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4/06/04 13:56:18
Name 계층방정
Link #1 https://brunch.co.kr/@wgmagazine/24
Subject [일반] 고깔 변(弁)과, 송사할 변(辡)에서 파생된 한자
사랑은 쉽게 변하지
사람은 쉽게 안 변해
- BIG Naughty, Y0UNG, Ryan S. Jhun 사, IVE 노래, Payback 중


지난 시간에는 변화의 변할 변(變)와 연애의 그리워할 련(戀)에 같이 있는 어지러울 련(䜌) 자를 주제로 다루었다. 그런데 변할 변이 굳이 소리를 䜌에서 가져와야 할까? 음이 '변'인 다른 한자를 써도 되지 않을까?

이 생각은 옛날에도 누군가 한 모양이다. 옛날 춘추전국시대의 유물인 증후을묘에서 발굴된 종에 써진 變 자는 아래와 같이 생겼다.

glHT1KHYymHmmcou8vy8VTmLsT8.jpg
증후을종 - 증후을묘에서 발굴된 편종 세트.
b8Aw9H8K0x59U_WFwYkVzXF5Kmk.png
증후을종에 써진 변할 변(變)과 이를 현대식 해서로 변환한 글자.

글자의 왼쪽에 있는 것은 말씀 언(言) 안에 동그라미를 찍은 것으로 소리 음(音)에 해당한다. 오른쪽에 있는 글자는 고깔 변(弁)자로, 지금의 弁과는 조금 다른데 弁에는 다른 형태로 覍이 있기 때문이다. 곧 증후을묘에서는 變을 지금과 같이 䜌+攵으로 나타낸 게 아니라 音+弁으로 나타낸 것이다. 초나라의 다른 유물에서는 䜌을 쓰기도 하기 때문에 초나라에서는 變을 쓰지 않고 音+弁만 쓴 건 아니지만, 어쨌든 변할 변의 음을 䜌 대신 弁으로 쓰기도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옛날 사람들이 䜌 대신 弁으로 변할 변의 소리를 나타냈다면 지금 變 자가 이토록 복잡하지는 않을 텐데 아쉽다.

43VWU_X2-5EKR7jn8bUdn9xSRMA.png
기원전 300년의 초나라 영토. 초나라는 수많은 문자 유물을 현대에까지 전하고 있다.

고깔 변(弁)에서 음을 가져온 변할 변(音+弁)이 變에 밀려 도태된 것처럼, 弁에서 음을 가져온 다른 한자들도 현대에는 거의 쓰이지 않으며 그나마도 다른 글자의 이체자들이 많다. 그렇지만 현대에 弁은 다른 용도로 많이 쓰이고 있는데, 辨(분별할 변)·辮(땋을 변)·辯(말씀 변)·辦(힘쓸 판)·瓣(꽃잎 판) 등을 약자로 모두 弁으로 쓸 수 있다. 이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辨·辯·瓣의 신자체를 弁로 정하고 辮과 辦이 들어가는 글자는 모두 弁으로 바꿔쓰게 했기 때문이다. 이 다섯 글자는 모두 음이 변이나 판이고 좌우에 辛(매울 신)이 두 개 들어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AISc1fxpzdIGVQ1oIcNy1_Hrfj0.png辯·辨·辮·瓣·辦에 모두 들어가 있는 辡

이 매울 신 두 개가 들어가 있는 글자는 辡(송사할 변)이라 한다. 이 다섯 글자 모두 辡이 소리를 나타내는 형성자다. 그리고 辡은 한자의 뜻을 구성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다섯 글자 중에서도 일찍 쓰인 적이 있는 辯과 辨을 살펴보자.

B9tKuNJnforaoIjgxf0Lb2rxJ-M.png
수호지진묘죽간에서 출토된 매울 신(辛)과 말씀 변(辯)

수호지진묘는 1975년 후베이성 윈멍현 수호지에서 발굴된 진나라 시기의 묘로, 이 유적에서 발굴된 죽간에 辛과 辯이 쓰여 있었다. 둘을 비교하면 辯은 辛 두 개와 말씀 언(言)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잘 보인다. 지금은 두 辛 사이에 言을 쓰지만 당시에는 밑에 言을 쓰는 차이가 보인다. 그러나 이미 글자가 많이 상형문자에서는 멀어져서 자원을 찾기 쉽지 않으니 더 예전에 쓰인 辨과 辛자를 살펴보자. 먼저 辛이다.

zd36ro2MZa2bVNG3ygmMvR4ZjF8.png
갑골문(왼쪽)과 금문(오른쪽)의 辛

어떤 물체의 형체를 본뜬 것 같기는 한데 뭘까? 정설은 무언가를 찔러 쪼개는 칼이나 바늘로서 죄인의 머리에 문신을 새기는 형벌용 도구를 가리킨다고 본다. 이에서 나 형벌, 또는 형벌을 받으니 괴롭다는 뜻이 파생되었고, 거기에서 다시 맵다심하다는 뜻이 파생되었다. 다음은 辨이다.

