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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3/08 13:44:05
Name 폭창이
Subject [일반] [PGR에서 라이트노벨...] 계약 (3)
식탁 위로 완성된 볶음밥을 올려놓을 때쯤 동생이 방에서 나왔다. 항상 아슬아슬한 시간대에 일어나긴 하지만 어떻게든 지각은 면한다는 게 저 녀석의 신기한 점이었다.

“어, 벌써 밥이 되어있네?”

“오늘은 개학날이니 조금 일찍 일어났거든. 너야말로 오늘은 잘도 일어났네?”

“루트 하나밖에 안 남았었으니까. 흐아암, 진루트는 감동이었어. 노말 엔딩 뒤에 숨겨져 있던…….”

“아침의 평온한 분위기를 저질로 물들이지 마라.”

역시 내 정신건강을 배려하지 않는 것도 여전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려는데 잠시 어색한 침묵이 느껴 나도 모르게 몸을 내뺐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니 내가 있던 자리에 동생이 서 있었다. 동생은 나를 슥 돌아보더니 양손을 들고 뭔가 주무르는 손모양세를 하며 다가왔다.

“흐응, 이제 제법 반응이 빨라졌네?”

“잘못했어. 그러니까 내 평온한 아침을 공포물로 만들지 말아다오.”

“공포물이 아니야. 에로물을…….”

“헛소리 하지 마!”

그런 식으로 또 몇 분을 의미 없이 다툰 후 우리는 조금 더 바빠졌다. 사실 나야 식사 빼고 나갈 준비는 다 했었고, 동생이 시간이 촉박해서 동생을 챙겨야 하는 나까지 시간이 촉박해 진거긴 하지만 말이다. 덕분에 동생이 옷을 갈아입으려 잠시 방으로 들어간 뒤에야 식탁 옆의 의자에 앉아 쉴 수 있었다.

아침은 소란스러웠지만 또한 평온했다. 베란다를 통해 하얀 햇살이 들어오며 날씨도 너무 덥지도 않고 습기 차지도 않고 좋은 것이 기분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약간 서둘렀더니 오히려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오빠.”

“왜?”

“나 두고 가면 가만히 안 둘 거다?”

“알았어. 시간은 넉넉하니까 기다려 줄 게. 천천히 갈아입어.”

내가 말하기에는 뭐하지만 동생은 저 폐인 같은 생활을 해온 덕분에 친구가 없다. 그래서 고등학교 들어서 마침 학교가 같은 내가 함께 다녀주게 되었다. 귀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동생을 내가 보살피지 않으면 누가 보살피겠는가. 게다가 동생이 저렇게 된 것에는 오빠로서 잘 가르치지 못한 책임감도 느끼고 말이다.

“자, 가자.”

동생이 교복 차림으로 방에서 나왔다. 그리다 문득 동생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별 말 없이 그 손을 잡아 주었다. 이렇게 보니 영락없이 어릴 때 놀던 기억이 났다.

“흐음, 우리 집 공주님. 이제 나가실까요.”

“그것보다 마스터라고 하면 안 돼?”

“……시끄러워.”

어째서 이 아이는 이렇게 자란 걸까. 때늦고 부질없기까지 한 후회를 하면서 둘 다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섰다. 문을 연 순간 약간은 시원한 바람과 함께……. 눈앞에는 교복을 입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을 한 소녀가 있었다.

“안녕, 오빠.”

“……무슨 짓이냐.”

나도 모르게 쌀쌀맞게 반응했다. 그러니까 방금 상황을 정리하자면, 문을 열었더니 앞에는 연아가 있어서 상큼하게 웃고는 ‘안녕, 오빠.’하고 말해 온 것이다. 나는 이 녀석을 미리 밥 주고 학교에 보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전력으로 휘두른 망치에 뒤통수를 가격당한 것과 흡사한 감정을 느꼈다.

“흐응. 동생과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서 말이지. 네 판타지를 충족시켜 볼까하고 특별히 말투를 바꿔 주었는데 말이야, 오.빠.”

이유는 모르겠지만 화가 난 모양이다. 그보다 문제인 것은 그 화를 표현하는 방법이 나에게는 매우 곤란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오빠? 저 사람은 누구야?”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나도 잘은 모르지만 일단 너한테는 언니뻘이 될 것 같은 인물이신데.”

“오빠, 너무 그러면 내가 섭섭해. 좀 더 그때처럼 스위티하고 러블리하게 대해주면 좋겠는데.”

“오빠……!”

“그러니까 오해 하지 마! 너는 오해를 부를만한 말을 하지 말고!”

