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메뉴얼은 유유히와 같이 평범한 상식을 갖춘 일반인이, 지식이 철철 흘러 넘치는 교양인을 상대로 '나는 너보다 많이 아니깐 아는척 하면 큰코 다쳐'라고 위협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마치 약한 곤충 등 위에 큰 눈 모양의 무늬가 있어, 쉭쉭거리며 천적을 위협하는 안타까운 허세나, 수레를 위협하는 사마귀 당랑거철의 형세와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아래 메뉴얼은 '자신감 있게'인용하는 것이 중요하며, 기죽은 듯이 '..아닌가?' 식으로 인용하면 성난 적의 물어뜯기에 당할 우려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너 때문에 내가 망신 당했다고 화내지 마시고,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현학적인 척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흔히 철학적 화두를 던지게 마련입니다. 아래에는 똑똑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철학적 화두를 던져야만 하는 상황에 몰렸을 때, 혹은 잘난 사람인 척 말문을 열고 싶을 때 활용할 만한 몇 가지 사례들을 적었습니다. 물론 그 뒤에 철학자가 주어가 되고 사상이 동사가 된 폭포수 같은 논쟁을 보게 된다면, 한발짝 물러나 싱긋 웃어 보이는 것 또한 미덕이라 하겠습니다.






1. 인간의 본성 -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토마스 홉스 - "인간의 본성은 고독하고, 비천하고, 추하고, 야만적이고, 거칠다."

흔히들 '성선설'과 '성악설' 로 대비되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쟁거리가 되겠습니다. 인간은 본래 악한가? 인간은 본래 선한가? 우선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보겠습니다. 신에 의해 태어난 아담과 하와(이브)는 신이 흙을 빚어 만들어낸 순결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악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론상으로는'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해라. 뱀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던 선악과를 따먹고 맙니다. 하와의 핏속에는 '불복종'이라는 악의 인자가 언제부터 흐르고 있던 것일까요? 결국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맙니다. 어차피 태생부터 죄로 물든 아담과 하와이니만큼 이 둘 사이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이 나온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뭐 좋습니다. 시간을 뒤로 돌려보죠. 수천년, 어쩌면 수만년이 흐른 뒤,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자진해서 속죄양이 되어 인간들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죽었습니다. 우리들은 다시 죄를 잊고 순결해진 것일까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악은 다시 창궐했습니다. 이 악이 어디서부터 튀어나온 것일까요? 우리의 핏속에 헤모글로빈 숫자만큼 죄악이 흐르고 있지 않다면야, 도저히 이 악이란 존재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 수가 없군요.

이영도 작가의 소설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죽이지 않으면 죽임당하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이 '죽이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우리가 태어났다며, 우리 모두가 살인자의 후손임을 지적합니다. 수만, 아니 어쩌면 수천만년 동안 쌓여온 악의 유전자가 우리 몸 속에 흐르고 있다는 말이죠.

저는 어쩌면 '선'이라는 것이 인간 본성에 반대되는 것들만 모아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말에 의하면 '당위當爲는 당위이기에 당위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해야 한다'는 말은 실제로는 그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담배를 싫어한다면 금연해야 한다는 '당위'가 생겨날 턱이 없지요. 누구나 외모에 무관심하다면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자'라는 '당위'가 주창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선하다면 '선을 추구하자'라는 가치는 존재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메뉴얼 제작자로서는 위의 논거들을 들어, 제시된 주제에서 '성악설'을 적극 지지할 것을 추천합니다....만은, 토론의 분위기를 보아 슬쩍 곁다리를 넣는 것도 추천합니다.




2. 방법론적 회의의 유효성 - 나는 생각하면 존재하는가?

르네 데카르트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틴어로 "코기토 에르고 숨" 은 철학자들의 말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 중 하나입니다. 요 말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모든 것을 의심해보자. 내가 보는 것이 진짜일까? 누군가가 내 눈에 아이맥스 안경을 씌워 놓은 것이 아닐까? 내가 먹는 것은 진짜일까? 사실 주위 모든 것들이 CG이고, 내가 무언가를 먹으려 할 때마다 어떤 맛이 나는 알약을 입안에 집어넣는 것이 아닐까? 아니야, 아예 '나'라는 것이 존재하는게 맞는 건가? 이 모든 것이 환상이고, 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 의심을 가리켜 '방법론적 회의'라고 합니다. 이런 방법론적 회의를 거치고 난 데카르트는 "아니야! 이렇게 끊임없이 '의심'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외부세계가 아무리 믿을 수가 없어도, 그 외부세계를 '의심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해!" 라고 외치며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생각(의심)한다. 고로 (의심하는 나는) 존재한다."

얼핏 보면 흠잡을 데 없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나는 '의심하는 나'라는 것이 있다고 믿게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데카르트는 대답할 수 없을 겁니다. 만약 억지로 대답한다면,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가 되겠지요. 그러면 또 묻습니다.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는 나라는 것이 있다고 믿게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그러면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에구, 그만하지요.

결국 다 말장난이라는 말입니다. 이 논제에 대한 논쟁은 데카르트의 사유가 유의미한 것인지 무의미한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폴라립스 랩소디에서는 "생각"이라는 것이 "과정"임에 착안하여, 생각이라는 과정으로 존재라는 순간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존재는 가변적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순간에도 변하거든요.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서의 '나'를 설명할 수 없게 되죠.

이건 메뉴얼 제작자로서도 복잡해지는군요. 어쨌든 이건 철학서적이 아니라 '논쟁거리'를 던지는 역할이니 그만하도록 하겠습니다.





