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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3/11 17:28:16
Name meson
Subject [일반] [역사]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3. 몽골리아의 각축 (수정됨)
이전 편: #1 #2

전간기의 전반: 당군의 공세

660년의 백제 멸망전이 왜국에만 경각심을 심어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나라의 대함대가 평양을 노리고 있는 이상,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다만 고구려의 대응책이 바다에 있지는 않았지요. 세계 제일의 부국인 당나라와 건함 경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수성을 하는 것보다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입니다.[3-1] 이 때문에 당군이 647~648년에 수군으로 3회에 걸쳐 요동 반도에서 상륙전을 펼치며 고구려의 해안지역을 소모시켰음에도, 이에 대응하는 고구려 수군의 모습은 사료상에 나타나지 않습니다.[3-2]

[3-1] 서영교,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문화』 8, 2023, 314쪽.
[3-2] 서영교,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문화』 8, 2023, 293-297쪽.


대신에 연개소문의 고구려가 집중한 것은 토목 공사였습니다. 당태종은 648년에 고구려 재침공을 모의하면서, 연개소문이 민생이 피폐함에도 성과 울타리[城柵]를 증설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3-3] 이를 보면 고구려는 1차 고당전쟁에서 파손된 성을 복구하는 한편, 추가로 필요한 곳에 방어시설을 건립한 것으로 생각됩니다.[3-4] 예컨대 천리장성은 647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죠.[3-5] 따라서 이 시기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은 대부분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3-3] 『新唐書』 卷220, 列傳145 東夷 高麗.
[3-4]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75쪽.
[3-5] 나동욱, 「640년대 후반 高句麗·唐 전쟁에 대한 검토」, 『군사』 72, 2009, 54-55쪽.


물론 해상에서의 공격은 요동 방어선의 강화만으로는 방어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당군이 상륙하여 고구려 영토 내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지는 것만으로도 요동 반도의 생산력에는 상당 부분 타격이 가해졌을 것입니다.[3-6] 이것은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생업을 방해함으로써 압록수 이북 고구려 백성들의 민심 이반을 유도하려는 당나라 조정의 의도[3-7]가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당태종이 649년에 사망하지 않고 전면 침공을 감행하였다면, 1차 고당전쟁과 연이은 습격으로 인해 경제 기반이 약화된 고구려는 큰 위기를 맞았을 것입니다.

[3-6] 나동욱, 「640년대 후반 高句麗·唐 전쟁에 대한 검토」, 『군사』 72, 2009, 58쪽.
[3-7] 『資治通鑑』 卷198, 貞觀 21年(646) 2月 丁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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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철, 『관방체계를 통해 본 고구려의 국가전략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2, 312쪽. 참고용 지도이며, 650년대의 전황은 아래에서 다시 검토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당태종은 사망하며 요동에 대한 행사를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3-8] 덕분에 고구려는 더 이상 후방을 습격받지 않고 전후 복구에 전념할 수 있었지요. 물론 당태종이 이러한 유언을 남긴 것은 고구려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사망하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호기도 소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태종의 사망은 그의 위엄에 눌려 있던 여러 이민족들의 태도 변화를 야기한 것으로 보입니다.[3-9]

[3-8] 『全唐文』 卷9 遺詔, “遼東行事竝停.”
[3-9] 서영교, 「白村江戰鬪 이전 倭國의 遣唐使 -唐의 서북방 정세변화를 중심으로-」, 『영남학』 67, 2018, 18쪽.


예컨대 토번의 송첸캄포는 당고종의 즉위 소식을 듣자 당나라 중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낸 바 있습니다.

“천자(天子)가 이제 막 즉위하였으니, 신하들 가운데 불충한 자가 있다면,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너희 나라에 가서 토벌하여 없앨 것이다.”
“天子初即位, 臣下有不忠者, 當勒兵赴國討除之.”
- 『자치통감』 권199, 당기 15 -
아무리 천자를 위해 신하에게 하는 말이라고 해도, 이것은 명백히 당나라 조정을 위협하는 언사입니다. 훗날 호삼성(胡三省)은 이에 대해 “토번이 태종의 죽음을 맞아 진실로 중국을 가볍게 여긴 것”이라고 평가하였지요.[3-10] 그러나 당고종은 이러한 모욕에도 불구하고 송첸캄포를 서해군왕에 봉하고 장인과 직물을 보내 주는 등 유화적인 대응을 보였습니다.[3-11] 토번을 적으로 돌리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10] 서영교, 「白村江戰鬪 이전 倭國의 遣唐使 -唐의 서북방 정세변화를 중심으로-」, 『영남학』 67, 2018, 18-19쪽.
[3-11] 『舊唐書』 卷196 吐蕃傳.


