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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9/25 12:04:14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역사불판-중세사3)광해군과 인조반정
중세사 마지막 불판입니다.각각은 주제별로 있으니 잘 찾아서 토론을 벌이고요(저도 이제부터 참가해볼 예정입니다.)

그리고,지난번 고대사편의 이벤트 당첨자를 제맘대로 뽑았습니다.
"재미를 위해서 각회마다 한 분씩 선정해서 3만원 이하의 도서상품을 전달해 드리는 이벤트"

당첨자는 信主SUNNY (아이디 petity)님입니다.
제게 혹은 timeless님을 비롯한 운영진에게 ‘성함, 전화번호, 주소, 책이름’이 적힌 쪽지를 전해주시면 됩니다.


다음주는 추석이라 쉬고요, 다다음주에 근대사 불판을 올리겠습니다.(추후 공지^^)
모두 즐거운 토론,그리고 즐거운 한가위 되시길 바랍니다^^


3.광해군에 대한 재평가와 인조반정의 의미


먼저, 홍승식님의 인조반정에 대한 문제제기 글을 발제문으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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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선조가 최악의 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종과 세종에 의해서 기틀을 잡은 조선왕조는 세조와 성종때 전성기를 누렸는데,
세상사 다 그렇듯이 전성기 이후는 내리막길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성종은 그닥 똑똑한 왕은 아니어서 세조 때부터 힘을 키우기 시작한 훈구대신(한명회일파)에게 휘둘렸고,
연산군이라는 희대의 폭군을 만들 예비 작업까지 했죠.

연산군 이후 중종반정이 있었지만, 반정 이후에는 당연히 왕을 추대한 세력이 커지기 마련이어서,
세조때부터 힘을 키운 훈구대신의 병폐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선조로서는 적자가 아니라는 약점까지 있었으니,
왕권을 키우기 위해서는 신권을 억누를 수 밖에 없었고,
힘이 없는 왕이 신권을 억누르는 방법은 숙종때를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신하들간에 대립을 조장하는 거죠.

문제는 선조가 왕이 되었던 16세기 후반은 중국대륙이나 일본열도나 모두 주축세력이 바뀌는 격변기였다는 거죠.
격변기에 정체되어 있던 나라의 왕으로서 선조는 잘했다고는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죠.

조일전쟁을 극복한 인물들도 모두 선조가 발굴한 인물이라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고려말부터 조선에 반대하며 은거해 공부하던 사림파들의 풀이 넓어졌기에,
인재들이 쏟아져 나와서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했지만요.

문제는 선조보다는 인조반정이죠.

그리고,
조선시대에 안정적으로 정권교체가 되어서 치세가 이어진 경우가 거의 없더군요.
(적장자가 왕위에 오르고 재위기간이 10년 이상인 경우)

태조 : 창업
정조 : 둘째 아들, 1차 왕자의 난
태종 : 다섯째 아들, 2차 왕자의 난
세종 : 세째 아들, 장자는 폐세자
문종 : 큰아들이나 재위기간 3년
단종 : 큰아들이나 어린나이에 등극, 재위기간 3년
세조 : 반정으로 즉위
예종 : 큰아들이나 재위기간 2년
성종 : 세조의 손자, 예종의 조카
연산군 : 폭군
중종 : 반정으로 즉위
인종 : 큰아들이나 재위기간 2년
명종 : 중종의 둘째 아들, 인종의 이복동생
선조 : 후궁에서 태어난 서자 출신
광해군 : 후궁의 아들
인조 : 반정
효종 : 둘째아들
현종 : 큰아들, 재위기간 15년 (조선 역사상 처음)
숙종 : 큰아들, 재위기간 46년 (2번 연속 정상적인 정권 교체)
경종 : 큰아들, 재위기간 4년
영조 : 무수리의 아들, 천출
정조 : 영조의 손자.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의해 사사됨
순조 : 둘째 아들, 세도정치 시작
헌종 : 순조의 손자
철종 : 강화도령, 정조의 이복동생의 손자
고종 : 흥선대원군의 아들
순종 : 큰아들, 재위기간 3년, 한일합방. 조선왕조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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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는 제가 아니더라도 많은 분들이 의견을 주실 수 있을 거라고 보고, 저는 참고자료 성격의 글만 올리겠습니다.

