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4/11/20 15:07:35
Name 식별
Subject [일반] 한나라가 멸망한 이유: 내우(內憂)

3.png 한나라가 멸망한 이유: 내우(內憂)


  서기 2세기 중엽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는 다섯 명의 현명한 통치자들에 의해 전성기를 구가하던 로마 제국이 있었고, 그에 비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위대한 제국은 동쪽의 한나라뿐이었다. 로마 제국은 향후 수십년 간 영광을 누리다가 3세기 무렵이 되면 각종 내외적 원인에 기인한 위기상황을 맞아 대혼란상에 접어들 것이며, 동쪽의 한나라는 이보다 수십년 더 빠르게 위기에 봉착해있었다.



Han_Dynasty_map_2CE.png 한나라가 멸망한 이유: 내우(內憂)


  제국의 광활한 영토는 동쪽으로는 한반도 북부, 남쪽으로는 오늘날의 베트남 북부, 서쪽으로는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국가들에 이르렀다. 


800px-Han_dynasty_Kingdoms_195_BC.png 한나라가 멸망한 이유: 내우(內憂)


  제국은 열 세개의 주州와 일백여 개의 군郡이라는 행정구역으로 나뉘었으며, 다시 일천여 개가 넘는 현縣이라는 하부조직이 이를 떠받치고 있었다. 


   호적상 인구는 5천만 명을 겨우 밑돌았고, 모든 주, 군, 현의 관리들은 제국의 수도 낙양(洛陽)에서 임명된 뒤 현지에 부임했으며, 이러한 관리들의 숫자는 다해서 무려 칠천오백여 명에 달했다. 제국의 모든 행정은 수도 낙양의 중앙 정부가 절대적으로 통제했으며, 그 권력의 정점에는 천자(天子), 즉 황제가 있었다. 



Basket_from_Lo-lang.jpg 한나라가 멸망한 이유: 내우(內憂)


  황제 직속의 내조(內朝)는 여섯 상서(尚書)로 구성돼 제각기 특정 분야를 도맡았으며, 이 외에도 실무를 담당하는 각종 부서와 기관들이 존재해 거대제국의 톱니바퀴를 굴렸다. 


  관리들은 기본적으로 혈연적 기반에 근거하여 선출되었으나, 엄격한 교육과정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높은 학식과 도덕적 책임을 요구받았으며, 오랫동안 이어져온 제국의 각종 관행에 능통해야했다. 그들은 유도리있게 상부와 하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각종 충돌과 모순을 조정하는 화합자로서 활약해야했다. 


  때때로 그 과정에서의 작은 비행은 감춰지거나 도리어 권장되었지만, 정도에 벗어난다면 부패 혐의로 탄핵되기도 했다. 이 '중용'을 지키는 감각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지적능력과 경험이 필요했을 것이다. 



Pottery_palace_1.JPG 한나라가 멸망한 이유: 내우(內憂)


  이렇듯 매우 복잡하고도 효율적인 관료제는 거대한 농경제국을 수백년 간 굴러가게 도왔으며, 백성들의 상공업을 진흥시키고, 각종 문화적 성취를 꽃피울 수 있게끔 도왔다. 한나라의 영광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관료제의 붕괴



  2세기 중반부터 이미 관료제의 고질적 문제인 '서류상(上)과 실질하(下) 사이의 거대한 간극'은 한나라의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그 근간을 좀먹고 있었다. 후한 말의 서류상 인구가 5,000만명 전후였고, 모든 현(縣)의 숫자가 1,000개 남짓이었으며,  현지부임관리가 모두 7,500여명 정도였다는 사실을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각 현의 인구는 서류상 평균적으로 4~5만 명 전후였고, 어떤 현은 이보다 훨씬 인구수가 많았는데, 이는 행정조직의 하부로 갈수록 줄어드는 극소수의 중앙 출신 관리가 상당한 숫자의 현지백성들을 책임져야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서류상 인구와 실질하 인구의 거대한 차이가 물론 있었겠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겨우 몇 명의 중앙관리가 몇 만 명에 달하는 현지백성을 책임져야했을 것이다. 


  이건 오늘날로 치면 인구 4만2천명의 논현동에 행정공무원이라고는 꼴랑 10명도 안되는 세계관이다. 당연히 일반 백성들에게는 관(官)의 존재가 상당히 멀게 느껴졌을 것이다.


