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신수, 혹은 키치한국풍이란 복잡한 말입니다. 누가 한국의 정체성을, 고유성을, 혹은 특수성을 몇 개의 활자만으로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종류의 낱말이라면 으레 그렇듯이, 어떤 것이 한국적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한국적이란 어떤 것이라고 한다면 반론을 받지 않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 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몇몇 사람들의 통찰을 살펴보면, 이른바 한국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로 수렴되는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국인의 선조들은 중국이 선진국이었을 때는 중국을, 일본이 패권국이었을 때는 일본을, 미국이 강대국인 때는 미국을 모델로 삼아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성은 대개 문명의 시작부터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왔던 한반도의 조건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선두였던 경험이 적고, 발명보다 모방에 익숙하며, 시원이 아니기에 더욱 원리원칙을 강조하던 역사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날에도 창조보다는 재창조를 더 잘한다고 일컬어집니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哭)하려 한다.
(신채호, 「낭객의 신년 만필」 中)
예의 저명한 산문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이러한 한국문화의 특성은 크게 불교와 유교에 대하여 발현되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이미 유입된 불교는 한국의 원시신앙을 빠르게 대체했으며, 이로 인해 중국의 도교나 일본의 신토에 대응되는 한국의 사상 - 즉 무교(巫敎)는 기록되고 연구될 기회를 크게 잃어버렸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삼국시대에 이미 도입된 유교는 한국의 정치사상과 각종 제도를 상당히 '문명화'시켰고, 그리하여 한국의 통치방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중화를 모방하기에 이릅니다. 특히 조선조 전반에 걸쳐 경주된 사대부들의 '교화'는 민간풍속을 화풍으로 바꾸어나가는 과정이었으며, 한국은 그 과정 끝에 완성된 유교문화를 체화한 채로 돌연 근대를 겪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불교를 수용하고 유교를 장려했을 그 시대의 위정자들은 그것이 필요하다고, 혹은 유익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며 불교나 유교에 그러한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돌아보는 입장에서 이것을 두고두고 곱씹는 것은,
[ 그렇게 한 나라가 생각보다 매우 드물기 때문이겠지요. ] 동아시아의 천하란 결국 중국과 한국과 일본과 베트남입니다. 유구국은 일본에 삼켜졌고 몽골은 유목문화로 분류되니까요. 그리고 여기에서 일본이 탈출하고 나면 결국 조선이 온몸으로 추구하던 '국제표준'이란 기실 조선과 베트남만이 추구하던, 혹은 조선만 진심으로 추구하던 '중국풍'으로 읽히기 일쑤인 것입니다.
중화문화를 기독교문화와의 동일선상에서 보고자 함에도 자꾸만 문화공정의 마수가 두려워지는 까닭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중국이 옛 전국시대처럼 일곱 개의 나라로 쪼개져 근대를 지났고, 한국이 그 옆에 있었다면, 중원은 유럽이 되고 한국은 그중 하나가 되어 나머지 일곱 나라와 함께 '중화 문화권'을 구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이 하나로 합쳐져 있는 탓에 한국은 중국과 문화를 공유한다기보다는 중국문화를 추종하는 듯한 전통을 보유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다행히 동병상련의 베트남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만큼 깊이 발을 담그지는 않은 것 같고요.
한국문화의 고유한 특질을 선뜻 제시해내기 어렵다면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조선시대에 완성된 우리의 전통이 화풍과의 차별화가 아닌 합일을 지향하고 있으니까요. 많은 능력자 배틀물에서 변신수들, 혹은 복사 능력자들은 흔히 '자기 것이 없다'는 비판에 직면하곤 합니다. 외국인의 시선으로 보면 조선의 이미지도 그럴지 모릅니다. 아니, 실은 한국인의 시선에서도 얼마간은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빈껍데기에는 무용의 용(用)이 있습니다.
2. 그런 조선에도 불구하고'한국적 환상을 구현한' 것으로 간간히 언급되곤 하는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에는 토끼와 표범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원문의 맥락과는 다소 다르지만, 앞 절의 부정적인 내용 다음에 위치하기에는 나름대로 적절한 인용이기도 합니다. 그 문언은 이렇습니다.
토끼는 자신을 부정의 대상이 아닌 긍정의 대상으로 바꿉니다. 표범보다 약한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자신을 선택하는 대신 표범보다 작아서 잽싸게 토끼굴로 뛰어들 수 있는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자신을 선택합니다. 도망치는 토끼는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 4권 315-316쪽 中)
저는 한국풍 세계관의 이미지를 정초하는 데에도 이러한 태도가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대한 까닭은
[ '일관된' 한국풍을 위해서는 결국 조선풍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조선의 지배층들이 사상적/문화적으로 고려와 단절되어 있고(물론 고려 역시 삼국과 단절되어 있고), 제후국을 자처하며 사대와 모화에 치중했고, 문치주의를 지향하여 무예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면 그야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전통'이란 곧 조선의 문화이고, 생활과 풍속에 대한 기록과 자료가 가장 풍부한 시대 또한 조선이며, 현대 한국과 가장 가깝고 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시대 역시 조선시대입니다.