1)
선조는 조선왕조에서 왕의 적자, 적손이 아닌 사람으로 왕실의 방계에서 처음 왕위를 계승한 왕입니다. 따라서 그는 무수리에게서 태어난 영조가 그랬듯이 적지 않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광해군시대의 비극을 낳았다고 연결짓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광해군이 세자시절, 임진왜란당시 눈부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조선조정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결정한 1592년부터 1604년까지 13년간 모두 다섯 차례의 책봉 주청사를 연경에 보냈지만 허사였습니다.

광해군이 참 운을 지독하게 타고 나지 못했구나 싶은게 바로 이대목인데요, 세자책봉이 안된 이유는 오로지 명나라 사정때문이었습니다.
명나라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황태자 결정문제가 있었는데요, 명신종은 명나라 황태자의 자리를 정하지 않고 먼저 번국인 조선의 왕세자 책봉을 승인하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왜냐하면 광해군이 차남인 서자였기 때문이지요. 아시다시피 광해군은 친형 임해군이 있었고, 서자입니다.

하필이면 명나라에서도 적장자와 다른 왕자간의 태자자리를 향한 눈치싸움이 치열한 상황이었거든요. 황제는 둘째 아들을 너무 사랑했고, 장자인 태창제를 세울 뜻이 없어보였는데, 명나라 예부에서는 태창을 위해 조선의 세자 책봉을 거듭거듭 거부한 것이지요.

그런데요, 광해군에겐 또 하나의 악재가 터졌습니다. 뒤늦게 새장가를 간 인조가 적장자를 낳은 것이지요. 그가 영창대군이고, 그의 어머니는 인목대비였으니 바로 그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된 것입니다.

2)
선조는 왕권의 고립을 막고, 전쟁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먼저 임진왜란의 책임을 물어 집권 남인계가 쓰러졌고, 뒤이어 서인과 북인계가 의병활동의 업적을 바탕으로 정권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남인-서인계의 의리론적 성리학자들은 북인계에 비해 정치적 콘텐츠가 취약했습니다. 국란으로 피폐해진 민정을 추스르는데 남다른 활약을 가진 사람들은 북인. 그들은 남명조식의 실천철학에 따라 의병봉기를 주도했던 경상우도 성리학자(동인이 지역적 특성에 따라 남인과 북인을 묶었다가 전쟁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분리된)와 서경덕을 정점으로 하는 개성파 실용주의자(중상론자가 많습니다)들이 서인으로 뭉뚱그려져 있다가 떨어져나와 북인그룹으로 묶입니다.

여기에는 소위 북인그룹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인홍의 개인사가 작용했던 것도 같습니다.정인홍은 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딸을 정여립의 아들에게 출가시키기 위해 혼담이 오고가는 사이라는 무함까지 받았으나, 그것이 오히려 그의 무고를 입증하는 근거가 되어 죄를 면한 일이 있었는데요, 자신의 목숨은 건졌으나 사나이중의 사나이였던 정인홍에게 목숨과도 같은 친구 최영경을 잃는 충격을 당합니다. 이로 인해 정인홍은 기축옥사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철과 성혼을 끝내 용서하지 않았고, 서인에 대한 지독한 분노를 표출, 반대로 서인도 정인홍에 대한 반감을 키워가며 광해군시대 비극을 잉태해갑니다.

정인홍은 훗날 고종시절에야 복권이 될만큼 서인-노론 집권기 최대의 이데올로기 희생양이었는데요, 그에 대한 평가는 단재 신채호가, 조선의 3대영웅이라고 이순신과 동급으로 취급했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만 그것도 신채호 선생이 왼쪽으로 구부러진 쇠를 펴려고 오른쪽으로 더 지나치게 미화한 것일 수 있으므로 당대를 살았던 이이의 평가를 붙이는 것으로 정인홍에 대한 평가를 대신하겠습니다.(율곡이이는 제가 알고 있는한 평가에 사심을 두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사헌부 장령 정인홍이 부모님을 뵈려고 휴가를 얻어 귀향했다. 정인홍이 사헌부에 있어서 나라의 풍속과 정치가 정돈되었다.또한 규율을 엄숙하게 바로 잡아 조정 대신들마저 두려워 떨며 조심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시장 상인들도 나라에서 판매를 금지한 물건은 밖에 내놓지 못했다. 국경을 지키던 병사가 휴가를 받아 서울에 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인홍 장령이 어떤 분이기에 그 위엄이 변방에까지 퍼져서 장수부터 고을 사또까지 두려워하고 삼가니 그는 진실로 대장부다’라고 했다. 또한 정인홍이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가자 서울에 있던 깡패나 무뢰한들은 모두 기뻐하며 겨우 살판이 났다고 어깨 숨을 내쉬었다.”