Lr0hJSZsoXVPOEVYub6yb254A-k.png
금문의 두 辨

뭔가 辛 비슷한 글자가 양쪽에 있고 그 사이에 刀(칼 도)나 人(사람 인) 같은 문자가 있다. 그래서 두 辛이 상징하는 두 죄인 사이에서 칼로 나누듯이 죄를 '분별한다', 또는 두 죄인 사이에 있는 한 사람이 죄를 '분별한다'는 데에서 분별하다는 뜻이 나왔다. 이를 바탕으로 辯을 해석해보면, 두 죄인이 송사하면서 서로 '말하다'라는 뜻이 된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辯의 용례 중에 변호사(辯護士)가 있으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辯은 법정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2020년에는 왕자양(王子楊)이란 학자가 논문으로 이 통설을 반박하기도 했다. 갑골문과 금문의 辛은 끝이 곧은데 금문의 辨을 구성하는 두 글자는 휘어져 있는 데 주목한 것으로, 이 글자는 辛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辛이 아니며 옥으로 만든 기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辨과 유사한 글자로 班(나눌 반)을 들 수 있다. 이 글자는 두 옥(玉)을 가운데에 있는 칼(刀)로 나눈다는 뜻으로, 辨이 사실은 옥기를 나눈다는 뜻이라면 班과 같은 구성이 되는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辡은 종래의 설처럼 두 죄인이 '송사하다'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옥기에서 비롯해 이에서 파생된 辨도 뜻하는 한자가 된다.

zbjsCQS3tL2kCgkbHsdkrywZZGw
班(나눌 반)의 금문

辨과 辯은 辡에서 뜻을 가지고 해석할 수 있지만 나머지 한자들에서는 그저 음만 담당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제 辡 시리즈들을 정리해 보자.

vRLeIABCr3CIVLShG9pgF9f1hIs.png
辡과 이에서 파생된 辨(분별할 변)·辯(말씀 변)·辮(땋을 변)·瓣(꽃잎/날름 판)·辦(힘쓸 판)

辡(송사할 변)

辡+刀=辨(분별할 변): 변리사(辨理士), 변명(辨明) 등, 어문회 3급

辡+言=辯(말씀 변): 대변인(代辯人), 변호(辯護) 등, 어문회 4급

a54nNMMfbX_4gSR_Qf68lzxoL1o.jpg
김수경 대한민국 대통령실 대변인(代辯人)

辡+糸=辮(땋을 변): 변발(辮髮), 급수시험 외

zzVqU-WzeksJSg1cflgYsYz_N6M.jpg
청나라의 합법 헤어스타일, 변발(辮髮)

辡+力=辦(힘쓸 판): 판무관(辦務官), 판제(辦濟) 등, 어문회 1급

Sfj1lwfpQeO0MVi176t1GWbMi9U.jpg
UN 인권 고등판무관(高等辦務官, 또는 최고대표) 볼커 튀르크

辡+瓜=瓣(꽃잎/날름 판): 안전판(安全瓣), 판막(瓣膜) 등, 어문회 준특급

0T_giCx60wqJDqKStipDsYpJzMM.jpg
심장 혈액의 역류를 막는 여러 가지 심장판막(心臟瓣膜)

이 중 판제란 말이 낯설 수도 있는데, 요즘 흔히 쓰는 말로는 '변제'라 한다. 원래는 판제였는데, 일본에서 辦이 들어가는 한자어를 전부 辨으로 바꾸면서 변제란 말이 새로 생긴 것 같다. 일본에서는 辦이나 辨이나 모두 음이 '벤'이라서 별 탈 없이 바뀔 수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음이 달라서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辡 시리즈들을 일본에서 왜 弁으로 쓰는지 조금 더 짚어보자. 辡 시리즈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辡이 다음과 같이 弁으로 변할 수 있다(?).

qr3XMkAUkYKTQU1TlyBPbjMu4TI.png
辡에서 弁으로 변하는 과정

너무 억지 같기도 하고, 중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간화자를 만들지 않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辡 시리즈에서 辡 쪽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辦만 간체자에서 초서체를 따라 办으로 간화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辡 시리즈들을 초서로 쓰면 거의 辡만 남고 중간 부분은 뭉그러져서 거의 구분하기 어렵게 되는 건 매한가지다.

z3xz6zRtaLsBba8rN-mo_kFnVIY.jpg
辯의 초서체
kSLAAimJ55zRXPwNDoIPd-OlWh4.jpg
辨의 초서체

물론 원래의 고깔 변(弁)에다가 辡 시리즈 다섯 글자를 합해서 여섯 글자를 하나로 통일하다 보니 헷갈릴 우려는 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억지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요약

弁(고깔 변)은 일본에서 辡(송사할 변)이 들어가는 辯(말씀 변)·辨(분별할 변)·辮(땋을 변)·瓣(꽃잎/날름 판)·辦(힘쓸 판)을 대신할 수 있다.

