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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7/05/24 15:17:56
Name OrBef
Subject [일반] 꼬맹이한테 많은 것을 배웁니다.
1. 아이가 시부모님이네요.

'아빠! 같이 자자~'
'아빠는 남은 일이 있어서 지금 못자. 먼저 자라'
'왜 일이 많이 남았는데?'
'낮에 다 못했거든'
'낮에 열심히 하고 밤에는 자야지이이~ 아빤 맨날 밤에 일하니까 아침에 못깨잖아. 그래서 낮에 일을 못하는거야아아아~ 같이 자자아아아~'
... 헉!!!

만으로 네살, 우리 나이로 다섯 살 된 제 아들놈과 오늘 나눈 대화였습니다. 일단 일이 정말 많았기 때문에 보채는 아들놈은 아내와 잠자게 보내놓고 저는 다시 학교로 출근했습니다만, 네살짜리 아들놈 말에 틀린 점이 사실은 하나도 없더군요.

2. 애나 어른이나

하루는 아내가 아들놈한테 책을 읽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어주었더니 문 밖에는 늑대가 있었어요... 늑대 참 나쁘다 그치?'
'아냐 늑대는 배가 고파서 아름이를 잡아먹으려는거야. 그건 나쁜게 아냐. 사람도 배가 고프면 동물을 먹잖아. 그냥 아름이가 문만 잘 잠그면 돼'
... 헉!!!

사실은 그날이 점심때 제가 돼지고기를 구워주었는데 꼬맹이가 처음으로 그 돼지고기가 자신이 그림책에서 보는 돼지를 죽여서 만든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날이었습니다. 이쁜 돼지와 맛있는 돼지고기와의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 확연히 보이길래, 어차피 알게 될 거.. 빨리 깨닫게 해주는 것이 나으리라 여겨서 제가 저런 논지의 말을 해줬었거든요. 그랬더니 늑대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단지 '무서울' 뿐이지 늑대를 욕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나름대로 도달했더군요. 이건 사실 어른이 되어서까지 고민해야 하는 주제이지만, 어른이 돼서 오만 철학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도 저것과 크게 다르진 않으니.. 그 수준높은 철학이나 네살박이의 사고나 근본은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3. 어른이 아이를 망쳐요

담배를 끊은 지 대충 두달 쯤 되었습니다만, 담배를 피울 때에도 애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로 피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애가 빨대로 주스를 먹다 말고 갑자기 빨대를 뽑더니 두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쭈욱 빨고 숨을 내쉬더군요. 뜨끔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이미 대답이 무엇인지 알지만) 뭐하는 거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응. 담배펴 ^_^'
'너 담배피는거 누구한테 배웠어? 너 그런거 본 적 없잖아?'
'아빠가 저번에 주차장에서 피우는거 봤어. 내가 아빠 거기서 모하나~~~ 궁금했거든'
... 헉!! x 3

결국 애를 망치는 것은 다른 나쁜 아이가 아니라 ( 걔가 결국 누구한테 배웠겠습니까.) 어른이라는 말은 백번 옳은 말입니다.

4. 애한테 올바른 삶을 배웁니다.

애한테 말해주는 것들..

'니가 하고싶은게 뭔지 말을 해야 내가 알지. 말도 안하고 혼자 꽁하면서 화만 내면 니 손해야.'
'잠을 일찍 자야 내일 아침에 일찍 깨서 하고싶은 것들을 많이 하지'
'야.. 티비보는 것보다는 나가서 노는게 더 낫지 않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한가지 밖에 못해. 근데 지금 니가 말하는 그걸 하고 나면 정작 재밌는 것을 할 시간이 없거든. 자.. 어떻게 할래?'

이런 것들은 사실 저한테 더욱 필요한 조언들입니다.

근데 이젠 저한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죠. 누가 해줘봤자 들을리도 없구요.

그래서 그런지 아이가 별 뜻없이 제가 해준 말을 저한테 해줄 때,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열심히 살아야죠. 애한테 부끄럽지 않으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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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namicToss
07/05/24 15:24
수정 아이콘
부모 가 흡연이면 그 자녀는 90% 흡연하게 되더라구요 부모가 비흡연자면 정반대구요. 이런 관계가 계속되다보니 우리나라 흡연율 높은거 아닌지..
NeverMind
07/05/24 15:37
수정 아이콘
전 아버지가 담배를 많이 피시는데도 담배는 안 피는데????

물론 술은 좋아 합니다...
DynamicToss
07/05/24 15:38
수정 아이콘
NeverMind // 님은 10% 속하신거죠
07/05/24 15:48
수정 아이콘
NeverMind님//
술은 밥과 같은 것이라, 극소수의 외계인을 빼면 다들 좋아하죠 하하하하 ^^땀
레지엔
07/05/24 16:36
수정 아이콘
으음 1번 헉이네요-_-;;; 어제도 밤새고 자다가 이제 일어나서 후...
해리콧털;;;;
07/05/24 17:04
수정 아이콘
애기 참 귀엽겟네요 ㅠㅠ 얼른 애기가 낳고 싶군요,
arq.Gstar
07/05/24 19:17
수정 아이콘
90%까지는 아닌것 같고.. 그냥 배울 가능성이 있다.. 라고 하는게 나을듯 싶어요..
07/05/24 20:23
수정 아이콘
저도 생전 아버지가 담뱃대를 입에 무시는걸 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담배는 잘 안하게 되더군요. 물론 개인적으로 담배에 대해서 안좋은 추억도 있고 해서...... 중학교때 체육시간 화장실에서 옷갈아 입으려 하는데 몇몇애들이 담배를 워나게 피어서 그런지 담배냄새가 참 고약했었습니다. 옷갈아 입다보니 그새 냄새가 제 몸에도 베었고 운동장 나가다가 학생부 선생님께 걸려서 담배 피웠냐는 오해를 받았고 제 엉덩이가 고초를 겪어야 했었죠 -_-;;;; 그뒤론 저는 나중에 커서 술은 할 지언정 담배는 죽어도 안하겠다고 결심했구 그 결심을 지금까진 잘 지켜오고 있습니다.
07/05/24 20:31
수정 아이콘
응 담배펴....덜덜;
지니-_-V
07/05/25 01:04
수정 아이콘
역시 부모를 닮나보네요 귀엽습니다 ^^
sway with me
07/05/25 14:52
수정 아이콘
저도 요즘 세 살된 딸아이를 보면서 많이 배웁니다.
얼마 전에 딸이 신발을 신다가, 좌우를 바꿔 신었는데 딸이 짜증도 내지 않고 혼잣말로 이러더군요.

'괜찮아, 다시 해보자'

그리고는 두 번 정도 다시 신어봅니다.

저 말이 저는 나름 감동적이었어요. 그리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검마독고구팩
07/05/26 12:41
수정 아이콘
OrBef님// 너무 기분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sway with me님// 저도 감동했습니다.
망디망디
07/05/27 02:08
수정 아이콘
YaKama// 어느학교시길래... 저희는 지금 한반에 2~3명 되보이던데...
저도 10%에 들도록해야겠네요 담배는 혐오합니다... 냄새 진짜 안좋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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