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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4/07 00:03:09
Name Eternity
Subject [일반] [잡설]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다
* 무거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기에 가까운 글인지도 모르겠네요.

#1.

학교에서 스터디 모임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나서...
전철에서 내려, 집에 가는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가방 하나가 눈에 띄더군요. 얌전히 정류장 옆 벤치에 놓여져 있는.
보아하니 생긴 것이 딱 노트북 가방이더군요.
처음에는 버스 기다리던 어느 분이 무거워서 잠시 놓아둔 것이겠거니 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제가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를 않고,
주변 다른 분들은 전부 다른 얼굴로 바뀌었는데 가방은 벤치 위에 놓여진 그대로더군요.
'혹시나' 싶어 주변 분들에게 '이 가방 주인 분 없느냐' 라고 여쭤봤었습니다.
답하시는 분들은 아무도 안 계시더군요. 서너번 외쳐봐도 주인은 나타나지를 않네요.

별 수 없이 나라도 가까운 경찰서나 파출소에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고 가방을 들었는데,
살짝 묵직한 것이 안에 들어있는 게 노트북이 맞는 듯 합니다.
주변에 계시던 한 아주머니께서 다분히 미심쩍은 얼굴로 한 마디 하시더군요.
그거 그 자리에 그대로 두면 주인이 가져갈텐데 뭘 가져가려 하느냐구요.


#2.

전철역 벤치 같았으면 그냥 역무실에 가져다 주고 말았을 테지만,
이유 모르게.. 그 아주머니의 그 한 마디를 들으니 이건 아니다 싶더군요.
버스 갈아타려던 것을 멈추고 일부러 택시를 잡으며 큰 소리로,
"아저씨 XX경찰서요" 라고 외치며 택시 문을 닫았습니다.


택시 네비게이션을 찍어보니 가까운 곳에 파출소 지구대가 있길래,
그냥 그 쪽으로 차를 돌려서 지구대로 들어갔습니다.


파출소 지구대 분들께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가방 안에 노트북이 들어있는 것 같다고 한 마디 했더니,
파출소 지구대의 경찰 분들도 놀라시더군요.

'참 좋은 일 하셨다' 라고 말씀은 하십니다만,
뭐랄까... '이런 사람도 있구나' 라는 눈길이었달까요.
저와 경찰 분이 가방을 같이 열어보니,
가방 안에는 역시 노트북이 들어있었고,
은행 통장과 현금카드, 그리고 한 제약회사 명함이 나오더군요.

아마 가방 주인 분이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셨나 봅니다.

명함에 찍혀있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보니,
술이 얼큰하게 취하셔서 정류장에 가방을 두신 채 택시를 타셨던 듯 하더군요.
(전화하기 전까지는 가방을 잃어버렸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계셨습니다.)


주인 분과도 연락이 되었겠다.. 시간도 늦은 시간이라 가방을 지구대에 맡기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3.

어릴 적에 부모님께서는 남의 것을 그릇되게 탐내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실, 가방을 들어보고 예상대로 묵직(?)한 것이 역시 노트북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순간,
삿된 생각이 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것을 부인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물건이라는 생각이 그런 삿된 생각을 이겨냈지요.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가방을 지구대에 가져갔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당연하지' 가 않은가 봅니다.
가방주인을 찾는 저를 미심쩍게 쳐다보시던 어느 아주머니의 눈빛 하며,
지구대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할 때 놀라워하시던 지구대 경찰 분들의 얼굴 하며,

돌아가는 길에... 무엇인가 자꾸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입장 바꿔서 제가 만일 그렇게 노트북이 들어있는 가방을 잃어버렸었다면 과연 노트북을 되찾으리라는 기대를 했을까.
입장 바꿔서 제가 만일 누군가 그렇게 주인을 찾고 있었다면 과연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입장 바꿔서 제가 지구대에 근무 중인 경관이었다면 그렇게 다른 이의 물건을 찾아오는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제까지 나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 '당연하지 않다' 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가 않더군요.



삶이 이렇다는 게... 참 씁쓸하네요.



* 기분은 나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삿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확인했으니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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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율
10/04/07 00:10
수정 아이콘
아, 저도 얼마전에 지하철에서 벤치에 놓인 가방을 두고 역무원에게 줄까? 아니면 그냥 놔둘까 고민하다 그냥 놔뒀는데 늦더라도 역무원에게 건네고 올걸 그랬나봐요.; 막차 일보직전이라 망설이다 그냥 지하철 타버렸는데 글을 읽으니 어째... 그 가방 주인이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좀 아쉽네요. 쩝.;
콜라박지호
10/04/07 00:16
수정 아이콘
잘하셨네요
9th_Avenue
10/04/07 00:35
수정 아이콘
Eternity님// 본문과 같은 일을 시작으로, 다시 당연한 일로 돌아갈 수 있을것 같네요~ 잘하셨어요~ :D
민첩이
10/04/07 01:03
수정 아이콘
이런 분들이 한분 한분 모여서.. ^^
10/04/07 03:03
수정 아이콘
좋은 일 하셨네요. 뭐.. 아주머니 입장에서야 의심쩍은 눈으로 보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니 너무 괘념치 않으셔도 돼지 싶어요.
10/04/07 09:33
수정 아이콘
물건 한두개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당연한 것입니다. 잘하셨네요 ^^
10/04/07 10:32
수정 아이콘
지갑이나 타인의 물건이 떨어져있거나 놓여있을때 항상 주변을 의식하게됩니다..
내가 이걸줍거나 들었을때 다른사람들의 눈빛이 변하기때문이죠..
그러면서 저자신도 좋은일할려고한건데 왠지 오해받지않을까 저사람들이 나를 의심하지않을까 라는생각에
집을려다 그냥 모른척지나가게됩니다... 입장바꿔 생각해보면 제물건도 저렇게 떨어져있거나 놓여있을텐데...
집에와서 막 찾으면서 불안에 떨텐데...
좋은일도 남의 눈치를 보게 될정도로 삭막해진 이 사회... 참 씁슬합니다..
글쓴님은 그래도 그러한 남을 의식하지않고 좋은일하신거에 대해 제자신이 부끄럽네요..
10/04/07 13:08
수정 아이콘
저도 지갑을 몇번 잃어버리고 못찾은 적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주말에 일본에 갔다가 그 지역 공중전화로 한국에 전화를 하다가 지갑을 나두고 왔었는데, 다시 가보니 없어졌더군요.
당시에 돈도 꽤나 있었고, 신분증같은 것들도 있었던 터라 참 곤란했었는데,
친구가 자신도 잃어버렸던 적이 있지만, 그대로 돌려받았다고 파출소에 가서 알아보자고 하더구요.
실망감도 실망감이었지만, 외국인지라 돈은 못찾아도 지갑만이라도 찾자고 생각해서 알아봤는데,
파출소에 이 비슷한 것이 들어와서 경찰서로 이관시켰다고 하더군요.

주말이라 월요일까지 기다려서 경찰서에 가보니, 제 지갑이 돈이 그대로인채로 있더군요.
상황을 알아보니, 제가 전화한 그곳에서 지갑을 발견하신 일본분이 그것을 그대로 들고 파출소에 가져다 준 모양이에요.
찾은분한테 사례하고 싶어서 그 지갑을 찾은 일본인한테 경찰이 연락을 했는데, 그 분이 괜찮다고 끊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해서 돌려받았는데, 참 기쁘면서도 기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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