당나라가 고구려에 대한 소모전에 집중하는 사이 북방의 초원에서는 동돌궐 출신의 차비가한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3-12] 또한 당태종의 죽음이 알려지자 서돌궐도 부족 통일 운동을 개시했습니다.[3-13] 당고종은 즉위한 그 해에 차비가한 토벌을 시작했고,[3-14] 곧이어 1년 6개월 만에 서돌궐을 통일한 사발라가한과의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3-15] 서돌궐의 반란 상태는 8년 동안이나 이어졌고요.[3-16]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 정복전을 재개하는 것은 당연히 연기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3-12] 나동욱, 「7세기 중반 高句麗의 東蒙古 進出과 軍事戰略」, 『한국사연구』 144, 2009, 106쪽.
[3-13] 서영교, 「『新唐書』 日本傳에 보이는 唐高宗 令出兵援新羅 璽書의 背景」, 『역사학보』 237, 8쪽.
[3-14] 『舊唐書』 卷194上, 列傳144上 突闕 上.
[3-15] 서영교, 「『新唐書』 日本傳에 보이는 唐高宗 令出兵援新羅 璽書의 背景」, 『역사학보』 237, 8쪽.
[3-16] 나동욱, 「7세기 중반 高句麗의 東蒙古 進出과 軍事戰略」, 『한국사연구』 144, 2009, 107쪽.


전간기의 후반: 고구려군의 공세

위와 같은 국제정세의 변동으로 인해 위기 상황을 넘긴 고구려는 650년대부터는 축성에만 치중하지 않고 공격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합니다.[3-17] 예컨대 655년 고구려가 백제와 연합해 신라 북부의 33개 성을 점령한 것[3-18]이 유명하지요. 이로 인하여 고구려의 남방 경계는 하슬라(강릉)에 육박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3-19] 그런데 당시 고구려가 공세를 편 방향은 남쪽만이 아니었습니다. 650년대에는 동몽골(요서)에서도 고구려와 당나라의 각축전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3-17] 윤성환, 「650년대 중반 고구려의 대외전략과 대신라공세對新羅攻勢의 배경」, 『국학연구』 17, 2010, 169쪽.
[3-18] 『三國史記』 卷22, 高句麗本紀10 寶藏王 14년 조.
[3-19] 윤성환, 「650년대 중반 고구려의 대외전략과 대신라공세對新羅攻勢의 배경」, 『국학연구』 17, 2010, 164쪽.


당시 요서에는 거란족과 해족 등 여러 유목 부족이 있었으므로, 당나라와 고구려의 갈등은 이들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란과 해는 600년부터 당의 건국 초까지는 돌궐 혹은 고구려에 부용하고 있었으나, 629년 이후에는 대체로 친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3-20] 특히 645년에는 고구려 침공에 종군하기도 하였죠.[3-21] 647년에 이세적이 고구려에 소모전을 벌일 때도 거란족과 해족이 일부 동원된 것으로 추정됩니다.[3-22]

[3-20] 김지영, 「7세기 중반 거란의 동향 변화와 고구려-660년 거란의 이반을 기점으로-」, 『만주연구』 12, 2011, 82-83쪽.
[3-21] 『新唐書』 卷220, 列傳145 東夷 高麗.
[3-22] 나동욱, 「640년대 후반 高句麗·唐 전쟁에 대한 검토」, 『군사』 72, 2009, 46-47쪽.


특히 거란의 추장 굴가(窟哥)는 당태종이 1차 고당전쟁에서 실패한 후 퇴각하면서 영주에 머물 때 좌무위장군을 제수받았습니다.[3-23] 또 648년에는 아예 부족을 모두 이끌고 당에 내속했지요.[3-24] (이때 이씨 성을 하사받아 이굴가로 불리게 됩니다.) 해족도 상황은 비슷하였으며 648년에 거란에는 송막도독부, 해에는 요락도독부가 설치됩니다.[3-25] (참고로 해족의 추장 가도자도 귀부 이후 당나라로부터 이씨 성을 하사받습니다.) 당시 당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준비 중이었으므로 이러한 내투를 유도 및 장려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3-26] 이때부터 거란과 해는 대부분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23] 『舊唐書』 卷199下, 列傳149下 北狄 契丹.
[3-24] 『舊唐書』 卷199下, 列傳149下 北狄 契丹.
[3-25] 김지영, 「7세기 고구려와 북방 제민족의 관계 변화」, 『만주연구』 8, 2008, 75쪽.
[3-26] 여호규, 「7세기 중엽 국제정세 변동과 고구려 대외관계의 추이」, 『대구사학』 133, 2018, 162쪽.


