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4/10/18 05:55:12
Name 계층방정
Link #1 https://brunch.co.kr/@wgmagazine/90
Subject [일반] 소리로 찾아가는 한자 42. 일할 로(勞)에서 파생된 한자들

등불반짝거릴 형(熒)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으나 熒의 파생자에서 빠진 한자가 있으니 바로 일할 로(勞)이다.

글자 꼴은 熒에서 아래에 있는 불 화(火)를 힘 력(力)으로 바꾼 모습이다. 《설문해자》에서도 勞를 '힘쓰다라는 뜻이다. 力과 熒의 생략형을 따랐다. 불꽃으로 집을 태운다. 힘을 쓰는 것을 勞라 한다.'라고 풀이했다. 이 설명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북송의 학자 정초는 《육서략》에서 熒 대신 경영할 영(營)의 뜻을 따라 경영하기 위해 힘써 일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단옥재 역시 《설문해자주》에서 정초의 해설을 따랐다.

그러나 熒과 勞의 옛 모양이 발견되면서 위의 모든 풀이는 새롭게 다시 고쳐야 했다.

67103119b73de.png?imgSeq=36575

勞의 변천. 출처: 小學堂

6710399d00ff9.png?imgSeq=36578

勞의 옛 형태. 왼쪽부터 ⿱炏衣, ⿳炏衣廾, ⿱炏心, ⿱⿱炏冖⿱衣心. 출처: 小學堂

지난 글에서도 살펴본 대로, 熒의 금문은 지금과는 달리 火가 직접 나타나지 않고 엇갈린 횃불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勞의 갑골문과 금문은 명백하게 火 두 개가 나타나고 있다. 이로써 熒과 勞는 서로 기원이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다.


勞의 갑골문은 火 두 개 아래에 옷 의(衣)와 점 3개가 보이는데, 이를 현대의 형태에 가깝게 예변(隷變)할 때에는 점은 빼고 ⿱炏衣로 나타낸다. 금문에서는 아래에 받치는 손을 추가해 ⿳炏衣廾처럼 쓰기도 하고, 더 시간이 지나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면 衣를 마음 심(心)으로 바꿔 ⿱炏心으로 쓰기도 한다. 이게 간백문자로 넘어가면 衣와 心을 둘 다 쓰는 ⿱⿱炏冖⿱衣心이라는 변형을 만들어낸다.

《설문해자》에 수록된 고문은 《강희자전》에서 ⿳炏冖悉로 예변했는데, 衣가 분별할 변(釆)으로 와전된 것 같다. 그리고 소전에서 드디어 지금의 勞의 형태가 나타나는데, 衣나 心이 힘 력(力)으로 바뀐 것이다.

勞의 초기 형태인 ⿱炏衣는 등불 아래에서 옷을 꿰매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이에서 '힘쓰다', '일하다'의 뜻이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손을 추가해서 동작을 강조하기도 하고, 마음을 추가해서 노심초사하는 것을 묘사하기도 했다. 현재의 형태인 勞는 힘을 들이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衣가 생략되었는데, 옷을 꿰매는 구체적인 작업이 생략되어 등불 아래에서 힘을 들이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상황을 나타내게 되었다.


勞는 갑골문에서는 지명으로 쓰이기도 했고, 큰물결 로(澇)를 통가해서 홍수를 뜻하기도 했다. 금문에서는 지금처럼 일하다는 뜻으로 쓰였고, 또 '노심초사'라는 단어에서 나타나듯이 마음으로 애를 쓴다는 뜻으로도 쓰였다. 위에서 말한 心을 쓰는 전국시대의 금문 勞, 즉 ⿱炏心가 바로 마음으로 애쓴다는 문맥에서 쓰인 것으로, 노심초사라는 뜻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心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일할 로(勞, 노동(勞動), 근로(勤勞) 등. 어문회 준5급)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勞+手(손 수)=撈(건질 로): 노해작업(撈海作業), 어로(漁撈) 등. 어문회 1급

