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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7/04/11 21:14:58
Name OrBef
Subject [일반] 그것이 나의 창과 방패와 군마가 될지니
학교와서 첫번째로 제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두번째로는 피지알에 왔습니다. 이게 끝나면 드디어 교수님이 시킨 일을 할 지도 모릅니다!

OrBef의 오늘의 뻘글입니다.

1. 창

돌이켜보면, 저는 매우 어려서부터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흥미를 느끼는 동안은 자기도 모르게 열심히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이런 생각이 머리를 때리는 거죠. 그리고 나면 몇초 전까지만해도 열광하던 그 대상에 대한 애정 - 그게 게임이든 공부든 기타 잡기든간에 - 자체가 팍 식어버리는 겁니다.

..............................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저것이 바로 나의 창입니다.

내 약점을 상대방보다 앞서서 - 그 상대방에는 자기 반성을 행해보려는 자기 자신도 포함됩니다 - 서술체로 주욱 말해버리는 것이죠. 결국 저 말의 주제는 '나는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입니다. 절대로 '앞으로는 저러지 않겠다' 가 아니죠. 이를 통해 상대방의 공격을 원천 봉쇄해버립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랄까요..

저렇게 말해놓고 나면,

'넌 왜 공부를 하다가 그만뒀니?'
'넌 왜 자격증 준비를 하다가 그만뒀니?'
'넌 왜 돈을 모으다 말고 회사를 관뒀니?'

라는 진짜 중요한 질문들을 마치 '내 약점에 얽힌 몇몇 세부적인 사항들' 인 것처럼 폄하해버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난 막장이거든.'

이 한마디로 끝나버리는거죠.


2. 방패

그딴 것들은 내 인생관에는 중요한 게 아니야. 너한테는 중요할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딴 쓰잘데기 없는 말장난이나 하는 사람들을 싫어해.
나는 이 회사가 싫어. 고로 내가 지금 빈둥대는 것은 절대로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야. 그러지 않아도 스트레스 받고 있는데 건드리면 박살내버릴거야!

..............................

적절한 방패입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얼굴 붉히기 싫어하기 마련이고, 자신이 절대 듣기 싫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미리 주위에 널리 홍보해 둠으로써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해둡니다.

시간이 흘러 점점 나는 망가져가지만, 적어도 주변 사람들은 웃는 낯으로 대해줍니다. 왜냐하면 내가 몇년전부터 조금씩 쌓아올린 방패때문입니다. 나에게 굳이 적대감을 느끼게 하기 싫으니까요.

자신은 '내가 주변과 그 주제에 대해 아무 대화도 나누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난 생각이 깊은 사람이야' 라고 자평할 수도 있고, 주변 사람중에 대단히 생각이 없거나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그 말에 동의해줄 수도 있지만, 실제로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내가 완전히 망가진 후에는 질려서 떠날 수도 있고, 혹은 끝까지 남아서 나를 도와주려 노력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 방패를 뚫고 들어올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설령 그것이 내 부모님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비만 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겁니다.


3. 군마

살다보면 가끔 '센스가 번뜩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저정도의 인물이 저런 일이나 하고 있지?' 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죠. 제가 공부쟁이라서 자꾸 그런 쪽으로만 이야기가 흐릅니다만.. 조금 더 공부해도 충분한 사람인데 중간에 멈추는 사람들을 보면 특히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조금더 일반적인 예라면, 조금만 더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갔으면 좋았을 것을, 고3때 신나게 놀다가 조금 떨어지는 대학에 간 후배들이 다른 좋은 예입니다.

물론 본인이 진짜로 안분지족의 경지라면야 무얼 탓하겠습니까. 하지만 안그런 사람도 많습니다. 제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였죠. 제가 저 상태에 있었을 때 노력하지 않는 제 자신을 합리화하던 대표적인 메커니즘은 이런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 그분보다 제가 못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분은 자기 인생을 공부에 바친 것이고 전 그정도까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차이는 그것 뿐이죠.'

..............................

제가 '열정 잠재우기' 스킬이라고 혼자 이름 붙인 기술입니다.

저 말 자체로는 그 당시로서는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근데 사실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1. 자기 자리에 넘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 이상의 자리에 갈 자격이 있습니다.
2. 근데 자꾸자꾸 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자기 능력에 딱 맞는, 혹은 벅찬 자리가 옵니다.
3. 그렇게 되면 지금 누리고 있는 '이야.. 저놈은 끝을 알 수가 없어. 저런 놈이 왜 이런 곳에 있지?' 라는 자그마한 부러움의 시선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자기 '끝'을 아는 것이 두렵습니다.
4. 고로 이 자리에 영원히 머뭅니다.

이런 시스템이 동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을 지평선 너머로 데려다줄 자신의 군마는 오늘도 내일도 잠만 잡니다.


