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5/01/31 16:45:16
Name 글곰
Subject [일반] 그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화장실 좌변기 칸이 모두 차 있었다. 드물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대안도 있었다.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예상대로 그곳 화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위층 화장실은 직원들의 동선에서 벗어난 외진 곳에 있는 탓에 늘 한가했다.

적당한 칸을 찾아 들어가 변기 위에 앉았다. 허벅지에 와 닿는 플라스틱의 서늘함에 잠시 몸을 떨어야 했다. 물론 손에는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배변 중 스마트폰 사용은 항문 건강에 좋지 않다지만 자제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여하튼 전반적으로 볼 때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화장실 방문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갑작스럽게 몹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가까워져 오더니 이내 내가 들어있는 칸 앞을 지나쳤다. 옆문이 벌컥 열리고는 덜컹거리며 다시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소 묘사하기 민망한 요란한 소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특정한 소음의 발생이 중단되자 화장실 안에서 들리는 것은 급하게 호흡을 헐떡이면서 몰아쉬는 숨소리뿐이었다. 어지간히 급하게도 뛰어온 모양이었다.

엄청 급하셨나 보군.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고요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미소는 곧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들려오는 것은 분명 여성의 숨소리였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번개처럼 좌우로 치달렸다. 뭐지? 너무 급해서 잘못 보고 들어왔나? 아니면 혹시 내가 잘못 들어온 건가? 순간 날카로운 소름이 등허리를 타고 내달렸다. 심장이 섬뜩하게 얼어붙었다. 만에 하나 내가 여자 화장실에 앉아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분명 뉴스 한 꼭지를 장식할 만한 일이었다. 아무리 변명하더라도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라. 수갑을 찬 채 직장 동료들의 혐오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경찰에게 끌려가는 나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숨을 죽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화장실 안에 울려 퍼지는 것은 차츰 잦아 들어가는 옆 칸 손님의 숨소리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흐르지는 않았다. 두루마리 화장지를 풀어내는 소리가 들리더니 옆 칸이 잠시 번잡해졌다. 그리고 물 내리는 소리.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

누군가에게 들릴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층 더 숨죽였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발걸음 소리가 왼쪽으로 향했다. 어째서인지 손을 씻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정체 모를 그가 화장실을 나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빼꼼히 문을 열고 밖을 살펴보았다. 좁은 틈새로 남성용 소변기가 보이는 순간, 깊고도 아늑한 안도감이 나를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나는 남자 화장실에 있었다. 그 사실만은 틀림없었다.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손을 씻으면서 나는 자문해 보았다. 물론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그 여자는 대체 어떤 연유로 남자 화장실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그리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화장실을 나갔을까.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수리검
25/01/31 16:49
수정 아이콘
숨 소리로 성별 판독이 가능하시다니 .. +_+b

얼마전에 길거리에서 너무 급해서
근처 지하철 역으로 뛰어들었는데
만석이더군요

영겁처럼 느껴지는 5분여를 기다리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비어있는 장애인 칸으로 들어갔습니다
저것이 약자를 위한 시설이라면
지금 이 곳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나 아닐까? 하는 합리화를 하며 ..
如是我聞
25/01/31 17:12
수정 아이콘
그러다 걸리면

성기능장애라구요!

하고 우기면 됩니다.
서리버
25/01/31 16:56
수정 아이콘
에드가 엘런 포 소설 한 편을 읽은 느낌이네요 정말 공포스럽습니다....
如是我聞
25/01/31 17:11
수정 아이콘
정말 같은 건물 내 남녀 화장실 방향은 통일시켜줘야합니다. 왼쪽 남자 오른쪽 여자. 별 생각없이 걷다가 여자화장실 들어가 본 적 있어요.
우르르쾅쾅
25/01/31 17:13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저마저 식은땀이 나는 잼있는 글 감사합니다.
식물영양제
25/01/31 17:49
수정 아이콘
제가 정확히 같은 경험이 있어서 그 기분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더 황당하게 자연스럽게 전화하며 들어와서 옆칸으로 들어가서 볼일보고 나가시더라고요. 식은땀이 줄줄나서 한참 숨죽이다 문열어보고 소변기가 보여서 안도의 한숨을.
우상향
25/01/31 17:56
수정 아이콘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모 대학에서 남녀 사워실을 뒤바꾸고 위와 같은 상황이 펼쳐져서 경찰이 오고 간 적이 있었죠.
남학생 한명이 남자 샤워실에 잘 보고 들어가서 샤워하고 있었는데, 여학생 여러 명이서 예전 기억에 남자 샤워실로 잘못 들어와서...