그렇기에 한국풍임을 자처하는 창작물들이 겨냥한 시대로는 조선이 가장 많으며, 그런 창작물들에 의해 형성된 한국풍의 이미지도 당연히 조선시대의 이미지입니다. 여기를 벗어나 고려나 삼국을 한국풍의 일반형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우선 자료가 부족할 것이고, 그 시대를 제대로 반영해낸다고 해도 다른 한국풍 창작물들과는 상이한 이미지가 나올 것이며, 그렇기에 쉽게 한국풍으로 인식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고려라고 해서 중국과 확연히 구별되는 어떤 특성이 있다고 광범위하게 인정되는 것도 아니지요. 물론 삼국 - 특히 신라의 경우에는 토풍이 뚜렷하다고 평가되지만 현대 한국문화와의 호환성이 그만큼 낮습니다. 이것은 마치 일본풍이 헤이안 시대를 포함하지만, 그럼에도 일본풍을 대표하는 것은 전국시대 이후의 찬바라인 것과 같습니다. 한국풍의 대표는 조선시대이고 이것 자체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조선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조선시대를 다루는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조선이 가진 시대단절·사대모화·문치주의라는 '부정적' 요소를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이는 얼핏 보기에 매우 어려운 과업처럼 보이지만, 이미 실제 창작물들에서 지적된 단서를 나침반으로 삼는다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습니다. 조선은 패스트 팔로어라는 그 특성 때문에 원류보다 더 원리원칙에 엄격했으며, 화풍을 지킴에 있어 융통성이 적었고, 그래서 오히려 중국풍의 자장을 뚫고 고유성의 실마리를 배태할 수 있었습니다. 한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이 차이를 다음과 같은 대사로 표현합니다.
내가 보니 명의 유학은 타락했다. 관리들이 불교나 도교의 가르침을 지지하고 장수를 기원하더니 사찰이나 도관에 칩거하고 명문을 새긴다. 참으로 개탄스럽도다. 천하가 이토록 어지러운 건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배우, 조선 왕이 되다』 152화 中)
이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 선비들이 종종 지적하던 바와 동일합니다.
최금남(崔錦南, 최부)이 중국의 풍속을 평론하기를, ‘도불(道佛)을 숭상하고 귀신을 높이는 것은 중국의 문물과 예악이 모인 바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저 먼 지방이나 외딴 마을에서야 혹 기도도 하고 제사도 지내는 곳이 있을 수 있다고 하겠으나, 어찌하여 온 천하를 들어서 모두 그렇게 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이 말은 참으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대저 경사(京師)는 사방에서 모이는 곳인데도 저들이 방자한 행동을 이와 같이 거리낌없이 하니, 이것은 반드시 조정에 있는 사람이 보고 듣고 두루 익히고서도, 구원하고 바로잡는 방법에 힘을 쓰지 않았던 때문인 것이다. 아! 괴이하고 놀랍다고 말할 수 있겠다.
余平日竊怪崔錦南評中國之俗曰, ‘尙道佛崇鬼神, 以爲中華文物禮樂之所聚.’ 彼遐荒僻村則容或有禱祀之處, 而烏有擧天下皆然之理. 今而目擊, 則斯言誠不誣矣. 夫以京師四方之所會, 而彼乃肆行無忌如斯, 則必是在朝之人聞見習熟, 而不爲汲汲然救正之計故也. 吁! 其可謂怪且駭也.
(『하곡집(荷谷集)』 「하곡선생조천기(荷谷先生朝天記)」 萬曆二年甲戌 八月 十三日 조.)
여기에서 착안하면, 조선이 불교를 탄압하고 무당을 핍박하고 상인을 제약하고, 광대나 백정이나 노비나 혹은 그와 비슷한 부류들을 억압하는 경향이 강했던 반면에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중국이라고 이러한 면모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고, 조선이라고 늘 이러한 모습만으로 고정되어 있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강도의 차이는 존재했다고 생각되며 조선풍의 특색은 그곳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중국의 전통이미지 - 즉 무협이 관무불침을 상정하고, 일본의 전통이미지 - 즉 찬바라가 관무일치를 이야기한다면,
[ 한국의 전통이미지는 관이 무를 질타하고 무는 관에게 복종하는 배경 하에서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죠. ] 그리고 이때의 '무'에는 무(武)만이 아니라 무(舞)와 무(巫) 또한 포함됩니다. 이것은 지금껏 제가 접했던 '한국풍' 창작물들에서도 거의 매번 언급되던 조선의 정체성 중 하나입니다. 몇 개를 꼽아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법은 이제 끝나 가고 있어. 더 이상 이 땅에서 가능하지 않은 시대가 온 것이야. 호교 군주들이 이따금 나오기는 했지만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렀어. 유림들이 산에 오를 때 절에 들러 가마를 매게 하지. 그런 수모를 말없이 받아들였어. 공부하는 스님의 수는 줄어들었고 깨달은 분은 더욱 드물어졌지.