갑자기 조금 몰려오는 피로함을 견디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어제 나는 내 방에서, 연아는 큰 방에서 잤다. 동생이 일어나는 시간을 계산해서, 그보다 먼저 일어나 연아를 먼저 깨워 보낸 것이다. 그때 연아가 갈아입고 나온 교복이 우리 학교 교복이었을 때는 많이 놀랐었지. ……물론 지금 놀란 것만 하겠냐마는.

“그러니까 누구야? 나한테 언니니까 오빠랑 동갑인 것 같은데, 오빠한테 여자 친구가 있을 리가 없잖아.”

잘도 남의 마음을 후벼 파는 소리를 하는구나.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니, 사실 심리적으로는 없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나랑 오빠 관계를 말하자면…….”

“넌 조용히 하고. 친구야 친구. 우연히 근처 동에 살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

“그래? 그러면 몇 동 몇 호? 인사나 가야겠네.”

집은커녕 방에서도 잘 안 나오는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그렇게 말하려다가 접고 약간 갈등했다. 대충 둘러대는 건 조금 위험할 것 같았다. 이상한 곳에서 행동력을 보여주는 녀석이니까. 정말로 확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게……. 잘은 몰라. 이 녀석이 말해주지 않아서. 말하자면 신비주의라고 할까?”

동생의 눈이 가늘어졌다. 왠지 그 눈이 내 마음이나 차크라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는 것 같지만, 전자는 몰라도 후자의 느낌은 착각이 분명하겠지. 아무튼 나도 모르게 쥐어진 손에 약간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다 동생의 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뭐,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조심해. 여자랑 잘못 엮이면 인생 피곤해져.”

“그래, 내 손을 잡고 있는 누군가가 그 교훈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고 있어. ……꼬집지 마. 미, 미안! 잘못했다!”

그렇게 문 앞에서 약간 다투며 걸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연아는 또 왜 불만인 표정이지? 겨우 동생의 의심을 넘겼는데.

“야, 같이 안 가?”

“알아서 해.”

그러면서 연아는 나와 동생을 지나치더니 앞서 걸어갔다. 소금자루 1kg과 모래자루 1kg을 지고 가다가 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당나귀가 된 기분이었다. 참으로 허술한 비유이긴 한데 어쨌든 의미를 풀이하자면 2배 정도 홀가분해 졌다는 것이었다.

시간도 아직 넉넉한 편이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동생과 함께 등교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가 서로 다투느라 꽤 늦은 속도로 등교한 셈인데 왜 빠르게 걷는 것처럼 연아가 멀리 사라지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미스테리다.


“……흐으.”

겨우 교실에 들어섰다. 등교하기까지의 고생이 스쳐 지나가니 긴장이 풀렸다. 반쯤 풀릴 듯한 걸음으로 내 자리로 걸어갔다.

내 자리는 내 사정을 아시는 선생님의 배려 덕분에 가장 구석진 창가 자리였다. 내 주변도 내 사정을 잘 아는 반 아이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누가 귀찮게 해오지도 않았다. 친구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좋은 아이들이다.

덕분에 내 주변은 조용하고 나른했다. 다들 방학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그것도 나만큼은 예외다.

자리에 앉고 가방을 내리니 홀가분함은 잠시. 피로감이 갑자기 몰려왔다. 정신이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하는 묘한 기분.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그렇게 살짝 엎드려 있으니 정신이 들었다가 나갔다가…….

반의 소리가 점점 멀게 느껴졌다. 정신이 들었다가 나갔다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느껴졌다. 정신이 들었다가 나갔다가…….

반 아이들의 소란이 멎었다. 선생님이 오시나 보다. 나도 일어나야 할 텐데. 정신이 들었다가 나갔다가…….

선생님이 뭐라고 말하셨다. 갑자기 반이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전학생이라는 말을 하신 것 같다. 정신이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안녕하세요. 새로 전학 오게 된 이연아라고 해요.”

그래. 이연아. 연아라고 부르면 되겠구나. 정신이 들어왔다가……. 정신이 들었다!

“뭐!”

순간 주변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크게 민망함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다들 그냥 내가 단순히 장난쳤다고 느낀 건지 시선은 다시 연아에게로 돌아갔다. 연아가 맞다. 어제 보고 아침에도 본 그 연아가 맞았다. 전학생이었나? 다른 반으로 간 줄 알았던 것은 사실 교무실의 우리 반 담임선생님한테 간 것이었구나.

“뭐, 그럼 대충 사이좋게 지내세요. 연아는……. 그래, 저기에 앉거라.”

