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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9/22 16: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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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실제 중세 전장에서의 기사도는 어땠을까?

서언

Gustave_Doré_-_Apparition_of_Saint_George_on_the_Mount_of_Olives.jpg 실제 중세 전장에서의 기사도는 어땠을까?


 중세 '기사도(Chivalry)'라는 개념을 일반화하는 것은, 그 악명높은 '파시즘 개념화(어떤 역사학자는 이를 두고 "젤리에 못박기"라 표현했다.)'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단언할 수 있다. 기사도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기에, 중세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과거 그 어느 곳으로 시선을 돌리든 우리는 제각기 다른 모습의 기사도를 찾을 수 있으며, 시간적 범위를 중세로 국한하여도 마찬가지다.

 16세기를 기점으로 전장을 지배하던 중기병의 지위가 낮아졌음에도, 그리하여 누구보다 앞장서서 돌격하는 용맹의 미덕이 체계적인 지휘와 전술에 대한 이해 등 전문적 능력 등으로 변화하였음에도, 기사도를 관통하는 핵심적 가치는 그대로 유지되어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결투 문화 등으로 이어져나간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19세기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정립된 '낭만적 기사도'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낭만주의적 필터를 통해 사료를 취사선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굳이 중세 서유럽에 국한된 기사도라는 것을 정의하는 힘겨운 시도를 해야만 한다면, 우선 그 제각기 다른 여러 기사도들을 세 갈래로 묶어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해 볼 수 있겠다.

 첫번째는 중앙의 고귀한 귀족들이 읊은 '궁정 로망스'적 맥락에서의 기사도이다. 이러한 로망스에서 기사도는 용맹하고 충성스러우며 관용적이고 예의범절을 지키는 고결한 용사들을 이르는 표현이다. 

 두번째는 기독교 교회 입장에서의 기사도이다. 이 교회 기사도는 약자를 지키고 교회와 성지를 수호할 것을 촉구한다. 

 마지막으로는 군사 귀족들 본인, 즉 당대에 '기사'로 불리며 전장을 휘저었던 그들 본인들이 직접 저술한 일단의 논고들과 무훈시에서 파악되는 기사도이다. 

 12세기 후반 기사도가 자리잡기에 이르기까지, 이 세 갈래의 시선은 사실 서로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융합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내가 이 글에 담고 싶은 주제는 전장에서 분리된 '이상화된 낭만적 기사도 규범'이 아니라 실제로 칼과 창을 들고 싸우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마음가짐, 그리고 그 마음가짐이 실제로 어떻게 표출되었는지에 대해서이다. 

실제로 싸우는 사람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규범은 종이쪼가리에 불과할 뿐이고, 몇몇 연대기 작가들이 이러한 가상적 규범에 따라 기사도가 어쨌느니 왈가왈부하는 것은 전장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기사 본인들부터가 바로 그렇게 생각했다. 

12세기의 무훈시(Chansons de geste)에서 기사들은 기도하는 자들, 즉 수도사들에 대한 경멸을 내비쳤는데, 전투에 앞장 서서 나서지 않는 기사들은 차라리 따뜻하고 평화로운 수도원 한구석에 처박혀 무릎을 꿇고 본인 죄를 위해 기도나 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주장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다룰 문제는 수백년 동안 계속해서 변모했던 '명목상의 기사도 규범'에 대한 긴장이 아니다. 그런 긴장은 성직자와 세속영주들 사이의 갈등이나 절대주의와 근대적 세속주의에로의 이행과 같이 역사의 아주 거대한 영역들을 다룰 때 필수적으로 고려해야겠지만, 이 글의 초점은 전장의 기사들에 있다. 중세 기사도의 기원이나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루면 좋을 것이다.



중세 기사도는 폭력의 정당화다


 이제 이야기는 트리스탄이 기사가 되자마자 그의 아버지에게 매우 고귀하게 복수했다고 전한다. 그는 왕이 서거하던 현장에 있던 여덟 기사를 모두 죽였음에도 여전히 복수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기사들이 거하던 도시 브레시아로 말을 몰았고, 그 곳의 모든 남자와 여자를 죽였으며, 그 도시와 그 성벽의 기초마저 파괴했다. 이 모든 것은 트리스탄이 그의 아버지 멜리아두스 왕에게 복수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행해졌으며, 트리스탄이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행한 것보다 더 큰 복수는 이제껏 그 어떤 기사에 의해서도 행해진 적이 없었다.
-15세기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로망스, 트리스탄과 원탁(La Tavola Ritonda)


Gustave_dore_crusades_richard_and_saladin_at_the_battle_of_arsuf.jpg 실제 중세 전장에서의 기사도는 어땠을까?


