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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16:32
여담이지만, 현재 자게 3연벙... 아니 3연 기독교 관련글이네요 덜덜
(각각의 글의 길이로 보건대 아마도 우연의 일치일 것 같은데 말이죠)
24/04/23 16:34
밑의 예정론이냐 자유의지냐 글 보고 삘 받아서 일필휘지했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건 하나님의 사랑으로 적절히 익스큐즈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24/04/23 16:37
목사님 본인이 구원에 이르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기독교를 믿는 동성애자 입장에서 너무 절망적인 게 문제 아닌가요?
그렇다고 목사님 말씀 중에 어떤 말은 듣고 어떤 말은 걸러야 한다면, 굳이 그 정도의 사리분별이 되는데 목사님 말씀을 들어야 되나 싶고... 하기사 동성애 문제는 교황님도 바뀔 때마다, 쿨마다 다른 말씀을 하시니 답이 없긴 한가 봅니다.
24/04/23 16:41
이게 문제죠.
본문에서 어떤 말씀을 하시고자 했는지는 어느 정도 알겠지만, 중점적인 예시로 드신 그 동성애 논점은 실제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뭔가 글 전체가 좀 붕 뜨는 느낌이 듭니다.
24/04/23 16:44
이런 말하면 위의 쿠마님이랑 파이어날 주제일 수도 있는데, 제 입장에서는 그것도 하나님이 기독교를 믿는 동성애자에게 던진 문제라고 보는 것에 가깝습니다
믿는자도 인생의 여러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기독교를 믿는 동성애자는 그 어려움의 형질이 동성애인 거죠
24/04/23 16:51
앗 파이어날 만한 말씀이라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굳이 제 이름이 언급되어서 첨언하자면, 저는 기독교를 믿는 동성애자들에게 주어진 문제/어려움의 형질을 '동성애' 자체라고 하기보다는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태도'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싶긴 합니다.
24/04/23 16:55
에 음... 여기서 좀 더 나가자면
내 자녀가 믿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을 때 기독교인 부모는 그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의 문제가 있는데요 쉬운 결론은 지옥에 가서 영벌을 받는다에요. 근데 그거를 납득할 수 있는 부모가 많지 않죠. 그러면 그 문제는 하나님이 그 사람한테 던진 거에요. 비슷한 맥락에서 동성애자의 고통 문제도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던진 것이라고 보는 거죠. 그 형질이 동성애인 것이고요
24/04/23 16:59
네 그 취지는 이해했습니다.
다만 말씀하신 상황에서 '던져진 문제'는 '자녀' 자체가 아니라 '믿지 않는 자녀의 죽음'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동성애자에게 던져진 문제라고 한다면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태도'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겠다는 의견이라는 얘기입니다.
24/04/23 16:56
기독교인이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교회에서 말씀에 위안을 얻는 것과,
기독교인이 교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겪는 어려움은 전혀 다르지 않을까요. 힘든 일을 겪고 집에 왔을 때 안아줄 부모가 있는 것과, 부모가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며 폭언하는 걸 견디는 건 전혀 다르듯이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동성애자가 굳이 신앙을 유지하며 괴로워 할 필요가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분들도 이유가 있고 믿음이 있어 그러시는 걸 테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24/04/23 17:16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박해 받는 신앙인'의 대표격이 현대에는 성소수자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교회에서 배척하거나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셈 치는데, 그럴 게 아니라 오히려 환영하고 교제하며 본받을 대상이라고 느낍니다.
24/04/23 16:43
종교에 있어서, '인간은 잘 모른다'는걸 인정하는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이게 흔히 말하는, 이순신장군도 지옥갔어요? 같은 구원문제부터 수많은 사회적 관점들에 대해서 가져야할 태도라고 생각해요. 근데 목사들 중에는, 본인들이 하나님인것처럼 세상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아주아주 확신에 찬 어조로 모든것을 아는것처럼 해석하고 그 해석에 어긋나는걸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죠.
