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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11/13 00:46:45
Name 이적집단초전
Subject [일반] 731부대를 능가하는 대한민국 독립군, 이승만과 친일정부?
각종 시사적인 이야기를 보면서 재미있겠다 싶은 이야기들을 몇 개 소개하려 합니다. 이왕 하는 김에 스케일 크게 근대 100년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1. 일제시대.

  정운찬 총리의 731독립군드립을 기념하는 대한민국 건국훈장감들을 소개합니다.

  이쪽이야 워낙 많이 돌아다니는지라 적당히 긁어왔습니다. 원 출처는 이곳 http://backup.egloos.com/1040009 입니다.


  무다구치 렌야

  1888년 10월 7일 ~ 1966년 8월 2일
  사가 현 출신. 일본육사 22기, 일본 육대 29기.

  노구교 사건이나, 태평양 전쟁 초의 말레이 작전 등에 관여 활약하고 있다. 최종 계급은 중장.
키무라 헤이타로, 토미나가 쿄지 등과 함께 토조 히데키의 심복 부하 중 하나.
  --- 그냥 대충 동남아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파견 되었던 장수.





  1. 임팔 작전.

  1994년 임팔 작전 . 2000m 의 산악지대와 정글로 둘러싸여져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작전은 보급을 하찮게 보았고, 그로 인해 여러 참모와 인물들 등이 무다구치에게 항의를 했지요. 그러나 무다구치는 '영국군의 약하다. 반드시 퇴각할 것이다.' 라며 강경하게 주장하여, 결국 작전이 실행되게 이릅니다. (무다구치가 이 작전을 하자고 우긴 이유는 영국군이 인도를 점거하는 방법을 보고 '아! 영국군이 산으로 몰래 들어와서 인도를 탈취했구나. 나도 따라해야징' 라고 맘대로 생각하여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결과는 패배.

  무다구치는 이렇게 항변했습니다. "나는 징기스칸 작전을 실행하려고 하였다"  (징기스칸 작전 : 소에게 짐을 옮기게 하고 산을 넘으면 식량으로 바꾸는 것.) 그러나, 원래 미얀마의 소는 저습지에만 익숙해져 있고 장기간의 보행에는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소의 음식용 풀 준비도 미흡했기 때문에 소들은 길가에서 차례로 죽어갔습니다. 거기에 참모들이 더 항의를 하자,  

  "일본군은 원래 초식동물인 것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풀이 이토록 많으니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라는 명대사를 탄생하기에 이릅니다.


  거기다 당시 일본군의 증언에 따르면 "무다구치 각하가 좋아하는 것은 첫째가 훈장, 둘째가 메이바(미얀마 어로 여자), 셋째가 저널리스트" 라는 말이 돌았다고도 합니다.

  그 후에 이 임팔 작전은 그 당시 일본육군의 무능을 상징하게 됩니다.




  2. 전쟁 중의 무능

  보급이 부족해 고전이 계속되던 전쟁 중에도 기생과 붕가붕가를 즐기고 그걸 들은 영국군이 스피커로 그 장면을 생방송 중계. 부하들의 사기는 바닥을 기고, 거기에 전선부대에 대해 '후퇴는 절대로 못함 ! 닥치고 지켜라 !' 라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후에 전선부대는 박멸 당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사령부가 영국군에게 노출되자, 바로 자기 혼자 튀어버립니다. 이 결과로 미얀마를 잃어버렸으며, 또 다른 명대사를 남깁니다. "공세 하러 나왔기 때문에 미얀마를 잃는 것을 끝난 것이며 임팔 작전이 없었다면 동남아시아 전부를 잃었을 것이다"

  제15사단장 야마우치 마사후미는 전투 상세보고에서 "공격하는 병사에게 총알이 없으며 일선부대는 호우중의 진흙탕에서 병과 기아로 전투력을 상실해 가는 이 상황은 실로 군과 무다구치의 무능" 이라고 말해, 그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다 임팔 작전 실패 후에 스스로 건축한 요배소(일왕을 참배하고 경례하는 곳)에 간부급 장교를 모아서 1시간 이상 훈시를 실시했지만 간부 장교들까지도 영양실조로 서있지를 못하고 쓰러졌을 정도로 웃긴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3. 이후의 사건.
  임팔 사건 실패로, 부하에게 '일왕에게 죄를 졌으니 걍 할복 하면 안 됨?' 라고 상담을 요청, 부하는 '할복자살을 한다고 하시니, 막료로서 일단 말리기는 하겠습니다만, 사령관으로서 책임을 느끼고 계시다면 그냥 물러나 주십시오. 이번 작전의 실패는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 라고 냉정하게 비판. 결국 할복을 안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장군이었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감옥에 들어가게 되지만 '오히려 일본군에게 손해를 줬다' 라는 이유로 기소가 중지됩니다.