거란족의 이굴가, 해족의 가도자 등 당나라에 앞장서서 귀부한 군장들의 입장에서는 당나라의 지배가 이득이 되었을 것입니다. 기미주로 편성된 각 부족들은 도독의 지휘를 받게 되므로, 당나라에 의해 도독에 임명된 본인들의 권력이 확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3-27] 그런데 이들을 후원하던 당나라의 관심은 650년대에는 돌궐 전선으로 상당히 분산되므로, 요서 방면의 통제력도 다소 감소하였을 것입니다.[3-28] 고구려는 이러한 전략적 공백을 포착하고 요서 지역의 판도를 바꾸기 위해 동몽골에 진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3-27]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177쪽.
[3-28] 서영교, 「白村江戰鬪 이전 倭國의 遣唐使 -唐의 서북방 정세변화를 중심으로-」, 『영남학』 67, 2018, 19쪽.


고구려의 진출은 군사작전을 동반한 것이었습니다. 과거 장수왕 시대의 고구려는 군사적 압박으로 거란을 분할시킨 뒤, 형해화된 거란의 일부를 부용 세력으로 끌어들여 지배했던 적이 있죠.[3-29] 물론 650년대의 경우에는 군사적 압박과 함께 반당 성향을 보이는 현지 세력과는 협력도 병행하며 요서에 거점을 구축해 나갔을 것입니다.[3-30] 당나라의 지배로 인해 이굴가 등은 이득을 얻었겠지만, 반대로 손해를 입거나 불만을 품게 된 요서의 부족들도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29] 박경철, 「高句麗의 東蒙古経略」, 『백산학보』 71, 2005, 145쪽.
[3-30] 나동욱, 「7세기 중반 高句麗의 東蒙古 進出과 軍事戰略」, 『한국사연구』 144, 2009, 120쪽.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료가 주목됩니다.

영휘(650~655) 연간에, 강하왕 이도종[道宗]이 죄를 받으니, 위대가[待價]는 곧 이도종의 사위였으므로, 연좌되어 노룡부(盧龍府) 과의(果毅)로 좌천되었다. 이때[時] 장군 신문릉(辛文陵)이 병사를 이끌고 고려를 초위하였는데, 행군하여 토호진수(吐護眞水)에 이르렀을 때, 고려가 그가 방비하지 않음을 엄습하여, 갑자기 쳐서 그를 패배시켰다. (그때) 위대가[待價]는 중랑장 설인귀와 더불어 조서를 받들고 동번(東蕃)을 경략하는 중이었는데, 그래서 부하들을 이끌고 신문릉[之]을 구원하였다. 신문릉[文陵]은 고전하였으나, 적이 점차 물러나니, 군사가 비로소 온전해졌다. 위대가[待價]는 중상을 입어, 유시(流矢)가 왼발에 맞았지만, 끝내 그 공을 말하지 않고, 발병이 들었다며 면직하고 돌아왔다.
永徽中, 江夏王道宗得罪, 待價卽道宗之壻也, 綠坐左遷盧龍府果毅. 時將軍辛文陵率兵招慰高麗, 行至吐護眞水, 高麗掩其不備, 襲擊敗之. 待價與中郞將薛仁貴受詔經略東蕃, 因率所部救之. 文陵苦戰, 賊漸退, 軍始獲全. 待價被重瘡, 流矢中其左足, 竟不言其功, 以足疾免官而歸.
- 『구당서』 위정전, 부 위대가전 -
강화왕 이도종이 죄를 받아 유배된 시점은 653년 2월이므로[3-31] 토호진수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653년 이후의 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토호진수는 요하의 상류 중 서남방에 있는 노합하로 보는 것이 통설이며,[3-32] 해족과 거란족의 중심지[衙帳]도 그 500리 이내에 위치해 있어[3-33] 요서의 유목 지역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거란과 해가 양번(兩蕃)으로 호칭된 사례[3-34]를 고려하면, 위 사료에서 위대가와 설인귀가 경략하려 한 ‘동번’은 해 또는 거란일 공산이 큽니다.[3-35]

[3-31] 『舊唐書』 卷60 宗室傳.
[3-32]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182-183쪽.
[3-33] 『新唐書』 卷39 地理志, “吐護眞河五百里至奚契丹衙帳, 又北百里至室韋帳.”
[3-34] 『舊唐書』 卷199, 列傳149 北狄 奚.
[3-35] 윤병모, 「고구려의 對唐戰爭과 遼西 및 동몽골 진출」, 『몽골학』 27, 2009,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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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수계 지도. Laoha가 바로 노합하입니다.)