24/04/23 16:55
원효대사가 위인인 이유는 그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불교 경전 다 때려치우고, 일반 중생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것만 알면 된다고 딱 정리해버렸기 떄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평양대부흥의 기반도, 복잡한 성경책 다 몰라도 되고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것만 알면 된다고 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사실 종교적이든 과학적이든 어려운 논란거리를 놔두고 고민을 하는 건, 우리가 어느 정도 먹고살기 좋고, 삶의 여유가 있기 때문인거고요. 예수님도 그 수많은 율법을 그냥 하나로 정리해버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본문의 예시들도 그렇지만, 기독교인이라면 그냥 덮어두고 사랑하면 됩니다. 뭘 상대의 잘잘못을 따져서 정죄하고 앉아있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권한에 도전하는 신성모독입니다.
24/04/23 17:25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됨으로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지 않으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 이로 인해 지옥에 간다고 설명합니다
24/04/23 17:31
결국 예수천국 불신지옥인거네요. 안믿는 사람은 안사랑함.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불교도, 무슬림도 다 지옥가는거고.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는 건데 그거 그냥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지옥보내는 건데 예수 믿으면 봐준다. 이거 인듯.
24/04/23 17:40
아 제가 교리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 개떡같이 썼는데 잘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은 하는데 날 안믿으면 구원해줄 수 가 없어. 이런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겠군요. 아니 로또를 사야 당첨을 시켜주지. 이런 것? 어찌됐든 하나님이 인간이 빠지게 되어있는 고통에서 구원을 해주는 존재라면 인간을 왜 고통에 빠지게끔 만드신건가요?
24/04/23 17:46
창조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되었다가,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으로 우리 모두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럼 선악과를 왜 만들었냐의 문제가 있는데, 저는 선이라는 것이 악을 택할 수 있어야 선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목에 폭탄목걸이가 걸려서 선행하는 건 선이 아니잖아요? 그런 것처럼 선악과를 먹는다라는 악의 선택지가 있어야 선이 존재할 수 있어서 자유의지에 의한 악의 선택지로 선악과를 마련했는데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는 악행을 했고, 이로 인해 죄에 취해 우리 모두가 죽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그 죄를 모두 대속하심으로 우리 모두가 다시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4/04/23 17:50
저는 그 지점에서 생각이 좀 다르네요.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는 건 그 자체로 나쁜 거라 생각합니다. 친구를 시켜 애인을 유혹하게 한 다음에 넘어가면 너는 나쁜 놈이었어.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인간이란 원래 나약한 존재인데.
24/04/23 17:59
사람이 프로그래밍을 배워서
프린트를 막 찍어서 Dew님은 최고야 Dew님은 전지전능해 상 시 숭 배를 출력시켜봐야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근데 챗지피티가 나오고 얘가 도무지 무슨 말을 할지 예측도 안되고 옳은 소리 똑똑한 소리도 했다가 구라도 쳤다가 하는걸 보니까 재미있잖아요 신으로서도 똑같이 그냥 건드리면 신 최고 하는 출력을 내뱉는 생명체를 만들어봐야 아무 의미가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자유 의지를 주어서 얘가 정말로 진심으로 자기를 숭배하기를 바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4/04/23 18:17
moqq 님// 그 부분은 인간의 관점으로 과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전적으로 신의 선택/계획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저 복음을 전하라고 했지 목숨걸고 멱살잡고 끌고와서 교회에 앉히라고 하지 않았어요 전한 다음에 정말로 그 사람이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사람이(타인 혹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신의 마음에 달린거죠 뭐 그런데 쓰고보니 바로 위에선 자유의지 어쩌고 하지 않았느냐 모순아니냐 그러실 수도 있을 거 같은데 .. 그런 모순을 견디는 게 종교긴 합니다. 아무리 논리적인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국 어느 순간에는 신뢰의 도약 하듯이 아무튼 믿음임 아무튼 믿어야 함 하는 순간은 오게 됩니다
24/04/23 23:48
뭐 타종교인 입장에서 바라보면 불교는 선행을 쌓으면 극락가고, 무슬림도 내세 사상이 있으니 알라의 천국을 가던지 하겠죠?
말씀하신 논지는 기독교의 교리가 진리임을 전제로 둬야 성립되는 것이니, 모순 같습니다.
24/04/23 17:33
같은 신을 믿는 유대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은 예수를 구원자로 믿지 않으니 지옥에 가야 하는 걸까요?