  그 후 도쿄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지만, 임팔 작전에 대해 책임을 물을 때 마다, "그것은 내 탓이 아니고 부하의 무능함 때문에 실패했다" 라며 모르쇠로 일관하였습니다. 1966년 사망할 때 까지도 병사들에게 사죄의 말이 없었으며, 유언에도 자신의 장례식에서 자기변호를 인쇄한 광고지를 배포시킨 인물이 되겠습니다.




   츠지 마사노부

  츠지 마사노부 (1902 - 1968 ?)
  일본 육군 참모였으며 노구교사건을 일으킨 자였다. 또한 종전 후 정치가로 활동. 일명 '작전의 신' 으로 불렸던 남자. 하지만 진실은 '작전의 bottle신'.


  1.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
  몽골과 소련 연합군은 탱크로 무장. 일본군은 츠지 마사노부의 '총검백병주의' 로 인해 총과 검으로 무장. 결과는...

  ...많은 일본군은 만주 땅에 좋은 거름이 되었습니다.

  패전 후 "소관의 작전내용은 완벽했으나, 일선 지휘관들의 졸렬한 지휘와 감투정신 부재로 패전" 이라고 보고 결국 일선 지휘관들 할복 자결. 그러나 츠지 마사노부는 오히려 승진.

  2. 과타카날 전투


  츠지 마사노부가 오기 전에 다른 파견장수가 이미 이곳에서 두 번의 패전을 경험했었음. 두 번째로 파견된 장수인 가와구치가 츠지에게 '미국군 X나 무서움;; 가지마셈;;' 이라고 하니까 츠지 마사노부는 '양키는 X만 큰 오랑우탄임' 이라고 생각. (했을걸요) '돌격만이 살 길이다' 라는 주장으로 돌격을 주장. (미국은 그 당시에 일본군의 정찰을 모두 마치고, 전쟁 할 준비가 모두 되어있었다.) 그러나 츠지 마사노부는 정찰 따위 대충하고 '미군이 테니스나 치면서 놀고 있다' 라는 개소리를 일본에 보고. 거기다 가와구치가 훨씬 더 좋은 공격 방안을 냈지만, 이를 구실로 삼아 모함하여 파면조치 시킨다. 결국 그냥 어택 땅 찍었던 일본군은 당연히 질 수 밖에 없었다.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서술. 베스트셀러가 된다. 후엔 정계에 데뷔해 의원으로 발탁.







   토미나가 쿄지

   토미나가 쿄지(1892년 1월 2일 - 1960년 1월 14일) 별명은 "도조 히데키의 돈주머니"


  1944년 8월에 신임 육군상 스기야마 하지메에 의해 제4항공군 사령관으로 전출되어 9월 8일 마닐라에 착임했다.

  1. 배경

  토미나가 쿄지는 전선에서 실정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일본군의 골칫거리가 되었던 인물로서, 할 줄 아는 건 '특공에 임하게 되면 술을 들고 나와서 훈시를 길게 늘어놓는 것' 라고 생존자들이 증언하였습니다. 특히 훈시 중에 명대사가 탄생하였습니다. "제군들은 벌써 신이다. 너희들만을 가게 하지는 않는다. 마지막 일전이 되면 본관도 특공하겠다"

  후에 자기만 비행기타고 탈출.

  카미가제에서 자살공격을 하지 않고 돌아온 특공대원은 가차 없이 매도하였고, 약 62회에 걸쳐 400기에 자살특공을 명령, 파일럿 전원을 전사시켰습니다.





  오오니시 다케지로.

  가미카제의 창설자. 후엔 일본인 1억 명을 가미카제로 보내자고 주장도 하였다.

  결국엔

  <본토를 공습하러 온 b29에 바짝 달라붙어 미군기지 까지 날아간다. b29에 착 달라붙어 있으면 적도 공격할 수 없을 것 이다. 이렇게 해서 미군기지에 돌진, 차례차례로 파괴시키는 방법을 끄면 일억 총 공격으로 미국을 격퇴시킬 수 있다.>

  라는 괴랄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스스로 선두에서 젊은 특공대원들에게 오토바이에 폭탄을 장치해 돌진하는 훈련을 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었으며, 결국 많은 일본인 젊은이들의 자살폭죽놀이를 보여주게 되었다.