3. 인식론의 한계 - 존재론과 지각론

"나무 한 그루가 숲에서 쓰러졌다.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과연 그 소리는 존재하는 것인가?" -조지 버클리 주교

누군가는 인간의 생각과 개념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현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존재'란 '지각'과 분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너무 어려운가요? 쉽게 풀어 말하자면,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누군가의 생각 속에 그 개념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흠, 그래도 어렵군요. 실례를 들겠습니다.

지금 당장 개울가에 가서 자갈 하나를 집어든다고 칩시다. 그것은 자갈이겠죠. 하지만 '자갈'이라는 말은 '내가 집어든 자갈'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언어와 대상에 관한 논의로 흐를 것 같군요. 삼천포로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내가 집어든 자갈에 '자갈A'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칩시다. 그 다음 자갈A를 휙 던져버리고 자갈B를 집어듭니다. 자갈B는 자갈A에 비해 더 크고 더 둥글둥글합니다. 이렇게 자갈A와 자갈B는 구분되고, 유유히라는 사람에게 지각됨으로서 비로소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자갈 A와 자갈B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지각하기 전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자갈'이라는 '대명사'로서의 돌조각들은 존재하겠지만, 독특한 그들만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자갈A와 자갈B는 존재하지 않던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뜬금없이, 자갈Z라는 놈을 가정합시다. 이 자갈 Z는 나도 본 적이 없고 PGR분들도 본 적이 없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어떤 형태의 자갈이라 칩시다. 과연 그 자갈 Z는 존재할까요? 혹자에 의하면 그 답은 '아니다'입니다. 왜냐면, '지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얼핏 언어와 대상에 관한 논의로 오해하기 쉽습니다만, 사실 비슷한 면도 있지만 약간 다른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떤 것"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또다른 이들은 '다 말장난이다'라고 말하겠지요. 그리고 나서 '왜 말장난인지를' 말할 겁니다. 주의깊게 경청한 다음 의견에 따라서 반론을 제기해 주거나 고개만 끄덕거려 주면 됩니다. 참 쉽져잉.




4. 윤리적 관점의 자살 - 카뮈의 '부조리'

"가장 진지하고 참된 철학적 문제는 자살이다." - 알베르 카뮈

카뮈라는 위대한 철학자는 '시지프스의 바위'를 인용하여, '삶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주문했습니다. 삶은 분명히 부조리함 투성이이지만, 그 부조리함을 인식하고 직면하여, 냉담하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몸부림 - 시지프스가 밀어 올리는 바위 - 자체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간 황당하게도, 삶의 부조리가 너무 심해 감당하기 어려울 때에는 자살도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나약한 인간 또한 긍정하는 걸까요? 카뮈 본인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는데 이 사고가 자살인지 아닌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어 논란거리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쨌건 자살에 관한 문제입니다. '자살은 죄'라고 기독교 신자들은 손쉽게 말합니다만, '어째서 죄인가?'라고 물으면 약간 답답한 대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일이다"라고 말할 겁니다. 사실 자살이 죄가 아니라면 어서 빨리 천당에 가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죽어버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교회로서는 집단 자살을 막기 위해서 불가피한 입장이라고 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내 목숨은 하나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차피 찬반이 극렬할 수밖에 없으니, 여기서 기독교적 논의는 무용하겠군요.

자살은 살인인가? 물론 그러합니다. 자살은 '나'라는 인격체를 죽이는 '나 자신'의 살인입니다. 그렇다면 자살은 '죄'인가? 이 질문은 약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살인은 죄인가?'라는 질문부터 선행되어야 하니까요.

?? :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살인이 죄가 아니라고?

물론 살인은 죄입니다. 하지만 살인이 죄가 되는 이유는 모두 '남의 무고한 목숨을 죽이고...' '남의 인생을....' 등등, 필연적으로 타인과 연계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타인을 죽이는 살인'은 분명 죄이지만, '자신을 죽이는 살인'은 물음표인 것이죠.

그렇다면 예를 바꾸어 봅시다. '상대방이 죽여줄 것을 부탁하여, 상호 동의 하에서 살인하는 것은 죄인가?' 복잡한 문제입니다. 현행 형법에서는 살인죄로 처벌 대상이긴 하지만, 여기에서 '상대방'을 '나'로 바꾸면 그게 자살이 되거든요. 그럼 자살은 죄가 되네! 싶어도, '자해'라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공갈사기가 병행되지 않은 자해는 처벌 대상이 아닙니다. 뭐 집에서 정신과 치료를 강제로 받게 할 수야 있겠습니다만.

'상대방이 해칠 것을 부탁하여 상호 동의 하에서 위해를 가하는 것'은 죄인가? 란 질문이 가능합니다. 위의 예를 보아서는 죄가 될 것 같지만, 그건 지금도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SM플레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상호 동의 하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법적 처벌대상도 아닙니다. 폭행죄는 친고죄이기 때문이죠. 뭐 법전을 떠나 이 사회가 유지되는 윤리학적 입장에서 어떻게 자살과 자해를 평가해야 할지 머릿속이 다 복잡할 지경이군요. 하지만 걱정마세요. 대신 싸워줄 현학가들이 있잖아요. 우리가 할 일은 그냥 말머리를 던지는 것일 뿐입니다.








휴, 복잡한 문제들이 많군요. 어려운 것을 어렵게 쓰는 것은 참 쉽지만, 어려운 것을 쉽게 쓰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새삼 크게 느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위 메뉴얼은 '아는 척'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위 내용은 철학적 화두를 던질 때 '나 많이 알아.'식으로 어깨를 으쓱하는 데 쓰여야 할 것입니다.

ps. 위의 문구들 중 일부는 '멘탈 플로스(한국 출간명 지식의 통조림) - 졸업식장에서 들어보았을 만한 경구'에서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