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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9/26 14:3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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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이탈리아의 영국인 용병대장, 존 호크우드

 

Paolo_uccello,_Monumento_equestre_di_John_Hawkwood,_1436,_02.jpg 이탈리아의 영국인 용병대장, 존 호크우드

 

 피사와 피렌체의 휴전은 교황청과 비스콘티 가문 사이의 휴전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말인즉슨,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중무장한 실업자들이 드글거리게 되었단 것입니다. 잔혹한 행위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남프랑스에서 누구 못지않게 무시무시했던 흑태자조차도 동향 사람들의 악행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며, 교황은 그들을 두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지 못한 이교도들이라고 맹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각 도시들은 어떻게든 용병들을 자기네들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한편으로는 경쟁자들이 고용한 용병들을 조국 너머로 추방시키려는 등 용병의 필요성을 강하게 의식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용병들을 이탈리아 바깥으로 쫓아내는 한가지 방법은 바로 '십자군'이었습니다. 종교적 동기 및 금전적 보상에 이끌린 많은 용병들이 제 발로 이탈리아를 떠나 성지를 향했습니다. 일부는 삭풍부는 프로이센 지역으로 떠났고, 일부는 모래바람 부는 동방으로 출항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서 이승을 떴습니다.

 

 존 호크우드는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았고, 먼 훗날 그가 죽을 때까지도 그러했습니다. 존 호크우드가 포함된 이탈리아의 용병집단들은 한 차례 격렬한 분쟁을 겪은 뒤 민족 단위로 재구성됐습니다. 독일인들은 별의 용병단을 창설해 백색용병단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는데, 알브레히트 슈테르츠와 한네킨 바움가르텐이 공동대장을 맡았고, 많은 독일 출신 귀족들이 그들을 따랐습니다. 백색용병단과 별의 용병단은 서로 격렬하게 전투하며 이탈리아 현지를 마구잡이로 약탈했고, 그 과정에서 백색용병단은 거의 재기 불능의 패배를 여러차례 당하며 와해되었습니다. 많은 영국인들이 별의 용병단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패잔병들은 대다수가 존 호크우드의 깃발 아래 몰려들었고, 이제부터 호크우드는 확고부동한 '이탈리아 영국인들의 대장'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직전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피사를 제외한 토스카나 온 천지에 전부 그를 제거하려는 적들 투성이였습니다. 시에나와 페루자의 군대가 그를 추격해오자, 존 호크우드는 말라리아와 독충이 들끓어 방비가 허술한 고개를 넘나들며 간신히 피사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비스콘티 가문의 사생아인 암브로조 비스콘티와 합류하는데, 그는 성 조지 용병단을 창설해 호크우드의 용병단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봉기가 일어난 제노바에서 반란군 측을 지원하며 한 차례 그 도시를 휘저어 놓았고, 그 뒤에는 시에나로 진격해 시에나시 주위 반경 30km 이내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했습니다. 시에나는 막대한 양의 뇌물을 굴욕적으로 지불한 뒤 경솔하게도 존 호크우드의 병사들을 시 안에 들였고, 그 결과는 용병들에 대한 독살 시도와 용병들이 시민들을 인질로 잡은 난투 등이었습니다.

 

 

 

George_Frederic_Watts_-_Una_and_the_Red_Cross_(study).jpg 이탈리아의 영국인 용병대장, 존 호크우드

 