勞+水(물 수)=澇(큰물결 로): 구로칠한(九澇七旱: 중국의 우임금이 겪은 아홉 번의 홍수와 탕왕이 겪은 일곱 번의 가뭄) 등. 인명용 한자

勞+牛(소 우)=犖(얼룩소 락): 낙락(犖犖: 분명한 모양), 탁락(卓犖: 뛰어난 모양) 등. 인명용 한자

勞+疒(병들어기댈 녁)=癆(중독 로): 노점(癆漸/勞漸: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수척해지는 증상), 척수로(脊髓癆: 척수매독) 등. 급수 외 한자

67103db944eba.png?imgSeq=36579

勞에서 파생된 한자들.


이외에도 고전에서 드물게나마 찾아볼 수 있는 한자로는 지껄일 로(嘮), 대이름 로(簩), 발기름 료(膋), 쓰름매미 로/참매미 료(蟧)가 있다. 簩는 특별히 독이 있는 대나무를 가리키고, '발기름'이란 발에 있는 기름이 아니라 짐승의 내장지방을 말한다.

膋는 膫로 쓰기도 하고, 蟧는 '참매미 료'라는 훈음으로는 蟟와 같은 한자다. 형성자의 성부로는 勞와 횃불 료(尞)가 서로 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癆는 지금은 결핵이나 몸을 상하게 했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흥미롭게도 《설문해자》에서는 약·독을 가리키는 조선의 말이라고 적고 있다. 즉 고대 한국어를 음차한 한자인 것이다. 지금은 아쉽게도 이 말이 우리말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지만, 독을 뜻하는 순우리말이 이렇게 중국인들의 기록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勞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수고롭게 일을 많이 하는 데에서 비롯해 '크다'나 '많다'를 뜻하기도 한다.

嘮(지껄일 로)는 口(입 구)가 뜻을 나타내고 勞가 소리를 나타내며, 수고롭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뜻한다.

澇(큰물결 로)는 水(물 수)가 뜻을 나타내고 勞가 소리를 나타내며, 물이 수고롭게 많이 움직이는 것인 큰 물결, 홍수를 뜻한다.

癆(중독 로)는 疒(병들어기댈 녁)이 뜻을 나타내고 勞가 소리를 나타내며, 수고롭게 일해 몸이 상한 것을 뜻한다.

이렇게 크다, 많다의 뜻과 관련이 되는 위의 한자들과는 달리, 蟧는 작은 매미나 작은 소라를 가리킨다고 풀이한다. 이 한자는 매미 제(蝭)와 같이 써서 제로(蝭蟧)라는 매미의 한 종류를 뜻하는데, 이 매미는 중국어에서 혜고(蟪蛄)라고 하는 털매미라고 한다. 쓰름매미나 털매미나 다 매미 중에서는 작은 종이다.


한편 본래 한국어에서 나온 癆는 또 다른 한자에 독이라는 흔적을 남겼다.

簩(대이름 로)는 竹(대 죽)이 뜻을 나타내고 勞가 소리를 나타내며, 癆의 뜻을 가져와 독이 있는 대나무의 한 종류를 뜻한다.

이상의 관계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6711065b136e4.png?imgSeq=36631

勞에서 파생된 한자들의 의미 관계도.


요약

勞는 원래 등불 아래에서 옷을 수선하며 일한다는 뜻의 회의자였고, 현재는 힘 력(力)이 옷을 대신했다.

勞에서 撈(건질 로)·澇(큰물결 로)·犖(얼룩소 락)·癆(중독 로)가 파생되었다.