  메레타시 메레타시!


이분들의 분투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은 더 늦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상으로 안중근, 김구 선생님만큼이나 소중한 대한민국의 독립투사들이셨습니다.








1. 이승만 대통령 시절.

  친일 인명사전이 발간되었습니다. 역시 방응모, 김성수를 모시고 있는 조선과 동아가 발작을 했었지요. 자그마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사건이랍니다. 중앙조차 친일파 사주님이 안 계신 관계로 침묵하고 있습니다. 저 두 신문이야 어쩔 수 없지요. 주인님이 욕을 먹고 있는데 충견들이 열심히 짖어야지요. 그런데 정말 대한민국은 친일파로 시작한 나라일까요?

  http://orumi.egloos.com/4272518 에서 긁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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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내각

조선과 동아가 친일인명사전을 정통성 문제로 끌고 가는 것을 볼 때, 이들의 정통성이란 대체 무엇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1948년 정부 수립 때, 내각은 다음과 같았다.



절대 다수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며, 일제에 의해서 탄압 받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향후 행적이 어땠는지를 떠나서 딱 해방 시점에서 이야기해보면 이런 정도면 양호하다 할 수 없을까?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 6형제와 함께 만주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설립. 임시정부 법무총장, 재무총장, 감찰위원장, 재무부장 역임했다. 일전에 화제가 되었던 이종걸 의원의 작은 할아버지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 - 3.1운동 참여. 임시정부 법무차장, 외무총장, 내무부장 등 역임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 일제강점기 인권변호사. 1932년부터 물러나 은둔. 일제의 배급도 거부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소속으로 청산리 전투 참여. 광복군 사령부 참모장

외무부장관 장택상(張澤相) - 해외에서 독립운동. 청구 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풀려난 후 해방 때까지 은거 생활
재무부장관 김도연(金度演) -3.1운동에 앞선 2·8독립선언을 주도하여 투옥. 1942년 다시 체포되어 20개월 복역
법무부장관 이인(李仁) - 일제강점기 인권변호사. 수원농림학교 학생 사건 변호하다 6개월 정직.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집행유예 3년형
농림부장관 조봉암(曺奉岩) - 3.1운동 투옥. 상해임시정부 경무국 직원. 1930년 공산주의 운동 중 체포되어 7년간 복역
상공부장관 임영신(任永信) - 1919년 3.1운동 참여 6개월 집행유예. 상해임시정부에 관여
체신부장관 윤석구(尹錫龜) - 황포군관학교 2기생. 임시정부 삼수지국 밀파 공작원. 국내자금책으로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 송금 역할을 수행

무임소장관 지청천(池靑天)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 고려혁명군 결성. 대한독립군단 조직. 조선혁명당 창당. 광복군 총사령관이었다. 일명 이청천
무임소장관 이윤영(李允榮) - 3.1운동 참여로 투옥

이건 뭐, 거의 전과자 내각이다. 범죄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드문 형국.
내각 중 친일 인명사전에 들어간 사람은 둘.

내무부장관 윤치영(尹致暎) - 일제말기 시국강연회 및 좌담회 참석. 친일기고문 발표 등 친일 의혹이 있음
법제처장 유진오(兪鎭午) - 친일작품 8편의 친일의혹이 있음 (법제처는 국무총리 산하기관으로 장관급은 아님)

  이 두 사람이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가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훼손된단 말인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정통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정의하고 다음 논의를 행해야 할 것 같다.
=====================================================

  1공화국은 헌법에 분명히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정통을 잇고 있고 지금 건국 60년을 주장하는 모 정권과는 다르게 1919년을 건국한 해라는 것을 천명했었습니다. 실재로 초기 내각을 보면 대부분이 독립지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친일 의혹조차 사실은 경미한 사안입니다. 워낙 유명하다 보니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게 된 것이지요. 이러던 게 무너진 결정적인 계기는 사실 6.25입니다. 남북분단과 반공으로 몰아가는 사회분위기가 친일파가 부활하게 된 단초를 제공한 것이지요.




  까는 김에 뉴 라이트도 좀 까 봅시다.