 중세 시대의 기사들이 '낭만화된 기사도'를 내면화하여 현지 주민들의 수호자 역할을 했을 것이라 믿는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이겠지만, 사실 기사들의 적은 오크나 마녀가 아니었다. 그럼, 그런 사악하고 역겨운 존재들이 아니라면 대체 기사들은 누구에 대항해서 싸웠던 것일까? 

 만약 기사들이 가장 많이 죽이는 자들을 두고 '기사의 적'이라 할 수 있다면, 기사의 적은 바로 평범한 촌부, 탁발수도사, 성직자, 상인 그리고 농촌 여성과 어린아이들이었다. 사실, 기사들은 싸우지 못하는 농민들을 거의 다른 인간종으로 여겼다. 기사들에게 있어서 땅에 매인 그들은 투박하고 비천해, 경멸해마땅한 존재들이었다. 

 나를 비롯한 현대인들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세상이 전혀 평화로운 곳이 아니라는 감각이다. 우리에게 전쟁은 일시적 파괴나 폭력 쯤으로 여겨진다. 천지가 진동할만큼 거대한 폭음, 사지가 떨어져 나감, 영웅적 희생...그리고 모든 것이 고요해지며 마침내 전쟁 끝! 이제 다시 기나긴 평화 시작. 이것이 현대인들의 전쟁 감각이다. 그러나 중세인들에게 현실은 영원한 전쟁 상태였다. 중세인들에게 이러한 감각은 세속적인 영역을 벗어나 영적인 세계에서도 또한 그러했다. 성경에 따르면, 이 세상의 첫 전쟁은 하늘에서 일어나지 않았던가?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계12:7-9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곧 이루어지듯, 중세인들에게 전쟁이란 성스러운 것이었다. 중세인들은 하늘에서 첫 전쟁을 치르신 신께서 인류에게도 기꺼이 그 영광을 나누어주신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전쟁은 본질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다만 악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기사도에 대한 선행연구들이 하나같이 지적하는 것은, 중세의 기사도가 바로 이러한 영구 폭력 상태에서의 폭력의 독점자들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기사들의 폭력은 죄악이 아니라 신께서 그들에게 부여한 신성한 직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폭력'은 몇몇 규범적 기사도가 주장하듯이 추상적인 도덕적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피와 근육으로 상징되는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기사는 윤리의 보호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떤 윤리나 도덕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지배자이자 복수자로 여겨졌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에 의해 그러한 권리를 보장받은 영광스러운 귀족이라 여겼다. 

 그들은 또한 오직 전장에서의 승리만으로도 위대하신 주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증명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 관계는 성직자라는 중개자를 거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기사들은 성직자들의 금식이나(전쟁 도중엔 흔한 일이었다) 밤새 기도를 하는 것(밤을 새는 것 또한 전장에선 흔한 일이었다) 따위보다 전장에 나가 목숨을 걸고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훨씬 고되고 신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세의 전쟁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거대한 사업의 일종이었다. 중세인들이 가지고 있는 수단들을 고려해봤을 때, 전쟁보다 더 효율적인 갈등 해결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자들, 즉 '전쟁 대장'들은 오늘날의 CEO들이나 거대 기업 총수들과 같이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어느정도, 이 세상을 일종의 게임처럼 여긴다. 사실 이런 '기사들이 벌이는 거대한 게임'으로서의 중세 인식은 여전히 당대의 연대기 작가들에게나 지금의 중세 마니아들에게나 여전히 대중적으로 큰 영향을 가지고 있다. 중세의 전쟁대장들이 현실을 게임으로 여겼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낭만적 중세 전쟁 게임'의 규칙이랄 게 과연 있었다면, 그건 잘 지켜졌을까? 



기사도는 '천 것'들에게도 적용됐을까?


Gustave_dore_crusades_entry_of_the_crusaders_into_constantinople.jpg 실제 중세 전장에서의 기사도는 어땠을까?