4. 마치며

언제나 그렇지만, 주제같은 것은 없습니다. 일기는 일기장에... 쓰는 것은 거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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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efree
07/04/11 21:24
수정 아이콘
이런 글을 일기장에만 적으시는 것은 이곳 유저님들이 거부하실 듯 합니다.
며칠 전 '환상 속의 그대' 가사와 물려, 뼈아프게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07/04/11 22:07
수정 아이콘
너무나 공감이 가서 소름이 끼치는 가운데 저 역시 방패를 살짝 들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07/04/11 22:36
수정 아이콘
.. 이쯤에서 머물러도 괜찮을 걸까?(혼잣말)
07/04/11 22:48
수정 아이콘
아아아아아...

진짜로 이러면 안되는데 자꾸 또 그러지 말입니다 ㅠ.ㅠ
레지엔
07/04/11 23:25
수정 아이콘
'공개된 장소에서 써선 안되는 글은 사적인 글이 아니라 못쓴 글이다' 라고 모 사이트 운영자가 일갈한 적이 있었지요. 이런 글이라면 일기가 아니라 낙서라도 환영입니다.
07/04/12 01:49
수정 아이콘
아아.. 비도 오고... 왠지 도망가고 싶은 밤입니다;; 군마를 깨우고 싶지만, 차마 못하는 이 마음... 어찌해야 좋습니까?
성안길
07/04/12 02:51
수정 아이콘
근데 덧글로 일기는 일기장에 이런말 참 안좋더라구요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는건지
07/04/12 03:54
수정 아이콘
AhnGoon님/
흐흐흐흐 그거 너무 오래 재우면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_^
07/04/12 08:56
수정 아이콘
OrBef님의 글은 저에게 늘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군요.
이제 뭔가 준비를 해야할 나이인데 자꾸 자리에 안주하는...
결국 벼랑중간에 굵은 동아줄에 매달린 나...
쥐가 갉아 먹어 끊어질텐데...
올라가던지 내려가던지 뭔가를 새롭게 해야한다는게 두렵네요..
sway with me
07/04/12 10:13
수정 아이콘
같이 읽을만한 일기면 게시판에 써도 괜찮겠지요^^

그런데 내 군마가 어디갔지??
07/04/12 10:33
수정 아이콘
군마를 깨워 달리는게 쉬운 일은 아닌거 같습니다 확실히.
제 능력을 인정해주고, 같이 일하자고, 더 좋은 대우를 보장해주겠다는...
그런 사람들은 주변에 몇몇 있긴 한데...

현실이 자꾸 발목을 붙잡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신중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인지,
그저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군마를 움직일 채찍을 분실한 기분이랄까요?

"야! 일어나! 일어나! 언제까지 잠만 퍼질러 잘꺼냐? 아놔..."
07/04/12 11:02
수정 아이콘
옥돌님/
댓글을 보고 신상정보를 클릭해보니 '심사역' 이시군요. 제가 아는 그 VC 심사역이 맞다면.. 전설적인 직업 아닌가요?

'보는건 수많은 빛나는 성공과 처절한 실패, 당장의 괜찮은 수입, 불투명한 미래'

제 제일 친한 친구가 미래에셋 심사역으로 일하다가 결국은 창업하더군요. 지금 한창 분투중인데 옥돌님도 화이팅입니다!
07/04/12 11:05
수정 아이콘
sway with me님/
근데 '군마' 라는 명칭이 호응이 좋군요!! 이 단어를 꾸준히 밀어볼까..

안군님/
뭐 결국 움직이던 그자리에 머물던 간에 자기가 안부끄러우면 된거겠죠. 그리고 자기 자신만큼은 영원히 속일 수가 없는 것도 불변의 진리니까요. ^_^
JKPlanet™
07/04/12 17:59
수정 아이콘
소름끼치도록 공감이 되네요..
저도 동아리 후배들과 술한잔 할때면 선배라는 명목으로 개똥철학을 늘어놓곤 하지요. 특히 여자 후배들한테...
너흰 25까진 남자의 얼굴을 보고 만나라. 하지만 25이후에는 그남자의 자기개발능력을 보고 만나라. 얼굴이 밥먹여 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말을 하는 제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서는 자위를 하겠죠. 나는 그래도 꿈을꾼다고요...
하지만 꿈만 있지 꿈을 실현하려는 의지는 별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고는 시간이 없어..여건이 안되라는 식의 변명만 혼자 늘어놓고 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네요...
이카르트
07/04/12 23:29
수정 아이콘
굉장하군요,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사실입니다. '보고싶지 않은 현실'을 보셨네요, 정말 대단합니다.
07/04/13 04:55
수정 아이콘
소름 끼친다고 하신 분이 3분이나...

제가 쓴 글은 공포물인가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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