암튼 북인그룹(여기는 서인이나 남인보다 계보가 뚜렷하지 않고,대략 한양의 관학출신부터 남명조식의 계보,서경덕의 계보는 물론이고, 여기저기서 전쟁을 통해 성리학의 한계를 보고 떨어져 나온 그룹까지 뭉뚱그려집니다. 가령, 허균, 김신국,이수광, 신흠, 유몽인, 한백겸 등등)은 행정력과 민심을 기반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고, 그들은 함께 의병운동을 했던 광해군의 정치적 능력을 신뢰합니다. 이것은 선조임금에게 불안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임금은 명나라로 망명할 각오로 하고, ‘불사이군’이라는 성리학적 윤리를 배반하고 광해군을 분조, 한동안 조선은 두 개의 태양이 떠있는 ‘이군’의 나라가 되게 만들었던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거든요.

그것은 결국 모든 신하들과 결별,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외척 유영경을 통한 독재를 모색하게 합니다. 유영경은 선조의 지지아래 정치적 명분도 없는 사당조직을 이끌고 국정을 장악합니다.

그러나 유영경은 선조가 죽자 포대기에 쌓인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아야 했고, 인목대비는 수렴청정을 포기, 광해군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됩니다.

3)

광해군은 즉위 초기, 자신의 취약한 혈통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적 대연정을 구상했습니다. 초반의 정계는 소북,대북,서인,남인이 모두 두루 중용되었고, 광해군이 중심이 되어 당파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면서 정국은 안정되었습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서인,남인은 임진왜란의 피해에 대한 복구사업과 보민책의 차원에서 호패법과 대동법이라 불리는 선혜지법 등의 사회 경제적 정책들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민생후원차원에서 동의보감을 편찬하는 등 눈부신 업적들을 정치적 안정과 함께 일궈내는 저력을 보여줍니다.

특히 당시는 전세계적 격변기, 동아시아의 정세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오늘날 다시 적극 조명되기도 합니다. 그는 후금과 갈등을 빚어 전쟁을 유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터를 누비던 그는 길거리 시체더미로 변한 백성들의 처지를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독자적인 대후금정책은 결국 병화를 예방하면서 안전을 도모했지만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대북세력과 갈등을 겪는 원인이 되어 결국은 반정의 명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임해군, 영창대군의 존재는 왕실을 위협하는 불안요인으로 여겨졌고, 이에 외척세력인 유희분(소북)과 정인홍의 수제자임을 자처하는 이이첨(대북)은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이들을 제거하기 시작하면서 광해군 시대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습니다.
(유희분은 분조시기 광해군을 수행하면서 열렬한 광해군 추종자가 되었고, 그것이 무리수를 연달아 두게 하였다고 했으니, 광해군으로서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줄 수 있는 사람을 얻은 대가가 작지 않았습니다)

4)
서인-남인의 성리학계는 전쟁이후 정치적 고립을 타파할 명분을 찾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정인홍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 터라 감히 그에 대적할 엄두가 안나는 상황에서 하늘이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정인홍은 정몽주로부터 내려오는 성리학계보가 못마땅했습니다. 그에게 최고의 학자요, 존경하는 인물은 남명 조식이었습니다. 반면에 이언적,성혼,이황,이이...이런 이들은 ‘말만 많지 실천하지 않는 글방서생’이었습니다.

임진왜란시기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함, 민중들은 그게 어디에서 왔는지 알았습니다.바로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곽재우가 자신의 영향력과 지도력을 바탕으로 관군에 비협조적이었던 백성들을 결집시켜냈기 때문이지요.