다행히 내 근처에 앉는 일은 없었다. 내 주변 자리는 내 이 불편한 특성에 맞추어서 주변인들의 배려로 이루어졌던 자리니까. 우연이라도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괜히 긴장했다.

……왠지 저 녀석이 자리에 앉은 후 나를 대놓고 째려본 것 같다.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침 조회가 끝나고 선생님이 나가셨다. 연아는 당연히 우리 반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뭐, 저런 식으로 친구가 늘 것이고. 학교에서, 그것도 내 반에서 골치 아프게 될 일은 없겠구나.

잠시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하며 연아를 살짝 훔쳐보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전학생에 아주 자연스러운 약간의 관심이 있어서 잠시 보는 것처럼.

……이런 내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연아는 거의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저 녀석 입장에서는 다른 친구들보다 내가 편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곤란하다.

결국 별 생각 없이 가려던 화장실을 약간 연아의 시선으로부터 도망가듯이 향하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수업 때는 교실에 돌아오고 쉬는 시간 때는 화장실이나 다른 곳으로 도피를 가는 게 반복되었다. 그리고 연아는 매 쉬는 시간(및 수업시간)마다 시선을 나에게 보내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화장실에 따라오지는 않았지만.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새로 친해진 것처럼 보이는 친구들이랑 식당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걸 확인하고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도 다른 아이들과 식당으로 향했다. 뒷자리에 앉은 김민수라는 녀석이 배려해 준 덕분에 점심시간 때는 이 녀석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 아마 학교에 내가 그나마 친구라고 할 만한 녀석을 찾으라면 이 녀석밖에 없지 않을까.

“전학생은 어때? 어디에서 왔대?”

“수원이라고 들었는데? 그나저나 걔 이름 연아 맞지?”

“우리 반도 이제 겨우 다른 반들과 비슷하게 되는구나. 원래 우리 학교가 반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반은 사람이 너무 적어.”

대화는 역시 전학생이나 그에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너 40레벨로 올렸냐? 결장가면 어떤데?”

“결장은 말도 못해. 그것보다 네 세컨케 쩔 해줄까?”

“아, 내 아이디 필요한 사람 없냐? 수능도 다가오고 나 슬슬 게임 접을까 하니까.”

뭐, 아니나 다를까. 금세 이런 이야기로 변했지만.

그렇게 배식을 받고 자리로 향했다. 식당의 식탁들은 4칸짜리나, 4칸짜리를 붙인 8칸짜리가 대부분이었다. 나를 포함해 7명인 이 점심시간 패거리는 결국 내 앞자리가 비게 된다. 민수는 그걸 미안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는다.

옆의 대화를 들으나 끼지는 않으며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 누군가가 앉았다. 살짝 얼굴을 확인하고 입에 머금던 걸 뱉어버렸다. 다행히도 상대방 얼굴이 아니라 내 배식 판에.

“푸하! 켁, 켁, 케엑…….”

“물줄까?”

긴 검은머리. 무심한 표정. 은근히 교복이 잘 어울린다. 사랑스러운……. 아니, 이건 빼자. 내 입으로 인정하기 싫다. 묘한 헤어스타일, 머리의 x자 머리핀. 묘사를 더 할 것도 없이 연아였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내가 여기 앉아야지.”

급히 옆을 보니 다른 녀석들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에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어주었다. 그래, 너는 역시 내가 이상한 녀석에게 걸려 괴로워하는 나를 이해해 주는 구나? 앞으로 우리 친구하자!

“뭐야. 여자 친구가 있었냐? 알고 보니 무지하게 부러운 녀석이었구나.”

친구는 개뿔.

그들은 거의 놀리듯이, 커플은 싫다면서 민수의 주도아래 멀어져 갔다. 배신자들. 치를 떨면서도 계속 8인 식탁에 둘이 앉기는 그래서 자리를 옮겼다. 물론 4인 식탁으로 옮겨간 거지만 연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왔다.

“아까 친구들도 사귄 것 같던데 왜 여기로 왔냐.”

“너무 정을 붙이면 안 되니까. 여기에 오래 있는 다는 보장도 없고.”

“마치 특수요원 같네.”

그렇게 말하며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복부에 꽤나 흥건해있던 피. 특수요원 같은 건 아닐지라도 심상치 않은 일에 엮어있을 가능성은 있었다.

“그런데 그러면 왜 굳이 나하고 있는 건데? 혼자 먹으면 되잖아?”

“너는 물주니까. 많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하더라도 물주는 철저하게 관리해야 하는 게 원칙이지.”

“……아, 그러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우리를 보는 시선이 자주 보였지만 지금은 그 빈도수가 확실히 줄었다. 아마 그냥 점심시간을 둘이서 함께하는 닭살커플정도로 보고 있겠지.

