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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12/11 13:12:55
Name 두괴즐
Subject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세계공화국을 생각해 보다 (에세이)
손에 피가 묻은 핵무기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과학공동체와 국가
-세계공화국은 가능한가?


<1> 양자역학 탐구 공동체의 해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영화 <오펜하이머>를 봤습니다. 대단한 과학자들이 정신없이 등장했다가 퇴장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궤도가 침착맨의 유튜브에 출현한 영상을 보고 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글로벌 과학공동체가 어떻게 해체되는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시대는 과학사적으로 분기점이 되는 시기입니다. 우주를 해석하는 새로운 제안이 등장하던 때였지요. 당시의 주류 관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과학자들은 여기에 도전합니다. 바로 ‘양자역학’의 등장입니다. 영화의 초반에 오펜하이머가 유럽으로 가서 하는 공부가 바로 양자역학입니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이들이 이 분야의 거인들입니다. 실험 물리학이 되었든, 이론 물리학이 되었든, 글로벌 과학공동체는 양자역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을지 함께 탐구합니다. 이론 내에서는 경쟁하지만 이들은 모두 동료입니다. 인류의 앎이 또 한 번의 큰 걸음을 내딛습니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해체됩니다. 그리고 곧 다른 공동체로 개편됩니다. 국가의 부름이 있는 탓입니다. 우주에 대한 탐구이자, 우리 자신의 본질에 관한 연구는 대량살상무기 개발로 전환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가 간의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세계시민이던 과학자들은 삽시간에 애국 투사가 되어 타국의 파괴자가 됩니다. ‘불확정성 원리’를 구축하여 양자역학에 결정적 기여를 하는 하이젠베르크는 히틀러의 독일 핵무기 프로그램(Uranverein)의 주요한 멤버가 됩니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맨해튼 계획의 수장이 되고 종국에는 핵무기의 아버지가 됩니다.


<2> 세계공화국은 무슨

저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한국인으로 자랐습니다. 우리는 국민국가의 구성원으로 살고, 대한민국은 주권을 가진 글로벌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유엔(UN)은 국제 협력을 증진하고 세계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기구입니다. 현재 전 세계 193개국이 가입해 있고,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가 간 연합체이자 다자 회의 기구입니다. 유엔은 과거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승국들이 전쟁을 막기 위해 설립했던 국제연맹의 후신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연합국들을 중심으로 설립됐습니다.

국민국가의 등장은 국가 간 총력전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예견한 인물이 있었으니,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주권국가는 그 나라의 선언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승인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누구나 주권국가가 될 수 없음을 함의하는 것으로, 실제로 서구는 근대국민국가 형태를 갖춘 이후 본격적인 제국주의 팽창을 합니다. 이러한 식민지 쟁탈전은 양차 대전으로 치달았고, 결국 칸트가 제안한 영구평화의 방법론을 받아들입니다. 국제연합이 구상된 것이지요. 신분제를 기본으로 하는 봉건제가 해체되고 근대국가가 등장하던 시기,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유럽이 있던 1795년에 처음 제안된 칸트의 평화론은 한 세기도 더 지난 20세기 중반에야 겨우 형태를 갖춥니다.

하지만 칸트의 수평적인 국제주의를 조소했던 철학자가 있으니 바로 프리드리히 헤겔입니다.

저의 소년기 시절에 가장 암울했던 시절이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도통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지요. 1980~199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지만, 굉장히 작은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한 학년에 반이 4반 혹은 5반까지였고, 전교인원도 많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남자 중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는데, 한 학년에 13반까지 있었고 아이들은 본격적으로 테스토스테론(남성 혹은 수컷의 주요 성호르몬)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온 초등학교 졸업생들 중에는 각 초등학교의 지배자가 있었고, 그들은 진학 이후 한결같이 화가 나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때가 무르익고 있었던 셈입니다.

학기 초부터 시작됩니다. 그야말로 허구한 날 쌈박질입니다. 천하제일 개싸움대회입니다. 각 초등학교 짱들 사이에 하이에나들이 줄을 서고, 키가 유독 작거나 혹은 뭔가 모를 이유로 개싸움 선수에게 찍힌 아이들은 빵을 들고 뜁니다. 칼을 들고 설치는 등 공정성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선에서는 선생들도 딱히 관여하지 않습니다.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저의 중학 시절이 시작됐습니다.

반배치 고사 때부터 시작된 개싸움대회는 중간고사를 기점으로 정점에 오르고, 이후로는 차츰 뜸해집니다. 그럭저럭 서열이 정리되는 탓입니다. 초등학생 때는 별 볼일 없다가 중학생이 되어 급성장을 한 친구들이 중간 중간 도전장을 내밀며 서열 변화가 생기곤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평화가 옵니다. 이제는 다른 학교의 지배자가 전학을 오지만 않는다면, 귀한 평화는 지속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철학자 헤겔이 합니다.

헤겔은 국제연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규약을 위반한 나라를 처벌할 수 있는 국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서열을 정리하고 정점에 오르는 패권 국가가 있는 한에서만 평화가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헤겔은 칸트의 수평적 국제연합 모델은 순진한 이상주의라고 본 것이지요.

하지만 일본의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칸트의 생각은 단순히 각국의 단독행동주의에 대한 다국 간 협조주의 같은 것은 아닙니다. 칸트의 이념은 “궁극적으로 각국이 주권을 방기함으로 형성되는 세계공화국”에 있습니다. 그 이외의 방법으로는 국가 간의 적대상태가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가 없습니다.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세계공화국으로』, 222~223).