비종교인 관점에서 봤을 때 참 거시기 한 결론이라서요.
24/04/23 17:37
답변을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기회에 대한 공평의 문제가 나오는데, 기독교의 주류는 그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을 믿을 동등한 기회가 주어졌으나 믿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 정론입니다
24/04/23 17:48
1. 저는 모태신앙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종교인인데 그걸 넘어서 허용되는게 현실이고 현실에서는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들은 태어나자 마자 종교가 강요되는 거나 마찬가지죠. 사실은 카톨릭이나 개신교도 거의 똑같구요. 그들은 모태신앙이 아니면 비종교인 외에는 거의 선택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에 따르면 기독교도들 외에는 일종의 지옥이 결정된 삶이네요.
2. 저는 외가 쪽이 개신교 쪽인데 이런 부분들 볼 때 마다 나는 절대 해당 신을 믿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열심히 이야기 하는데 실제로 보면 신에 대한 사랑을 강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라니 그런 신이 있다면 너무 쪼잔하다고 생각해서 믿고 싶지 않아지더군요.
24/04/23 17:51
제 식대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이 그런 환경을 raindraw님께 허락하신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건 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raindraw님의 그 생각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을 할 겁니다. 어떻게 일할지는, 그건 저도 모르지만요
24/04/23 18:09
이슬람인들은 예수를 선지자 중 한명이라고 얘기합니다. 얼마전 라마단 끝나고 첫번째 축제인 이드 때 무슬림 애들하고 대화했는데 그렇대요
24/04/23 17:40
사실 여러해석들이 있습니다
만인구원까지 외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이 알아서 판단할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비롭게 판단할거라고 이야기한 목사님이 생각나네요
24/04/23 17:43
저도 이 해석을 지지하는 쪽입니다.
구원의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는거고, 그건 불신자들 뿐만이 아니라 신자들 중에서도 구원받는자와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갈라지겠죠.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거보다는 더 공의로울것이고 우리가 생각하는것보다는 더 자비로우실거라고 생각합니다.
24/04/23 17:24
개인의 입장에서야 퉁 치고 사랑이 사랑이다 대승적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진리의 조건이 분명하게
다른 집단간에도 그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24/04/23 17:41
물론 몰라도 구원받지만 이런 이성적 변증이 필요하고 논리적 접근으로 믿게되는 신자들도 있기에 교리가 연구되고 그런 사람들에겐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24/04/23 17:46
이성적 변증이 필요하고, 사실 이성적 변증은 천년넘는 세월동안 수많은 대답들이 나와있습니다.
다만 아무리 논리적으로 접근해도, 어느 순간에는 논리 -> 신앙으로 점프해야만 하는 시기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있죠. 신앙이라는게 결국 논리로 전부를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라 ;;
24/04/23 17:48
잘 몰라도 구원에 이를 수 있지만, 알기 위해 노력하는것도 그 자체로 아름답고 매우 중요하다
이정도가 제 결론이 아닐까 싶습니다 애초에 하나님이 눈을 틔워주시지 않았는데 잘 모르는 것을 알게 될 수 있는가의 문제도 있구요
24/04/23 17:59
한 때 키보드 배틀을 저어하지 않았던 전직 키보드 배틀러 입장에서 말씀드립니다만...
푸른잔향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뭐 어쩌겠습니까. 저는 그려려니 하겠습니다. 그러니 기독교 교리에 대한 해석에 관하여 굳이 언쟁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다만, 마태복음 23장 27절을 인용해보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신이 보시기에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따라서 제 시각이 맞다고 강변하거나 우길 생각은 없습니다마는, 저는 어째 서울 한복판에 높은 첨탑을 올려가면서 굳이 목사자리를 세습하는 목사들과, 또 그것을 용인하는 기존교단들이 말이죠. 딱 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든 진리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장 낮은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이들이 지위를 세습하는 모양새를 보자면.. 과연 저들이 성서의 진리를 따르고 있기는 한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24/04/23 19:00
기독교 교리나 신이 보시기에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건 기독교 교인들 사이에서도 자주 나오고 비판되는 모습들이라... 딱히 의문이랄것도 없지 않나 싶습니다.