“너는 혹시 가게 되면 그걸로 되지만 난 그 후에도 이 학교에서 생활해야 한단 말이야. 게다가 너를 재우고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면 큰일이고.”

“흐응. 그렇네.”

“그래서 모른 척 하려고 했는데 네가 다 망쳤어.”

“뿌듯한데.”

“…….”

가만히 숟가락을 놓고 연아를 구경했다. 오물오물 먹고 있다. 무표정하게 가만히 먹고 있는 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었다. 그러다가 눈을 살짝 치켜뜨며 나를 보았다.

“시선이 너무 끈적거리는데.”

“누구 때문에 식판에 먹던 걸 뿜은 후 밥맛이 떨어져서 그런다. 다른 데는 볼 대도 없고.”

“흐응. 나밖에 볼 사람이 없다는 거지?”

약간 콧소리를 내며 놀리듯이 나를 보았다. 그 시선이 거슬려 괜히 고개를 멀리 돌렸다.

“흥, 말을 말아야지.”

뭐가 재미있는지 연아는 키득거렸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문득 말을 꺼냈다. 연아나 느리게 먹는 편은 아니고 오히려 여자애 치고는 빨리 먹는다 싶기는 했다. 그렇지만 가만히 주변이나 구경하기에는 약간 지루했다. 저 녀석만 계속 봐도 질릴 것 같지는 않지만……. 그건 왠지 싫다.

“그런데 너 어떻게 여기로 전학 왔어. 급식을 먹는 걸 보니까 급식비도 낸 것 같은데. 그건 또 어떻게 한 거야? 밥도 못 사먹는 녀석이.”

“사먹을 돈은 있었어. 네가 멋대로 밥을 먹여줬을 뿐.”

“내가 아니었다면 너는 지금 어디선가 변사체로 발견 되었을걸?”

그 말에 연아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네.”

이렇게 나오면 더 이상 따질 수 없다.

“아무튼 급식비 같은 건 어떻게 된 거야?”

“등록금 같은 거 내주는 사람들이 있어. 급식비도 그렇고. 전학 수속도 말이고.”

아마 의무 교육제도는 중학교 까지였지? 그게 아니더라도 복지단체에서 지원금을 줄지도 모르겠지만. 복지단체라면 급식비보다는 생활할 공간을 먼저 마련해 주었겠지.

“보호자 같은 사람들이 있어?”

“보호자라기보다는 후원자에 가깝지만……. 일단은 그 사람들이 이걸 대 줘.”

“흐음. 장학금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그렇다면 방학 전까지는 점심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대강 계산했다. 연아는 밥을 먹으면서도 그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상관 않고 계산한 내용을 표시하다가 쏘아대듯 말했다.

“신기하냐?”

“베테랑 주부 같아. 남편에게 사랑 받겠는데.”

“……칭찬 고맙구나.”

반박할 기운도 없어 그렇게 대충 대답하고는 수첩과 펜을 다시 품속에 넣었다. 부모님이 출장을 가시는 일이 잦아지고 그때 생활비는 내가 관리하게 되기에, 생각 없이 사는 동생에 맞춰 돈을 관리하느라 생긴 버릇이었다. 이걸 챙기기 전에는 부모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돈이 떨어진 적도 있어 가슴이 철렁했었지.

“그나저나 방학 때가 큰일이네. 점심비가 고스란히 들어갈 태고 동생 때문에 전기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테니까. 너,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는 가겠지?”

“……아마도. 겨울이 되면 다시 떠나야겠지.”

약간 농담 삼아 그렇게 말했는데 이런 대답이 돌아와서 놀랐다. 표정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연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야, 아……. 그러니까 꼭 방학전이나 방학 때 떠날 필요는 없어. 적어도 겨울이 끝날 때 까지 보살펴 줄 돈은 되니까. 노, 노숙을 해도 봄에 하는 게 낫잖아?”

“고마워.”

연아는 그렇게 말하며 수저를 놓았다. 앞으로 조금 더 잘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태연하게 행동하니까 이 녀석의 처지는 나도 자꾸 잊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잔반을 정리하고 나서 연아를 뒤따라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내 목을 잡아채 뒤로 끌었다. 그 시점에서 얼굴을 보지 않고도 내 목을 잡아챈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급히 주변에 사람이 없는 바깥 지점으로 도피한 후, 시원한 바람이나 그늘, 기분좋은 태양을 느낄 세도 없이 나를 따라온 그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흥, 오빠는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마치 기껏 다 키워놨더니 큐x에게 시집가는 딸을 보는 아빠의 기분? 아니, 그것보다 남쪽 나라의 왕자 같은 녀석한테 시집가는 모습을 본 아빠의 기분이라고!”

