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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2/23 13:21:14
Name 7drone of Sanchez
Subject [일반] 선생님 심부름 셔틀하던 어느 초딩 이야기
1주일 전 넋 놓고 개콘을 보다가 개그 소재로 나온 "청주교대부속초등학교 4학년 1반 담임선생님 이름은?"  라는 말을 듣고 정말 화들짝 놀랬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이며 제가 다닌 반이었기 때문이죠.

비록 6학년 2학기 때 서울로 전학을 와버려서 졸업은 못 했지만 유년시절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어서 저에겐 무척 애착이 많은 곳이죠.

한 학년이 3반밖에 없는 교대부속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집에서 멀리서 다녔습니다.

그 덕에 학교버스를 6년 내내 타고 다녔죠. 그로 인해 또래의 동네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 적었습니다.

제 기억으론 2학년 2학기가 되어서 겨우 사귈 수 있었는데 정작 사귀었어도 교과서도 다르고 커리도 달랐기 때문에 절 외계인취급했었단..^^;;

게다가 당시 제 별명 중 하나가 튀기였습니다.

지금은 덜 하긴 한데 당시 제 머리칼과 눈동자 색이 갈색이었습니다.

지금 시대에선 그게 무슨 놀림거리가 되냐고 하실 수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몹시 듣기 싫은 소리였죠.

그렇게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가면서 재미없는 방과 후 생활을 즐기던 초딩이 나이를 먹고 5학년 교실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학교는 번호를 가나다 순서로 매기는지라 늘 3~7번 를 꽤찼었고 출석부에서 빨리 호명되는 편인데

5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출석을 부르다 말고 "너 xx 아파트 115동 사니?" 라고 물으시기에 엉겁결에 그렇다고 말씀드리니까

선생님이 웃으시면서 "난 116동인데 크크"라고 말을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뒤로 방과 후 심부름 셔틀은 물론이고 동네에서 선생님과의 많은 에피소드를 겪게 되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러셨는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수업이 끝날 무렵 종종 저에게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이것 좀 집에 들여다 줄 수 있니?" 라고 하시면서 저에게 택시비를 주셨지요.

매 시각 학교버스가 있는지라 버스를 타고 가면 되는데 선생님께선 얼마 안 되는 짐을 부탁과 동시에 초딩에게 택시비를 왜 주셨는지...

처음 한 두 번은 순순히 택시타고 선생님 댁에 물건 드리고 집에 오곤 했는데

영악한 초딩은 택시비를 받고선 학교버스나 시내버스를 타고 심부름을 해드렸고 남는 돈을 모아 프라모델을 사는 만행을 저질렀죠 -_-

선생님이 절 부르는 이유는 단지 심부름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참고서는 서점에서 시판되는 일반용과 '교사용'이라고 써있는 비매품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저에게 교사용 참고서와 문제집을 주시더군요.

저도 교사용 참고서가 주석이 더 많고 읽을거리도 풍성하단걸 진작부터 알고있었지만 선생님이 주시기에 넙쭉넙쭉 받았었죠.

혹시나 저희집 가정형편을 걱정하셔서 그러신게 아닌가 추측도 해볼 수 있지만

당시 저희집이 청주에서 대단지에 속하는 축인지라 그리 부족한 환경은 아니었고 선생님 당신께서도 저희 집이랑 같은 평수 사시면서 왜 그러셨는지 정말 의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선생님의 은총으로 인해 반 아이들의 따끔한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소심한 초딩은 프라모델 조립으로 받은 스트레스를 풀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저녁 찬거리가 부족하다고해서 제가 슈퍼로 심부름을 갔었죠. 근데 거기에 선생님 가족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당시 선생님 가족구성원은 저와 같은 학년의 남자아이와 두 살 터울의 여자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심부름 하면서 문틈으로 얼굴 익힌 그 아이가 맞더군요.

근데..... 그 여동생이 .... 음..... 좀........ 많이 예뻤습니다.

그러나 당시엔 전혀 티를 낼 수 없었고 심부름거리를 사오자마자 곧장 집으로 뛰었습니다. (왜 뛰었니 너;;)

그 일이 있은 후 이발관에서도, 심지어 목욕탕에서도 -_- 선생님 가족과 자주 마주치게 되었죠.

