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5/08/24 14:17:12
Name 라비01
Subject [일반] 기억상실증에 관한 이야기
죽을 때가 다가오니 갑자기 말이 많아지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대화할 상대도 없고 진짜 제 이야기를 할 용기도 없다 보니 곁 가지로 이런 이런 이야기라도 올려봅니다.

저는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증상이 시작되어 어언 30년째 앓고 있는듯 합니다.
이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대략적으로 초등학교 5~6학년 즈음 시작되었겠다고 예상을 할 뿐이지요.

제 주변에서는 제가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지 모를 겁니다.
누구한테 애기한 적도 없고 어쨌거나 일상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기억들은 대부분 없어지지 않고 있으니까요.
증상이 시작되던 시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저것 까먹고 없어진게 아마 나름 많아서 어떻게든 남들의 행동을 흉내내고 이래저래 노력해서 엇비슷하게 따라가던 시절이었죠.
사람을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참 끙끙 앓기도 했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 큰 이상 없으면 다들 그러려니 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저희 집안이 그 시절 무척 힘들던 시기였기에 가족들도 저를 신경 쓰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없어진 기억은 아마 2~30%정도의 기억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진 않습니다.
다들 유치원생 시절은 기억하지는지 모르겠으나 그러한 시절은 원래 잘 기억 못했던 것 같으니 제외하고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은 어느정도라도 기억나는 것 같은데 그 외의 기억은 특히 3~4학년 시절의 기억은 갑자기 대부분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시절의 기억은 어느 정도씩 기억이 나는데 3~4학년 시절의 기억은 통으로 비워진 느낌이었고
정작 그 시절 자주 찾아가던 친구에 대한 기억은 또 일부 남아있어서
그 친구가 대체 누구였는지 언제 쯤 사귀던 친구였는지 등을 알 수가 없어서 한참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끙끙 앓곤 했습니다.

그러한 시절을 지나면서도 저는 이게 기억상실의 일종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걸 알려줄 만한 매체도 없었거니와 알려줄 만한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그저 저 혼자 혼란 속에서 힘들어 했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그 시절이 그렇게 힘들었는가 괴로웠는가 고통스러웠는가 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주위의 약간의 도움만 있으면 그래도 나름 슬기롭게 해쳐나올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그 모든 세월이 다 지나간 지금에 사 생각해볼 뿐입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론 결국 그 시절이 저를 망쳐 놓고 말았습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부터 다수의 정신장애를 앓고 있었고 그 모든 정신장애의 시발점은 기억상실로 인한 혼돈이었습니다.
기억이 없다는 것 자체는 주위의 관심과 사랑이 있다면 어느 정도 흘려보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내가 나인지 모르게 되면 나를 의심하게 되고 나를 의심 하다보면 나를 점점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저는 갈수록 더 많은 기억들을 잃어갔고 제 속에는 추억이라고 할만한게 갈수록 줄어갔습니다.
그로 인해 이런저런 정신병들을 앓아가고 저를 잃어가며 아마 저의 많은 부분들이 텅빈 공허로 향해 갔던것 같습니다.
저는 결국 제가 존재해야 할 이유 살아가야 할 이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결국 어찌저찌 지금까지 죽지 못해 살아남았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정신이 성숙해지고 회사일도 하면서 온갖 정신병적 증상들이 조금씩 극복이 되어가기 시작하였지만 그래도 저는 계속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이상하게 평온합니다.
기억에는 감정이 담기고 그 감정이 추억이 되는거겠죠.
제 기억에는 대부분 감정이 없습니다.
이제는 몇 안되는 추억이나 저를 늘 괴롭히곤 하던 트라우마나 모두 별 느낌없이 다가오곤 합니다.
이전에는 트라우마를 다시 트라우마로 자가발전하며 괴로워하곤 했는데
이젠 그냥 모든 게 빛바랜 느낌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인가 제가 과연 그렇게 힘들었는가 내 인생이 그렇게 괴로웠는가 내 지금이 괴롭고 힘든건가? 하는 생각들이 계속 들곤 합니다.
평생 아무에게도 아무 말 없이 살다가 죽겠다고 하다가 이런 글을 인터넷에 적는 걸 보면 무언가 상태가 이상한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주변에 기억상실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잘 돌봐주세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건 극복 못할만한 질병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기억만큼 새 기억을 좋은 추억을 쌓아주기만 하면 되는 것 같은데 저는 그게 잘 안되었네요.
곁 가지만 이야기한다고 하는 게 너무 조금 깊게 들어간 느낌이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올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조금이라도 정돈하고 줄여서 올려봅니다.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내일은주식왕
25/08/24 14:37
수정 아이콘
그동안 참 많이 힘드셨겠구나. 나는 참 배부른 놈이구나. 생각이 듭니다. 라비01님의 이야기를 앞으로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델라이데
25/08/24 14:57
수정 아이콘
초등학생때의 기억을 20~30%를 제외하고 기억하시는거면 많이 기억하시는거 아닐까요? 저는 10%도 기억이 안나는데..
25/08/24 15:36
수정 아이콘
저도 거의 기억나는게 없는데...
라비01
25/08/24 15:48
수정 아이콘
아마 초등학교 5~6학년 혹은 중학교 1학년 때즈음에 저렇게 느꼈던것 같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초등학교 3~4학년 시절의 거의 대부분 초등학교 1~2학년 시절의 상당수가 갑자기 기억이 안난다고요.
모든 기억이 사라진건 아닌데 이 거억이 대체 어느시절의 기억인지
이 기억이 대체 무슨 기억인지 알수 없게 되고 기억들이 점차 사라져가거나 악몽들로 대체가 되고 악몽들을 진짜 기억으로 착각하고 그런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시절들을 거쳐 지금의 제게 기억이라고 할말한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일상을 해나가고 회사일을 해나갈수 있는 기억들은 대체로 어느정도 보존이 되는 편입니다.
다만 추억이라고 할만한건 글쎄요 잘모르겠습니다.
그러한 기억들은 전부 흐릿하여 존재하는것 같기도 한데 존재하지 않는것 같기도 한 그런 느낌입니다.
반복하여 되뇌이는 기억들은 그래도 어느정도 나름의 선명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편이지만 제가 그렇게 되뇌는 기억은 트라우마 말고는 없는 편이어서요.
개인적으로 느끼기로는 남겨진 기억의 상당수는 완전히 없어진건 아닌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꺼내써야 하는지라고 하는 특정한 형태와 종류의 기억을 꺼내쓰는 방법이나 체계가 고장난 느낌이긴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먹어가면서 뇌가 그런 쪽으로 더더욱 망가져서 증상이 더 가속화된 느낌이 있고요.
럭키비키
25/08/24 19:43
수정 아이콘
죽음까지 생각했었다면 심각했었군요.
누군가에게 털어놓지도 못했다니 어려운 고백을 하셨습니다.