  얼마 전에 PGR에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이라는 떡밥이 있었지요. 일제에 종속되어 있고 그래서 해방되자마자 대한제국 시절의 80%수준(1911-777달러 -> 1945년-616달러, 90년 달러기준) 으로 떨어져버린 경제지만 뉴 라이트들은 일제 강점기 평균 3.5% 성장을 했다며 일제의 긍정적인 영향을 이야기 했었지요.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리셋. 그 다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 찌질 했다던 이승만 정권기 중 전후 1954~1959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5.35%, 특히 2차 산업 성장률은 13.3%였습니다. 다까끼우스 가카가 나오시기도 전 부터지요.

  경제학에서 기회비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교(일제)시절 매 경기 완투 시키고 맨날 구타하고 심지어 알바까지 시키고 학부모의 돈을 운영비 명복으로 갈취해놓고 정작 선수 훈련은 소홀히 했는데 그래도 프로(한국)팀 가니 좀 덜 때리고 쥐꼬리만 한 월급도 주고, 밤에 알바를 시키거나 부모님 돈을 갈취하지는 않고 최소한 7이닝 던지면 마무리도 있고 다 던지고 나면 어께를 얼음 팩으로 식혀 주더란 말입니다. 이랬는데 야구기자(뉴 라이트)가 '고교 감독덕에 큰 선수가 되었지'라고 하는 격이지요.

  쉽게 말하면 이것이지요. 일제시대 조선인은 조선시대 백성보다 못먹고 못살았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1공화국 국민은 조선시대 백성보다는 잘먹고 잘살았습니다. 개똥에 굴러도 이승이 낫고 막장 정권이라도 독립국가에서 사는 것이 백성들 먹고 살기에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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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13 01:02
수정 아이콘
기다리건 정치 관련 능력자 워리어분의 귀환입니다. 환영합니다 :)

일본군이 정신력 정신력 노래를 부르다가 제대로 망했다더니, 물론 가장 극단적인 경우들을 모아오신 것이겠지만, 이건 뭐 적군인데도 안습한 수준이네요.

이승만 초대 내각은 저도 몰랐던 이야기입니다. 확실히.. 처음은 그래도 좀 해보려고 하긴 했었군요. 한민당도 이승만한테 이용만 당했다고 볼 수 있었으니, 이승만 전대통령이 비범하긴 했지요. 근데 잘 나가다가 왜 나중에 그모양 그꼴이... 사람은 역시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것인데 말이죠.
Zakk Wylde
09/11/13 01:10
수정 아이콘
유게에서 몇번 본 기억이 있을 정도로 Bottle신이죠..

뉴라이트들... 일본 가서 일본을 위해 일해주는게 우리를 위한 길인듯..
이적집단초전
09/11/13 01:16
수정 아이콘
OrBef2님// 사실 이때도 친일파를 비호하긴 했습니다. 다만 경찰들에 한한 것이었지요. 이승만 정권에 충성스러운 무력을 담당하는 부분은 군대 보다는 경찰쪽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사실 피부로 가장 드러나는 친일파들이 바로 일제시대 순사들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리박사에게 충성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그걸 리박사가 철저히 활용했지요. 반민특위가 쓰러진 이유입니다.
앙앙앙
09/11/13 01:17
수정 아이콘
많은 거 배우고 갑니다. 며칠 전에 박정희 친일 관련 글을 적었는데, 이렇게 자세한 자료를 가지고 친절히 글을 적어주셔서 더욱 공부가 됐네요. 이적집단초전박살...이라는 단어에도 공감합니다.
09/11/13 01:18
수정 아이콘
츠지 마사노부가 그 유명한 반자이 돌격을 주창한 사람인가요 낄낄
09/11/13 01:28
수정 아이콘
이적집단초전박살님// 제대로 그 분야를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경찰과 이승만의 유착에 대해서는 들어본 기억이 납니다. 근데 소속단체에 건준은 전혀 없네요. 한 명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제가 뭔가 착각을 했는지.. 하여튼 의외네요.
죽음에 이르는
09/11/13 01:29
수정 아이콘
절대적인 가치에 상대적인 잣대를 들이댑니다.(친일인명사전 논란)
상대적인 가치에 절대적인 잣대를 들이댑니다.(루저 논란)

100분토론을 보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전혀 다른 두 논란이 마치 하나의 사건처럼 느껴지네요.
내일은
09/11/13 01:53
수정 아이콘
노몬한 전투는 거의 리얼 버라이어티 수준이죠.
이태원서울팝
09/11/13 02:04
수정 아이콘
제가 대학교때 총장님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자중의 한분이던 윤 총장님이었습니다. (한성대 나왔습니다) 그때 저희 대학역사상 처음으로 총장님이 교양 수업을 진행하셨었죠.