당나라가 이미 복속된 해족 또는 거란족을 경략할 이유는 없으므로, 653년 이후에 당이 토벌하려는 ‘동번’은 반당 성향을 가진 세력일 것입니다.[3-36] 그런데 이러한 당나라의 군사활동은 고구려를 초위하는 움직임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으며, 당군은 고구려의 공격에 패해 고전했을 뿐 아니라 장교가 중상을 입기까지 하였죠. 이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고구려군이 653년 이후 현지의 반당 부족과 연합하여[3-37] 토호진수 일대에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36]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72쪽.
[3-37] 나동욱, 「7세기 중반 高句麗의 東蒙古 進出과 軍事戰略」, 『한국사연구』 144, 2009, 121쪽.


동몽골 패권의 쟁투

이후 당나라는 토호진수 전투와 같은 사건을 보고받으며 고구려의 요서 잠식을 인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따라 요서 곳곳에서 고구려군과 당군의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655년 이후에는 요동으로도 전장이 확대되었고요. 다만 이 시기의 기록은 여러 사서에 파편화되어 전해질 뿐만 아니라, 기록이 상이한 부분도 있어 정확한 시점이나 사건 정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로 언급되는 기사를 모으면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1
2

우선 654년 고구려군이 거란을 공격했다가 격퇴당한 것은 거란을 압박하는 지속적인 군사작전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3-38] 전투가 벌어진 ‘새로 쌓은 성[新城]’을 송막도독부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3-39] 송막도독부가 아니더라도 송막도독이 직접 방어에 나선 것을 볼 때 거란족의 요충지에 위치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3-40] 당시 고구려는 동몽골 방면으로 상당히 침투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3-38]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69쪽.
[3-39]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187-192쪽.
[3-40]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68쪽.


한편 사료상의 혼선이 심한 655년과 657년의 전투 기사들을 검토해 보면, 비슷한 내용의 기록이 2년의 터울을 두고 반복되는 것은 655년과 657년에 실제로 비슷한 사건이 각각 일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휘 6년과 현경 2년은 표기상 차이가 확연하므로 단순 혼동의 여지는 적습니다.) 이때 '귀단수(貴端水)에서 고구려 격파'라는 정보 중에서는 655년 5월 책부원구의 것이 가장 자세합니다. 따라서 다른 기록들은 이것을 참고하여 단순화시키며 작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투는 657년보다는 655년에 일어났을 공산이 크지요. 한편 '귀단성(貴端城)에서 고구려 격파, 참수 3,000급'이라는 정보는 657년 설인귀열전에서만 등장하며, '참수 3,000급'이라는 정보도 657년에 대한 기록에서만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전투는 655년보다는 657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두 전투의 내용을 재구해 보면, 655년 전투는 신라의 구원 요청에 부응하고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655년 3월은 정명진 및 소정방 등이 고구려 공격을 위해 출발한 시점일 것입니다. 이후 5월에 당군이 요동에 진입하여, 성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온 고구려군과 합전해 승리하였으며, 1천여 명을 죽이고 신성 주변과 촌락에 불을 지른 다음 귀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제한적인 국지전은 위협 내지는 경고로만 작용했을 뿐, 신라가 바라는 대규모 파병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3-41] 왜냐하면 당나라는 655년 5월에도 서돌궐 정벌군을 출병시키는 등[3-42] 서북방의 전쟁에 관심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죠.

[3-41] 서영교, 「『新唐書』 日本傳에 보이는 唐高宗 令出兵援新羅 璽書의 背景」, 『역사학보』 237, 19쪽.
[3-42] 『資治通鑑』 卷199, 高宗 永徽 6年(655) 5月 조.