좋은 기억이나 추억이 없어진건 아쉬운 일이지만 나쁜기억도 같이 없어졌을겁니다.

사람은 영원히 잊지않고 싶은것도 있지만 잊고싶은것도 있거든요. 그건 나의 부끄러운 기억일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고통받은 기억일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작성자님 글을 보면 힘든 시간은 지난거같지만 그렇지않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제 필력이 부족하여 만족스러운 위로는 드리지 못하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일반] [공지]자게 운영위 현황 및 정치카테고리 관련 안내 드립니다. + 선거게시판 오픈 안내 [29] jjohny=쿠마 25/03/16 31696 18
공지 [정치] [공지] 정치카테고리 운영 규칙을 변경합니다. [허들 적용 완료] [127] 오호 20/12/30 310672 0
공지 [일반] 자유게시판 글 작성시의 표현 사용에 대해 다시 공지드립니다. [16] empty 19/02/25 364280 10
공지 [일반] 통합 규정(2019.11.8. 개정) [2] jjohny=쿠마 19/11/08 369294 4
104850 [일반] 이따 KBS1 '월드1945 - 그때 지금이 시작되었다' 다큐 마지막 3부가 방송됩니다. [2] 시나브로2493 25/08/24 2493 2
104846 [일반] 철학적 사고를 하는 캐주얼한 방법 [4] 번개맞은씨앗1543 25/08/24 1543 4
104845 [일반] 야구랑 축구 보러 대구 여행 [5] 及時雨900 25/08/24 900 4
104844 [일반] 기억상실증에 관한 이야기 [5] 라비012083 25/08/24 2083 8
104842 [일반] 철학적 사고를 하는 캐주얼한 방법 [21] 삭제됨2612 25/08/24 2612 4
104839 [일반] [팝송] 저스틴 비버 새 앨범 "SWAG" [2] 김치찌개2011 25/08/24 2011 1
104837 [일반] 귀멸의칼날 무한성 1장 개봉당일 보고 온 후기 (스포없음) [97] 시랑케도13191 25/08/23 13191 5
104835 [일반] 케데헌은 PC 그 자체이죠. [226] 유동닉으로12904 25/08/22 12904 21
104834 [일반] "소득은 국민연금뿐, 생활비 걱정" 부동산에 묶인 노인 빈곤층 [133] 페이커7511379 25/08/22 11379 22
104831 [일반] 숨 참기 기네스 기록 29분 3초 [49] 조조5693 25/08/22 5693 12
104829 [일반] 지식의 사람 차별 [8] 번개맞은씨앗3471 25/08/22 3471 1
104827 [일반] 주호민씨가 뻑가와 악플러들을 고소한 것 같습니다. [157] 짭뇨띠16959 25/08/21 16959 0
104825 [일반] 2만9천명의 소득세 신고를 놓친 세금어플 사건 [30] 안녕!곤9386 25/08/21 9386 26
104824 [일반] 우리는 수출을 다변화 할 수 있는 것이 맞는가? [45] 깃털달린뱀4786 25/08/21 4786 7
104823 [일반] 가정환경이 나쁜 사람은 거르라는 말에 대한 시시한 고찰 [39] 김아무개5156 25/08/21 5156 17
104816 [일반] [역사] 수학 그거 방정식만 풀면 되는 거 아니냐(아님) [12] Fig.14263 25/08/20 4263 9
104815 [일반] 우리나라 공공병원의 현실 [59] 진공묘유7114 25/08/20 7114 28
104813 [일반] 소원 성취. 차를 바꾸다. [56] 쉬군4887 25/08/20 4887 26
104811 [일반]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수학기초 [108] 번개맞은씨앗10526 25/08/20 10526 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