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글을 좀 일찍 떼었습니다. 한국나이로 3살에 한글을 뗐는데 제 생일이 12월 31일이니 좀 믿기 힘든 부모님의 증언이지요. 아무튼 한글을 뗐다는 것은 뭔가를 읽을 줄 알았다는 것이고, 그 뒤로 제 머리속엔 기억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아직도 어릴 때 읽었던 그림책의 장면이 기억나는 것은 비단 저만의 능력은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가 일하던 공사장 뒤편 쓰레기장에서 걸리버 여행기 책을 주워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저의 학습만화에 대한 기억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한글 공부 겸사겸사 해서 어린 시절 제 옆에 꽂혀있던 책은 계몽사의 디즈니 그림명작입니다.
# 디즈니 그림 명작(계몽사)
디즈니 그림명작이 학습만화라고 하면 그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 책은 유치원 가기 전의 저에게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교양(?)을 쑤셔넣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디즈니 그림명작에서 본 내용이 명작동화였다던가, 한국에서 잘 볼 수 없는 로빈 훗이나 레이디와 트램프 같은 애니메이션의 내용이 남아있다던가... 나중에 디즈니 만화동산이 절찬리 방영할 때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주제에 향수의 아련한 느낌을 느꼈드랬지요.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림책은 그림책. 유아용 그림책은 놓아줄 때가 오기 마련입니다. 저는 사촌 형네 집에 놀러 가서,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받고 그림책의 시대를 접게 되었습니다. 이제 진짜 학습만화의 시대가 왔습니다. 그들은 유치원시절 제 사고와 호기심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지적 경험을 시켜주었습니다.
# 학습 그림 과학(계몽사)
1편부터 우주의 압도적인 그림으로 저를 압도한 과학 학습만화. 원시고대WHY?. 지금 한국의 거장 만화가 박문윤 화백의 그림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한국만화 최고의 사료. 아직도 숏컷이 이쁜 여자가 최고라는 이성적 관념을 심어준 기숙이. 전형적인 과학 학습만화로 우주, 동물, 식물, 곤충, 공룡 같은 주제와 당시 저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물리학이나 자성, 전자기, 밀리터리 같은 내용까지 빽빽합니다. 이 시대 학습만화의 흔해빠진 전개로 맨 마지막에는 미래사회의 모습을 예상하는 파트도 있지요. 줄기엔 토마토 뿌리엔 감자. 자동 번역기. 재택근무. 블라블라. 알파벳 약자의 경우 장음을 그대로 살린 표기가 구세대의 향수를 자극합니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학습그림과학 최고의 핀포인트는 과학의 불가사의입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서 네시, 사스콰치, 버뮤다 삼각지대, 바벨탑, 아틀란티스 같은 유사과학 총집판. 빅 풋의 머리 피부 화석이랍시고 세모꼴 뚜껑 같은 것을 떡 하니 올려놓는 기괴함.
시대가 시대라서 그런가 아쉽게도 성교육이 없네요.
# 학습만화 세계의 역사(신진출판사)
이집트 피라미드부터 시작하는 전형적인 세계사 만화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봐 왔던 만화와는 궤를 달리하는 굵직한 선의 남성적 느낌이 가득한 만화지요. 사실 지금도 한국인이 그린 거 맞나? 싶긴 합니다. 일본 세계사 학습만화도 구성이 비슷하다고 들었거든요. 청동기와 철기를 넘어갈 때 대장장이의 능력을 보여주는 씬이라던가. 개인적으로 제일 인상깊었던 건 2권 말미였던가? 여자들이 상의를 다 까고 가슴 노출을 한 채로 돌아다니던 씬이었습니다. 그런 장면이 있었는데 진짜 한국인이 그린거 맞을까... 흠...
# 먼나라 이웃나라(고려원미디어)
먼나라 이웃나라 1편이 네덜란드냐 프량스냐로 세대를 구분할 수 있지요. 혹은 하드커버냐 아니냐. 한국인이 제일 잘 아는 프랑스요리는 코코뱅. 한국인은 서유럽의 봉건주의 시대를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르네상스부터는 아무것도 모르나요. 6권은 왜 로마 편이 아니고 이탈리아편이죠?
먼나라 이웃나라의 힘은 재미입니다. 이 책이 그렇게 사방팔방에 오류천지에다 새로운 나라를 작업하고 개정판을 만들면서 점점 보수화된 이원복의 시니컬한 시선만 늘어남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학습만화의 지존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이 구판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재미 때문일 것입니다. 만화 내내 3X5 컷을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내용 구성 및 연출을 전혀 지겹지 않게 해내는 실력은 지금 봐도 환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