勞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크다'나 '많다', 또는 癆의 영향으로 '독'의 뜻을 지닌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如是我聞
24/10/18 09:16
수정 아이콘
조선의 말이라...
원문에서 조선을 정확하게 뭐라고 지칭했을지 궁금하네요. 찾아보니 설문해자가 고조선 멸망 후 2백년 쯤 뒤에 쓰였던데...
계층방정
24/10/18 09:37
수정 아이콘
딱 조선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에서는 약·독을 이르기를 '로'라 한다(朝鮮謂藥毒曰癆). 병들어기댈 녁(疒)(의 뜻)을 따르며 일할 로(勞)는 소리다.(从疒勞聲)”.
如是我聞
24/10/18 11:08
수정 아이콘
정말 고맙습니다. 국어학 쪽에서 정말 귀한 자료겠군요.
24/10/18 13:00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설문해자의 해설보단 비교적 최근의 해석이 더 와닿네요. 남들이 쉴 때 꿈을 위해 더 노력하는 느낌입니다
계층방정
24/10/19 05:4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꿈을 위해 등불 아래에서 노력한다는 표현이 시적이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2494 [일반] 난봉꾼의 문제 [27] 번개맞은씨앗10690 24/10/20 10690 7
102493 [일반] [팝송] 벨리 새 앨범 "Water the Flowers, Pray for a Garden" 김치찌개2934 24/10/20 2934 1
102491 [일반] 결혼 결정사 해본 후기 [58] 개좋은빛살구13078 24/10/20 13078 43
102490 [일반] [2024여름] 뜨거웠던 안동 월영교 [4] 계층방정4419 24/10/19 4419 6
102489 [일반] 인테리어 할 때 돈부터 주면 안된다는 말 [32] 능숙한문제해결사10731 24/10/19 10731 7
102488 [일반] [2024여름] 여름의 양재천과 수국(데이터 주의) [1] nearby4328 24/10/19 4328 4
102487 [일반] [2024여름] 무더위를 끝내는 폭우 [1] 진산월(陳山月)4351 24/10/19 4351 9
102486 [일반] 최근 제가 주목한 소식 두개(신와르 사망 / 북한의 파병) [34] 후추통7379 24/10/19 7379 12
102485 [일반] 저작(인접)권 보상금 분배에 대한 글 [4] evil4246 24/10/19 4246 6
102484 [일반] [2024여름] 남프랑스 빙하와 바다 [11] Ellun4037 24/10/18 4037 7
102483 [일반] 소리로 찾아가는 한자 42. 일할 로(勞)에서 파생된 한자들 [5] 계층방정2924 24/10/18 2924 2
102482 [일반] [2024여름] 여름색 [2] 판을흔들어라4001 24/10/17 4001 2
102481 [일반] 한강 작가의 수상소감 발표 [35] 유료도로당11836 24/10/17 11836 57
102480 [일반] 지금이 인적 서비스를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시대가 아닐까요? [22] 럭키비키잖앙8683 24/10/17 8683 4
102478 [일반] 항상 건강 관리 잘 하세요 여러분 [210] 모래반지빵야빵야10171 24/10/17 10171 198
102477 [일반] 공립 고교가 사라지고 있는 일본 고교 야구 (feat. 고시엔의 존폐) [15] 간옹손건미축5516 24/10/17 5516 51
102476 [일반] [2024여름] 일본 시마네현 아다치 미술관 [16] Karolin5046 24/10/17 5046 6
102472 [일반] [2024여름]여름 막바지 대만 여행 [3] Nothing Phone(1)3837 24/10/16 3837 3
102470 [일반] <조커2 : 폴리 아 되>에 관한 옹호론 (1,2편 스포有) [155] 오곡쿠키6051 24/10/16 6051 7
102469 [일반] [2024여름] Fourteen years ago and now [5] 제랄드2319 24/10/16 2319 8
102468 [일반] 2024년 노벨경제학상 - 국가간의 번영 격차에 대한 연구 [30] 대장군8362 24/10/15 8362 2
102466 [일반] 카리스마와 관료제 그리고 그 미래 [14] 번개맞은씨앗4924 24/10/15 4924 0
102465 [일반] [2024여름] 아기의 터 파는 자세 / 덤 사진 (움짤 용량 주의) [23] 소이밀크러버5189 24/10/15 5189 2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