 '낭만적 기사도' 게임으로서의 중세를 옹호하고 싶어하는 자들은, 인류 역사상 끝도 없이 되풀이된 추악한 전쟁사에서 유일하게 중세만이 예외라고 믿는다. 중세성기에는 고상한 젠틀맨들이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상당히 자기 규제적이고, 또한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보편 윤리 강령에 봉사하며, 이익보다는 명예를 추구하는 한편, 한 손으로는 농민과 여성들의 권리를 수호하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공정한 게임의 규칙에 따라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낭만적 기사도'를 옹호하고 싶어하는 자들은 분명, 기사들은 역사속 끔찍한 학살과 약탈 방화 등 민간인들 및 비전투원의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는 여러 야만적 전쟁범죄들을 '최소화'하려 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대부분의 학살과 약탈은 고귀한 기사가 아니라 천하디 천한 일반 병사들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기사가 하위 병사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웠고, 그렇기에 사료에서 수도없이 묘사되는 약탈은 전쟁에 수반된 일부 부작용 사례이며 당대 기사도의 미덕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위와 같은 주장들은 전부 거짓이다. 

 일부 중세 귀족들이 그러한 주장들을 개인적으로 믿었고(그는 바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또한 19세기의 낭만주의자들이 부활시켰어도 말이다. 적어도 전장에서는 명백히 그런 규칙이 지켜지지 않았고, 중세의 기사들은 전쟁 놀이를 하는 꼬맹이들이 아니었다. 예컨대 영주는 물론 자신 영지 내의 소작농들을 수호하는 존재였겠지만, 만일 해당 영지가 적들의 손아귀에 넘어간다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불태우고 노략할 수 있었다. 그런 행위는 또한 해당 영주의 위신이나 평판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리고 농노 수천의 삶이 위협당하는 끔찍한 전쟁들은 때때로 영주 개인의 위신에 해를 끼치는 아주 사소한 이유, 이를테면 사과 한 바구니를 훔치는 일만으로도 벌어질 수 있었다. 세상 어느 보호자가 그런 어리석은 이유로 자신의 의무를 저버릴까? 

 낭만주의자들은 일부 중세 연대기 작가들이 비전투원 약탈을 비판한 기록을 들어 기사도가 '약자를 보호하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당시의 비판은 실상 '약탈 행위' 그 자체보다 약탈이 자행되는 '방식'과 그 구체적인 '대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판의 요지는 대개 구체적으로 약탈이 자행되는 양상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으며, 당시에 태동하던 원시적 민족주의의 맥락에서 읽어야한다. 

 예컨대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서 리모주 학살을 비난하는 구절을 보면, 어째서 '반역의 죄'를 저지르지 않은 '무기를 들 수 없는 빈곤한 자들' 또한 똑같이 값을 치러야했는지를 개탄하는데, 여기서 비난의 초점은 '기사도를 지키지 않음'이 아니라, 그리고 '학살을 자행한 것' 자체가 아니라, 저들 '영국인들'의 '무분별함'에 있었던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프루아사르는 약탈당한 도시의 주민들을 '순교자'로 묘사한다. 중세 전쟁 곳곳에는 이런 순교자들이 심심찮게 발견되며, 오늘날의 많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리모주에서 있었던 학살은 유달리 잔혹하지 않았다. (프루아사르는 남녀노소 삼천명 가량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지만 수치는 열 배 정도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민간인 삼백명이 학살당한 것을 두고 가벼운 일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중세 전장에서 이러한 일들은 흔하게 벌어졌다.)

 사실, 중세 연대기 작가들은 상대편이 저지르는 이런 무분별한 약탈에 대한 비판보다는 우리편(때로는 상대편!)이 저지르는 영광스러운 '약탈 찬양'을 훨씬 더 많이했다. 그리고 이러한 약탈을 주도한 기사들을 자랑스러운 연대기의 한 페이지에 당당히 위치시킨다. 예컨대 장 프루아사르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장 르 벨(Jean Le Bel)은 그의 '진정한 연대기(Vrayes Chroniques)'에서 더비 백작을 비롯한 영국군이 프랑스 시골을 휩쓸며 자행했던 끔찍한 약탈과 학살상을 두고 "이보다 더 크거나 훌륭한 군사작전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며 그로 얻은 재산상의 이익을 찬양한다. 제프리 르 베이커의 연대기에서도 도시를 불태우는 불과 적들을 도망치게 하는 칼, 그리고 밭을 짓밟는 말발굽은 승리의 명예와 병치된다. 