남명 조식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기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명종의 부름을 받아 한강나루를 건너자 한강너머에 사람이 가득하고,떠나는 날 배웅을 위한 인파로 커다란 배 두척이 만석이 되었다고 합니다.

남명 조식의 철학은 분류하자면 ‘기철학’입니다. 세상도 자연도 법칙에 지배받는 우주. 따라서 이 세상에 정의따윈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인간의 실천적 노력만이 세상을 정의롭게 바꿀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일면, 양명학과 닿았고, 일면 이이의 철학과도 닿았습니다. 이이는 그래서 조식을 존경하였습니다.

이런 실천철학은 지방에서 군림하는 향촌지배양반들에게 늘 ‘구휼하기를 권하고,지방민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말라’고 말함으로써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합천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주변의 철학은 사변적인 철학과 달리 조식에 의해 더욱 적극적인 현실철학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전부 의병운동을 통해 나라를 구했습니다.

그런만큼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이름을 최고의 반열에 올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성리학의 성인반열에 올리고 싶었지요. 하지만 이미 향촌과 서원과 성균관의 지배자는 서인-남인. 그들은 묘한 시기에 정인홍을 정치적으로 공격할 수단으로 ‘오현의 문묘종사’카드를 씁니다.

화가난 정인홍은 이것을 반대했고, 옳다구나 싶은 서인-남인은 급속히 결집하기 시작합니다. 사림파가 훈구파를 몰아냈던 그 방식 그대로, 정인홍에 대한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반정을 위한 정치세력화에 성공합니다.

영창대군,인목대비의 폐비같은 사건은 단지 표면적인 원인일 뿐, 결론적으로는 서인-남인의 앙상레짐일 뿐이었던 인조반정은 오랫동안 명분이 없어 반대에 시달립니다.
인조 1년, 역모행렬이 끝이지 않았고, 이괄의 난 때, 이원익과 이귀가 종루에 앉아 모병을 하였으나 10여일 동안 한명도 구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민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만 합니다.
강학년은 상소를 올려 인조의 무능함과 훈신의 혼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인조의 피난길에 따르는 백성이 없었던 것은 민심을 잃은 집권층에 대한 민중의 당연한 반응이었음을 지적하였으니 인조반정이 일어난지 8년뒤에까지도 반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이 만만치 않게 존재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반정공신인 장유는 이 거사자체를 부끄럽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특히, 인조반정세력은 개인적인 욕심으로 민심을 잃었는데요,당시 훈신들은 적신으로 몰려 죽은 자들의 가산을 차지하느라 적지 않은 폐단을 낳았으며,“그 집에 들어가 살면서 그 종을 부리기를 마치 본디 소유했던 것처럼 하여 당시 사람들이 단지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다고 하였으니 부끄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사관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반정직후만이 아니라 인조 즉위 3년이 지나도 그치지 않아, 흉서가 나돌고 공신을 비방하는 저잣거리 노래가 떠돌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렀습니다
“아,너희 훈신들아!
스스로 뽐내지 말라.
그의 집에 살면서,
그의 전토를 점유하고,
그의 말을 타며,
그의 일을 행한다면,
너희들과 그 사람이
다를 게 뭐가 있나.“

5)

그러나 광해군이 민심을 잃은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당시 행정조직은 완전히 붕괴되어 말단 향리까지 착복할 수 있는 구조가 되었는데요, 이것은 민심을 돌아서게 한 결정적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세금은 도중에 거의 사라졌고, 명령은 도달하지 않았으며 호패법,대동법은 곧 폐기됩니다.