그러다가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어. 호교 무공을 극성으로 익힌 자가 왕실의 안녕을 위해 일해 준다면 산사의 절만큼은 남겨 주겠다는 제안이었어. 어떤 놈이 그런 제안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어.
(『만행무승』 12화 中)
"혹시 백의종군 하신 적 있나요?"
"지금 하고 계신다. 하지만 그 분의 잘못은 아니다. 괴력난신은 정말 운 좋게 관직에 나아가더라도 본래 여기저기서 천하다고 핍박을 받게 되어있어. 사소한 실수로도 그리 되지. 사실 녹둔도 전투는 그 분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승전한 거였지만······."
(『율곡검원의 소드마스터』 15화 中)
괴력난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 나라의 근본인 유교다.
허나 이미 벌어진 일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
믿겠다. 그 무녀의 말을···
이 나라는 선왕들께로부터 이어진 나라다!
그 핏줄이 아닌 자가 왕이 되려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반역!
반역자는 삼족을 멸하는 것이 국법!!
(『우투리』 2화 中)
그리고 위의 『우투리』가 이미 존재하던 아기장수 설화를 바탕으로 조선풍 엑스맨을 (비록 아직 끝까지 그려내지는 못했지만) 그려내 보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 조선은 '끝내 인정받지 못하는' 기인들의 이야기를 펼쳐보기에 꽤 적절한 배경이며 그러한 전통도 이미 존재합니다. ] 예컨대 『홍길동전』의 얼자 홍길동이 그러했고 『허생전』의 몰락양반 허생이 그러했으며, 『임꺽정』의 양수척 임꺽정과 『장길산』의 광대 장길산도 유사한 맥락을 잇고 있습니다. 홍길동은 뛰쳐나가서 자기 나라를 세우고, 허생은 세우려다 말고, 임꺽정은 관군에게 죽고, 장길산은 잡히지 않고 잠적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조선 사회에 대한 시선은 모두 대동소이하다고 할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선풍의 세계관은 한국적 특색뿐만 아니라 현대적 시의성까지 갖출 수 있게 됩니다.
3. 역사와는 멀리, 환상과는 가까이무협 작품들 속의 명문대파들은 흔히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것으로 등장하지만,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 근현대에 창작된 설정이라는 점도 이제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찬바라에 나오는 닌자나 사무라이들은 실존 인물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으며, 당대의 쇼군이나 그 지역의 다이묘 이름이 사료와 일치하느냐의 문제는 대개 부차적인 것입니다.
[ 일반적으로 말해 어떤 배경이 한 장르의 세계관으로 통용되기 위해서는 우선 비역사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 그렇기에 김용의 역사무협은 불후의 명작이지만 오늘날의 무협 작가들이 김용처럼 작품을 쓰지는 않으며, 이우혁의 '한국적 판타지'가 많은 인기를 끌었음에도 오늘날의 한국풍 작품들이 『왜란종결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는 미묘합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대답이 있겠지만, 간단히 말해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삼는다면 이순신이 노량해전 이전에 사망하는 전개는 대체역사소설이 아니고서는 (심지어는 대체역사소설에서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선조는 도망을 가야 하고, 곽재우는 홍의를 입어야 하고, 권율은 행주에서 이겨야 합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들의 원인이나 과정에는 상상을 가미할 수 있지만, 이를 넘어서서 일어나야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순간 그동안의 설정은 무너집니다. 반면에 비역사적인 배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센고쿠 시대의 '어떤' 유명한 무사가 장군이 되었다가 닌자의 습격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써도, 그 무사가 실존인물이 아니고 그 시대가 언제인지 모호하게 처리하기만 하면 문제될 것이 없지요. 