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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1)
2. 그때 그랬다면? - 영등포부 승격
1936년으로 돌아가 보면, 당시 일제는 시흥군 영등포읍을 경성으로 편입시켰지만, 영등포의 일본 유지들 중에서는 영등포를 부로 승격시키자는 주장이 있었다. 만약 그들의 말대로 영등포부가 설치되었다면 이후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구글 지도로 나타낸 당시 시흥군의 지형도. 군 한가운데에 관악산과 수리산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영등포읍이 따로 영등포부로 독립해 나가는 것, 다른 하나는 시흥군이 통째로 시흥부나 영등포부가 되는 것이다.
영등포읍이 따로 영등포부가 되었다면, 인천시처럼 따로 영등포시로 있다가 역사처럼 서울이 크게 확장될 때 서울에 편입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역사와 큰 차이는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시흥군이 통째로 시흥부나 영등포부가 되었다면? 정부에서도 서울을 확장하기보다는 (가칭) 시흥부를 서울의 공업 기능을 나눠맡는 위성도시로 육성했을 가능성이 영등포읍 단독으로 있을 때보다는 컸을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의 영등포 일대뿐만 아니라 동작, 구로, 시흥, 나아가 광명까지 이어지는 공업지구와 공단의 배후 주거지구로 개발되는 대형 공업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80년 인천이 직할시로 경기도에서 독립할 때 시흥도 마찬가지로 직할시가 되어 경기도 서부는 인천과 시흥이라는 두 개의 큰 광역시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양천은 서울 대신 시흥으로 편입되고, 부천은 다른 경기도 지역과 단절되므로 인천과 시흥으로 분할되어 사라질 수도 있다. 대략 지금의 시흥시 영역에 해당하는 구 소래읍 지역이 과정은 다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로 시흥에 편입될 것 같다.
그러면 저 지도의 시흥군이 통째로 시흥광역시가 되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형을 보면 시흥군의 중심에 관악산과 수리산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두 산들은 영등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개발 흐름에 큰 장애물이 될 것이며, 설령 이 장애물을 넘어갔다 하더라도 이 산들로 인해 시흥의 북서부 - 동부 -남부의 교통에는 여전히 큰 장벽이 된다. 그리고 이 산들은 옛 과천 - 시흥 - 안산의 경계와 대략 일치한다.
따라서 이 가정에서 시흥이 크게 발전되면 자연히 북서부 - 동부 - 남부에 서로 독립적인 시가지가 나타날 것이고, 서울 주변의 위성도시를 분할 승격하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안산과 과천 일대는 시흥에서 분리되어 원래의 제 역사를 써내려갈 것이며, 구 시흥만이 시흥광역시로 승격할 것이다.
시흥, 안산, 과천이 따로 독립하고 양천과 부천을 편입해 시흥광역시가 설치되는 가상 지도. 회색 선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이렇게 되면 우리는 수도권은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와 경기도가 아니라,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와 시흥광역시와 경기도라고 배울 것이다. 시흥은 지금의 시흥시가 아니라 영등포 일대를 부르는 별명이 될 것이고. 시흥시청은 양천과 부천에서도 편하게 이용하기 위해서 지금의 영등포구청 자리나 더 서쪽으로 갔을 수도 있겠고, 광명과 소래 일대를 배려해 옛 시흥군의 중심지, 곧 시흥동으로 갔을 수도 있겠다.
덧붙여, 시흥광역시가 독자적인 발전을 하면 자연스럽게 구 시흥군의 중심인 지금의 금천구도 체계적인 개발 계획을 거쳐 발전해, 지금처럼 서울의 낙후 지역이라는 오명은 벗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상은 지도만 보고 쓴 나만의 상상일 뿐이다.
3. 시흥의 둘째 딸, 안양
시흥에서 가장 큰 지방인 영등포가 경성으로 편입되면서 시흥은 새 중심지를 찾아야 했다. 영등포 이전 시흥의 중심지인 지금의 시흥동 일대, 당시로는 동면 일대에 다시 기회가 온 것일까? 그러나 위의 시흥군 지형에서 보다시피, 과천과 안산 일대까지 아우르는 거대 시흥군에서 동면은 이제는 북으로 너무 치우쳤고, 관악산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관악산 남쪽까지 소통하기 어려웠다.
안양의 지명이 유래한 안양사 터에 남은 귀부 정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동면 대신 새로 주목받은 곳은 지금의 안양시로 성장하는 구 과천군 서부, 당시 지명으로는 서이면이었다. 서이면은 구 과천군의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조선 정조의 개발을 거쳐 시흥군에서 구 시흥, 과천, 안산 세 지역과 모두 맞닿은 곳으로서 교통의 요충지로 주목받았다. 1905년 경부선 개통 당시에 안양역도 세워졌는데 이는 1908년에 개통된 시흥역보다도 더 이른 것이다. 일제 시대인 1926년에는 이런 이유로 인해 안양시장이 서이면에 세워져 번창했다. 다음은 1927년 6월 1일 동아일보 기사로, 3일 후에 열리는 안양시장 1주년 기념식 예고 기사다(맞춤법은 당시를 따르되 원문의 한자를 한글로 고치고 띄어쓰기 삽입.)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 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장차 발전의 여지가 충분하므로 동 면에서는 작년 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이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욱히 안양 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 (단오일)을 기하여 전 시장 1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조산청년의 소인극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급 동화동요회 등이 잇서 만흔 흥미가 잇슬리라더라”
1941년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안양의 이름이 드디어 역사의 전면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안양이란 이름은 어디서 나왔을까?