 명예와 위신은 또한 놀랍게도 금전적 이익이라는 세속적 가치와 굳게 결부되어있었다. 대대적인 약탈과 그로인한 엄청난 부의 획득은 곧, 그 자체로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기사들은 영지의 수호자로서 농민들을 지키는 하찮은 일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기꺼이 '파괴자'라고 불리는 공작원들, 즉 공격자로서 적지의 영지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는 '우리편 파괴자들'을 지키는 데에 시간을 쏟았다. 그것이 훨씬 명예로운 일이었다. 



기사도적 규범은 전장에서 거의 기능하지 못했다


Gustave_Doré_-_Death_of_Frederick_of_Germany.jpg 실제 중세 전장에서의 기사도는 어땠을까?

 14세기초, 마요르카 왕국 출신의 신학자 라몬 류이(Ramon Llull)는 기사의 '수호자성'을 강조하며, 도시와 성을 약탈하고, 농작물을 훔치고, 가축들을 죽이는 것이 기사들이 하는 직무라면, 기사도는 곧 그 반대를 향해야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렇다면, 실제 전장에서도 이러한 규범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을까? 기사들은 비전투원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리고, 농민들과 비전투원은 어떻게 구별되었을까?

 사실 중세 전쟁에서 성직자를 포함한 모든 성인 남성의 경우, 엄밀한 의미의 비전투원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중세 시대는 폭력적인 시대였다. 이들은 (돌팔매와 낫으로 무장한 채) 비상시에 징집되었고, 심지어 성직자들도 기꺼이 전투에 참여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사들이 비전투원만을 따로 분별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기사들은 농민도 성직자도 기꺼이 죽이고 약탈했을까? 역사적 증거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기사들은 기꺼이 적의 땅에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고, 교회를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은 특히 중세 전쟁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였다. 백년전쟁 도중 자행된 끔찍한 초토화 전술은 정규군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현장 지휘관 역할을 했던 기사들은 누가 비전투원인지를 가릴 역량도 의지도 없었다. 

 앤 커리(Anne Curry)는 백년전쟁 시기 정규군의 군율에 주목하여 주요 지휘관들이 휘하의 병사들을 통제하려 했던 시도에 집중하기도 했다. 군율은 (비전투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교회와 성직자를 보호하라는 구절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러 연대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서술들은 그러한 군율의 엄정함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교회 재산이 약탈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땅이 불태워졌는지를 끝도 없이 열거한다. 횃불은 끝도 없이 타올랐다. 지휘관들은 적지에 더 큰 고통을 주기 위해 약탈지에 최대한 오래 머물고 싶어했고, 수도원과 교회를 일상적으로 파괴했다. 과수원의 수확물 저장고에 불을 질렀고, 아직 수확되지 않은 작물들을 모조리 짓밟곤 했다. 포도나무는 뿌리채 뽑혔다. 그러나 별로 상관은 없다. 전쟁은 신의 뜻에 의해서 허용된 지상에서의 속죄이니, 학살당한 자들은 지상에서 지은 죄를 얼마간 씻어낸 뒤 돌아갔을 것이다. 적어도 중세의 귀족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현대인인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 중세 기사들에게 "농민들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것이 기사도적으로 옳은 것이냐" 따져묻는 광경을 상상해보자. 이건 마치 미래에서 온 누군가가 우리에게 "대중교통이나 자동차를 타고 매연을 뿜어내며(과장된 표현으로는 "지구를 파괴하며") 매일같이 터덜터덜 직장에 일하러 가는 게 과연 지구인으로서 옳은 일이냐?"고 묻는 것과 비슷한 반응을 자아낼 것이다. 너무 일상적으로 자행하고 있는 일이기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몇몇 친절한 기사들은 머리를 간신히 굴려 이렇게 답할 것이다.

 "좋은 전쟁을 위해서라면 하찮은 자들쯤은 약탈하고 파괴하고 학살해도 되는데, 그것은 신성한 교부들에 의해서도 축복받은 성스럽고 합법적인 일이며 모두 하늘에 계신 그 분 계획의 일부다." 

