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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1/17 18:01:50
Name 계층방정
File #1 용릉후_가계.png (23.0 KB), Download : 12
Subject [일반] 두 번이나 아내를 잃어도


경제의 손자 용릉절후 가문의 가계도. 종손 유지와 나중에 황제가 되는 유현, 유수를 중심으로.

후한을 세운 광무제는 유씨 왕조에서도 손에 꼽히는 유능한 사령관이자 군주입니다. 30세에 황제가 되어서 11년 만에 전 중국을 평정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광무제도 처음에는 형 유인의 그늘에 묻혀 있었고, 유인은 자신보다 더 종손에 가까운 경시제 유현에 밀려서 황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경시제가 이 집에서 가장 서열이 높았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위 가계도를 봐주시지요.

경시제, 유인, 광무제 모두 경제의 손자며 장사정왕의 아들인 용릉절후의 자손들로, 용릉후국을 중심으로 뭉쳐 살았습니다. 그리고 용릉절후 가문의 종손은 바로 위 가계도의 성양공왕 유지입니다. 경시제는 유지의 6촌 형제고, 광무제는 유지의 8촌 형제로 둘 다 종가와 멀리 떨어진 방계 후손들입니다.

경시제와 유인이 녹림군에서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툴 때 유지는 유인 진영에, 그리고 유지의 사촌동생 유가는 경시제 진영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황제를 모실 때 장군의 직함이 있는 경시제와 유인 둘을 후보로 세웠습니다. 유지와 유가는 비록 서열은 높았지만 녹림군에서 종군하고 있을 뿐 지도자가 아니었기에 황제 후보가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유지란 인물은 비록 반란군의 지도자는 아니었으나 종손으로서 가문의 기대를 많이 받았기에 굴곡진 삶을 지내게 됩니다.

신나라가 이미 일어나기 전, 신나라의 황제가 될 왕망이 한나라에서 정권을 오로지하자 유씨 황족들에게 위협이 가해집니다. 유지의 아버지 용릉강후 유창 역시 족형 안중후 유숭이 일으킨 반란 때문에 두려워해, 적선과 친교를 맺고자 그 딸이 유지의 아내가 됩니다. 그런데 적선의 아우 적의가 왕망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유지의 아내는 사로잡혀 처형되고 본인도 아내에 연좌되어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때에는 왕망 역시 한나라의 종실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저 한나라의 종실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력다툼에 말려들어가 아내를 잃은 유지는 비슷한 비극을 한 번 더 겪게 됩니다.

그러다가 신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지면서 집안 동생들인 유인·유수 등이 한나라 부흥을 목적으로 용릉병이라는 반군을 일으키자, 신나라 시기에도 집안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유지는 결국 다시 이 혼돈의 소용들이에 빠져들고 맙니다. 유지는 형제들을 모아 함께 용릉병에 가담했으나, 또 가족들이 신나라 관아에 잡혀들어가고 맙니다. 그러면 용릉병이 승승장구해서 이 신나라에 잡혀간 가족들을 구해주면 해피엔딩이겠죠? 그러나 하늘은 유지에게 그런 좋은 운명을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소장안취 전투에서 유인 군은 신군에 대패하고, 유인의 작은누나 유원과 그의 세 딸, 그리고 유인의 큰동생 유중 등이 전사하고 맙니다. 유인이 자기 가족들도 건사하지 못했는데, 반군에 그저 가담하고 있었던 유지의 가족들의 운명은 뻔하겠죠? 이전에는 아내만을 잃었던 유지, 이번에는 전수대부(한나라의 남양태수에 해당) 진부에게 어머니와 동생과 새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렇게 두 번이나 아내를 잃고 자식도 잃은 유지이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제 또 결혼을 했는지 그는 유평과 유견이라는 두 아들을 새로 봅니다. 이 박복한 남자에게 시집온 여자도 보통 각오가 아니었을 듯합니다. 마침내 유인과 유수는 다른 녹림군의 동료들과 함께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경시제 유현은 새 한나라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경시제는 집안의 장손인 유지에게 원 작위인 용릉후를 주었다가, 다시 정도왕으로 승격시켜 줍니다.

그러나 유지에게는 장손의 책임감은 있어도 야심은 없던 모양입니다. 그저 경시제의 명령을 받아 전한의 마지막 황태자 유자 영 복위운동을 진압한 기록만 있습니다. 그렇게 경시제를 섬기다가 25년 경시제 정권이 붕괴하면서 낙양으로 탈출해 광무제에게 투항합니다. 광무제는 유지를 26년 성양왕에 봉하고, 36년에 유지가 죽자 아들 유평을 경릉후에 봉해 아버지의 제사를 받들게 했습니다.

결혼하고 가정이 생겨서 그런지 유지처럼 세상의 풍파에 휩쓸려 아내를 두 번이나 잃어버린 사람을 보면 감상적이 되고 아내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잃은 그의 슬픔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첫 아내에게서는 미처 자식을 얻을 겨를조차 없었을 테고, 둘째 아내에게서는 기껏 본 자식들도 전부 잃었죠. 그렇게 그의 두 번의 결혼생활은 훗날 남길 기억조차 파괴되는 잔인한 결말이었습니다.

상처, 상처, 유지는 그저 한 왕실 용릉후 집안의 장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두 번의 상처를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정을 이루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야심이라고는 없던 이 사나이의 마지막 작은 야심은, 그렇게 열매를 맺고 끝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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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7 18:14
수정 아이콘
요즘 유행하는 단어로 극T인듯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계층방정
24/01/17 18:21
수정 아이콘
감상적인 글을 쓰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4/01/18 09:36
수정 아이콘
계층방정님이 아니라 유지가 극T라고 했는데 전달이 잘 못되었네요 ^^
아내가 2번 죽고 가족들 연좌죄로 다 죽어도 살아남은게 극T가 아니면 불가능 할 것 같아서요 흐흐흐
계층방정
24/01/18 11:08
수정 아이콘
아 유지를 가리키는 거였군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둘째 아내를 잃은 때(22년)가 첫 아내를 잃고(7년) 15년 후인데 그렇다면 새 가족과도 정이 들 만큼 들었을 세월인 것 같습니다. 극F였다면 여자와 어린애만 봐도 죽은 아내와 자식이 떠올라 울었을지도요. 그럼에도 희망을 계속 품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유지의 나이가 31세로 아직 젊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안아주기
24/01/17 20:10
수정 아이콘
말 그대로 장손의 책임감으로 결혼을 세번이나...
계층방정
24/01/18 06:20
수정 아이콘
다 쓰고 나니까 저도 그 생각이 나더군요.
김보노
24/01/17 22:04
수정 아이콘
이렇게 역사의 주역에서 빗겨나가 있는, 하지만 어느 주인공보다 역경의 삶을 산 인물들의 이야기 정말 좋습니다.
계층방정
24/01/18 06:22
수정 아이콘
저도 가끔은 이런 역사의 엑스트라? 이런 사람들의 삶에 몰입될 때가 있습니다. 좋은 감상을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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