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의 『둔황』은 이른바 ‘둔황 문서’가 둔황석굴에 은닉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낸 건조한 소설이다. 작품의 주 무대인 서역은 사막이고, 문체도 화려하거나 격정적이지 않고 대체로 담담하다. 결말 역시 서사적으로는 허무하다. 주인공의 행적은 서하에 닿기 전까지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차분한 모험으로, 서하군이 된 뒤부터는 혼란스럽고 밋밋한 전쟁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내용을 주제의 측면에서 다시 되짚는다면 『둔황』은 역사소설의 본령을 통찰한 작품으로 읽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起: 강렬한 세상을 향하여
『둔황』은 주인공 조행덕이 개봉으로 상경해 과거 시험에 나서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조행덕은 응시생 중 수위를 다툴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잠에 빠져 시험 시간을 놓치면서 뜻밖에도 탈락하고 만다. 그런데 더 뜻밖인 것은 그 직후에 일어난 한 서하족 여인과의 조우이다. 그 여인은 알몸으로 토막나 팔릴 위기에 처했음에도 의연하고, 생명보다 신념을 더욱 중요시한다. 또 자신을 구해준 조행덕을 당당하게 대하면서도 염치를 잃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곧 '강렬한 인간'의 모습이다.
이 짧은 만남에서 조행덕은 세계관의 격변을 겪는다. 서하 여인이 보여준 기개는 조행덕의 세계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에너지를 품은 것이었고, 이에 조행덕은 자신이 그동안 쌓아왔던 지식과 목표를 초라하게 여기고 잠깐 마주했던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하 여인이 보여준 강렬함이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민족의 특성이라고 여기게 되면서 그가 매료된 대상은 서하 민족, 서하 문자, 서하 땅에 이르기까지 확장된다. 그래서 조행덕은 자신의 이상향을 찾아 서하로 떠난다. 서하에는 “자신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힘차고 가치 있는 무언가”[1]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承: 강렬한 인간을 찾아서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서하 땅에 도착해 서하인들 사이에서 살며 서하 문자까지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조행덕은 예전에 서하 여인에게서 보았던 강렬함을 발견하는 데 실패한다. “예전에는 원시적 아름다움을 지닌 격렬한 무언가가 서하 민족의 핏줄에 살아 꿈틀대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서하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2] 사실 이것은 서하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가 겪는 과정이기도 하다. 외세에 의해 쫓겨나거나 정복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원시적인 생명력과 개성을 포기하는 대가로 힘을 한 곳에 집중시켜 강력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조행덕이 서하에서 군기와 획일성만을 발견했을 뿐 강렬한 감동을 다시 느끼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에 봉사하는 정신이 그들의 얼굴을 삶의 위안거리와는 무관한 무덤덤한 표정으로 만들어버렸”[3]던 것이다.
다만 강렬함이란 그렇게 쉽게 실종되지는 않는다. 흥경에 머물던 조행덕은 문득 예전에 개봉 저잣거리에서 만났던 서하 여인의 강렬함을 떠올린다. “그녀에게 받은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여전히 행덕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4] 다만 그런 강렬함이 민족이 아니라 개인의 특성이었을 뿐이다. 그제야 “자신이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5]었다는 것을 자각한 조행덕은 곧 흥경을 떠나 “다른 세상을 만났다면 한 나라의 왕비가 될 여자였”[6]던 위구르 왕족 여인에게로 향한다. 흥경을 찾아가는 여정 중에 함께했던 그녀가 실은 서하인들보다 더 강렬한 인간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轉: 강렬함이 결국 사라진다면
하지만 조행덕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위구르 왕족 여인은 본래 조행덕을 기다리기로 약속했었지만, 조행덕은 약속 기한을 1년이나 넘겼다. 그 사이 그녀는 아마도 강압에 의해 서하의 군주 이원호의 후처가 되어 있었다. 뒤늦게 돌아온 조행덕은 결국 그녀와 마주치고, 위구르 왕족 여인은 이튿날 성벽에서 몸을 던지고 만다. 이렇게 보면 위구르 왕족 여인은 “마음의 결백을 호소”[7]하기 위해 투신자살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이 죽음이 조행덕에게 가지는 의미는 그것 이상이다. 그토록 강렬했던, 그래서 자신이 매혹되고 또 계속해서 교류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한 사람이 너무나 허무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행덕의 세계관은 다시 큰 변화를 겪는다.
