 담당자는 신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문학적 성취에 감탄했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출간을 결정한다. 출간 후, 소설  《그로칼랭》은 상업적 성공은 물론 프랑스 문단으로부터 열혈한 찬사를 받게 된다. 《그로칼랭》의 저자, 그의 이름은 에밀 아자르.

  프랑스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작가 에밀 아자르. 이듬해 그는 차기작  《자기 앞의 생》을 출간했고, 문단과 대중의 찬사는 연일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에밀 아자르는 그 해, 콩쿠르 상의 수상자로 결정된다.

  그러나 에밀 아자르는 콩쿠르 상 시상식 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에밀 아자르는 불법 낙태 시술을 여러 번 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사법 당국에 쫓겨 남미에서 도피 생활을 하고 있던 의사로, 아무리 콩쿠르 상을 수상했다고는 하지만 고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 누구도
  그의 얼굴도
  그의 전화번호도
  그의 집 주소도  
  알 지 못했다.

  얼굴 없는 작가, 에밀 아자르.




  그리고 다른 한 소설가. 그의 이름은 로맹 가리.


  1914년에 태어나 1935년, 비교적 이른 나이에 데뷔한 로맹 가리는 일찍이 문단과 대중으로부터 찬사와 주목을 받는 천재 작가였다. 그리고 마침내 1956년  《하늘의 뿌리》로 콩쿠르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하늘의 뿌리》
《대 탈의실》

  등등 기라성 같은 문학 작품을 남긴 그였지만, 세월은 야속했다.
  문단과 대중은 그의 매너리즘을 의심했고, 도무지 변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의 작품을 두고 빈번히 비판의 눈길을 보냈다. 어느 새 로맹 가리는 전통을 고집하는 작가로 낙인 찍혔고, 그의 소설은 식상한 내러티브로 점철된 작품으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엔 이렇다 할 혁명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았고, 동시에 프랑스 문단에는 또 다른 거장들이 자리를 잡았다.


  1974년, 그런 로맹 가리 앞에 나타난 에밀 아자르.

  그러던 어느 날, 에밀 아자르는 자신의 실제 이름이 폴 파블로비치라고 고백하게 된다. 에밀 아자르의 고백은 또다시 프랑스 문단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폴 파블로비치는 바로 로맹 가리의 조카였기 때문. 프랑스 문단은 요새 문단과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삼촌 로맹 가리를 배려해 에밀 아자르가 그 동안 정체를 숨겨왔다고 추측했다.

  그리고 로맹 가리에겐 연민어린 시선 반과 함께 또 다른 비판이 쏟아졌다. 로맹 가리의 차기작에서 에밀 아자르의 작품과 비슷한  느낌이 나자, 로맹 가리가 조카의 성공을 시기하고 질투할 뿐만 아니라 모방하려고 한다는 비판이었다. 프랑스 문단에서 로맹 가리의 위신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에밀 아자르의 위상은 높아져만 갔다.  《자기 앞의 생》 이후 에밀 아자르는 두 편의 소설을 더 출간했고 연일 모두 성공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문학적으로 끝없이 자조하고 혼란스러워 했던 로맹 가리는 1981년 7월, 결국 자택에서 권총 자살을 함으로서 생을 마감했다.















  로맹가리가 죽은 뒤 6개월 후, 갈리마르 사에 한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로맹 가리. 로맹 가리의 유서였던 것이다. 로맹 가리의 유서는 몹시 길었기 때문에 갈리마르 사는 그의 유서를 책으로 출간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유작의 이름은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었고, 그 책은 프랑스 문학사상 전례가 없을 만큼, 문단과 대중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책 속에서 로맹 가리는 담담하게 고백했다.
  에밀 아자르의 저서는 모두 자신이 쓴 것임을. 에밀 아자르라고 알고 있었던 조카 폴 파블로비치의 동의를 얻어 자신이 계획한 연극임을. 멍청하고, 변화란 조금도 없는 평론가를 비웃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가면 너머에 있는 자신의 진정성에 대한 진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 그렇게 했음을. 로맹 가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카 에밀 아자르를 질투하며 조금은 슬퍼하고 있을 로맹 가리가 불쌍하다는 말을 몇 번 들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멍청한 평론가들이 에밀 아자르에 대해 찬탄의 말을 늘어 놓을 때마다, 그리고 내 작품에는 비난 할 때마다, 모두 즐거웠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무척 즐겼다. 안녕, 그리고 모두 고맙다.”


  이렇게 로맹 가리, 그리고 에밀 아자르는 콩쿠르 역사상 유일하게 수상을 두 번 씩이나 하게 된 작가로 남게 되었다.





--

  로맹 가리의 이야기는 사실 많이 유명하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라 심심풀이로 예전에 정리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올립니다.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는 동일인물이었지만, 결국엔 같은 사람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둘의 작품하며, 로맹 가리의 염원하며. 개인적으로는 저는 '자기 앞의 생'이 가장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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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rasax_:JW
11/02/28 00:25
수정 아이콘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11/02/28 00:40
수정 아이콘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
예전에 이 책을 읽고 로맹가리의 소설을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었죠.
더군다나 프랑스어는 로맹가리의 모국어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쓰다니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로맹가리가 좋아하던 청어요리를 먹어 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매우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낭만토스
11/02/28 00:47
수정 아이콘
어떤 난해한 그림을 봤을 때, 듣보잡 화가의 그림이라고 하면 '갸우뚱' 하지만
'피카소가 그린거야' 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있어보이는 것과 같네요

결국 로맹가리에 대한 편견이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눈도 속이고 말았군요
로맹가리의 그 쾌감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저런 바보들.... 사실은 내가 쓴건데 알아차리지도 못하는구나. 저것도 비평가라고....'
몽정가
11/02/28 01:23
수정 아이콘
자살은 왜 했을까요?
극적인 반전을 위한 장치치고는 너무 큰 것 같은데.......
저런 것도 일종의 광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프랑스문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찾아서 읽어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1/02/28 01:53
수정 아이콘
몽정가 // 읽는 분이 글에 몰입하기 쉽게 제가 자살한 부분에서는 마치 문단과 대중의 외면 떄문에 좌절해 자살한 것 같이 쓰기는 했지만, 로맹가리가 자살하게 된 계기에 '문단과 대중의 외면'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로맹 가리는 실제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삶이 공허하고, 무력하고. 그런 로맹 가리에게 에밀 아자르로서의 삶은 정말 재미있는 유희 거리였겠죠? 하지만 아무리 재미있는 유희거라라도, 칠 년을 버틸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권총과 함께 에밀 아자르에 관한 유희도 막을 내린 거죠.
11/02/28 08:03
수정 아이콘
와.. 설마 설마..하며 읽었는데 제가 이랬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의 결론이 나왔네요.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그의 작품을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11/02/28 16:48
수정 아이콘
우와...
吉高由里子
11/02/28 19:25
수정 아이콘
'자기 앞의 생'은 정말 걸작중에 걸작이죠. 원래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라 정말 좋았습니다.
'유럽의 교육'도 인상깊게 읽은 기억이 있네요.
어릴적에 장그르니에를 시작으로 프랑스소설들에 빠졌다가 과도기적 시점에서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나서 다시금 버닝(?)했던 생각이 나네요.
파란무테
11/03/05 19:15
수정 아이콘
정말, 소설같은 이야기이네요.
로맹가리의 작품을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자기앞의 생' 한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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