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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9/18 14:45:28
Name 두괴즐
Subject [일반] [에세이] 인간을 먹고 싶지만, 꾹 참는 네즈코 (「귀멸의 칼날」)
<귀멸의 칼날> 정주행을 시작하면서 느낀 바를 썼습니다.
<진격의 거인> 1기 스포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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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에세이] 인간을 먹고 싶지만, 꾹 참는 네즈코

—「귀멸의 칼날」을 보고 (「진격의 거인」 1기 스포 있음)





<1> 경계적 존재: 네즈코



「귀멸의 칼날」이 장안의 화제다. 흥행이라는 측면에서는 불멸의 애니메이션이 되고 있다. 유행에 뒤처지는 중년이 될까 봐 두려워서 정주행을 시작했다. 주행을 하면서 먼저 본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해보니, 이미 하차를 했단다. 왜? 네즈코 때문에.



「귀멸의 칼날」의 배경은 일본 다이쇼 시대다. 깊은 산속에는 한 가족이 있는데, 이들은 숯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한다. 주인공 탄지로는 가족 중 맏이로 숯을 가져다 마을 주민들에게 파는 일을 맡고 있다. 한 날은 눈도 많이 쌓인 터라 동생들을 놔두고 혼자서 마을에 다녀온다. 그런데 돌아오니 혈귀의 습격이 있었다. 가족은 모두 처참히 죽어 있다. 다만, 가만히 보니 천만다행으로 여동생 네즈코에게는 호흡이 남았다. 급히 네즈코를 업고 마을로 내려가는데, 아뿔싸- 네즈코는 이미 혈귀가 되어 있다.



탄지로는 여동생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혈귀에게 복수를 하려고 ‘혈귀 사냥꾼’의 길로 나간다. 「귀멸의 칼날」의 세계관은 간명하다. 인간의 세계에 혈귀가 침입했다. 혈귀는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식인귀로 인간 존재의 위협이다. 인류의 존속을 위해 혈귀는 절멸해야 한다. 문제는 네즈코인데, 얘는 인간을 먹지 않는다. 정확히는 인간의 피 냄새에 침을 질질 흘리지만, 그럼에도 참는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편에서 혈귀와 싸운다. 이게 뭐야, 그래서 친구는 하차했다.



아무튼 이유는 모르지만, 네즈코는 특이 체질이어서 인간을 먹지 않아도 에너지를 얻는다. 잠만 푹 자면 된다. 친구는 이런 설정 자체가 억지라며 몰입이 안 된다고 했다. 혈귀와 인간의 뒤 없는 참혹한 대결 구도 속에서 이런 간편한 예외 설정은 우습다는 것이다. 아무리 네즈코가 “나 오늘 되게 예쁜데?”라고 해도, 친구는 “너 때문에 하차다!”라고 선언했다. 나는



되게 예뻐서 계속 보는 것은 아니고, 예쁜 것도 맞지만 그보다는 귀엽고, 그래서 본다라기보다는, 친구 말도 맞긴 한데, 것보다 나는 경계적 존재로서 네즈코에 관심이 있다. 정말이다. 인류는 비인간으로 여기던 타자를 인간으로 재규정하면서 공동체를 확장해 왔다. 보편적인 인간이란 “암묵적으로 남성이고 백인이며 도시화되고 표준 언어를 사용하고, 재생산 단위로서 이성애적이며, 승인된 정치 조직의 완전한 시민”(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2015, 87)을 지칭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학철학자인 장대익도 인간 종특 중 하나가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류의 탄생 때부터 수렵 채집기 내내 그리고 최근 1만 년 동안의 시대에서도 외집단에 대한 경멸과 혐오는 상수였다.”(『공감의 반경』, 2022, 8) 만약, 이 외집단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게 되면 양심의 가책 없이 차별, 혐오, 폭력의 스위치가 거침없이 켜진다. “나와 다른 타자를 우리보다 못한 존재, 즉 ‘인간 이하의 존재(less human)’로 취급하는 순간 그들은 문자 그대로 짐승이요, 벌레요, 물건이 된다.”(10)