생각해 보면 이런 죽음은 비단 위구르 왕족 여인만 겪는 것이 아니다. 조행덕이 전전한 전쟁터에서는 늘 사람들이 허무한 죽음을 당하고, 그가 소속된 부대의 경우에는 매 전투마다 9할이 사망한다. 그는 늘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다음번에도 그런 요행이 계속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 조행덕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고, 또한 그들의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8]지는 단계에 도달한다. 아무리 강렬한 사람이라도 결국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그들의 인생은 그것으로 불이 꺼져 시간 앞에 스러져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 존재의 강렬함을 무화시키는 역사의 흐름’은 소설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사막, 모래바람, 하늘 등 인간의 미약함을 부각시키는 거대한 자연의 묘사와 거짓말처럼 전사해 버리는 병사들의 모습, 전쟁에 패해 쓸려나가는 여러 종족의 이름들이 이러한 분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심지어 역사적으로 위대한 정복을 하고 이름을 드높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둔황』의 마지막 장을 보면, 앞에서 그토록 웅장하게 부흥하던 서하의 흔적들은 결국 풍화되어 사라진다. 이제 서하의 모습은 남들이, 주로 한족이 기록한 단편적인 기록들에서만 겨우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역사의 무게는 어떤 강렬함이든 끝내는 희석시키고 풍화시켜 버린다.
結: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그렇기에 역사의 허무성에 대한 소설의 강조를 고려할 때, 종반부에 경전류를 구하기로 결심하는 조행덕의 선택은 “인간의 무력함과 생명의 무의미함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종교”[9]에 귀의한 결과로 이해된다. 결국 작중에서 조행덕의 세계관은 유교적 지식인의 전형에서 시작해 인간의 강렬함을 동경하는 여행자의 것으로 변모하고, 그런 강렬함도 결국 풍화된다는 사실을 극복하기 위해 최종적으로는 불교적 내세관을 받아들이면서 완성된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죽음 이후를 설명하는 것이 종교의 주된 기능 중 하나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이것은 실제로 가능한 방법이다. 『둔황』은 역사에 내재한 허무감을 통해 불교적 미학을 극대화한 역사소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둔황』은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발을 더 내딛는다. 소설은 조행덕의 선택만을 보여주며 끝나지만, 이를 접하는 독자는 상황 자체에서 새로운 영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조행덕이 무상감을 느끼게 된 계기는 강렬한 인물들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따라서 죽음 뒤에도 그들의 강렬함이 사라지지 않고 기억될 수 있다면 삶의 무상함은 극복되고, 인생은 유의미해질 수 있다. 그리고 소설에서 이것을 보여준 인물이 바로 조행덕이다. 그가 은닉한 경전류가 훗날 발견되어 역사에 한 획을 그음으로써, 그 역시 조행덕이라는 이름을 받고 장대한 서사의 주인공으로 형상화되어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둔황』은 역사에 족적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가장 빛나는 부분을 시공간을 초월해 전달하는 것 또한 가능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 역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 방법이다.
작가는 이러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강렬한 인물들과 허무한 최후들을 병치시키고, 역사의 풍화작용을 보여주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가차없는 무화의 과정을 거쳤음에도, 그때 그 인물들의 강렬함이 이야기 속에 재현되어 여전히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알아채 주라는 의도에서 말이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해석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둔황』을 역사의 의미와 역사소설의 본령을 통찰한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 흔적을 남긴다면 그것이 단초가 되어 누군가 그들의 강렬함을 이야기 속에서 재현시켜 줄 것’이라는 한 줄의 희망만으로도 사람은 살아갈 힘을 얻으며, 역사소설을 읽는 독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흥에 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 임용택 역, 이노우에 야스시 저, 『둔황』, 파주: 문학동네, 2010, 24쪽. [2] 위의 책, 76쪽. [3] 위의 책, 77쪽. [4] 위의 책, 79쪽. [5] 위의 책, 79쪽. [6] 위의 책, 84쪽. [7] 위의 책, 93쪽. [8] 위의 책, 97쪽. [9] 위의 책,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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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읽고 나니 제겐 희망보다는 무상함을 담은 여운이 더 짙게 남은 듯합니다. 조행덕이 살던 시절 송나라에는 강렬한 인물을 담은 이야기가 없었을까요? 아니면 서하에는 없었을까요? 그 모든 이야기들은, 그리고 '둔황'조차도, 결국 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아가 강렬함을 품었던 모든 종족이 결국에는 허무하게 사라질 것 같고요.
삶이 부조리함을 이해했으나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거부한 카뮈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이또한 하나의 병치인 것 같네요.
제가 '둔황' 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건 어릴적 TV에서 방영되었던 NHK 실크로드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습니다. 내용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서역의 황량한 풍경, 동굴 벽화의 강렬한 색채, 신비로운 음악 같은 것들에 왠지모를 아련한 끌림을 느껴서, 부모님이 녹화 해 둔 테이프를 몇 번이나 돌려봤던 기억이 있네요.
전부터 이노우에 야스시의 작품을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덕분에 좋은 작품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