  (한나라 서류상 인구가 5,000만이고 마침 현대 대한민국의 인구도 5,000만명인데, 지방에 파견된 한나라의 관리들이 다해서 겨우 7,500명에 불과했던 것과 달리 오늘날 우리나라의 공무원 숫자는 117만 1천 70명이라고 한다. 다 제외하고 행정부 지방 공무원만 세도 39만 1천 4백 80명이다. 단순 계산하면 50배 이상 차이나는 정도인데 여기에 기술발달에 따른 행정 효율의 격차를 더해야한다.)



  중앙에서 새롭게 부임한 이 대다수의 관리들은 당연하게도 현지 지역사정에 어두웠고, 이들이 현지 백성들의 삶에 개입하는 순간은, 제국의 재정상태를 위해서 가혹하게 세금을 쥐어짜내거나, 통치자들의 권위를 드높이는 각종 역사(役事)에 동원하거나, 지역민의 범죄를 온갖 기상천외하고도 잔혹한 전통 형벌을 동원해 일벌백계하거나, 이단적 풍취를 짙게 풍기는 요사스러운 신전들을 때려부술 때 뿐이었다. 



7.png 한나라가 멸망한 이유: 내우(內憂)


  이렇듯 현지의 풍토와 이질적이며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신참내기 '서울깍쟁이' 나으리 대신, 지역에서 대대로 세습하며 백성들을 관리해온 '후덕한' 현지의 유력 대가문, 즉 호족(豪族)과 임협세력 등이 백성들의 일상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가진 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곤 했다. 


  이들은 가끔, 권력을 아예 겉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한 지역을 주름잡는 거대한 가문의 호족들은 현령의 보좌관 격으로 자신들의 가문 구성원을 '추천(사실상 강요)'하거나 중앙정계와의 커넥션을 통해 지역 정치에 있어 각종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예 지방에서 쌓은 부와 인맥을 통해 가문 구성원을 한나라의 관료제 시스템의 일부로 끼워넣을 수도 있었다. 



Han_shieldbearers_03.jpg 한나라가 멸망한 이유: 내우(內憂)


  이렇듯 한나라의 지방은 서서히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보이지 않는 인맥과 암투의 연결망을 통해 분열하고 있었다. 부자가 빈자를 착취했고, 호족이 관리를 능멸했으며, 가문과 가문이 상쟁하는 하극상의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었다. 지방의 호족들은 저택의 주변을 방책으로 둘렀고, 가주는 휘하의 가문 구성원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진 지방의 꿈틀거림 정도야 중앙정부에게는 날아다니는 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제국은 지난 수세기 동안 이러한 준동(蠢動)을 수도 없이 겪어왔고, 그 꿈틀거림이 도를 넘는다면, 충성스러운 중앙 출신의 군사 지도자를 출진시켜 사뿐히 즈려밟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변란이란 대저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일지니 (天下之禍 不由於外 皆興於內), 연속해서 어린 황제들이 즉위하자, 그에 따라 야심가들의 음모로 가득차있는 구중궁궐 속에 고립된 황제가 믿을 사람들이라고는 친위세력인 환관과 외척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들은 정말로 황제의 충직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척족에 기반한 정치가 외부로부터의 변동에는 지극히 취약했다는 데 있었다.