24/04/23 19:17
뭐, 그래서 모든건 나중에 하나님이 판단하실거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도 주여주여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게 아니라는 말이 있죠.
24/04/23 17:59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독실한 기독교 왜군 장수와 싸운 조선군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을지,
연옥에서 중생들을 구제하는 석가모니는 구원이 필요한 것인지, 제가 기독교에 반감이 있어서 그런지 교리를 몰라서 그런지 천국과 구원이라는 개념이 잘 와닿지 않던데 종교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안되는 영역같더라구요. Mbti식으로 말하자면 f의 감성이 필요한 영역..
24/04/23 18:16
이 글을 보니 예수님의 바램은 아직 이루어지기 멀어 보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예수님은 개인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이땅에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죠 구원은 그 과도기적 보상일 뿐인데 2000년이 넘게 세월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룰 생각은 없고 개인의 구원만을 간구하고 있으니 말이죠 기독교인은 선행만으로 구원받는게 아니겠지만 혼자서 구원받으려고 신을 믿는 것도 아니어야죠. 대속하러 오신 예수님 보기 부끄럽네요.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복음 10장 37절)
24/04/24 01:40
예수: 네 이웃을 사랑하라.
사람들: 공산주의자는요? 동성애자는요? PC 주의자들은요? 페미니스트들은요? 예수: 내가 말 더듬었냐? 아니면 니네 귀가 먹었냐? 이 독사의 자식들아!
24/04/24 02:35
예수님은 믿어서 구원받을거라고 믿지만
예수님 말씀중 편한것만 따르고 교회에 이득이 되는 것만 가르치는 거짓 신자요 거짓 교사 들이죠 예수님은 사랑하지만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 신자와 사마리아인은 배척하라고 가르치는 교사들이라니..
24/04/23 20:11
자의적으로 '그건 알 수 없다' '그런데 이건 확실하다'라고 하는 것일 뿐,
그냥 밑도끝도 없는 설정놀음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거죠 머. 같은 교회 옆에 앉은 신도들끼리도 이 사람의 야훼는 여자가 목사가 되어도 된다는 야훼, 저 사람의 야훼는 그렇지 않다는 야훼 라는 식으로 무수한 조합의 서로 다른 야훼들이 들어앉아있죠. 말로는 '경전이 진리'라고는 하지만 결국 하는 말은 '내 말이(우리 해석이) 절대 진리다' '내 말이 곧 신의 뜻이다'라는 거구요. 소박한 사람들은 바램을 들어주는 누군가를 찾고 싶어하는 데서 그치겠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신이라는 치트키를 써서 '신의 뜻인 내 말을 들어라'라며 남들을 조종하고 싶어하는 거고...
24/04/23 20:36
개신교가 다시 예전 카톨릭으로 회귀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개신교의 아이덴티티는 "오직 믿음으로서 의롭다" 인데 요즘은 목사들이 말씀을 빌미로 수많은 현대판 율법들을 만들어내고 있죠 루터가 관짝을 뚫고 뛰어나올 일이죠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3장28절)
24/04/23 20:48
논의에서 살짝 벗어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런 논쟁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구원, 천국 등의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학문적 논의가 제대로 논의가 되려면 관련 용어의 정돈이 필요한 것처럼 신학적 논의 역시 용어의 개념 정리가 필수입니다. 구원을 천국 가는 것.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 이렇게 단정지은 상태에서 이야기하면 논의가 진전되기 어렵습니다. 다양한 신학적 경향에 따라 구원과 천국의 개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성경말씀은 무조건 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해석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실 수 있는데 4복음서조차도 다 쓰여진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신학적 관점이 다릅니다.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언행도 다 상이합니다. 물론 성경에 대한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의 관점에서 벗어난 상태에서만이 이런 다양한 해석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글쓴이께서는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동의하시는가요?