광해군은 정치시스템에 대해 몰랐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등거리외교가 가진 의미를 설득할 수 있는 공론구조를 장악하지 않은 채 세자시절 자신에게 등돌렸던 성리학사대부들에 대한 반감으로 파주로의 천도를 계획합니다.(세자시절 광해군은 신하들이 조금만 꼬투리를 잡아도 선조에게 무릎꿇고 빌어야 했고, 영창대군이 태어난 뒤로는 아침인사도 받아주지 않았으니 영창대군을 옹호했던 성리학자들에 대한 반감은 인간인 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조선시대 권력은 ‘인사권을 가진 이조’와 ‘공론을 조직하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나왔습니다. 지방의 사림들은 이 시스템만을 움켜쥐고 장기집권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율곡-퇴계를 정점으로 하는 시스템입니다. 남명조식-화담 서경덕계는 학문적으로도 불분명하고 계보도 흐렸습니다. 대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방법이 있었다면 돈줄을 틀어쥐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일부 산업을 국유화하고 전매화하고, 비변사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향상시켜나가는 것이지요.이런 능수능란한 정치력은 아무 콘텐츠도 없었던 숙종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숙종처럼 ‘이이제이’의 수법으로 서인과 남인이 싸우게 하여 서로 약화시킨 뒤 왕권을 갖는 방법을 쓸만큼 교활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믿을 세력은 외척과 정인홍 추종파뿐.....고립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허균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시대를 너무 빨리 보았던 것일지도...)

그 와중에 정인홍 추종파마저 외교문제로 등을 돌림으로써 모든 것은 파국을 피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반정이 일어난 뒤, 3일 후, 정인홍은 재판없이 사형당했습니다. 명분은 혹시 다른 사람이 정인홍을 미워해서 죽여버릴까....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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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09/09/25 12:22
수정 아이콘
저같은 사람에게는 조선 시대는 정말 읽어도 읽어도 기분 좋은 부분보다는 기분 안 좋은 부분이 훨씬 많아지는 그런 역사네요. 제가 잘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서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부분이 별로 없어서.. -_-a 그래도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좋기는 합니다. 감사합니다.
탱구와레오
09/09/25 12:36
수정 아이콘
조선시대는 참으로 답답하죠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임이최마율~
09/09/25 12:42
수정 아이콘
조선사 읽어보면서 최대의 비극은 인조반정이라고 생각합니다....역사의 흐름을 정반대로 돌려버렸죠....
...더불어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이고...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면서 예송논쟁으로 대표되는 당쟁.....

영조-정조가 중흥군주라고 하지만...이미 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까지 이어지면서...나라는 곪을대로 곪아버렸죠
정말 나라 망하지 않은게 신기할따름입니다......

추가 : 조선시대 예송논쟁으로 대표되는 당쟁의 모습을 보시고 싶으시다면
이덕일씨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반드시 읽어보라고 추천드리고 싶네요
信主SUNNY
09/09/25 14:00
수정 아이콘
운좋게 글이 올라오기 보름 정도 전에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게된 것이 책을 얻는 행운으로 이어졌네요.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을 보면서 답답한 것은, 그것이 익숙해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다른 것보다 사형명분이 기가막히면서도, 좀... 무섭기도하네요.
Benjamin Linus
09/09/25 14:10
수정 아이콘
광해군의 외교 풍토가 계속 이어져 왔으면 최소한 청에게 삼전도에서의 굴욕은 당하지 않았겠죠.
조선시대 정말 최악의 사건 중 하나로 인조반정을 꼽고 싶네요.
Cedric Bixler-Zabala
09/09/25 14:43
수정 아이콘
광해군을 과도하게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심시티는 자제좀...) 인조가 너무나도 스펙타클한 막장포스를 선보이는지라 광해군이 실제보다 더 빛나보이는 건 어쩔 수 없네요 -0-
엘렌딜
09/09/25 15:36
수정 아이콘
저는 최악의 사건을 계유정난으로 봅니다.