그때 친일 인명사전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란, 현재의 평가도 중요하지만, 그 시절의 상황에서 그 것이 어떻게 민중들에게 다가갔느냐도 무시못할 것이다라는 얘기를 하셨죠.
이승만이나 박정희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때의 사실에 입각해서 만든다는 점을요

살아보지 못해서 모릅니다만, 친일 인명사전이란 지금의 기준이 아닌 그때의 행위에서 비롯되었단 걸 역설하시더군요.
아야여오요우
09/11/13 02:20
수정 아이콘
렌야라는 분은 그 무능함이 연합군에 이롭게 작용했다는 이유로 전범재판에서도 무죄를 받으셨다는 독립유공자급 인물...
09/11/13 05:58
수정 아이콘
그나저나 리박사 말기때 경제성장률이 5.35% 나 됐었군요. 리박사가 낙농업 육성 정책을 썼다는 얘기와 13.3% 의 2차산업 성장률도 정면으로 배치되구요.

보통 < 장면 정부때 기획한 것을 박통이 실행했다 > 라는 공식이 있습니다만, 그럼 최소한 리박사때는 장기 경제 개발 플랜은 없었다는 얘기인데, 저때의 성장동력은 뭐였을까요.
이적집단초전
09/11/13 08:36
수정 아이콘
OrBef2님// 경제개발계획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1951녀『5개년 계획안』,1953년 『경제재건계획의 기본방침』,1954년 『한국경제부흥 5개년 계획안』등이 있었지만 '일본은 공업국, 한국은 소비국'이라는 미국의 지침때문에 무산되었지요. 그러던 것이 당시 우위에 있던 공산권의 평화공세(남조선 인민 여러분! 북조선이 더 잘살아요!)가 심했고 미국도 슬슬 경제 원조 삭감을 생각한 때였습니다. 남한을 일본 공업의 소비시장으로 놔 두는게 아니라 독자적으로 경제발전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됩니다. 결국 1956년부터 미국의 인식이 남한의 산업 발전에 우호적으로 바뀌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수출이 급증했고 섬유, 식품등의 경공업등의 산업과 전후복구를 위한 건설업 급성장하게 되었지요. 거기서 나온 정책이 1956년의『무역체제강화요령』이었습니다.

아, 그리고 성장동력은 당연히 천조국님의 은혜였지요. 이승만 시절 경제를 지탱하는 근간이 바로 미국의 원조였으니까요.
오늘도데자뷰
09/11/13 09:3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일본 출신 독립 유공자들의 맹활약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일본인으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후후;;
09/11/13 09:37
수정 아이콘
이적집단초전박살님// 에잇 성장동력이 천조국님이란 것은 모두 알지만 덮어두는 공공연한 비밀인.. (응?)

'무역체제강화요령' 이라..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답글 감사합니다.
09/11/13 10:29
수정 아이콘
`1994년 임팔 작전` 덜덜덜 오타시겠지요^%^?
루크레티아
09/11/13 11:07
수정 아이콘
그래봐야 반민특위 때려잡은 것 하나로도 이승만은 두고두고 까일 소스 제공입니다.
덕분에 지금 이런 친일인명사전 같은 안해도 되는 일을 하고 있으며, 친일파의 후예들과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을 하고 있으니 말이죠.
09/11/13 12:23
수정 아이콘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장군이었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감옥에 들어가게 되지만 '오히려 일본군에게 손해를 줬다' 라는 이유로 기소가 중지됩니다"

웬지 독립기념관에 모셔야 될 것 같은 분위기...
Noam Chomsky
09/11/13 12:35
수정 아이콘
빈 터님// 반대로 우리나라 인물 중 몇몇 분은 일본에서 고마워하며 기념관을 세워 줄 수도 있겠군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나중에 토론 할 일 생기면 딱 한 줄 써먹겠습니다.
"일제시대 조선인은 조선시대 백성보다 못먹고 못살았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1공화국 국민은 조선시대 백성보다는 잘먹고 잘살았습니다.
개똥에 굴러도 이승이 낫고 막장 정권이라도 독립국가에서 사는 것이 백성들 먹고 살기에는 좋습니다."
쿠루뽀롱
09/11/13 15:43
수정 아이콘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어느 군대든 저런놈들이 존재하는군요. 그런데 왜 이놈들은 계속 승진하는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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