24/04/23 21:20
신, 구원, 천국 등의 개념들은 근거가 없는 개념이니 정의 또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 나름대로 주장할 수 있겠죠. 근거 없이요. 신이라는 개념만 봐도, 어떤 신들은 자손을 낳기도 하고 서로 죽이고 죽기도 하고 인간에게 패배하기도 하고 상급신이나 운명에 저항하다가 처벌을 받기도 합니다. 일본이나 인도만 해도 벼라별 잡다한 속성의 신들이 있구요. 여러 종교를 들먹일 것까지도 없이, 기독교라는 종교 하나 안에서만 봐도 신에 대한 많은 개념이 있어왔습니다. 기독교 신학자인 틸리히는 신은 사고가능한 대상이 아니며 차라리 無라고 해야 할 것이라 했고, 역시 신학자인 알타이저는 신은 이미 죽었다고 했죠.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원래 종교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무언가(아니 '무언가'라고도 할 수 없는)'에 대한 상징적인 체계였는데 (道可道非常道) 아시아권 종교들에는 그런 경향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반면 유럽권에서는 근대에 들어 과학적(기계적) 세계관과 이성 중심적 세계관에 오염되어 경전의 텍스트와 교리, 신이라는 개념을 절대화하여 우상숭배하는 무언가로 변질되어버렸다고 지적합니다. 요즘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야훼의 개념 또한 그렇게 근대 이후에 등장한 것이고, 그 이전의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던 야훼의 개념과는 다르다는 거지요. 위에 열거한 신 개념 모두 근거 없는 자기 나름의 사변적인 믿음들이구요. 그러니 신이라는 개념에 대해 사전적인 정의를 내릴 수는 없을 거예요. 아마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공통점 정도가 있을까 싶은데, 그 정도는 마블 히어로들도 마찬가지고. 따라서 그런 개념들에 대해 '제대로 된 논의'라는 것도 아마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 이 본문 게시글과 댓글들을 포함해서 그런 것들에 대한 대화나 고민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건 재미나 지능계발(?) 같은 side effect 일까...
24/04/23 21:47
저는 신학 공부를 해본적이 없어 상당히 궁금한데요, 그렇다면 '카렌 암스트롱'이란 학자는 일종의 탈성경주의(?)를 주장하는 건가요? 가령 루터 이전에는 성경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뭐 이런 류의 얘기를 하는 것인가요?
p21님에게 하는 질문은 아니고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말씀하신 '다종다양한 신(개념)의 사례들'을 보았을 때 기독교인들은 대체 왜 다른 모든 신이 아니라 기독교적 신을 믿는 것인지, 다른 모든 종교경전이 아니라 왜 하필 성경을 믿는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대체 왜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지도요(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수리물리학적으로 표현되지 않는(혹은 자연과학적으로 실증되지 않는) 초월에 대한 논의는 인간의 삶에 있어 중요하고 의미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신앙(생활)에는 강한 순기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쓰이고 전승되어온 역사적 맥락을 볼 때, 혹은 기독교 신앙이 확대-전승되는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과정을 볼 때 대체 왜 하필 다른 어떤 종교경전도 아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텍스트라고 믿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24/04/23 21:56
그 할머니는 종교학자이지 기독교인이 아니니 탈성경이고 뭐고 할 것도 없는 사람이긴 합니다.
그녀는 위에도 써드린대로 "종교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무언가(아니 '무언가'라고도 할 수 없는)'에 대한 상징적인 체계"였다고 주장하는 건데, 예전 종교인들은 그 경전도 초월적인 것에 대한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뿐, 현대의 문자주의 기독교인들처럼 에덴동산이니 대홍수니 하는 경전에 있는 내용을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장자가 곤(鯤)과 붕(鵬)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고자 한 게 아니라 아니라,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 바깥'을 상징적, 우화적으로 표현해본 것처럼 기독교를 포함한 일반적인 종교의 신화와 경전 같은 것들도 원래는 그렇게 만들어지고 그렇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라는 얘기죠.
24/04/23 23:14
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은 신, 구원, 천국에 대해 합의된 정의를 내리자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논의에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주장하시는 분들은 신학적 해석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에 논의가 진행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글쓴분께 질문을 드렸던 것입니다. 신학적 경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 성서는 열린 텍스트가 되어 다양한 논의가 진행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4/04/24 11:03
네 감사합니다.
저는 더 나아가서 절대주의라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보고, 과학적 방법론과 (다원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호의적으로 보는 편입니다. 축자영감설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서로 검증/반증 가능한 근거도 없이) 내가 믿는 게, 내가 하는 말이, 우리 해석이 절대진리다라고 하면 결국엔 같은 구도로 뱅뱅 도는 셈이 되지 않나 싶어요.