여학생들이 샤워실 밖에서 잡담하면서 탈의하는 동안, 샤워실 안에 있던 남학생이 너무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자기가 잘못 들어온 줄 알고 알몸으로 옆칸 남자 샤워실로 도망갔는데... 새로 들어간 그곳이 진짜 여자 샤워실이었던 거죠. 비명지르고 난리나서 붙잡히고 경찰 옴..
아무맨
25/01/31 18:06
수정 아이콘
으악!
Hulkster
25/01/31 19:00
수정 아이콘
아니 이런 불상사가...
남학생은 충격과 공포였겠네요;
Janzisuka
25/01/31 20:13
수정 아이콘
내가 급했거나 상대가 급했거나..라고 생각했을거 같아요 저라면 크크
오타니
25/01/31 20:39
수정 아이콘
추추..추천이요..
지탄다 에루
25/02/01 00:39
수정 아이콘
크 긴박함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살짝 냄새도 느껴지는 것 같군요.
추천합니다.
정말 급하셨나 봅니다!
페로몬아돌
25/02/01 01:23
수정 아이콘
예전에 제가 급해서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죠 크크크 똥싸고 나오는 데 소변기 안 보이니 식음땀이 크크크크
25/02/01 07:04
수정 아이콘
긴장감 장난 아니네요
시무룩
25/02/03 09:13
수정 아이콘
저는 캠핑장에서 손 씻겠다고 아무 생각없이 옆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그게 여자 화장실이었습니다
손을 씻고있는데 화장실 칸에서 여자분이 나오는 순간 눈앞이 새하얘지더라구요
죄송합니다만 염불처럼 외면서 황급히 나갔는데 그분도 그냥 웃고 마셔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경찰서 갈 뻔 했네요...
그 이후로는 화장실 들어갈때 남/녀 구분 마크를 끝까지 쳐다보면서 들어가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ㅠㅠ
카마인
25/02/03 13:39
수정 아이콘
여목러일겁니다 (기대감 와장창)
쇼쇼리
25/02/04 09:58
수정 아이콘
여자화장실은 전부 꽉 찼는데 더이상 막아낼 자신이 없어서 일수도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3770 [일반] [잡담] 서울이야.. 맞아, 서울이야. [20] 언뜻 유재석9598 25/02/14 9598 23
103769 [일반] 한겨울에 따뜻하게 찍어본 ILLIT 'Lucky Girl Syndrome' 커버 영상. [6] 메존일각5595 25/02/13 5595 8
103767 [일반] 중증외상센터 드라마와는 다른 현실 결말 [168] 홈스위트홈15002 25/02/13 15002 22
103766 [일반] BYD가 열어가는 전기차 대중화와 미래 경쟁 구도 [70] superiordd10845 25/02/13 10845 11
103765 [일반] 미국 빅테크 기업은 왜 주가가 높은가 [40] 번개맞은씨앗10048 25/02/13 10048 8
103764 [일반]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월드 (스포다량) [8] ph5463 25/02/13 5463 0
103763 [일반] GPT-4.5, 25년 1분기. GPT-5 25년 12월 예상 / 레딧 현자의 예상 [13] Q-tip7825 25/02/13 7825 8
103762 [일반] 김치 프리미엄이 붙은 금 가격 [31] 굄성8863 25/02/13 8863 1
103761 [일반] 트럼프 "MAGA는 용서 안해"…야유받은 테일러 스위프트에 뒤끝' [59] 마그데부르크10469 25/02/13 10469 2
103760 [일반] 수출과 무역적자에 대한 생각 [53] 번개맞은씨앗10626 25/02/13 10626 2
103759 [일반]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 이 정도면 준수한 증명.(노스포)) [56] aDayInTheLife8155 25/02/12 8155 8
103758 [일반] 25년의 소소한 일상 [4] 싸구려신사5130 25/02/12 5130 6
103757 [일반] 딸아이와 함께 진엔딩을 보았습니다 [38] 글곰10066 25/02/12 10066 109
103756 [일반] [동네약국 사용설명서#2] 이름은 달라도 같은 약입니다. [54] 우파아니고보수7381 25/02/12 7381 13
103755 [일반] [설문] "AI"는 과대평가되어 있는가 [82] 슈테판7580 25/02/12 7580 1
103754 [일반] 트럼프 "가자지구 미국이 사는게 아냐.. 가지는 것." [106] 전기쥐10774 25/02/12 10774 10
103752 [일반] 이런저런 이야기 [4] 공기청정기7038 25/02/12 7038 7
103751 [일반] AI 경제학 이야기 (대런 아세모글루 MIT 명예교수/노벨경제학상 수상자) [37] 스폰지뚱7856 25/02/12 7856 10
103750 [일반] 소리로 찾아가는 한자 75. 고무래/장정 정(丁)에서 파생된 한자들 [12] 계층방정4901 25/02/11 4901 3
103749 [일반] 투잡 대리운전 2탄, 차량 탁송 후기를 올려봅니다 [32] 청운지몽9202 25/02/11 9202 19
103748 [일반] 외환위기 이후 최악, 구직자 10명에 일자리는 3개도 안돼 [304] 건강하세요21704 25/02/11 21704 9
103747 [일반] AI시대가 와도 일자리가 지금보다 더 감소하진 않습니다 [89] 독서상품권10109 25/02/11 10109 5
103746 [일반]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나폴레옹의 감상 [32] a-ha8192 25/02/11 8192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