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저쪽 손님들 좀 많이 시끄러운데요."
또 시작이다. 비교적 널널한 피시방 알바를 힘들게 하는 진상 손님들. 사실 서비스업이란 게 별거 아니다. 미소를 짓고 최대한 상냥하게 인사하고, 부탁하는 거 들어주고 불만사항을 재빨리 처리해주고. 일은 힘들지 않다. 사람이 힘든 거다. 군대에서 알아낸 진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이렇게 내 생활에 파고든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면 안될까요. 볼륨도 조금만 낮춰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오, 그래도 말은 잘듣는구나.저쪽의 검은 정장은 잽싸게 볼륨을 낮추고 소곤댄다. 괜시리 내가 뻘쭘해진다. 그래도 역시 한심하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전혀 어려보이지도 않는 남자 넷이서 워크하면서 신나하는 꼴이라니. 취직은 했냐 이 아저씨들아 하여간 대한민국 망치는 일등 주범은 블리자드라니까. 주제에 맞지도 않은 비판을 해대며 나는 카운터로 돌아왔다.

"형, 그 아줌마가 순대랑 떡볶이 사다주셨네요. 같이 먹어요 헤헤"
다이어트를 결심한 날부터 이 어울리지 않는 행운이란. 앞으로 근무지에서 야식은 금지하기로 했는데..같이 일하는 녀석은 마냥 좋다고 싱글벙글이다. 하여간 저 아줌마는 이 작은 호의조차도 타이밍을 못맞추는구나. 바빠죽을 때마다 커피니 냉수니 하며 카운터 컴퓨터를 시끄럽게 울려대더니. 할 수 없다. 손님의 정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일단 먹자!! 하하 작심삼일이라는 명언 하에 작은 죄책감과 함께 순대 조각들은 뱃속으로 꿀떡꿀떡 넘어간다. 그리고 밤도 또한 흘러간다.

"여기 얼마죠?"
아까 그 시끄러운 아저씨들이 계산을 요구한다. 어디보자. 세시간씩이나 네 종족의 평화와 균형을 위해 싸우셨군요. 금액을 말하려는 찰나 카운터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검은 정장이 눈에 들어온다. 키도 작으면서 무슨 멋을 저리 냈담. 뿔테 안경으로 엣지나게 컨셉잡아주셨군.
가만?????????? 어디서 많이 봤는데????????????? 어라?????????? 맞는 것 같은데??????????????? 맞다맞다맞다!!!!!!!!!!!!!!
"저...이승원 해설 아니세요???"
이럴 수가. 이승원 해설이다. 티비에서나 보던 저 사람이 이런 구석지 피시방에는 왜 온거지. 옆에는 박상현 캐스터도 있었다. 멋적게 웃으며 그는 대답했다. "아..네..."   난 무려 이승원 해설과 박상현 캐스터에게 조용히 좀 하라고 면박을 줬던 것이었군 그래. 기가 막혀서 나원.

"저 잠시만요. 싸인 좀 부탁드릴께요."
이런 뻔뻔한 놈. 조용히 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유명인이라는 걸 알아보자마자 이렇게 들이대는건지. 뭐 어떠냐 내가 언제 또 실물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다고. 종이쪼가리에 했다가는 금새 잃어버릴 것 같아 일기장을 꺼내들어 맨 뒷장을 펼치고 펜을 건넸다. 그는 흔쾌히 사인해주었다. 그렇게 놀라고 흥분한 와중에도 사인을 받아내는 나도 어지간히 성숙해졌나보다. 이런게 아줌마 억척근성이라는 걸까. 별별 생각을 다하는 나에게 그는 물었다. "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문래동 경기장에서 생생히 울려퍼지던 목소리를 몇번 듣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듣기는 또 처음이었다. 일단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깊고 울렸다. 이야 꿀성대로군!! 저게 사석에서 친구랑 이야기하는 목소리인가 웅변대회에서 결론을 외치는 목소리지!! 방송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구나 말로 먹고 사는 사람답다 속으로 감탄하면서 눈으로는 그의 외모를 이리저리 흝었다. 검정색 정장에 형광색 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가지 의상은 어느새 하나의 패션이오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었다. 왼쪽팔목에 채워진 커다란 시계는 주인님의 센스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자랑하는 듯 했다. 이건 훈남이 아니라 무려 간지남이잖아!!! 그리고 역시나 키는 작았다.....