“언제 네가 나를 키웠냐! 게다가 비유가 왜 그래? 내가 누구한테 시집……. 아니, 누구하고 결혼을 했다고 이래!”

그렇게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동생은 나를 올려다보고 뭔가 스스로 죄를 회개했는지를 죄인에게 묻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흐응. 이제야 생각해 냈나보지? 그 언니하고의 행복한 신혼을.”

“……그냥 밥 같이 먹은 것뿐이잖아.”

“오빠에게 사귀는 사람이 생겼다고 부모님한테 다 말할 거야!”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들키면 안 되는 부분은 연아를 집에서 재우게 되었다는 부분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귄다고 하는 것 정도는 부모님께서도 용납해주실 거다. 동생이 저렇게 오해하는 게 오히려 나한테 유리한 부분도 있었다.

“둘이 했던 애정행각도 다 말할 거야!”

흥, 마음 것 떠들어라. 너의 그 착각이 나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게 하겠다. 이제 더 이상 당하고 살지는 않아. 뭘 말하든 다 넘겨주마!

“둘의 뜨거운 신혼도 말할 거야! 상세하게 묘사하겠어!”

“이상한 말 하지 마!”


소란스러운 점심시간도 지나가고 곧 하교할 시간이 되었다. 주변에 몇 학생들이 하교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를 가만히 나서기 시작했다. 오늘 하늘은 보기 드문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태양도 적당할 정도로 쬐고, 무엇보다 이따금씩 나뭇가지들의 흔들림과 함께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 시원했다. 그리고 주변에는 조용히, 혹은 떠들썩하게 하교하는 아이들. 으음, 나는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여어.”

“오빠.”

그리고 내 이런 점잖은 풍류를 방해할만한 사람들이 양쪽에서 둘이나 붙어왔다. 특히 동생은 같이 하교하는 친구들로 보이는 애들과 인사까지 한 후 나에게 달려온 것이다.

“……연아는 그렇다 쳐도 너는 야자 안 하냐. 공부 좀 하시지.”

“야자를 하면 게임을 못하잖아.”

“매일 조금씩 하면 되잖아.”

“안 돼. 게임은 가능하면 모든 루트를 하루 만에 클리어 해 줘야 한다고.”

“그쪽 게임 이야기였나.”

고개를 돌려 연아를 쳐다보았다. ‘일단 동생이 방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들여보내 줄테니 늦게 따라오라.’는 뜻이 닿기를 바라며 최대한 간절하게 눈빛을 보냈다.

“오빠, 시선이 너무 끈적끈적해.”

“역시 그렇지? 밥 먹을 때도 그렇고 너무 곤란하다니까.”

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어!

“그, 그래요?”

“……아니야. 그것보다 너 멀리서 봤는데 친구들이 있었냐?”

“나는 오빠와는 다르니까.”

나보다 친구가 많다는 것에서 자긍심을 느끼고 가슴 펴지 마.

“그럼 그 친구들과 같이 하교하면 되잖아.”

“뭐, 미래를 위해서 오빠와 언니의 뜨거운 연애를 한번 봐서 경험을 새겨 두려고. 남자친구 사귀면 써먹게.”

말 속에 가시가 박혀 있다. 게다가 이 녀석이 이런 이야기를 하니 기분이 묘하다. 뭔가 이게 바로 큐x엔딩이나 남국의 왕자와 결혼엔딩을 본 아버지들의 마음인가? 뭔가 크게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

“어머, 우리 연애는 네가 보기에는 너무 뜨거울 텐데? 괜찮을까 모르겠네.”

“너는 쓸데없이 오해를 키우지 마!”

머리를 누르며 아파트까지 걸어갔다. 단지 내로 들어설 때쯤에는 혹시 연아가 집 앞까지 따라오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아침에 했던 설정대로 연아는 다른 동으로 걸어가 주었다. 조금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며 동생과 둘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

“오빠.”

“……왜?”

“왜 따라가지 않았어?”

그대로 쓰러질 뻔 했다.

“내가 스토커냐!”

“보통 집이 어딘지도 모르는 애인이 홀로 자기 집으로 걸어가면 그러고 싶지 않아?”

“보통이 아니야. 아니, 게다가 나 걔가 애인이라는 말 한 적이 없다?”

“흐응, 요즘은 애인이 아닌 사이라도 둘이서 다정히 점심시간 때 이야기를 나누는 구나.”

“……다정히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냥 애인사이 정도로 오해해 주면 좋은 거야. 좋은 거야. 좋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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