 교황은 참람하게도 성 조지라는 이름을 쓰는 용병단과 백색용병단의 이러한 행패에 분노해 강력한 규탄과 파문 교서를 계속해서 쏟아냈습니다. 교황은 용병해산까지 한달 간의 유예기간을 주며 대용병동맹을 형성하려 노력했습니다. 시에나, 페루자, 피사, 피렌체, 아레초, 코르토나와 나폴리까지 모두 이 동맹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은 동맹에 대해서 긍정적인 말잔치를 쏟아냈지만, 결국 참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용병동맹은 "지금부터 창설되는 새로운 용병들"에 대해서만 반대하는데 동의했고, 이미 창설돼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백색용병단이나 별의 용병단, 그리고 성 조지 용병단 등은 적에서 제외됐습니다. 당연히 이런 동맹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실제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채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백색용병단과 성 조지 용병단은 계속해서 약탈을 일삼았는데, 비스콘티 가문이 교황과 성공적인 협상을 맺자 암브로조 비스콘티의 성 조지 용병단은 그로부터 얼마 뒤 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색용병단은 여전히 전장에 남아있었습니다. 교황군과의 한 차례 접전을 벌인 뒤 교황측은 방금 막 자신들이 기세를 꺾은 백색용병단에게 의심스러운 음모에 가담하도록 종용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음모의 대강은 페루자에 주둔한 별의 용병단장 알브레히트 슈테르츠와 공모해 그 도시를 함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강력한 독립 도시 페루자는 오랫동안 교황령의 눈엣가시였고, 마침 페루자 내부에는 존 호크우드와 약간의 불화는 있었지만 막역한 사이였던 알브레히트가 있는 상황에서 모든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것입니다. 페루자 내부에는 별의 용병단이 잡아간 옛 호크우드의 동료들도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이 음모는 알브레히트 본인은 알지도 못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음모의 발각은 알브레히트 슈테르츠에게 곧 재앙이 되었습니다. 페루자인들은 그를 붙잡아 참수했고, 어리석게도 '영국인' 앤드루 벨몬트를 새로운 용병단의 대장으로 삼았습니다. 앤드루 벨몬트가 이끄는 부대는 페루자인들로부터 지급받은 선급금으로 무장한 채 곧장 탈영해 호크우드에게 합류했고, 이제 존 호크우드가 이끄는 백색용병단은 페루자에 대한 공세 준비를 마쳤습니다. 

 

 시에나와 페루자에 대한 정벌은 다분히 감정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살해당한 알브레히트 슈테르츠의 복수, 영국인 포로들의 해방, 그리고 시에나인들이 미지급한 급여 등은 그들을 처벌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잔혹했던 것으로 손꼽혔습니다. 시에나 남서부의 몬탈치넬로에서 벌어진 한 차례의 전투 끝에 시에나 지휘부는 완전히 붕괴했고, 시에나는 무정부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페루자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는 더 잔인했습니다. 세 시간 동안 지속된 전투 끝에 페루자측은 1,800여 명의 사망자를 냈고, 포로들은 셀 수가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페루자 측은 이외에도 용병들의 죽은 말 값으로 엄청난 양의 뇌물을 갖다 바쳐야 했으며, 포로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베네치아와 피렌체 등지에서 돈을 빌려야만 할 지경이었습니다. 교황은 페루자의 패배에 너무나도 기뻐하며 영국인 포로들을 풀어주었고, 포로들은 오랜 옥살이에 심신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다시금 밀라노에 대한 포위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4세는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이탈리아로 진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베르나보 비스콘티는 그의 사생아 암브로조 비스콘티, 즉 한 때 성 조지 용병단을 지휘하며 존 호크우드와 말을 나란히 했던 그를 다시금 교황을 물어뜯기 위해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황군에 의해 격파된 뒤 포로로 잡혔습니다.

 

 존 호크우드가 본격적으로 교황의 반대편에 서기로 결정한 것은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3세가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동맹을 맺기로 시점에서였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백색용병단에게 밀라노를 지원하라고 친히 독려했고, 교황은 그에 대해서 우려하는 서한을 보내며, 이제는 연례 행사가 되어 별로 놀랄 것도 아닌 비스콘티 가문에 대한 파문을 날렸습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지리한 용병전쟁이 다시금 반복됐습니다. 

 

 교황과 황제의 연합군은 포강 유역의 피카롤로라는 한 마을에서 집결했는데, 그 군세가 2만이 넘는다거나 말들만 해도 5만 마리가 넘게 있었다는 과장된 묘사가 남아있는데, 분명한 것은 그 숫자가 매우 많았을 것이라는 사실 하나 뿐입니다. 교황-황제 연합군이 비스콘티 가문에 대해 공세를 펼치며 지루한 공성전을 벌이고 있던 그 때에, 가문의 수장 베르나보 비스콘티는 조카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수를 돌렸습니다.