당시에 저의 아버지는 외국에 계셨던지라 목욕탕을 혼자 다니곤 했는데 나중엔 셋이서 함께 등을 밀고 바나나우유를 얻어먹기도 했었죠.

그렇게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 가족과 친하게 1년의 세월을 보내고 저는 초딩의 끝판왕인 6학년에 오르게 되었죠.

5학년 마지막 수업 마지막 순간. 아직도 기억나네요.

"블라블라블라.. 너희들은 6학년이 되어서도 공부 열심히 해야해. 내가 지켜보겠어!! "

"특히 너 xxx. 넌 이따 또 보자"

그리곤 6학년 교과서를 받아든 채 설렘 반 두려움 반의 기분으로 6학년 교실을 찾아 올라갔습니다.

......  선생님이 거기 또 계시더군요 -_-;

나중에 산수선생님에게 들은 소린데 절 경시대회 준비시키려고 데려가려고 했는데 그 선생님이 인터셉트 해갔다고 ;;

그렇게해서 저는 또다시 학교에선 선생님의 셔틀이 되었고 동네에선 선생님 아들과 놀았으며 가끔 여동생을 므흣하게 바라봤었죠.

처음엔 학교에서의 권위적인 모습과 달리 동네아저씨 같은 선생님의 모습에 많이 놀라기도 했는데 이렇게 편한 사이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렇게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 개학한 지 얼마 안 된 시점,

학교에선 6학년 수학여행 일정짜기로 한창 분주하던 때에 저희 집이 서울로 뜨게 되었죠.

교대부속학교라는 특성상 반이 3개밖에 없는지라 한 학년의 거의 모든 친구와 친했기 때문에 그 소문은 삽시간에 돌게 되고

전학 가기로 한 날, 친한 친구는 물론 안 친한 여자애들에게도 난생처음 '선물' 이란 걸 받아봤었죠.

지금 생각하면 참 짠합니다. 연필, 필통, 모양자 ...  언뜻봐도 학교 안에 있는 매점에서 파는 물건인줄 알겠는데 그새 다들 사다 준거죠.

어린 초딩은 처음으로 감동을 안은 채 마지막 등교를 마칩니다.

너무 아쉬운 나머지 며칠 뒤에 수학여행인데 수학여행만 다녀오고 가면 안 되냐고 말했지만 부모님에겐 씨알도 안 먹혔죠.

그리고 이사 전날 밤, 온 가족이 짐을 꾸리느라 정신이 없을 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죠.

문을 열어보니 츄리닝 입고 산보 나온 동네 아저씨가 저를 반깁니다. 선생님 이셨죠. 뒤에 그 아들내미와 딸아이와 함께...

그러곤 뭐 도울 것 없냐면서 막무가내로 짐을 함께 날랐죠. 그 고사리들도 함께...

한밤중까지 일을 도와주신 뒤 마지막으로 저에게 당부의 인사와 더불어 자그마한 선물을 내놓으시더군요.

샤프였습니다.

아버지 직업상 샤프를 많이 쓰시는 관계로 제가 자주 가져가서 쓰곤했는데 학교에선 못 쓰게 했거든요. 그로 인해 종종 혼내키기도 하셨던 분이셨는데

그게 미안했다면서, 서울 올라가면 이걸로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와 함께 샤프를 건네받았습니다.

그날 밤 저는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정든 애들이랑 수학여행도 못간 채 서울에 끌려가는 기분이어서 울었고

애들과 선생님에게 받은 지나친 환대가 너무 고마워서 울었고

우리 아버지랑은 너무나 다른 다정다감한 선생님을 아버지로 둔 그 친구가 너무 부러워서 울었습니다.

후엔 6년 12학기중 꼴랑 1학기만 다니고 서울 xx초등학교 졸업생이 되었지만

그 학교에 두고 온 추억이 너무 많아서 중학교 올라가기 전 어머니와 함께 선생님 댁을 찾아가서 인사만 드렸는데

제가 내려올 것을 어찌 아셨는지 애들 편지랑 졸업앨범을 따로 챙겨놓고 기다리고 계셨었죠. ㅠㅠ




그게 선생님과의 마지막 조우였습니다.

