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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7/05/16 09:02:52
Name OrBef
Subject [일반] 간다 / 잘 가라
저 대사는 바람의 검심이라는 만화의 마지막 권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선과 악을 떠나서, 일본은 19세기의 대 혼돈을 유신으로 이겨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시기에 대해 일본인들의 향수는 제법 강해보이고,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나 만화 역시 상당히 많은데, 저 만화도 그중 하나입니다.

대 혼돈의 시대이다보니, 개개인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나라는 원초적 질문에 대해 모범답안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소년 만화답게 등장인물들은 여러 방향으로 극단적인 해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을 수 있는 3명의 인물 - 히무라 발도제, 사가라 사노스케, 사이토 하지메 - 는 상황에 따라 적대하기도 하고 연대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는 전혀 다릅니다.

유신을 일궈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것을 위해 자신이 행한 수많은 죄악에 염증을 느껴 은둔자의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는 히무라 발도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일본을 위해 유신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했고, 유신 세력에 패배한 후에는 주어진 일본의 미래를 위해 비밀 경찰이 되어 유신 세력에 협력하고 있는 사이토 하지메

유신 혁명의 와중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기에 유신체제의 일본을 혐오하고, 그렇기에 인생의 확고한 목표가 없지만, 그래도 젊은이답게 불확실한 미래나마 쟁취해보려는 사가라 사노스케

이 3명이 엮어가는 이 만화는, 그 자체로도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최고로 꼽는 장면은 수많은 전투장면이 아니라, 그 모든 전투가 끝난 후 이 3명이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장면입니다.

비록 유신 이후에는 일본의 미래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협력했지만, 사이토는 원래 히무라를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그 오랜 원한을 풀어주고자 히무라가 ( 위암에 걸려 몸이 쇠약해져가기 시작했기에, 이때가 아니면 싸울 수 없는 상황에서 ) 일대일 결투를 신청하자 사이토는 거절하죠.

'흥. 이미 반병x이 되어 다 죽어가는 사람하고 뭐하러 싸우나. 그보다 일이 중요하지. 이미 다음 임무는 시작되었다고'

그리고 자신의 길을 갑니다.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하죠.

사가라 사노스케 역시 근대화되어가는 아시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상하이로 떠납니다. 그리고 히무라와 짧은 대화를 나누죠. 그리고 그도 다시는 히무라와 재회하지 못합니다. 제가 최고의 장면으로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간다!'
'잘 가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려는 인간의 욕심과

자신의 '꿈'을 위해 달려가려는 인간의 욕심은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Happily ever after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죠. 애초에 꿈을 찾아가려면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하고, 각자의 길을 걷다 보면 이별을 피할 수 없습니다. ( 그것이 물리적 이별이던, 감정적인 이별이던 )

유일하게 저것이 양립 비스무리한 모습을 띄는 것이 소위 결혼과 가족이지만, 부부 중에서 한명이 다른 한명의 꿈을 위해 같이 걸어주지 않는 이상은 이 역시 겉돌기 마련입니다. ( 저 만화에서는, 역시 소년 만화답게 히무라의 길을 같이 걸어가주는 여자 주인공이 한명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여자분에게는 자신의 꿈같은 것이 없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가지 모두를 꿈꿉니다.

그리고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또 인생의 멋이기도 한 것이죠.

...

상하이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고군분투하고있는, 제 형제와도 같은 그 친구를 그리워하며 씁니다. 언제 다시 볼지는 모르지만, 다시 볼 때에는 우리 둘 다 자신의 꿈에 한걸음 더 다가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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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16 09:19
수정 아이콘
만화책에서..그것도 한장면에서 이런 심오한 해석도 가능하군요..
정말 생각 없이 1초만에 다음 장면으로 봤던 나는-_-;;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AstralPlace
07/05/16 09:2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글쎄요. 두 가지를 모두 얻는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불가능하진 않습니다.다만 힘들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사람끼리는 어떤 식으로 만나냐,얼마나 만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
07/05/16 09:26
수정 아이콘
AstralPlace님//
맞아요. 바라보는 방향이 같은 경우의 인연은 둘 다 가질 수 있죠.

근데.. 방향이 언제고 달라지는 날도 오지 않나요? 전 그랬어요 ㅠ.ㅠ
IntiFadA
07/05/16 10:02
수정 아이콘
아....
오랜만에 가슴에 많이 와닿은 글이네요...^^
스타크래프트와는 상관없는 글이지만 이런 글도 추게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honnysun
07/05/16 11:11
수정 아이콘
요즘 메이지유신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는데 검심은 아직 접해보질 못했군요. 꼭한번 봐야할텐데 시간이 없네요.
sway with me
07/05/16 14:2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가끔은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더 중요한 건지,
같이 있는다는 것이 더 중요한 건지 갈등이 될 때가 있더군요.
아마 제가 같이 있는다는 것 자체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길시언 파스크
07/05/16 18:36
수정 아이콘
갑자기 바람의 검심이 다시 읽고 싶어지게하는 멋진글이로군요...
전 등장인물들 중 사이토 하지메를 가장 좋아했고 아직도 가끔 목검을 들면 아돌영식을 따라하곤 합니다... 그러나 천상용섬은 검집이 없어 흉내불가..^^;
낭만토스
07/05/16 22:52
수정 아이콘
개인홈피에 가져가 가끔 읽고 싶을때 읽고 싶은데 허락해주세요^^
07/05/16 23:07
수정 아이콘
낭만토스님//
헉! 그럴만한 글이 아닌데요 ^^;; 저야 당연히 괜찮습니다.
낭만토스
07/05/16 23:2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사이몬PHD
07/05/18 09:34
수정 아이콘
OrBef님//"Happily ever after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죠"에서
Happily ever after가 무슨 뜻이죠? 단어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도 뜻이 잘 전달되지 않네요. 앞 뒤 문맥을 봐도 잘 이해되지가 않고 너무나도 당연한 관용어구처럼 쓰셔서 궁금하네요.
07/05/18 10:33
수정 아이콘
사이몬PHD님//
아.. 우리나라 동화에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대요' 에 해당하는 영어 관용어구에요. 보통 '왕자랑 공주랑' 과 같이 붙여서 사용하죠
사이몬PHD
07/05/18 19:28
수정 아이콘
OrBef님//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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