 기사들은 농민들을 같은 인간종으로 여기지도 않았으며 그들에 대해 그 어떠한 기독교적 유대도 가지지 않았다.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은 물론 '사회적 지위'였다. 귀한 신분의 부인들과 처녀들은 절대로 성적으로 침탈당해서는 안되었으나(물론 전쟁 중에는 이들도 심심찮게 고귀한 신분의 기사들에게 범해졌다는 증거들이 차고 넘친다.), 농민 출신의 천한 소녀들은 아무렇지 않게 폭력으로 범해졌다. 12세기 후반에 쓰인 안드레아스 카펠라누스의 사랑의 기술(De amore)은 (비록 풍자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이러한 일면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은 말이나 노새처럼 자연의 충동이 끄는 대로 자연스럽게 비너스의 일(성적인 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농민에게는 끊임없는 노동과 농기구가 주는 쉼없는 위안으로 충분하다... 만약 그대가 농민 여성에게 사랑으로 끌리게 된다면 그들을 칭찬으로 치켜세우라. 그리고 적절한 기회를 찾는 즉시 폭력적으로 끌어안아 그대가 원하는 것을 취하라.(Si vero et illarum te feminarum amor forte attraxerit, eas pluribus laudibus efferre memento, et, si locum inveneris opportunum, non differas assumere quod petebas et violento potiri amplexu.) 강제적인 치유책을 선행하지 않는 한, 그들의 완고한 수줍음을 누그러뜨리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 Capitulum XI: De amore rusticorum





결론: 기사도는 파괴적이었다

 이 글의 서언에서 언급했듯이, 기사들이 전장에서 행한 '전장 기사도' 이외에도 분명, 궁정 음유시인들이 노래한 기사도나 몇몇 기사도적 연대기 작가들의 기사도, 그리고 교회가 기사들로 하여금 강요하려 했던 기사도들 또한 분명 무시해선 안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러가지 모습의 '기사도 규범'들은 분명 당대를 살던 군사 지휘관들의 심성에 얼마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기사들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언제나 고아와 과부와 빈민만이 남았다. 그 땅을 가장 가혹하게 유린하는 기사가 언제나 가장 큰 명예와 영광과 전리품을 축적했다. 많은 수녀와 농민 여성들이 납치당하고 능욕당했다. 이 모든 것들이 기사도의 이름 아래 기사들에 의해서 '정정당당하게' 행해졌다. 만일 기사도의 진정한 의미가 그런 끔찍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가상의 기사도는 역사가들이 아니라 소설가들이 다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전장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 어떤 기사도 규범이라도 군사적 효율성 앞에선 가뿐히 무시당했다는 것이다. 기사들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들이 곧 종주(宗主)이자 판사였다. 그 어떤 도덕적, 정치적 권위도 거부했고, 오로지 스스로의 창과 말에 의지한 채 전장에서 실력으로 직접 증명했다. 그들은 자율적이었고, 판단하는 자들이었으며, 신의 뜻을 대리하여 그들의 앞길을 막는 자들이라면 그 누구에게나 사형 판결을 선고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이 자행한 학살에 대해서도 도덕적으로도 떳떳했다.


그야, "재미있으니까! (Parce qu'il me plest!)"

- 브르타뉴 출신의 무관장, '도살자' 올리비에 드 클리송(Olivier V de Clisson)의 좌우명. 그는 이 문구를 인장에 새겼다. 그는 평소 포로의 사지를 절단하는 취미를 지녔다. 
= 동료였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그 잔혹한 풍경을 보고 "영국인들이 당신을 괜히 '도살자'라 부르는 것이 아니군!"하며 놀라워했다. 그런 뒤 게클랭 자신 또한 한 때 용병단을 이끌며 가는 곳마다 남녀노소를 막론한 끔찍한 학살들을 여럿 자행한 바 있다. 그는 한 때 아비뇽 주위를 약탈하며 교황을 겁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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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나
25/09/22 16:31
수정 아이콘
폭력이 일상화된 시대에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가 그 어느 때보다 진리이던 시절이겠네요.
25/09/22 17:23
수정 아이콘
천룡인의 인간사냥은 역사에 근거한 내용이었따...
겨울삼각형
25/09/22 17:33
수정 아이콘
(수정됨) 중세 끝자락 이야기이지만

킹덤컴에 묘사되는게 정말 현실적이지요.

작중 빌런역이 자주 이야기하는
전쟁은 지저분한 비지니스다.
더 강한개가 암캐를 따먹는다.

등등..

작중 주인공의 적의 수장으로 나오는 지기스문트 폰 룩셈브루크의 경우에도..
본인의 인간성 자체는 중세시대임에도 꽤 괜찮은 군주상이지만
(오스만 투르크의 서진을 막는다는 대의도..)