"엄재경 해설 다음으로 본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설 잘 듣고 있어요~"
무슨 뻘소리를....주체못할 마우스는 사전편집 없이 헛소리를 마구 뱉어낸다. 웃지도 못하는 저 어정쩡한 미소. 저기 제가 방금 잘못 읽은 거죠? 그 오묘한 표정에 써져있던 그.래.서.어.쩌.라.고. 이로써 진상팬 확증인가. 아무튼 상관없다. 난 그를 실제로 이렇게 눈앞에서 보고 있고 싸인까지 받아내고 있다. 그리고 카운터 컴퓨터는 13000원인가를 받으라고 표시하고 있었다. 몇백원쯤은 사정없이 할인해주려고 했는데. 3000원은 내 선에서는 처리가 안되는 금액이라 하는 수 없이 돈을 다 받고 말았다. 왜 음식점 사장님들은 서비스도 주고 돈도 안받는다고 하더니만, 미리 알았으면 립튼 한캔씩이라도 돌리는 건데.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아무 서비스도 못하고 그렇게 난 무정하게 이승원 해설 일당을 떠나보내야 했다.

"민이는 왜 안와??" "몰라~ 혼자 문래동에서 뭘 하는건지~" 오오 강민 해설??? 여기에 오기만 했으면 할루시네이션 리콜은 어쨌니 송병구랑 김택용 둘중에서 누가 짱인지 헛소리를 해대며 서비스로 휴지 100장을 가져다주는 둥 주책을 떨었겠지. 그렇게 나를 설레게 하는 대화를 나누며 이승원 해설과 박상현 캐스터, 그리고 그의 친구분들(지금 생각해보건데 아마도 한명은 이우호 연출가였을 것이다)은 겜방을 나갔다.
그들이 나간 후에도 혼자서 싱숭생숭해서 난 다른 알바생에게 침이 튀어라 설명해댔다. "엠비시 게임 이승원 해설이야!!! 이승원!!!!"

"누구에요? 연예인이에요?"
나의 호들갑에 괜시리 궁금해졌는지 카운터 앞쪽에 앉아있던 손님이 묻는다. 스타크래프트 해설 하시는 분이세요~ 라는 대답에 어쩐지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손님. 그래, 스타를 모르는 누군가에게는 듣보잡인 그이지만 이렇게 골수 스덕인 나에게는 KBS 아나운서 급의 유명인이시라구. 그런 사람을 난 오늘 봐서 싸인받은거야. 혼자서 의기양양해하던 난 금새 또 손님들의 갖은 서비스 요구에 금새 피곤한 얼굴이 되고말겠지만은, 그래도 쉽사리 지치진 않을 것 같았다. 이러다 송병구가 우리 피시방에 오는 날엔 난 아마 기절할 지도 모르겠는걸. 일을 집어치우고 1:1 한판만 해달라고 쌩 진상을 떨지도 모르겠다고 혼자 시덥지 않은 상상을 하며 괜한 뿌듯함을 느꼈다. 알바는 오래하고 볼일이야.

순대 그리고 이승원 해설의 겹경사 콤보를 맞은 9월 첫째날. 잘은 모르지만 어깨너머 스타중계방송을 같이 보는 다른 알바생의 증언으로 아부하며 끝을 맺을까 한다. 어떤 과장이나 오버액션도 첨부되지 않은 비非스덕의 순도 100% 진실된 발언이다.  
" 아~그래요?? 어쩐지 자리에 앉은 모습이 뭔가 범상치 않던데요? 음악 하는 사람 아니면 연예인인 것 같더라구요."
왜 이런 결말인가. 괜히 엄해설 운운하며 헛소리를 했던게 조금은 걸리던 나의 소심함 때문은 아니다.......


뱀다리 하나. 이매리 씨 이후로 유명인은 두번째 보네요. 카메라 마사지를 받는 사람들은 뭔가 달라도 다릅니다.
뱀다리 둘. 이승원 해설을 보고 경황이 없는 나머지 박상현 캐스터에게 관심주기는 좀 바빴습니다. 그냥 주변인 취급...
* Timeless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9-04 2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