하지만 인류는 그러한 편협을 넘어왔다. 한때는 특정 신념을 가진다는 이유로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는 것이 당연했다. 또, 남다른 사랑을 하는 사람은 돌로 쳐 죽이거나 거세를 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누구나 종교의 자유가, 사랑의 자유가, 정치적‧사회적 활동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니다. 피, 땀, 눈물이 있었고, 이에 범벅이 된 경계적 존재가 있었다. 그 경계적 존재가 다 이룬 것도 아니다. 그 존재 곁의 사랑, 동료, 우정, 갈등, 부대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귀멸의 칼날」의 네즈코는 그런 경계적 존재다. 오빠인 탄지로에게 네즈코는 여전히 인간으로 보인다. 하지만 네즈코는 명백한 혈귀다. 혈귀 사냥꾼들에게 네즈코는 당연히 섬멸해야 할 적이다. 이를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 안에 숨어든 배신자일 것이다. 탄지로는 혈귀 사냥꾼이 되어 혈귀와의 전쟁을 수행한다. 전사가 된 그는 거침없이 혈귀를 벤다. 하지만 내로남불의 대명사이므로 자신의 동생만은 소중히 지켜야 한다.



혈귀 사냥꾼의 리더들에게 혈귀는 용서할 수 없는 원수다. 탄지로는 이런 그들에게 “우리 동생은 혈귀지만, 그래도 괜찮아!”라고 설득해야 한다. 경계적 존재는 모호하고, 애매하며, 어디에도 선명히 소속되지 않기에, 괴물, 마녀, 불신자―알 수 없는 공포가 된다. 하지만 만약 이를 극복하여 경계를 넘는다면 새로운 공동체의 기원이 된다.





<2> 경계적 존재: 에렌



매정히 네즈코를 버린 나의 친구는 「진격의 거인」을 다시 정주행한다. 21세기를 대표하게 된 거대한 애니메이션을 꼽으면 「귀멸의 칼날」과 「진격의 거인」은 나란히 설 것이다. 물론 이런 나의 생각에 친구는 노발대발하겠지만, 인기로 따지면 그렇다는 거고, 당연히 두 작품은 상당히 상이한 유형의 작품이다. 「진격의 거인」은 치밀한 세계관 설정과 밀도 높은 관계 묘사, 탁월한 떡밥 회수 등 여러모로 완성도가 높다. 작정하고 파고들지 않으면 놓치게 되는 디테일도 많다. 반면 「귀멸의 칼날」은 단선적인 성격이 짙어서 보다 직관적으로 세계가 들어온다. 설정들도 엄밀하지 않다. 하지만 나에게 두 작품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결국 경계적 존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기 때문이다.



「진격의 거인」은 거인들이 무서워서 높은 벽을 세우고, 그 안에서 인류가 사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그렇게 얼마간을 살았던가. 어느 날 벽이 뚫리고, 거인들이 들어온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 에렌은 엄마가 거인에게 먹히는 것을 목도한다. 이후 이 열혈 소년은 거인을 도륙하기 위해 전사가 된다. 에렌은 심장을 바쳐 거인을 도살한다. “구축해 주마. 이 세상에서, 한 마리도 남김없이!!” 하지만 거인이 괜히 거인이 아니므로, 동료를 구하다가 자신도 먹히게 된다. 그리고 에렌은



‘어라? 나도 거인이잖아?’



거인이 된다. 인간이지만, 거인이고, 거인이지만, 거인을 섬멸하고자 하는 에렌. 벽 안의 사람들은 이런 에렌을 믿을 수 없기에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거인의 힘을 이용해 거인을 이기려는 본인의 의지와 그를 지키고자 하는 동료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에렌의 이야기는 더 이어진다.