그럼에도 그의 한마디에 주인공의 고향인 스칼리츠가 다 약탈당하고 학살당했죠..
FlutterUser
25/09/22 18:29
수정 아이콘
첨부된 이미지가 왠지 베르세르크 느낌이 나네요
번개맞은씨앗
25/09/22 19:01
수정 아이콘
기사는 전사라는 얘기이고, 전사의 기본은 야만 아닐까 싶네요. 야만에서 미덕 ・ 윤리 ・ 신앙 ・ 교양이 덧붙으며, 문화적으로 진화하는 것이겠고요. 

문화적 이상이 있는가 하면, 인간 현실도 있는 것이겠지요. 그 현실속에서 누군가는 선하고, 누구는 악할 테고요. 누군가는 선한 사례를 주목하며 낭만을 가질 테고, 누구는 악한 사례를 주목하며 환멸을 가질 테고요.

기사만이 아니라 봅니다. 갑질 ・ 마녀사냥 등 힘의 균형이 무너진 지점에서, 감정적 폭주가 있게 되고, 비참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인간 내면에 감정을 규율할 실천이성이 돌아가야 될 테고요. 
25/09/22 20:15
수정 아이콘
(수정됨) 12-13세기 기사 문학에서 혈통을 강조하는 것과 농민과 민간인에 대한 극단적인 멸시는 정작 현실에서 기사들이 그들에서 비롯되었고 그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필요했던 수사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노르만 정복의 경우에도 노르만 기사들이 이론상 비천한 노예인 잉글랜드인들과 혼인하고 언어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는 반세기도 걸리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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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은 초기에 토양 경작과 거름 냄새를 암시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야 했다. 왜냐하면 기사가 된 많은 이들이 처음에는 마을 사람, 토지 경작자, 심지어 예속민과도 완전히 그리고 항상 구별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초기에 전투원을 밀레스(miles)라고 불렀을 때, 그 의미는 종종 뚜렷한 복종의 느낌을 담고 있었고 상당히 낮은 사회적 지위의 전사들에게 사용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고, 정치 권력의 소유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모리스 킨이 지적하듯이, 13세기는 기사 서임식을 통한 기사 계급 진입에서 귀족 혈통을 통한 자격으로 강조점을 옮겼다. 문학 작품들은 기사도적 자질이 유전적 상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신념을 보여준다. ...

중세 성기를 특징짓는 상업과 도시의 호황을 고려할 때, 기사들은 자신들과 엘리트 도시민들 사이에 거리를 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들은 사회 정상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를 가장 열망했고, 가능한 한 빨리 기사도의 특징적인 모습을 취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만의 토너먼트를 열고, 문장을 보이고, 오만하지만 가난한 기사들과 혼인 동맹을 맺는 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엇이 그들이 기사도 문학을 읽고 고상한 예절을 모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기사들이 실제로 규범을 깨고 중간 계층과 어울리며, 그들의 대출, 상업적 전문 지식과 경영에 의존하고, 그들의 딸들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과의 기사도적 거리를 강조하는 것이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Richard W. Kaeuper, Chivalry and Violence in Medieval Europe

11세기와 12세기의 여러 문헌들은 사회적 배경이 농민과 가까운 기사 계층이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오로지 군사적인 직업으로 구분되었다. 12세기 프랑스에서는 농노에서 기사가 된 사례들이 있었다. 군사적인 직업은 그들을 자유롭게 했지만, 그들의 자유로운 신분은 전적으로 그들의 직업에 달려 있었고, 그들의 상속인에게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12세기 동안 기사 계급의 배타적인 경향은 심화되었다. ... 모든 시대의 벼락출세자들과 마찬가지로 귀족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선배들보다 더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Frances Gies, Life in a Medieval Castle

그리고 본문에서 주로 다루는 계급/직업의식으로서의 기사도에서는 이론상 마치 무용으로 자격을 증명해야 하고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볼 수도 없는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수많은 기사들이 무술 훈련 같은 건 받아본 적 없는 민간인이거나 매우 흔하게 공포에 질려 전투에서 도망쳤다는 점도 생각해볼 수 있죠.

대부분의 군인-기사들이 본문에서 묘사되는 수준으로 자아가 강했으면 집단으로서 전투력에 오히려 손해라서 도태되기 쉬웠을 거라는 점도. 러시아 혁명에서 무자비하게 피를 흘리며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도 실상은 기가채드 레닌과 트로츠키를 따르는 독서가 샌님 집단이었고 레닌이 독일 열차로 배송되기 전까지는 다른 이상주의적인 사회주의자들과 크게 구분되지 않았듯..
호머심슨
+ 25/09/22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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