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심심하기도 하고 뭔가 볼 게 없나 하고 넷플릭스를 틀었는데 이 작품이 나와서 봤습니다.
참고로 저는 건담이라고는 턴에이 1개 보고, 나머지는 꼬꼬마 시절 본 건담 만화책이 전부입니다. 다만 건담이 서브컬쳐에 미친 지대한 영향으로
주인공 인물들의 이름이나 사상 정도는 알고 있어요(아무로 레이나 샤아 등)
거두절미하고, 본 감상 평을 한 줄로 말하면 '이 정도는 되어야 애니의 전설이 되는구나... 토미노.'
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재미있게 봤어요.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정말로 거의 10년도 넘게 애니를 보다 느껴보지 못했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 주제의식.
스케일이 달라요. 최근 나온 애니메이션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주제의식이 개인에 머물러 있거나, 혹은 더 큰 영역을 다뤄도 그 깊이가
너무 얕고 조야해서 솔직히 '오타쿠 철학...' 같은 느낌만 받았어요. 주제 의식이 개인에 머물러 있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저는 뭔가 이런 걸 바랬던 거 같아요. 신냉전 이후에, 특히나 2010년대 들어서도 결국은 지구 한 곳에서는 계속 전쟁과 테러가 일어나고 있고,
인류는 더없이 편안한 문명을 누리고 있지만 공포와 불행에서 달아날 수는 없다는 걸 모든 곳에서 말해주고 있죠. 90년대 이전에 쓰인 작품이지만 상당한 인사이트가 놀라웠어요.
극장판 애니메이션에 국한해서 보자면, 저는 소설판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스토리 라인과 플롯은 좀 이해되지 않긴 했어요(하사웨이가 누구야? 걔 아빠는 또 뭔데?)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전체적으로 이해가 가므로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를 부분은 과감히 잘라서 좋았다고 생각해요. 배경설명에 너무 시간을 할애하면 결국 중요한 것을 못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2. 캐릭터
극장판에서 하사웨이나 케네스는 사실 좀 흐리게 다뤄지는 것처럼 보였는데, 저는 기기 안달루시아 캐릭터가 매력적이고 굉장히 뚜렷하게 다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어린 나이에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생각, 놀라운 통찰력. 뉴타입이라고는 하지만 기기 본인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사실 더 뛰어나게 보였어요.
게다가 기기가 '저울질'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보통 남자를 대상으로 한 애니에서 여자주인공의 저울질은 그 자체가 거의 금기시되죠. 물론 여자들이 현실에서는 당연히 선택을 한다는 걸 알지만, 그걸 굳이 화면에서까지 보고싶진 않을테니까요. 사실 기기 본인의 처지(어린 나이, 성노동자라는 불안한 상황)를 생각하면 저울질은 사실 당연한 거죠. 하지만 기기의 저울 양쪽 끝에 있는 두 남자가, 단순히 기기의 안위와 생명을 의존할 존재가 아닌, 앞으로 기기가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줄 수 있는 이념을 가진 존재라는 것에 더 무게를 실어둔 느낌이어서 굉장히 좋았어요. 턴에이에서도 여성캐릭터들이 생동감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남성 중심의 애니메이션에서도 여성 캐릭터의 훌륭한 서사를 만들 수 있는 토미노 요시유키의 능력이 돋보이더군요. 더불어 두 남자를 어떻게 앞으로 극장판에서 보여줄지도 궁금해졌습니다.
3. 작화, 전투씬, 음악
초등학생 시절 이후로는 로봇에 관심을 잃은 사람이라도 뭔가가 불타오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멋있어요. 화려하지만 지나치게 빠른 템포는 아닌, 박진감 넘치는 씬을 보여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멋부리기에 치중한 것도 아닙니다. 파일럿들은 지극히 침착하고 전투에 나선 군인 그 자체로 오히려 사실감을 부여해 더욱 더 현실적으로 나타내어줍니다. 전투 씬의 완급 자체도 잘 되는 느낌. 아무리 스펙터클해도 강-강-강-강으로 가면 피곤해지는데, 중간에 적절히 파일럿들의 대사나 다른 씬을 끼워넣어서 '이제 그만....'이라는 소리가 안 나와요. 저는 보통 전투씬을 좀 지루해하는 편인데, 이건 더 보고싶더라구요.
작화도 대단히 훌륭합니다. 깔끔하게 잘 뽑힌 캐릭터 디자인도 좋고 음악도 만족스러워요. 다만 기기의 귀걸이를 내내 반짝반짝 비춘다거나, 클럽에서 춤추는 장면은 조금 촌스럽게 느껴졌어요. 연출면에 있어서는 별다른 기교를 쓰지 않고 그냥 평이하게 진행한 거 같아요. 연출이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극을 방해하지만, 이 경우에는 인간관계를 드러내주는 장면에서는 좀 더 세련된 연출을 쓰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덕분에 정말 간만에 즐거운 애니메이션을 보았습니다. 조금 있으면 2편이 나온다는데 굉장히 기대가 되네요. 더불어 지금 우주세기 건담을 시작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언제 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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