24/04/23 22:39
동의하냐/안하냐의 논쟁에서 저는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해 동의합니다.
다만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벗어난 신학에 구원이 있냐 없냐를 묻는다면 저는 거기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24/04/23 23:41
푸른잔향님께서 사용하시는 구원, 천국 등의 용어 해석이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동의하시는 분들이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비슷해서 질문을 드렸었습니다.물론 그러한 해석이 현재 우리나라 개신교인 대부분이 동의하는 주류 해석이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푸른잔향님께서 다양한 공부와 숙고를 통해서 그러한 신학적 관점을 가지게 되셨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냥 일반적인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가르치니까 자연스럽게 당연히 그런 관점을 가지게 되셨다면 조금 더 폭 넓게 신학에 대한 공부를 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저도 모태신앙으로 교회에서 배우고 들어왔던 일반적인 신학적 해석을 당연하게 여겼을 때는 님께서 하셨던 고민들과 비슷한 고민과 질문들을 많이 가졌었는데 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해왔던 질문들에 대해 제 나름의 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24/04/23 21:08
오래 전에 읽어 자세하진 않지만 카뮈의 <페스트>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떠오르는군요. 4살이던가 5설이던가, 무튼 세상이든 삶이든 뭐든 제대로 알 수도 없는 어린 아이가 페스트에 걸려 죽을 지경이 된 상황에서 주인공 리유박사(의사)와 신부님이 논쟁을 벌이죠. 양 인물의 피를 토하는 장광설이 이어지는데, 제 기억상 신부님은 본문의 예정조화설(?) 비스무리한 논리를 동원하며 '이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은 딱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의 시련만 주신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이에 대해 리유박사는 분개하죠. 얼토당토않은 소리 하지 말라고요. 만약에 신이 있다고 치고, 설령 그 신이 우리에게 '극복 가능한'시련으로서의 사랑같은 것을 하사한다고 할지런정 그 시련이 소설 속 상황과 같은 '부조리'한 것이라면, 우리가 대체 왜 그런 신을 믿어야만 하냐고요. <페스트>의 신부님은 리유의 열변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지만 아마 현실의 신도라면 다음처럼 대답할 수 있겠죠. 당신의 반항심 또한 신이 사랑을 하사하시는 과정의 일부인 것이라고. 그러니까 사실 독실한 신도는 이미 무적의 논리를 구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신앙인은 조금 더 세속적 이성이 던지는 문제제기에 더 적극적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세속적 이성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태도를 전제로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적 논리는 쉽사리 폭력행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인이 팔레스타인인을 죽입니다. 신의 이름으로요.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할테지요. 서로가 서로를 신을 명분으로 죽입니다. 전능하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은 이러한 아비규환 또한 사랑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실까요? 만약 그런 신이라면 우리는 과감히 그런 얼치기 신을 거부할 수 있어만 합니다. 그런 신은 이성의 이름으로 단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신을 거부하기 위해서라도 종교인들은 더더욱 세속적 이성의 부름에 귀기울여 응답해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신'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역'에서 빠져 나와야만 합니다.
