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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1/13 18:25:07
Name KOZE
Subject [일반] 조선의 젊은 아베크족들이 많은 걸 모르셨나요? - 1940년 경성 번화가를 걸어보다. (수정됨)

‘경성에서는 “이봐, 한잔 하러 가지.” “좋지. 남촌에서 할까, 북촌에서 할까”라는 것이 선결문제이다. 
남촌, 북촌은 경성의 번화가인 본정(本町)과 종로를 말하는 것인데 경성거리 중앙을 흐르는 청계천을 경계로 남쪽으로는 본정이, 북쪽으로는 종로의 번화가가 있다. 본정은 내지인(일본인) 거리이고 종로는 순수한 조선거리이다. 도쿄에서 '강을 건넌다' 든지 '강 건너 간다' 라고 하면 왠지 나쁜 곳을 다니는 것으로 알지만, 경성에서는 종로에서 놀다가 본정으로 장소를 바꾸고자 할 때  ‘강을 건너자’는 말을 자주 쓰게 된다.
조선은행과 미쓰코시 사이의 광장을 가로지르는 우체국 옆에서부터 본정 일정목이 시작된다. 
경성 한복판에서 벌어진 토착 자본과 일본 자본의 백화점 대전, 그 결과는? <span class='bd'>[사-연]</span>

거리 입구에 하얀 전등으로 만든 아치 밑으로 들어가서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면 가구라자카나 시부야의 도겐자카와 다름없다. 
미나카이 맥화점의 쇼윈도, 메이지야, 에도가와의 장어집, 가네보 의 제과점 마루젠 등 특별히 신기할 것도 없다. 
금강산이라는 과자점은 신주쿠의 나카무라야처럼 고급스러운 다방을 열고 있다. 메이지 제과에서 2정목이 시작된다. 오른쪽 모퉁이에 미야타 조선 물산관이 발길을 끌지만 조금 앞쪽에 조선풍의 4층 건물로 기념품 전문 조선관이 있으므로 조선관을 향해서 서두르다 보면 왼쪽 모퉁이에 설격자가 끼어진 이상한 돌문이 있고 '만세문'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고조 시게루라는 문패가 걸린 의사의 저택이다. 
의사의 집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본 것인지 자나가던 사람이 "저 만세문이라는 글씨는 지금의 이왕 전하가 쓰신 글씨를 여기에 옮긴 거랍니다.이 의사 선생은 이곳의 개척자와도 같은 분이지요" 하고 일부러 알려 주었다.
 
목적지인 조선관은  외관과 달리 내부가 한적하고 물건도 별로 없어서 기대에 어긋났다. 실망한 순간 피로가 몰려와서 3정목 쪽으로 가지 않고 세카에서 생맥주를 한잔하며 쉬었다. 내지인 거리여서 손님도 내지인이 많다. 가족, 군인, 기모노를 입은 사람, 양복을 입은 사람 등 다양하지만 그중에는 잠옷차림으로 대낮부터  비프스테이크를 안주 삼아 정종을 마시는 무례한 이도 있었다.

기자와 같은 테이블에 모던한 조선 학생이 카레라이스를 먹고 있길래 무심코 거리 풍경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 학생은 웃으면서, "본정을 걸으면서 조선의 젊은 아베크족들이 많은 걸 모르셨나요." 라고 한다.

우리역사넷

"종로 쪽을 걸으면 조선인이 많아서 남의 눈에 띄기 쉬우니 조선인 아베크족들을 대게 본정으로 온답니다. 종로는 조선인끼리 서로 편하게 다니기 때문에 여자를 데리고 걸으면 이런 놈을 봤나, 건방지군 하며 덤벼 들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아베크족들은 모두 본정으로 물리지요."이런 얘기를 듣고 거리를 보니 정말 아베크족들의 러브 퍼레이드이다.
학생과 헤어져서 기자의 육감으로 본정 거리를 탐색해본 결과, 소화거리의 후미진 곳에 위치한 삼덕 떡집 옆에는 남산 목욕탕이 있다.
그 곳 2층에 있는 고급 다방 남령은 조일정의 게이샤와 유한 마담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고, 반대편 영화관 메이지좌 쪽에서 향해서 가면 후유노야도가 있다. 이곳은 명곡을 자주 듣는 음악 애호가와 문학 청년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인 듯하다. 메이지좌 건너편 토스카니의 그림을 건 미마쓰도 문화인들이 좋아하는 고급 다방이다.