‘알고 보니, 거인!’이라는 미스터리는 「진격의 거인」 세계의 중요한 일부다. 더 크고 엄혹한 세계가 에렌과 그의 동료들, 또 자신의 공동체 앞에 펼쳐진다.



「진격의 거인」은 나도 주행을 마쳤기에 경계적 존재로서의 에렌이 어떻게 되는지, 어떠한 공동체로 나아가는지 안다. 그건 비극이자 구원이었고, 살육이자 사랑이었다. 「귀멸의 칼날」은 아직 주행 중이라 네즈코라는 경계적 존재가 어떤 공동체를 만들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경계적 존재가 있기 때문에 내집단과 외집단 사이의 대결이 달리 열리게 된다는 점이다. 비극적 결말에 당도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사례만 반복되었다면, 나와 네가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네즈코의 미래를 좀 더 지켜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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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MAGE
25/09/18 16:15
수정 아이콘
네즈코는 혈귀라면 당연히 느끼게 될 살육과 인육의 욕구를 참고 견디고 있기에 정말 대단한 존재죠.. 마치 흡연을 20년동안 했는데 , 금연 한지 한달 지난 금연자의 느낌이랄까요.. 어쩌면 그것보다 더 욕구가 심할수도 있겠습니다...어디까지 보신줄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그런 혈귀들이 또 나옵니다. 이 들의 공통점은 그들을 있게 만든 무잔이라는 존재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는거죠. 이 만화의 출연하는 인간들도 대단하지만.. 그 욕구들을 억누르고 인간들과 화합하는 그들은 진짜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찬가라는 어쩌면 단순해 보이는 주제일수도 있는데.. 저 들의 존재 때문에 귀멸의 칼날이 그저 단순한 만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25/09/18 17:27
수정 아이콘
굉장히 재미있게 봤고 욕망을 이겨내는 인간 찬가의 주제도 적절히 버무려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테스트 중 혈귀 먹이가 되던지 말던지 그건 참가자가 알아서 정신의 귀살대 선별테스트는 여전히 대체 뭐지 싶어요..
Anti-MAGE
25/09/18 20:20
수정 아이콘
선별테스트는 동감합니다. 테스트인데 목숨을 걸어야 하다니..
두괴즐
25/09/19 11:57
수정 아이콘
맞아요. 결국 경계적 존재의 의지와 역량이 새로운 관계를 열어내고, 기존의 공동체를 변모시키니까요.
及時雨
25/09/18 16:37
수정 아이콘
답은 꿀잠이다... 욕구를 차단하는 꿀잠...
두괴즐
25/09/19 11:57
수정 아이콘
꿀잠자는 네즈코가 부럽습니다...
及時雨
25/09/19 13:08
수정 아이콘
엘렌도 꿀잠을 잤더라면 흑흑
25/09/18 17:11
수정 아이콘
작품의 아주 초반에 드러나는 설정이기도 하고,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와도 관련이 있는데, 친구분은 그냥 몇 화 안 보고 하차하셨나 보네요
두괴즐
25/09/19 11:59
수정 아이콘
들어보니, 그래도 무한열차 까지는 봤다더라고요. 저는 무한열차에 너무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그 친구는 여기까지 오면서 드러난 세계관, 설정, 개연성 등이 너무 형편없어서 도저히 못보겠다고...
닉언급금지
25/09/18 18:16
수정 아이콘
전 오히려 진격거를 거기서 나오는 흑선포비아가 너무 싫어서 1화 하차했는데 말이죠... 크크크
두괴즐
25/09/19 12:02
수정 아이콘
<진격의 거인> 작가의 극우 논란이 있어서 저도 사실 보다가 하차했었는데, 워낙 잘 마무리가 됐다고 해서, 재도전 했었습니다. 다 보고 나니, 굉장하더군요. 여러모로.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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