24/04/23 22:41
그 시련이 소설 속 상황과 같은 '부조리'한 것이라면, 우리가 대체 왜 그런 신을 믿어야만 하냐고요
- 믿어야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신앙은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어야 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해야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믿어지는 자들인 것이죠
24/04/24 03:03
예수님의 직접보고 수많은 기적을 목도한 12사도들도 틈만 나면 못 믿고 부정하고 의심했고
한명은 은전에 예수님도 팔아넘긴 마당에 믿어져서 믿는다는건 그냥 결과론적인 답변일 뿐이죠 심지어 예수님도 믿음의 당위를 설명하려 친히 현세에 임하셔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말씀을 전하셨는데 님이 믿어져서 믿는다고 하면 얼마나 기가 막히시겠어요 님의 믿음이 자기만족을 위한 믿음인지 아닌지는 말씀을 어떻게 따르며 사시는지가 증명입니다. 혹여 나는 나의 구원만 간구하며 예수께 나를 바치고 사랑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시는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선행만으로 구원받지 못하듯이 예수님의 말씀중 일부만 선택적으로 따른다고 구원에 이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야고보서 3장 17~18절) 제가 만나던 기독교인 들의 믿음의 무게(행함의 책임)는 솜털 같이 가볍더라구요..체리피킹해서 말씀을 따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믿음을 쉽게 생각합니다. 근데 예수님이 바라시는건 천근 같은 무게(행함의 책임)의 믿음이죠
24/04/24 09:04
행함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믿었으니 난 다 됐어로 끝나서는 안되고, 그와 관련해 본 글의 8번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4/04/24 10:30
행함도 매우 중요한게 아니고
행함이 믿음의 증거입니다. 성부성자성신 이 하나인것 처럼 믿음과 행함도 하나죠 성도 모두가 말씀에 따라 행할때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거죠 8번을 읽어보면 믿음 만큼의 갈구와 엄격함이 없어요 믿음에서 느껴지는 절절함이 없죠 [그렇지만 괜찮다. 모두가 이 단계를 거친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다면 놀러다니고 싶고 온갖 의무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도 그랬다. 그렇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괜찮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책임의 무게를 믿음으로서 가볍게 만드는 종교입니다. 정답은 아니다가 아니라 믿음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행동이죠 믿음의 증명이 행함인데 믿음은 충만한데 행함이 없으면 그게 믿음일까요? 아니면 믿음이라는 자기 최면일까요? 특히나 개신교를 믿는 분들이 이 믿음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고 목사들도 이 믿음의 무게를 굳이 설교하지 않죠 예를 들어 제가 이건희의 아들임을 진실로 진실로 믿는데 돈을 씀에 있어 망설임이 있을거 같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데 말씀을 행하는데는 왜 망설여질까요? 혹여 믿음에 의심이 있는 걸까요? 아님 듣기 좋은것만 체리피킹하고 구원만 바라는 거짓 성도일까요? 제가 전에 목사님에게 이부분을 꽤나 진지하게 여쭈었는데 한숨을 쉬시면서 요즘 교회의 큰 문제인데 이걸 이야기하면 신도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하더군요. 덜 행하여도 된다고 해주는 교회로 옮긴답니다. 껄껄
24/04/24 11:47
진정한 믿음에는 진정한 행함이 따릅니다.
그러나 행함은 믿음의 증거이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 아시지 않습니까? 저도 아우구스티너헬님과 해석이 동일할 겁니다
24/04/27 20:15
다만 이건 칼빈주의 장로교쪽 해석에 가까운 말씀인 것 같긴 합니다.
믿어지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이다. 이게 웨슬리안이나 알미니안 쪽의 해석이라고 보고요. 전적타락만 해도 오히려 장로교쪽 아니면 잘 주장 안 하더라고요 의외로. 웨슬리안도 전적타락 주장하긴 하는데 현재 인간 상태는 부분타락에 가까운 것으로 해석하지 않나 싶고요. 전적타락이지만 선재적 은총으로 구원에 대한 자유의지가 열려 있다. 이건 뭐 사실상 부분타락 상태 맞죠.
24/04/24 20:48
세속적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함부로 답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과 유사하게, 부조리한 상황을 섣부르게 정당화할 위험이 있거든요. 자칫하면 얼치기 신을 만들어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장의 답이 필요한 사람이 없는 건 또 아니라서 어렵네요.