외환(外患) 편에서 계속.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강동원
24/11/20 15:1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더 가져 오십시오! 어서!
24/11/20 15:39
수정 아이콘
식별님의 글은 항상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어서 쓰십시오 어서!
닉네임을바꾸다
24/11/20 15:39
수정 아이콘
(수정됨) 5천만을 겨우라 하기엔 강남개발 전까진 화북기반 통일중국왕조의 맥시멈이 저정도라 크크
수문제나 당현종도 5천초반이니까...강남개발이 진행되면서 당말만해도 인구가 7천만을 넘게되지만서도...
24/11/20 17:09
수정 아이콘
추천 더 누르게 다음 글 부탁드립니다
24/11/20 17:27
수정 아이콘
재밌어요
24/11/20 17:47
수정 아이콘
예전에 청나라였나 파견한 인원이 2천명이었나(현 하나당 1명)이라고 본거 같은데 7500이면 엄청 많이 파견했네요.
manymaster
24/11/20 19:15
수정 아이콘
국민 당 공무원 수의 차이, 행정 효율의 격차에... 인구 밀도까지 감안하면... 진짜 중앙 정부 관리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멀고도 멀게 느껴졌겠네요. 그렇다고 관리를 더 늘리는 것도 전근대 특성상 부담이 심했을테니...
브레스피해욧
24/11/20 21:22
수정 아이콘
(어서.. ) 감사합니다!
로이드 배닝스
24/11/21 07:24
수정 아이콘
창천이사 황천당립!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다!!
어라 이게 아닌가??
24/11/21 08:29
수정 아이콘
결국 세금 문제죠
현대처럼 복잡 치밀한 세금체계가 설립하지 안으면 제대로 된 관료제가 만들어지기 쉽지 않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2713 [일반] 아니, 국과수도 모르겠다는데... 설마 대법원까지 보내려고 할까요? [37] 烏鳳8596 24/11/21 8596 30
102712 [정치] (채상병 사건) 박정훈 대령이 군검찰로부터 징역3년을 구형받았습니다. [86] 꽃이나까잡숴7932 24/11/21 7932 0
102711 [일반] 4년간 미국 물가는 얼마나 심각하게 올랐는가 [62] 예루리5213 24/11/21 5213 2
102710 [정치] 메르스 이후 처음으로 주요 그룹 사장단 긴급성명 발표 [69] 깃털달린뱀6848 24/11/21 6848 0
102709 [일반] 트럼프 2기 정부는 불법 이민자 문제로 시작합니다 (+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트럼프 공약) [73] 시드라4561 24/11/21 4561 1
102708 [일반] 페이커 "실패 하나하나 모여 지금의 나…청년들 도전하세요" [46] 덴드로븀4130 24/11/21 4130 15
102707 [일반] 넷플릭스 영화 전,란에서 보여지는 역사왜곡 문제 [29] 뭉땡쓰3128 24/11/21 3128 13
102706 [일반] (수정)백종원표 더본코리아의 오늘까지의 주가추이 및 개인적인 의견 [45] 독서상품권4846 24/11/21 4846 1
102705 [일반] 피지알 회원들의 AI 포럼 참가 후기 [19] 최애의AI5632 24/11/20 5632 36
102704 [일반] AI 시대, 사교육 방향이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이유 [25] 스폰지뚱5420 24/11/20 5420 8
102703 [일반] 영화 청설 추천합니다 [17] 퀵소희4475 24/11/20 4475 1
102702 [정치] 감리교회의 반동성애 기류는 더욱 심해지고 강해지고 있습니다. [33] 라이언 덕후5511 24/11/20 5511 0
102701 [일반] 구조조정 바람이 거세지는 요즘 드는 생각들 [79] 수지짜응8606 24/11/20 8606 2
102700 [일반] 한나라가 멸망한 이유: 내우(內憂) [10] 식별2555 24/11/20 2555 27
102699 [일반] 우크라이나 내 전쟁여론 근황 종전 찬성 52% 반대 38% [124] 뭉땡쓰7682 24/11/20 7682 1
102698 [정치] 트럼프의 집권은 오바마에 대한 실망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되네요. [95] 홍철9197 24/11/20 9197 0
102697 [일반] [스포주의]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인상적이었던 연출 몇개... [18] Anti-MAGE3669 24/11/20 3669 4
102696 [일반] 현대차 울산공장 연구원 3명 사망… [37] 뜨거운눈물9625 24/11/19 9625 1
102695 [일반] 개인적으로 한국어에는 없어서 아쉬운 표현 [73] 럭키비키잖앙8037 24/11/19 8037 7
102694 [일반] 회삿돈으로 현 경영권을 지켜도 배임이 아닌가? [81] 깃털달린뱀12323 24/11/19 12323 12
102693 [일반] 소리로 찾아가는 한자 51. 급할 극(茍)에서 파생된 한자들 [6] 계층방정2498 24/11/19 2498 1
102692 [일반] MZ세대의 정의를 뒤늦게 알게 되었네요. [16] dhkzkfkskdl8713 24/11/18 8713 2
102691 [일반] 니체의 초인사상과 정신건강 번개맞은씨앗3873 24/11/18 3873 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