이처럼 서돌궐과 당나라가 전쟁 중이었던 것은 657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657년 요동으로 출전한 정명진 및 설인귀 등은 그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귀단성을 공격하여 3,000여 급을 얻은 뒤에 곧 귀환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가 동몽골로 진출하며 거란을 압박하려 하였다면, 당나라는 산발적으로 요동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물력 소모를 발생시키려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전환: 서돌궐의 붕괴

그런데 657년 12월, 소정방은 서돌궐의 주력을 대파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3-43] 658년 2월에는 사발라가한도 생포되었습니다.[3-44] 이러한 서돌궐 토벌의 성사는 당고종의 대외정책 변화도 가능하게 했을 것입니다. 658년 당군이 고구려의 적봉진(赤烽鎭)을 공격한 것은 당고종의 관심이 동방으로 옮겨간 결과로 생각됩니다. 앞서 655년의 정명진은 거느린 병력이 적었고, 이로 인해 고구려군이 성문을 열고 합전에 나섰었습니다.[3-45] 신라의 청병으로 파견된 부대조차 이러했으므로 657년의 당군 역시 대규모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658년 두방루의 3만 병력을 대파한 당군은 이에 필적하는 전력을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3-43] 서영교, 「白村江戰鬪 이전 倭國의 遣唐使 -唐의 서북방 정세변화를 중심으로-」, 『영남학』 67, 2018, 28쪽.
[3-44] 여호규, 「7세기 중엽 국제정세 변동과 고구려 대외관계의 추이」, 『대구사학』 133, 2018, 177쪽.
[3-45] 『冊府元龜』 卷986 外臣部·征討.


동몽골 지역으로 비정되는[3-46] 적봉진까지 3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 고구려는 요서에 이를 위한 거점과 제반 여건을 조성해 놓은 상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는 실제로 요서에 역참[驛], 검문소[邏], 봉수[烽], 초소[戍] 등을 두었던 적이 있습니다.[3-47] 다만 이처럼 대규모 병력이 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적봉진을 탈환하지 못하였으므로 고구려의 요서 세력은 다소 약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3-48] 그 뒤로도 공방이 있었음이 사료상에 암시되기는 하나, 늦어도 659년에는 설인귀·양건방·계필하력 등이 요동의 황산(橫山)을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46]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69-170쪽.
[3-47] 이성제, 「高句麗와 遼西橫斷路 : 遼河 沿邊 交通路와 관리기구」, 『한국사연구』 178, 2017, 61-62쪽.
[3-48]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72-173쪽.


645년 당태종이 요동 방어선을 공격할 때 함락시킨 10개의 성 중에는 황산성도 포함됩니다.[3-49] 이것이 위의 황산과 동일한 지역이라고 보면, 설인귀 등은 659년에 요동 방어선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역시 전면전은 아니므로 앞서 정명진 등이 행했던 국지전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백제 침공을 위해 고구려군을 요동 방면에 묶어두기 위한 공격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3-50]

[3-49] 『資治通鑑』 卷198 太宗 貞觀 19年 10月 조.
[3-50] 여호규, 「7세기 중엽 국제정세 변동과 고구려 대외관계의 추이」, 『대구사학』 133, 2018, 177쪽.


그러나 당시 동몽골에 적봉진과 유사한 고구려의 중요 거점이 여전히 건재했다면, 당군은 앞서 그랬듯이 해당 거점을 먼저 공격하였을 공산이 큽니다. 또한 당이 동방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양건방이나 계필하력과 같은 당나라의 주요 장수들이 소규모 부대를 이끌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이렇게 위협적인 군세가 요동으로 진격했음에도 요서에서 저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요서의 고구려군이 약화되었음을 시사하는 듯합니다.

이러한 당나라의 군사활동은 그동안 기미부주로 편성된 거란과 해를 자주 동원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고구려와의 전투에 자주 출전한 정명진은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로서 거란과 해를 지휘하고 있었고,[3-51] 658년에는 실제로 거란병을 이끌고 고구려군을 격파하였습니다. 또한 당고종은 651년 백제에 신라와 화친할 것을 요구하며, 고구려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거란과 여러 오랑캐[諸蕃]를 동원해 공격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죠.[3-52] 거란과 해는 이처럼 여러 전투에 투입된 것으로 보이며, 656년경 이굴가와 가도자가 대장군으로 승진하는 것은 그간의 군역에 대한 보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3-53]

[3-51] 『舊唐書』 卷86 程務挺傳.
[3-52] 『舊唐書』 卷199 百濟傳.
[3-53]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195쪽.