이 정도 돌아다녔으니 밤이 되었다. 카페로 서둘러 가자. 이곳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카페는 마루비루이다. 도쿄 마루빌딩의 크기를 떠올리면 안된다. 우선 2층도 계산에 넣어 신주쿠의 다이가 정도이다. 조화에 종이등을 매달아 조명을 약간 비추는 취향으로 봐서는 아사쿠사 일대와 비슷하다. 이곳의 여종업원들은 모두 내지인이고 관서지방 출신이 많은데 홋카이도에서 온 사람도 있다.

여종업원의 우두머리인 오유미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20년이나 여종업원 생활을 하고 있는 경성 카페계의 개척자이다. 그녀의 여걸다운 모습은 대단한데 때마침 손님들끼리 싸움이 일어나자 폭발 직전의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어 어머니처럼 달래더니 간발의 차이로 소동을 잠재웠다. 오유미 씨가 땀을 닦으며 기자에게 돌아왔을 때 "고생했어요" 라고 하자. "매일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있으니 힘들어요" 라고 했다.

그 밖에 본정의 뒷골목 카페 바는 무수하게 많고 모두 손님들로 북적였다. 그 곳에서 떨어져 강을 건너기로 했다. 전매국 앞을 지나 황금정 2정목을 곧장 지나 낮은 지붕의 집들이 늘어선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 나가면 지금은 복개공사를 하여 이름뿐인 청게천을 건너 종로로 나선다.

종로 랜드마크였던 '화신백화점'의 굴곡 큰 운명 조명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 멈춰 서서 화신 빌딩을 오려다보며 다방 아시아에 들러 소다수를 마신 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출발한다. 종로의 밤거리는 노점상으로 즐비하다. 경성의 야시장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하여 물건을 사지 않고 값만 물어보고 다녔는데 도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선 바나나 가게이다. 위세가 당당하여 싼값으로 판매하는 일은 없다. 턱수염을 기른 아저씨가 유유히 곰방대를 물고 사고 싶으면 사라는 식의 태도이다. 콩가게에는 남경콩이 잔뜩 쌓여 있다. 사과와 귤 가게가 있고, 셔츠 가게는 이미 여름 물건을 팔고 있다. 아이스크림 가게는 아사쿠사를 떠올리게 한다. 지갑이나 넥타이 가게는 손님을 부르지 않으니 그냥 지나 친다. 잉크 지우개 가게만이 조선어로 소리치고 있었다. 옷감 가게와 골동품가게를 뚫어지라 쳐다보았지만 대단한 물건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조선 바둑이 있는데 오목은 아니다.

이렇게 구경하며 다니는 동안 이들 가게에 멀쩡히 서서 바보처럼 물건들을 바라보는 사람은 기자뿐이고, 다른 손님들은 쭈그리고 앉아서 꼼꼼히 물건을 살펴보고 다닌다.
야시장이 아닌 가게들 중에는 도로보다 낮은 가게가 몇 채 있었다. 다소 먼지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에 잠시 쉬려고 파고다 공원으로 들어가 본다. 화단에 튤립꽃이 향기를 내며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서울포스트 (The Seoul Post)
벤치에 나무 그늘을 사복 순경처럼 살피고 다녔는데도 사람 눈을 피하는 광경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경성 남자는 지나치게 품행이 방정하구만, 공원이 기분 좋은 모래바닥을 밟으며 팔각탑과 원각사지 다층석탑을 돌아 나와 다시 종로 2정목 근처 안쪽 골목으로 기어들었다.  네온빛이 도쿄 출신에게는 매혹적이다. 고마쓰 오뎅, 동아바, 하루쿠스이 오뎅, 덴이치, 호비 등의 가게가 있다. 기분이 좋아져서 미로같은 길을 즐거이 걸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기도가도 어두운 곳이 이어져 청계천에 다다르면 깜짝 놀라 되돌아오는 일이 두세 번 있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돌아다녀도 별 수 없다. 그래서 어느 바에 들어가본다. 다이아몬드 본관, 자욱한 보랏빛 연기 조선어의 대교향곡이 펼쳐지고 있어서 비로소 먼 땅에 왔음을 느낀다. 양복과 조선옷을 제각각 입은 예쁜 여종업원들이 꽤 있다. 여종업원의 이름은 기요미, 도시코, 모두 일본 이름이다. 
맥주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조선의 분위기를 둘러보고 있으면 귀여운 여종업원이 맥주를 들고 "드세요" (메시아가리 나사이) 라고 한다. 잔을 따르는 제스처라는 것은 알겠으나 하는 말은 좀채 알아듣지 못한다.
"이봐 국어로 말해 주게" 기자가 부탁하자, "국어요? 국어만 쓰면 왠지 별로예요" 라며 고개를 돌린다. 레코드가 걸려 있다. 조선어로 된 블루스, 오래된 화원, 비의 블루스 등의 노래가 목소리까지 내지 음반과 비슷하게 녹음되어 있다. 그리고 바를 한두군데 더 들르고 가잔야라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좋아하는 안주에 소주를 마시며 충분히 술을 즐긴 후 마지막으로 마치 고마가타에 있는 장어집처럼 으리으리한 건물의 다이쇼야에 들러 설렁탕을 먹고 철수했다. 

