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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2/01 09:55:57
Name Geradeaus
Subject [일반] 소리 1 - 기형도
소리 1 - 기형도

아주 작았지만 무슨 소리가 들린 듯도 하여 내가 무심코 커튼을 걷었을 때 맞은 편 3층 건물의 어느 窓門이 열리고
하얀 손목이 하나 튀어나와 시들은 푸른 꽃 서너 송이를 거리로 집어던지는 게 보였다. 이파리들은 空中에 잠시 떠
있어나 볼까 하는 듯 나풀거리다가 제각기 다른 速度로 아래를 향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나는 테이블로 돌아와
지난 新聞들을 뒤적였다. 그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빛깔이 조금 고여 있었다.
스위치를 내릴까 하고 팔목 時計를 보았을 때 바늘은 이미 멈춰 있었다. 나는 헛일삼아 바늘을 하루만큼 뒤로 돌렸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내가 대답을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을 때 그는 소란하게 웃었다. '그냥, 거리
로요' 出入口쪽 계단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 명함꽂이 만년필 재떨이 등 모든 形體를 갖춘 것들마다
제각기 엷은 그늘이 바싹 붙어 있는 게 보였고 무심결 나는 의자 뒤로 고개를 꺾었다. 아주 작았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다시 窓가로 다가갔을 때 늘상 보아왔던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거리의 아주 작은 빈 곳까지 들추며
지나갔다. '빈틈이 없는 事物들이 어디 있을려구요' 맞은편 옆건물 2층 창문 밖으로 더러운 분홍빛 커튼이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 섭섭하다는 듯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버려 두세요. 뭐든지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는 깜빡 잊었다는 듯이 캐비넷 속에서 장갑을 꺼내면서 덧붙였다. '아니, 그냥 움직이고 있는 것일지라두 말이죠'
먹다버린 굳은 빵쪼가리가 엄숙한 表情으로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듯 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어둠과 거리는 늘상 보던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천장에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나는 앞핀처럼 꽂혀 있답니다'
그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빛깔이 조금 고여 있었다. '아무도 없을 때는 발소리만
크게 들리는 법이죠' 스위치를 내릴 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내 가슴 알수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익숙한 그 소리는 分明히 내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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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r 복구 후 첫 글입니다. 딱히 글을 자주 쓰는 회원은 아니었지만,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서 오늘은 꼭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니, 정말 할 일 없는 젊은이구나 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pgr이 복구된 지금도 도배와 가구배치를 새로 한 집 마냥 어색하고 생경한 느낌에,
'나도 이 곳의 구성원이다' 라는걸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로 적극적이진 않은 데 말이죠.


기형도의 시 '소리 1'입니다. 줄바꿈은 제 자의적인 것이므로 신경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기형도의 시를 많이 접해본 것은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한 없는 우울함' 입니다.  '소리 1'에서도 느껴지는 것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 어둡고 적막한 분위기입니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느껴지는 시각적 대비가 눈에 띕니다. 그리고 조용한 방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대화하는 '나'의 모습은 마치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환자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정신분열의 증세 중에 '타인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증세가 있다고 하더군요.


혹시 소리 1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회고록?
...저의 1차원적이고 저열한 분석은 기형도의 시를 그로테스크한 3류 공포영화로 만들고 맙니다.


기형도의 시나 단편소설에서 풍기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음울함과는 사뭇 다르게, 그는 활달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기형도의 친구 원재길 시인은 이렇게 기형도와의 추억을 기록합니다.

' ... 기형도는 내게 있어서 하나의 인상이다. 나는 인상을 일별로 훑어 본다. 보인다. 그가, 늘 같은 모양인 어깨걸이 검은 가방을 메고 외투깃을 휙휙 날리면서 지나간다. 그는 밥을 빨리 먹는 습관이 있다. 그가 근무하던 신문사 근처 식당에서 종종 우리는 라면을 툭, 두 토막을 내서 넣어 먹는 김치찌개로 점심을 나누곤 했다. 김치찌개는 이제서야 막 끓기 시작하는 참인데 이미 밥그릇을 반 너머 비워나갔다. 밥을 숨가쁘게 떠넣으면서, 그는 소나기처럼 말을 쏟아낸다. 밥이 들어가는 길과 말이 나오는 길이 한 입에 동시에 열려 있다. 이 얘기 하다가는 어느새 저 얘기, 저 얘기 하다가는 어느새 이 얘기로 유장하게 그러나 정신이 하나도 없게 말머리를 몰고 다닌다. 서두름과 조급함은 천성에 가깝다. 그와 나란히 앉아서 같은 잡지나 책을 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조용한 다방을 하나 찾을라 치면 앞장 서서 탐색에 분주를 떠는 데, 건물 속으로 서둘러 들어갔다가는 어느새 도로 빠져나오고, 다시 다른 건물로 사라졌다가는 이내 나타난다. 마치 건물들이 그를 삼켰다가 토하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드물게 그는 말없이 앉아 있기도 한다. 아주 드물다. 그럴 때 그의 우울은 노골적이다. 부산하게 움직일 때, 떠들 때, 노래할 때, 이런 저런 모임에서 뛰어난 재치와 유머로 사회를 볼 때, 나는 동시에 그의 지독한 우울을 읽어낸다. 무엇이 그를 저토록 허둥지둥하게 만드는가.
왜 그는 늘 허둥지둥대는 것일까. ...중략'


아주 드물게, 정말 아주 드물게 말 없이 앉아 있던 기형도. 요절한 천재, 음울한 작품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그의 '시끄러운 ' 이미지는
그가 외로운 사람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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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01 13:14
수정 아이콘
폭풍의 언덕에서 였나요
아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
이런 구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에 충격 받았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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