수양이 그 뒤에 무슨 선정을 펼쳤던(이것도 뒤집어 생각하면 선정이라고 할 수 없죠. 자기가 뿌린 씨, 뒷수습하는 정도지), 강건한 조선의 기상을 꺾고 비합법적인 정치, 힘의 정치가 통할 수 있는 기반을 쌓은 인물이란 점에서 제게는 수양이 최악의 인물로 보입니다.
홍승식
09/09/25 16:14
수정 아이콘
엘렌딜님// 저도 비슷하게 생각하지만 너무 어린 왕은 무리가 있는게 사실이죠.
옛 주공의 고사도 있듯이 수양대군이 섭정이 되어 정사를 보다가 단종이 친정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그게 되면 성인이지 사람이겠습니까.
문종이 너무 일찍 죽은게 안타까울 뿐이죠.
문종은 거의 세종 주니어 라고 할만큼 성군의 자질이 충만했고 동생들과의 우애도 좋아 종친의 힘으로 신하들을 압박할 수도 있었죠.
문종이 단종이 성인 될 때까지만 살았어도 조선의 전성기는 더 길었을지도 모릅니다.
제리와 톰
09/09/25 16:42
수정 아이콘
비슷한 시기에 명과 조선은 삼촌이 조카를 죽이는 골육상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명에서는 영락제가 주인공이고 조선에서는 세조가 그 주인공이 되지요.
영락제는 변변치 못 했던 인물들이 왕 노릇을 했던 명대에 그나마 명군이라는 소리를 듣는 인물로서 재임 기간 내내 몽고와의 전쟁에 목숨을 겁니다.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했던 모양인데 반대로 그 조카가 왕위에 있었다면 몽고와의 전쟁에서 과연 명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 부호가 붙습니다.(영락제가 실제로 승리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조 역시 불안한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외부적으로 군사 행동을 여러 번 일으켰는데 여진족과의 전쟁이 자주 있었지요.
반대로 단종이었다면 집현전의 엘리트 관료와 건국 초기 부터 내려오던 공신들의 압력을 이겨내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 부호가 붙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겠지요.
어쨌든 말 많고 탈 많은 세조 이후에 성종이라는 정리자가 나타나서 부드럽게 조선 전기에서 중기로 넘어가게 만드는 교두보 역할을 해 주고 정치적으로도 훈구와 사림의 교체에 공헌을 하게 되어 이후, 성리학이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니 이를 좋게 보아야 할 지, 나쁘게 보아야 할 지는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엘렌딜
09/09/25 16:55
수정 아이콘
제리와 톰님// 집현전 엘리트 관료의 전횡이라고 하시는데,
실상은 수양을 옹립한 한명회, 권람같은 훈신들과 같은 '비정상적인' 공신들이 무더기로 생겨났고,
그들을 챙겨 주기 위해 토지를 배분하면서 부의 편중과 불균형이 발생했으며, 이는 두고두고 조선의 폐단이 되는걸로 압니다.

세종, 문종, 단종대로 넘어오면서 왕권의 독단보다 재상 중심의 유교 정치의 기반이 자리잡혀 가는데
수양이 공명심이 넘쳐나고 권력욕이 강해서 그런 '시스템'은 무시하고 살육을 벌여 정권을 잡은겁니다.
박정희의 쿠테타나, 전두환의 쿠테타나 다를 바 없으며 결과가 좋았다(?)고 하더라도 합법성 없는 힘의 정치는 사회 전체의 도덕적 분위기와 정통성을 크게 해쳤고, 그 해악은 계속 이어집니다.

수양이 왕이 되어서 나름 한명회, 신숙주도 잠깐 옥에 가두고 쇼를 했지만, 예종의 의문의 급사나, 성종 때의 힘겨루기 등을 생각해보십시오.
정치는 혼자 하는게 아닌게 당연하고 권력을 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한명회등의 훈신들이 수양이 걱정했던 김종서, 황보인 등의 자리를 대신해서 카리스마 있던 수양이 죽은 후 나라를 좌지우지 했습니다. 게다가 김종서, 황보인은 세종 때부터 공신이고 마땅히 그 자리에 오를만큼 실력과 명망, 자격이 있는 자들이지만, 한명회는 막말로 건달이지 않습니까?

성종이 정리자로서 조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생각하시지만, 제가 보기엔 반대입니다. 성종은 해놓은게 거의 없는 인물이고, 운 좋게도 성종 대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선조때가서 율곡같은 인물이 일어나서 수양 이후로 무너지기 시작한 조선의 기세를 되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사의 시계추는 이미 많이 기울어졌고, 그 결정적 원인이 전 수양의 야심이 빚은 계유정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홍승식
09/09/2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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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논제가 인조반정이 아닌 계유정난으로 흐르네요. ^^
저역시도 엘렌딜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발제글에도 잠깐 적었다시피 정상적이지 못한 왕권의 이양에는 공신이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조선의 창업과 제1,2차 왕자의 난으로 수많은 공신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태종에 의해 숙청당했죠.
태종이 한일 중 최고가 전 공신의 숙청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세조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세조야 공신들을 컨트롤할 수 있었지만 그 다음왕은 그게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종의 비도 한명회의 딸이고, 그게 성종이 왕이 된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당연히 성종은 한명회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죠.
성종때 이뤄낸 모든 것들은 다 세종, 세조때 시작된 일들이 성종때 정리된 것 뿐입니다.
성종 치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한 것은 없습니다.
성종때가 전성기라는 건 그때부터 국운이 꺽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죠.
시대의 흐름일 수도 있지만, 지도자의 리더쉽이 부족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성종과 선조 중 하나를 뽑으라면 차라리 전 선조를 뽑겠습니다.