머리털나고 처음으로 뭐든지 맘대로 할 수 있었던 대딩이 되자마자 사진기 들러메고 청주내려가서 추억 담아오기만 신경을 썼을 뿐

막상 선생님 찾아뵙는 건 뒷전이었죠.

훗날 TV는 사랑을 싣고를 볼 때마다 난 고민할 필요도 없이 찾을 선생님이 있다는 뿌듯함이 있기도 했었고

사이트 가입 시 본인확인용 질문을 고를 때마다 주저 없이 "초등학교 은사님은?" 고르고 선생님 존함을 답으로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루다보니 언젠가부터 5월 15일이 매우 불편하더군요.

그렇게 미루다 미루다 저 사진을 올리는 순간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개콘을 본 그날 바로 교육청 홈피에 가입을 한 뒤 은사님 찾기를 신청하고 대답이 오기만을 노심초사 기다렸죠.

그렇게 1주일 여를 기다리고 드디어 답변을 얻을 수 있었지만

"본 교육청에는 홈페이지에서 본인 인증을 하고난 후 스승찾기 코너를 통하여 은사님을 찾을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선생님의 개인정보로 인하여 찾기를 희망하지 않는 선생님은 정보를 제공하여 드리지 않습니다. "

설렜던 마음이 일순간 가라앉더군요.

어떠한 사정이 생긴 것인지는 알 순 없지만 선생님께선 자기 정보를 노출시키지 않길 희망하신 채 교편을 놓으신 것 같네요.

너무 답답해서 안내번호로 전화상담까지 해봤지만 거기까지만 알려 드릴 수 있다는 답변만 받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질질질 끌다 기회를 놓쳤네요.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으로 찾아뵙고 싶어서 1년만, 1년만 ... 그렇게 외쳤거든요.

졸업과 입학이 한창인 설렘 가득한 이 시즌 한켠에는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계실 선생님들이 계십니다.

누구나 한 번쯤 받아보았을법한 선생님께 받은 사랑을 새로운 아이들에게 나눠주실 채비를 하시는 거겠지요.

여러분도 혹시 마음 속에 품은 은사님이 계신다면, 올 스승의 날에 찾아뵐 수 있도록 슬슬 찾아보세요.

각 시도 교육청 홈피마다 은사님 찾기 메뉴얼이 있거나 해당교육과(초등, 중등 등) 문의게시판 가면 많이들 찾고 있습니다.

서정웅 선생님. 너무 늦게 찾아뵈서 죄송합니다. ㅠㅜ 그리고 정말 고맙습니다. !!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찾아뵐 테니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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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23 13:46
수정 아이콘
찡하네요..
은사님 꼭 다시 찾아뵙길 바랍니다.
abrasax_:JW
11/02/23 16:32
수정 아이콘
글 전체가 정말 재밌네요. 즐겁기도 하고요.
좋은 정보도 검사합니다.
전 고마운 선생님들 리스트까지 써놨는데 늘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편지를 보내거나 찾아가야겠네요. [m]
낭만토스
11/02/23 17:20
수정 아이콘
그리고 그 어여뻣던 여동생은 지금쯤,,,?
11/02/23 18:32
수정 아이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글이네요.
근데 왜 뛰셨어요? 크크
큐리스
11/02/23 19:09
수정 아이콘
이 글에 굳이 굉장히 부정적인 느낌이 드는 셔틀이란 단어를 쓰실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제목만 보고서는 선생님이 굉장히 나쁜 분이라는 글인 줄 알았습니다.
루크레티아
11/02/24 00:46
수정 아이콘
매일 안 좋은 뉴스만 가득한 교육계지만, 저런 선생님들이 더 많이 계시기에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온 것이겠지요.
선데이그후
11/02/24 12:19
수정 아이콘
흐흐흐.. 본인확인용질문의 답을 알았습니다. 흐흐흐
11/02/24 12:33
수정 아이콘
재밌고 훈훈한 글인데 의외로 흥하진 않았네요.
꼭 그 은사님 찾으셔서 후기를 다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화이팅~~~ ^^;;;
발가락
11/02/25 16:32
수정 아이콘
뒤늦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추천드립니다. 따뜻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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