24/04/24 23:48
본 댓글의 두 번째 문단을 쓸 때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충분히 쉽게 대답을 할 수 있음직한 예시(서로가 신을 명분삼아 서로를 해치는 상황)를 떠올렸던 것인데요. 말씀을 듣고 보니 대답이 상당히 어려운 예시들, 자칫하면 '얼치기 신'을 만들어낼 위험성이 큰 예시들이 많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당장 제가 예시로 들었던 <페스트>의 신부님 이 비종교인에게 어떻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할 수 있을지 떠올리기 쉽지 않네요. 제 댓글이 근본적으로 무신론적 입장에 기울어져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도 <페스트>에서 신부님이 봉착한 상황에 대한 답을 한 번 고안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리유박사 당신이 이 상황을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것은 정당하다. 저 죽어가는 어린아이에게 대체 무슨 원죄가 있는 것이겠나. 덧붙여 이 페스트가 창궐하는 오랑시의 주민들에게도 무슨 죄가 있겠나. 인정한다. 애초에 인간은 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의 입장에서 세상에는 부조리한 것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신부로서 하나님을 믿고, 이 모든 부조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시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당신의 입장에서 이 모든 부조리는 폭력적인 것일테다. 그렇다면, 저항하시라.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신을 거부하고 부조리에 반항하시라. 고통받는 오랑 시의 시민들을 위해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시라. 그 싸움을 지속하시라. 그런데 신앙인인 나로서는 당신이 택한 반항의 길, 투쟁의 길, 신에 대한 저항의 길에는 내가 택한 신앙의 길과 상당부분 공통점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당신은 왜 부조리에 저항하기를 택하였는가? 당신은 왜 투쟁하는가? 당신은 도망치고 회피할 수도 있지 않았는가? 의사로서의 책무를 저버리고 단지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도피할 수도 있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왜 저항하고자 하는가? 나는 반항하고자 하는 그 결심에는 분명 내가 선택한 신앙의 결심과 공명하는 어떤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신앙인으로서 이 죽어가는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믿고자 하는 내 결심을 충분히 완수하겠다. 당신은 싸우고자 하는 결심, 부조리에 저항하고자 하는 그 결심을 간직하며 당신의 역할을 다 하라. 그 과정에 끝에는 무신론자인 당신과 신앙인인 내가 충분히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하지 않겠는가?"
24/04/23 22:27
신을 믿고/안 믿고에 따라 천국/지옥이나 구원이 나뉘는 식으로 제약을 두는 건 신이 편협한 인간적인 잣대로 판단하는 한계성이 생기는 것이고 그렇다면 전지전능과 상충하는 것 아닌가?
한창 주일학교나 봉사활동 다니면서 생긴 의문을 당시 친했던 신부님께 던졌는데 신을 예수천국 불신지옥같은 인간의 관념과 잣대로 판단할 수도 없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라는 게 기억에 남네요.예수, 부처, 알라 등 사람은 자신의 시야와 인지능력으로 신을 표현하려 하지만 실제 신은 모든 종교가 표현하려 하지만 일부도 표현하기 어려운 전지전능한 모든것 그 자체라구요. 또한 선한 사람은 선함 그 자체가 신을 좇는 것이라 해당 종교의 믿음과 상관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요. 그 때 배운 시야로 지금까지 신과 종교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24/04/24 11:08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이 세상을 뒤에서 운영하고 있다는 믿음은 전형적인 음모론이고
음모론들의 전형적인 패턴은 자기 입맛에 맞는 거 같아보이는 증거들만 취하는 아전인수를 하며, 일반적/보편적인 증거들은 편리하게 무시한다는 거죠. 상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과학적인 방법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우리 삶의 더 많은 영역에, 더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으면 합니다.
24/04/24 20:44
음모론은 어디까지나 배후자를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하는 것과는 달라요. 그리고 과학철학계에서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은 많은 비판을 받고 이제는 한물 간 이론으로 취급받고 있는 모양입니다.
24/04/24 22:22
불교는 행함으로서 깨달음을 얻고 자기구원에 이르고
기독교는 믿음으로서 행함을 얻고 자기구원에 이르는 겁니다. 카톨릭은 그래서 단지 믿음으로서 구원받지 않고 믿음에 기반한 행함을 통해 구원받습니다. 근데 이 행함에 대해 수많은 규칙과 통제를 성직자가 내리는 것에 반대하여 루터가 로마서를 인용하여 오직 믿음으로서 구원받는 개신교를 만들었죠 하지만 개신교도 행함은 반드시 수반되어야합니다. 그걸 성직자가 제단하지 않고 신의 판단에 의지하는거죠 고로 믿음==행함이고 모두가 말씀에 따라 이웃 사랑등을 실현하면 하늘의 천국이 이땅에 이루어지는것이 신약의 근간입니다. 결국은 신도들이 스스로를 구원하는거죠 서로서로 그러니 믿음 == 행함 == 구원이 되는겁니다. 근데 행함은 쏙 빼놓고 믿음만 이야기하는게 현대 개신교의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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