계유정난에 대해선 그래도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닙니다.
세종때에 다시금 신권이 강화되는 중이었고, 나이어린 국왕이 있으면 왕실 자체의 존립도 위협받을 수 있으니까요.
계유정난은 조선이 창업한지 100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종친이라면 누구나 위협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양녕대군도 수양대군을 지지한 거죠.
차라리 세종이나 문종이 고명대신을 김종서가 아닌 수양에게 맡겼다면 어땠을까요?
세종은 스스로 모든 아들(문종,수양,안평 등)에게 후계자 교육을 시켰고,
문종이 자신을 닮아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텐데 왜 수양이 아닌 김종서에게 고명을 맡겼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형제들의 우애가 상당히 좋았다는 것과 세종 본인이 형제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수양이나 안평이 왕위를 찬탈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요.
제리와 톰
09/09/25 17:30
수정 아이콘
엘렌딜님// 엘렌딜님께서 하신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역사의 과정에서 보면 실제로 그러했지요.
세조를 뒤따르던 모사 계급이 또 하나의 기득권이 되어 그 이전의 기득권을 대체한 것으로 저도 이해합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지만 역시 또 한번 만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세조가 즉위하지 않고 나이 어린 단종의 치세가 계속 이어졌을 경우에 집현전 학사들과 건국 초기의 기득권층이 담합할 가능성은 없었을까요.
물론 어디까지나 만약입니다. 벌어지지도 않았던 일을 가지고 논하는 것 만큼 의미없는 일도 없겠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단종의 치세가 계속 이어졌어도 또 하나의 기득권층이 탄생할 가능성은 항상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들이 훗날 등장하게 되는 사림들의 개혁적 사고와 새로운 철학적 체계를 들고 있지 않았던 이상, 한 기득권의 또 다른 기득권으로의 수평적 이동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제 사견입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150년 가까이 훈구파들은 조선의 기득권 세력으로서 고려와는 차별화된 그들의 정치 철학을 추구하고자 애써왔습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든, 집현전 출신의 관료든, 세조를 옹립한 건달 출신의 시정잡배든, 그들의 출신성분을 불문하고 신생 국가인 조선을 전 왕조인 고려와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의 왕조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이 훗날 등장하게 되는 사림과 훈구와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닌가 생각되며 역시 집현전 관료와 세조를 옹립한 세력 사이에 철학적 차이를 느끼지 못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성종에게 정리자라는 표현을 쓴 것은 사실 약간의 유머스러움이 깃들어 있는 말인데요,(죄송합니다, 저의 유머가 이 정도 밖에 안 됩니다.ㅠ.ㅠ) 그렇다고 하여 조선 전기와 중기의 교체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왕이었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연산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특히, 성종 대의 업적 중의 하나인 경국대전의 편찬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happyend님께서는 경국대전을 조선 전기 훈구파의 업적 중의 하나로 설명하셨는데 그 안에는 집현전 학자들 중, 세조에게 가담한 신숙주 등의 영향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듯 합니다.
성종의 업적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성종 대에 이르러 훈구와 사림의 교체가 시작되게 된다는 점에서도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Benjamin Linus
09/09/25 20:44
수정 아이콘
글세요.. 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게 당연하다고 보고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린 단종이 뭘 알고 통치를 제대로 하겠나요.
어짜피 세조가 그렇게 왕위 찬탈 안했어도 조선 창업기의 정신은 어짜피 시간이가면 사라지는게 당연합니다.
조선이 점점 쇠락해져만 갔던 근본적인 원인은 성리학만을 강조하며 농업, 상업, 공업을 모두 천시하고 무시하고 짓밟던 사회분위기죠.
그 놈의 소중화사상으로 중국에게만 빌붙고 중국만 받들다가 포르투갈과 교역하던 일본에게 호되게 당하기도하고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여진족이 후금을 세우고 엄청난 힘을 길렀는데도 주제도 모르고 맞서다가 엄청난 굴욕을 당했죠.
이후에도 조선은 비참한 역사만 되풀이 되어 갔고 그 결과 19세기들어서 아편전쟁 때 청나라가 깨지자 패닉상태에 이르게되죠.
성리학은 그냥 철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되고 학문으로 연구하는 정도라면 좋았습니다.
근데 그게 나라의 모든걸 좌지우지하는 일종의 종교이자 규칙이 되었을 때 엄청난 해악이 되어버린거죠.