두 번째 전환: 해와 거란의 반란

그런데 위 같은 병력 차출은 당으로부터 대가를 받는 이굴가 등에게는 이득일 수 있어도, 직접 전장에 동원되는 군사들과 군소 족장들에게는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전투에서의 희생은 물론 전쟁 물자 준비로 인한 경제적 타격까지 이들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3-54] 이것은 결국 당나라로서는 예기치 못한 사태로까지 비화되었지요. 해와 거란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3-55]

[3-54]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203-204쪽.
[3-55] 『新唐書』 卷219, 列傳133 北敵 契丹.


물론 친당파였던 이굴가나 가도자는 이러한 반란을 억제하려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반란이 일어나기 전 어느 시점에 사망하였고,[3-56] 그 뒤에 주도권을 차지한 것은 반당파였던 듯합니다. 거란의 아복고(阿卜固)와 해의 필제(匹帝)는 서로 연결하여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며, 각자 왕을 칭했습니다. 아복고의 경우 거란왕으로 기록된 사료[3-57]와 송막도독으로 기록된 사료[3-58]가 함께 존재하는데, 이는 아복고가 이굴가 사후 거란족을 장악하여 우선 송막도독이 된 다음 칭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필제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해왕에 올랐을 것입니다.

[3-56] 『新唐書』 卷219, 列傳133 北敵 契丹; 『新唐書』 卷219, 列傳133 北敵 奚.
[3-57] 『舊唐書』 卷83 薛仁貴傳.
[3-58] 『新唐書』 卷219, 列傳133 北敵 契丹.


비록 660년 5월경 아복고가 체포되고[3-59] 661년 초에는 필제까지 참수되면서[3-60] 이들의 독립 시도가 진압되기는 하였지만, 도독급의 인물들이 반기를 든 것이었던 만큼 이들에 대한 기미지배는 일정 기간 동안 유명무실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차 고당전쟁에서 거란과 해의 동원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입니다.[3-61] 당나라는 대신에 회흘병을 동원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3-62] 그리고 이것은 당시 요서 제민족들 사이에서 반당 정서가 지속되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3-59] 『資治通鑑』 卷200, 高宗 顯慶5年 5月 조.
[3-60] 『新唐書』 卷219, 列傳133 北敵 奚.
[3-61]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204쪽.
[3-62] 이성제, 「7세기 東突厥系 蕃將과 蕃兵의 활동 : 麗唐戰爭 시기 활동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25, 2013, 199쪽.


각축의 결실

661년 당나라의 대규모 침공이 닥쳤을 때,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위와 같은 사실을 이용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간 동몽골 방면에서 활동하며 쌓은 경험과 기반을 바탕으로 반당 세력을 후원 및 선동하면 당의 군사적 압박을 분산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고구려는 실제로 이러한 기조에 입각해 외교를 펼친 것으로 보이며,[3-63] 그리하여 요서 제민족 중 거란의 경우에는 실제로 661년에 고구려와 연계한 사실이 확인됩니다.[3-64] 650년대 전반에 걸쳐 경주된 동몽골 진출 정책이 결과적으로는 고구려에 득이 되는 형세를 조성해 낸 셈입니다.

[3-63] 이성제, 「高句麗와 투르크계 北方勢力의 관계 : 이해의 방향과 연구방법에 대한 모색」, 『고구려발해연구』 52, 2015, 163쪽.
[3-64]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13-214쪽.


당나라가 바다에서 혁신을 일으켰다면, 고구려는 초원에서 반전을 꾀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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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1 19:50
수정 아이콘
항상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기 나오는 고려대장 온사문은 온달의 후손일수도 있을까요?
24/03/11 21:32
수정 아이콘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확정할 길이 없습니다.
만일 온달이 온씨라면 열전에서 성은 떼고 달이라고 부르기 마련이나 그런 부분이 없고, 온사문도 온씨라는 증거는 없죠.
14년째도피중
24/03/12 10:37
수정 아이콘
올려주신 게시물들 덕에 이전부터 설명하기 애매했던 부분들도 확실하게 근거를 얻었고 이를 통해 전성기 당이라는 제국의 체급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번에는 당이 이민족들을 이용한 전투를 통해 고구려를 포함한 변방의 세력들을 꾸준히 견제하고 있었다는 내용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상세한 자료와 친절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24/03/12 13:49
수정 아이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솔로몬의악몽
24/03/12 13:25
수정 아이콘
이건 거의 논문급의 자료 아닌가요?
24/03/12 13:49
수정 아이콘
과찬의 말씀입니다.
클라이밍고양이
24/03/14 23:34
수정 아이콘
사료까지 정리해주셔서 너무 흥미롭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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