- 출처: 모던 일본 조선판 1940: 경성 번화가 탐방기, p 301 - 305.  

본문에서의 본정은 현 충무로, 명동, 황금정은 현 을지로입구 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당시의 건물들: 미츠코시 백화점 -> 현 신세계 본관, 조선은행 -> 한국은행 화폐 박물관, 메이지좌 -> 명동 예술극장, 파고다 공원 -> 탑골 공원, 미쯔이(三井) 물산주식회사의 경성지점  -> 그레뱅 뮤지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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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3 20:50
수정 아이콘
흥미로운 포인트가 많은 글이네요. 전통과 모던, 조선과 일본이 교차하던 경성의 빛과 그림자에는 분명 뭐라 말하기 힘든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출처로 언급하신 책을 한 번 찾아서 보고 싶네요.
24/01/13 21:37
수정 아이콘
(수정됨) 골때리는 책이여서 강추합니다. 읽다보면 내선일체를 끊임없이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기생의 나라, 독특한 풍속, 음식들을 조선의 "이국적"인 면을 세세히 알려주면서 "우리도 이렇게 발전했으니까 내지인들과 동등하게 대해줘" 같은 친일파 지식인들의 기고문들이 군데 군데 있습니다. 사료 그 자체를 읽기 때문에 그 시기에 관심이 있으시면 읽어보실만 합니다.
안군시대
24/01/13 21:10
수정 아이콘
얼마전에 힙지로에서 지인들과 술한잔 했는데, 일제시대때부터 일본인들이 와서 살던 부촌이 이곳이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더군요.
coolasice
24/01/13 21:18
수정 아이콘
을지로- (구)중국인동네
충무로- (구)일본인동네
여서 일부러 이름 붙인걸로 알고있어요!
에이치블루
24/01/13 21:34
수정 아이콘
이야 이런건 정말 몰랐습니다 지식이 1 늘었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흐흐
꿈트리
24/01/16 14:05
수정 아이콘
저도 중국인의 기를 누르자는 생각으로 동네이름을 을지로(을지문덕에서 따옴)로 지었고, 일본인의 기를 누르고자 충무로(충무공에서 따옴)로 네이밍했다고 들었습니다.
24/01/14 09:49
수정 아이콘
저 출처는 혹시 옛날 잡지인가요???
24/01/14 12:55
수정 아이콘
네 1930년에 창간된 모던일본(モダン日本)이라는 일본의 오락잡지입니다. 1939년과 1940년에 조선의 문화, 문물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조선판을 발행했습니다. 이걸 몇년전에 국내 출판사가 번역 출판했고요. 당시 잡지 발행사인 모던일본사의 사장을 조선출신 아동문학가인 마해송(馬海松)이 맡고 있었더군요.
24/01/14 17:21
수정 아이콘
엇 몇년 전 번역출판한 도서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24/01/14 18:04
수정 아이콘
똑같습니다. 잡지 《모던일본》조선판 1939 완역, 잡지 《모던일본》조선판 1940 완역, 어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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