성리학은 학문에만 머물러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외적이 쳐들어오는데 기가 어떻고 우주가 어떻고 하는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도 유럽의 자연과학처럼 실증적인 관찰을 통한 학문이 아닌 사념적인 철학이니 실생활에 도움되는건 거의 없었다고 보입니다.
루크레티아
09/09/26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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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정치적인 감각이 떨어지는 최고의 실무 책임자'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후금과의 중립 외교나 대동법의 실시 등은 정말 이 임금이 쫓겨나야만 했던 임금이 맞나 싶을 정도로 훌륭한 정책들이었죠. 하지만 정치라는 더러운 진흙탕에서까지 균형감각을 동시에 유지하기엔 너무 벅찬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불운했던 임금임에는 정말 반론의 여지가 없죠.

계유정난과 영락제의 이야기도 나왔네요. 저 역시도 계유정난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홍승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태종은 왕자의 난 이후로 공신들에게 엄청난 숙청을 단행하면서 6조 직계제라는 초유의 제도도 만들어 냈고, 결국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신하들을 모두 물리치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까지 단행하게 됩니다.(사실 이런 왕권 강화가 없었으면 충녕대군의 왕위 계승은 택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조는 전혀 그러질 못했죠. 한명회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신숙주나 홍달손 등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이후 직전법이나 6조 직계제의 부활, 경국대전의 편찬 착수 등으로 나름대로 왕권의 강화를 꾀해보았지만, 정말로 필요했던 일인 공신들의 숙청은 하지 못했습니다. 팥 없는 호빵 신세의 정책이었으니 뒤를 이은 성종이 치마폭에 싸여 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예종은 뭐 너무 빨리 죽고 발자취도 별로 없죠.)

영락제에 대해서 말하자면 영락제의 정변은 그냥 단순한 반란이었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태조 홍무제가 자신들의 공신들을 죄다 죽여버린 이후에 정작 쓸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믿을만한 자신의 아들들을 국경 지방의 번왕으로 보내서 통치를 하고 있었습니다.(번왕은 지금의 도지사가 좀 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혈육으로 채워놓은 후에 나름 됐다 싶어서 안심하고 죽었는데 안타깝게도 홍무제의 뒤를 이은 건문제는 태자의 아들, 즉 번왕들의 조카였습니다. 황제이긴 했지만 나이도 어린 편이었고 변방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삼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황제의 권위를 내세워 당시 영락제를 제외한 나머지 번왕들을 죽이거나 직위해제 시켜버립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영락제가 선수를 쳐서 반란을 일으키고, 내통한 환관 세력에 의하여 난징이 함락되면서 건문제는 실종되죠. 영락제가 둔탱이들만 가득한 명나라의 황제들 가운데 드물게 나라를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던 것은 분명합니다.(명나라 황제들의 면면을 놓고 보면 이 나라가 대체 어떻게 굴러갔는지 궁금해질 정도입니다.) 나름 몽골의 침입도 막아내고 해양 원정단도 보내면서 다른 왕조에 비하면 좀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전성기'를 열었던 황제입니다. 역사가 승리자의 기록이기에 이런 평가가 나오는 것 인지도 모르겠지만, 건문제에 대한 평가나 기록이 워낙에 없어서 영락제의 반란을 긍정해야 할지 부정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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