다시 말해, 세계관을 비역사화하면 창작자가 누릴 수 있는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조선풍 세계관에서도 이미 이러한 장치를 적용한 사례가 꽤 있는데, 가장 유명한 예시는 아마 드라마 『킹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킹덤』을 보면 이해되듯이, 비역사화된 세계관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환상적 요소를 운용하기도 편해집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장점은 앞서 2절에서 지목했던 조선풍 세계관의 특성과 조화되기에 매우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차별받는 능력자들을 조명하는 작품은 대개 『임꺽정』이나 『우투리』처럼 사회의 기득권과 맞서거나, 『엑스맨』처럼 능력자들끼리 파벌을 갈라 대립하거나, 『위쳐』처럼 인외의 존재에 대항하는 것에 주력하는 세 가지의 방향성을 적절히 배합하여 전개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셋은 모두 문학적 과장과 환상의 투입이 없다면 흥미롭게 그려지기 어려운 소재이며, 그렇기에 한국풍 세계관은 무협과 대등하거나 그보다 더한 양의 환상을 가미하여 설정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와는 멀고 환상과는 가까운 세계를 구현한 한국풍의 작품으로는 일찍이 『뫼신사냥꾼』이 있었고, 최근의 것으로는 착호갑사와 광대를 엮은 『사람의 탈』이 비슷한 분위기를 내고 있습니다. 특히 착호갑사라는 소재는 암행어사와 함께 조선시대에서 극화하기 좋은 소재로 꼽히는 만큼 『호랑이형님』이나 『착호갑사』를 비롯한 많은 작품에서 다루어졌는데, 이러한 상황을 보면 한국풍의 세계관이라는 것은 예의 세 가지 방향성 중에서도 세 번째에 가장 치중하는 듯합니다. 실제로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 이후 분열기나 전국시대가 없었으므로, 무협이나 찬바라에서 등장하는 지역 간의 대립이나 혼란기의 사회상보다는 이물과의 투쟁이 어울리기는 하지요. 이런 범주에서 B급 감성까지 용인한다면 『은탄』 또한 한국풍의 작품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인데, 이 웹툰은 또한 한국풍 세계관의 정초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지적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전 왕조인 고려조만 하더라도 신령들을 잡귀 취급하지 않았다
너희가 깬 것이다!! 인간과 신령이 이 땅을 함께 향유하였는데!
팔관회로 매년 화합을 다지는 게 이 땅의 전통인데!
(『은탄』 96화 中)
인간의 이는 충치가 없는 한 모두 그 수가 같사옵니다
정말로 문자 그대로 이의 숫자로 지배자를 뽑았겠습니까?
이의 숫자로 우두머리를 결정했다 함은
요괴들이 그 힘을 겨루었다는 은유입니다
당굴은 인간 닛금은 요괴
이 땅은 인간과 요괴가 함께 다스리던 곳입니다
허나 현 조에 와서 우리 요괴를 배재한 결과
왜인도, 야인에게도 짓밟히는 소국으로 전락했나이다
(『은탄』 97화 中)
읽어 보면, 예의 인용문들은 2절에서 언급한 조선의 단절성을 보완할 실마리를 보여줍니다. 조선시대 이전 - 특히 삼국시대의 한국이 고유한 토풍과 환성상을 가진 나라였고 그것이 이후에 지배층으로부터 배격당한 것이라면,
[ 바로 그 지배층으로부터 핍박받고 거부받는 집단들 사이에서는 과거의 전통이 계승되어 오고 있었다 ]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때 그러한 계승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의 여부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조선시대까지 살아남은 산사들이 이전 왕조에서 건립된 그 사찰이고, 조선시대에 활동하는 무당들이 이전 왕조에서부터 이어져온 그 굿을 하고 있고, 조선의 거리를 거니는 광대와 악공들이 이전 왕조에서부터 향유된 노래와 춤을 익혔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 가능성만 인정된다면, 갑자기 착호갑사로 영입된 신량역천들이 황창랑/비형랑/처용 혹은 설죽화/척준경/김경손 등의 전인(傳人)이라고 어떤 작품에서 주장하더라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게 됩니다. 어쨌든 조선은 한국 전근대사의 종착점이고, 그 이전의 역사들은 조선이 섰던 공간에 쌓여 있었던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비로소 조선풍의 세계관은 그 안에 한국사를 오롯이 품을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한국풍 세계관으로서의 자격과 기능을 더욱 완연히 갖추게 될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거기까지 도달하는 미래가 실현된다면 그 뒤에는 장르의 정립을 기대해 보아도 좋겠지요.
역사에서는 멀고 환상과는 가까운, 중국풍도 일본풍도 아닌, 조선풍에 뿌리내린 한국풍의 장르 말입니다.
***
이렇게만 하면 무조건 되리라는 것은 물론 아니고, 이렇게 해야만 가능하다는 말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한국풍에 대한 생각은 늘 흥미로우면서도 어렵고 또 조바심이 나는 까닭에 조금 정리해 두어야겠다 싶어서 적어 보았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