 

 영국의 클래런스공 라이오넬과 비올란테 비스콘티의 혼인식에는 존 호크우드도 참석했습니다. 하객들의 명단은 호화로웠습니다. 예전에 호크우드에게 포로가 된 적이 있었던 사보이 백작 아메데오 6세와 그의 호위기사 리처드 머사드, 방랑시인이자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 그리고 제프리 초서 등이 있었습니다. 이 결혼식의 식사 메뉴도 마찬가지로 '중세 요리사의 위대한 순간'이자 전설로 남을만한 30여개의 코스로 구성돼 있었으며, 그 양만 하더라도 1만 명을 먹이기에 충분했다고 전해집니다. 금박을 입힌 새끼 돼지와 송아지, 구운 토끼와 왜가리, 잉어, 게, 마늘과 식초 소스 등에 절여진 거세한 수탉 등 산해진미가 따로없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라이오넬이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영국 측에서 신부가 지불한 지참금을 돌려주길 거부하면서 파행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TopografiaMilano1158.png 이탈리아의 영국인 용병대장, 존 호크우드
 

 

 존 호크우드는 여전히 밀라노 측에서 복무했습니다. 존 호크우드는 이때 경력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기습에 당해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는 2개월 동안 포로로 잡혔는데, 사실 이탈리아에서 용병대장들이 포로로 잡히는 일은 꽤나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존 호크우드를 격파했던 갈레오토 말레테스타 또한 일생동안 세 번이나 포로로 잡혔는데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용병대장 중 하나였습니다. 호크우드는 전장으로 돌아왔고, 다시금 교황령으로 기수를 돌렸습니다.

 

 호크우드의 군세는 비테르보의 교황궁문 앞까지 이르렀습니다. 호크우드의 궁병은 교황이 거하는 건물에 화살을 날려댔고, 보병들은 비테르보의 들판과 과수원에 불을 질렀습니다. 교화은 겁에 질려 용병단에게 십자군에 합류하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모든 죄에서 사면해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당연히 제안은 거절당했고, 황제 카를 4세는 이 영국인들의 용병단을 가증스러운 사탄의 용병단이라고 부르며 증오를 불태웠지만, 결국 이탈리아 반도에서 독일로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피렌체인들이 산미니아토에 대한 공성전을 시작하자, 베르나보 비스콘티는 그 지역으로 존 호크우드를 보냈습니다. 산미니아토는 피사와 피렌체 사이에 위치한 주요한 도시로서, 한 때 피렌체에 속해있었으나 쿠데타로 인해 피사 쪽으로 붙으려 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사의 통치자였던 조반니 델라녤로가 갑작스럽게 축출되자 그 틈을 타 베르나보 비스콘티가 그 도시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것이었습니다. 

 

 피렌체군과 호크우드군은 일전에 백색용병단이 처참하게 패했던 바로 그 지역, 카시나에서 마주쳤습니다. 두번째 카시나 전투는 호크우드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피렌체군이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겁쟁이인 적장은 술에 취해있었고, 호크우드는 신중한 매복작전을 전개해 대부분의 적 지휘관들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카시나에서의 승전은 거의 의미가 없었습니다. 피렌체인들은 금권으로 독일인 용병단들을 모아 군대를 재건했고, 호크우드의 군대가 지역을 떠나자마자 산미니아토 성주를 돈으로 매수해 성문을 열었습니다.

 

 1370년, 존 호크우드는 옥에서 풀려난 옛 동료 암브로조 비스콘티와 함께 볼로냐 지역에 대한 약탈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호크우드군은 종종 밀라노 본국의 의도와는 다른 월권 행위를 하며 제멋대로 날뛰었습니다. 가장 심각한 상황은 곤차가 가문이 지배하는 만토바 지역을 약탈한 행위였는데, 결국 곤차가 가문은 호크우드에게 어떠한 금전적 배상도 받지 못했고, 비스콘티 가문과의 사이가 악화되었으며, 이건 베르나보 비스콘티가 원치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이어진 고용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와의 갈등은 결국, 몬페라토 후작과의 전쟁 도중 적진으로 이탈하는 극적인 사건으로 비화했습니다. 갈등의 주된 원인은 결국 돈 문제였습니다. 존 호크우드는 더 많은 돈을 받아 용병단의 병력을 증강하고자 했지만, 베르나보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교황 그레고리오는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지녔지만, 비스콘티 가문을 척살하려는 의지는 그 누구보다도 드높았고, 존 호크우드의 불만을 기민하게 알아차렸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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