안양 발전의 시작이 된 화산능행 길의 만안교. 위키미디어 만안교에서.
안양의 지명은 고려 태조 시대에 지어진 안양사에서 비롯한 것인데, 이 안양사 터는 지금의 석수동, 당시 시흥군 동면 안양리에 있었다. 안양사가 있었기에 이 주변을 안양리라 불렀고, 그 안양리는 동면과 서이면 양쪽에 모두 있었다. 시흥군의 중심지인 시흥군청이 있던 동면이었기에 오히려 시흥군 동면 안양리는 시흥군청에 묻어갔고, 정조가 친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능행 경로를 이 서이면 안양리(당시에는 과천군 안양리)를 지나게 하면서 안양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등포가 떨어져나온 시흥군의 새 군청은, 바로 안양이었다. 1947년 11월 29일, 시흥군의 관민들은 함께 모여 성대하게 안양읍이 시흥의 새 중심지가 되었음을 상징하는 시흥군청 낙성식에 참여했다.
1947년 당시 시흥군, 영등포구, 안양읍과 시흥군청의 이전 과정.
안양에 새 군청이 세워지면서 시흥의 옛 중심지인 시흥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동면은 시흥군 북부에 치우친 신세가 되었고, 다른 시흥 지역보다 이미 나간 영등포, 더 나아가 근대화의 길을 가장 앞장서 걷고 있던 서울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1949년 8월 11일에는 미처 서울에 편입되지 못한 시흥군 북면의 잔여 지역이 옛 형제들을 따라 모두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해방 전부터 읍 승격을 염원해 온 안양면은 안양읍으로 승격했다. 시흥은 이를 기념하여 9월 7일에 시흥군청에서 안양읍승격대회를 열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시흥의 역사적 중심이었던 시흥동이 있는 동면이 남아 있었으나, 1963년 서울 대확장 때 시흥군 북부의 동면 대부분과 신동면이 편입되면서 드디어 시흥군에 시흥이 없어지고 만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 이름을 시흥이 아닌 과천으로 하지 않았을까? 결국은 시흥·과천·안산 3군이 합해진 시흥군에서, 구 시흥군의 대부분은 서울로 편입되고 시흥과 과천의 경계 지역이 근대화 과정에서 새로 성장해 군의 새로운 중심 지역이 되었으니까. 지금도 시흥동은 금천구에 있고 시흥시에는 시흥동이 없어서 시흥시와 시흥동을 헷갈리는 사람들이 가끔 나오는데, 시흥·과천·안산 통합 군의 이름이 과천이었다면 시흥시가 아닌 다른 이름을 쓰고 있었을 테니까. 무슨 이름이 되었을지는 시흥의 또 다른 딸 과천이 나올 때 생각해보자.
서울 대확장과 맞추어 옛 시흥군 서이면이었던 안양읍은 동면과 남면의 일부 지역으로 확장한다. 안양이 과천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과천과 시흥을 아울러 발전한 도시임을 보여주는 조치라 하겠다. 이렇게 시흥군은 안양읍을 기반으로 한 새 도시로 발전하고 있었다.
1963년의 시흥군, 시흥군 북부를 편입한 영등포구, 그리고 시흥군 동면과 남면 일부를 편입한 안양읍.
옛날 사람이라면 남양주시가 옛 농촌 남양주군과 옛 도시 미금시가 합한 도농통합시라는 것을 알 것이다. 이와 같이 같은 군에서 시가지와 농촌이 갈려나갔다가 도농복합시를 도입하면서 통합된 지역이 경기도에서는 남양주 외에도 평택+송탄이 있다. 이렇게 도농통합시가 만들어진 까닭은 그 전에는 농촌에서 도시를 분리해 시로 만드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었으나 이 정책의 부작용이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찍이 도시 지역이 발달한 곳에서는 군이 잘게 쪼개져 도시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 경향이 가장 극심한 곳이 바로 이 시흥이었다. 시흥에서 열두 딸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73년의 시흥군, 영등포구과 시흥군에서 독립한 안양시.
시흥군에서 가장 번창한 안양읍은 이 도농분리 정책에 따라, 1973년 안양시로 분리된다. 시흥시의 둘째 딸, 안양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시흥군이 영역을 잃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1963년에는 화성군 일왕면(의왕면), 1973년에는 부천군 소래면이 대신 시흥군으로 편입되어 왔다. 이렇게 해서 시흥군은 안양시를 동서에서 감싸는 거대한 군이 되었지만, 영등포, 시흥(동면)에 이어 안양까지 중심지를 세 번에 걸쳐 잃으면서 발전의 축을 연이어 상실하고 있었다.
군 전체를 아우르는 중심부의 독립과 이로 인한 구심점 상실, 이것이 시흥에서 열두 딸이 나오는 이유다.
※ 이 글은 밀리로드의 “시흥의 열두 딸들” 연재글을 묶은 것입니다.
※ 지난번 글이 정치탭으로 갔던 까닭은 제가 정치 댓글을 단 탓입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