辡(송사할 변)은 辛이 상징하는 두 죄인이 송사하는 것을 가리키며, 辨과 辯도 이에서 뜻이 비롯했다.

辡에서 辯·辨·辮·瓣·辦이 파생되어, '변' 또는 '판' 음을 나타내게 되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손꾸랔
24/06/04 15:42
수정 아이콘
예전 법학도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글자가 弁이었다는 소문이..
辡 사이에 들어가는 아이템이 꽤 다양하네요. 잘 정리해주셔서 많이 배웠습니다.
계층방정
24/06/04 22:16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말씀 들어보니 법학도들에게 弁이 엄청 유용했겠네요.
Phlying Dolphin
24/06/04 17:08
수정 아이콘
弁이 수도꼭지나 밸브를 말할 때는 瓣인 거군요. 일본어 배울 때 弁은 꽤나 뜻이 다양하다고 했는데 애초에 많은 한자들을 하나로 모은 거였네요.
계층방정
24/06/04 22:18
수정 아이콘
그리고 그 모은 방식도 약간 다르죠. 辯, 辨, 瓣은 약자를 弁으로 지정한 거고, 辮, 辦은 그냥 쓰지 못하게 하고 弁으로 대신하게 한 겁니다.
24/06/04 17:30
수정 아이콘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계층방정
24/06/04 22:19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쓰도록 노력할게요.
24/06/04 19:45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계층방정
24/06/04 22:19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스타나라
24/06/04 20:22
수정 아이콘
언제 똥 이야기가 나올까 두근두근 했는데 안나와서 실망했습니다.
추천 드립니다(?)
계층방정
24/06/04 22:19
수정 아이콘
어째 제목을 읽으면서 변이 똥 같다는 느낌이 좀 들긴 했는데...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883 [일반] [팝송] 알렉 벤자민 새 앨범 "12 Notes" 김치찌개4690 24/07/14 4690 0
101882 [일반] ‘삼체’를 소설로 읽어야 하는 이유 [34] Schol9950 24/07/14 9950 26
101881 [일반] 퇴직과 이직 즈음에서 [8] 흰둥6434 24/07/13 6434 11
101880 [일반] [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5875 24/07/13 5875 20
101879 [일반] 끝없는 달리기 고통의 원인 이제 마지막 선택지만 남았네요 [18] 내우편함안에7041 24/07/13 7041 12
101877 [일반] <플라이 미 투 더 문> - 가벼운 음모론을 덮는 로코물의 달콤함. [2] aDayInTheLife6532 24/07/13 6532 1
101876 [일반] 부천시체육회 여성팀장, 직원 성추행으로 정직 2개월 징계 [49] pecotek14572 24/07/12 14572 29
101874 [일반] 읽지도 않은 소설책 추천하기 [12] 쿨럭8055 24/07/12 8055 1
101873 [일반] 진주 고추 크림치즈 머핀 후기 [43] 김삼관10296 24/07/12 10296 6
101870 [일반] 깃발나부낄 언(㫃)에서 파생된 한자들 - 아침해빛날 간(倝), 아침, 햇빛, 노을 등 [13] 계층방정5640 24/07/12 5640 5
101869 [일반] [웹소설] 2개 추천합니다 [22] 소금물6614 24/07/12 6614 0
101866 [일반] Z플립6 파리 올림픽 에디션 [30] 겨울삼각형10588 24/07/11 10588 0
101865 [일반] 가속 페달을 핸들로 옮기는 아이디어 (추가) [203] VictoryFood17172 24/07/10 17172 6
101863 [일반] 급발진 주장 사고는 나이와 상관있을까? (+ 음주운전) [33] 덴드로븀9863 24/07/10 9863 2
101862 [일반] 카이엔 출고기 [51] Thenn12259 24/07/10 12259 17
101861 [일반] 진짜 위기라는 갤러리아 백화점 현황 [80] Leeka15476 24/07/10 15476 1
101860 [일반] 우주적 공포 창작 단편 "토미에, 각성" [8] 스폰지뚱5826 24/07/10 5826 3
101859 [일반] 아이를 LG트윈스의 팬으로 만든 죄책감에 대하여 [43] likepa5735 24/07/10 5735 29
101858 [일반] 자주 듣는 외국 밴드 발라드 [1] Pika484007 24/07/10 4007 5
101856 [일반] 둘째가 생겼습니다... [83] galax9153 24/07/09 9153 72
101855 [일반] 전통주 관련 책, 독립 출판 기념 나눔합니다 [당첨자 발표] [148] Fig.17107 24/07/09 7107 31
101854 [일반] 가운데 중(中)에서 파생된 한자들 - 가운데, 안의 뜻을 부여하다 [15] 계층방정6158 24/07/09 6158 7
101852 [일반] [팝송] 제스 글린 새 앨범 "JESS" [6] 김치찌개9266 24/07/07 9266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