가라타니는 주권국가의 주권을 이제는 방기하는 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칸트가 제안한 영구평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헤겔의 방식은 패권국가의 선량함에 의존해야 하는 비민주적인 평화이며, 패권국가를 규제할 방도도 요원합니다. 그리고 패권국가의 지위가 흔들리는 때가 오면 바로 글로벌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중국이 거슬리기 시작하는 미국의 입장이 그런 걸까요? 그렇다면 대안은? 가라타니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각국에서 군사적 주권을 서서히 국제연합에게 양도하도록 하여, 그것을 통해 국제연합을 강화 · 재편성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헌법 제9조에 있어 전쟁방기는 군사적 주권을 국제연합에 양도하는 것입니다. 각국에서 이와 같은 주권의 방기가 이루어지는 것 외에 국가를 지양하는 방법은 없습니다.”(224)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으로 규정된 일본은 승전국에 의해 헌법 제9조가 강제 되었습니다. 일본은 이 헌법 조항으로 인해 전쟁을 수행할 권리를 잃었습니다. 유엔이 인정하는 집단적 자위권의 권리는 갖지만, 주체적으로 군 운용을 행사할 권한은 없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조항이므로 새로운 헌법 해석을 위한 시도가 종종 이루어졌습니다. 2014년 아베 신조 총리의 정부에서 시도한 새 헌법 해석도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노력이었지요.

가라타니 고진은 정확히 이 반대의 것을 제안합니다. 일본 헌법 제9조는 굴욕이 아니라, 영구평화의 첫 걸음이다. 이 평화 헌법을 땅 끝까지 전하라! 복음을 믿고 이제는 다른 모든 주권 국가가 이 길을 뒤따라야 합니다.

아주 나이스한 생각일까요? 이견은 있겠지만, 확실한 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패권국가들이 자신의 주권을 방기할 수 있을까요? 국제기구의 통제 하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사실상 무력을 통한 지배를 포기하는 길을 갈 수 있나요?

칸트가 처음 영구평화론을 제안했을 때는 순진한 이상주의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결국 국제기구와 UN이 등장했습니다. 이처럼 훗날에는 가라타니가 그린 세계가 올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기후위기와 글로벌 패권 경쟁의 새로운 국면,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야기할 가능성과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시대가 왔음은 절감합니다. 그래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소중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더불어 세계시민으로서의 감각, 정서, 교감이 요청됩니다.

조선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에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의 전환을 위해 필요했던 상상력을 기억해봅니다. 상놈의 자식과 양반집 자식이 실은 같은 족속이자 동등한 시민이라는 생각과 믿음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요? 그러한 전환이,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오늘입니다. 자국을 위한 핵무기는 방기하고 다시 조소의 꿈을 꾸게 됩니다. 인류의 믿음이 또 다시 심판대에 오릅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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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까스
23/12/11 13:27
수정 아이콘
강력한 무력개입을 시행하는 조직이나 외계인의 무력개입으로 전세계의 안보총의가 하나로 모이지 않는 한은 현 문명 단계에선 어렵지 않을까나요.
두괴즐
23/12/11 14:03
수정 아이콘
칸트의 평화론도 결국 강대국의 상호 파멸의 종국 끝에 한 세기가 훌쩍 지나서야 현실화가 되었으니,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미리 대비할 순 없고, 끝장을 봐야지만 겨우 수습책을 꾸리는 것이 인간 종특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뭐, 미래는 모르는 것이니까요. 후후.
칭찬합시다.
23/12/11 14:27
수정 아이콘
정치공동체의 범위가 자의적이기에 정치적 상상력의 한계가 국민국가여야만 하는가란 의문이 들기는 합니다. 피터 싱어 같은 공리주의자들은 선행을 하면서 외국인과 내국인을 차별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주장하기도 하구요.

다만 세계정부가 형성되었을 때 그 정치체제가 과연 세속주의, 합리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 같은 가치들을 성공적으로 배양할 수 있을까합니다. 민주정부라고 불리는 국가들에게서도 민주주의가 시민적 덕성을 함양하려는 체제라기보단 단지 의사결정과정에서 다수결원칙을 지키는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로만 기능하는 게 현실입니다.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세계정부가 시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다수집단의 부족적 전통을 강요하는 체제가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두괴즐
23/12/1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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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맞습니다. 그럴 것도 같아요. 사실 가라타니의 제안은 기존의 국민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우선 군사적 주권만 국제 기구에 이양하자는 모델이긴 합니다. 일본식 헌법 모델의 세계화이지요. 추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요.
ioi(아이오아이)
23/12/11 16:31
수정 아이콘
한중일 연합체도 안 만들어진다고 유머 소재로 나오는 마당에

세계국가가 합의로 이루어질리 없죠.

사건 사고로 이루어지지
두괴즐
23/12/11 22:31
수정 아이콘
사실 고진의 기획은 세계국가의 형성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지양이라서 성격이 다르지만, 지금의 관점에서는 역시나 요원합니다. 어쩌면 특별한 사건 사고가 트리거가 된다고 해도 달리 갈 가능성이 높고요. 유발 하라리가 역사 공부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 우리의 세계가 우연 그 자체이고, 실은 수 많은 가능성 중에 어쩌다 오게 된 한 경로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는데, 미래에 대한 상상들도 그 숱한 우연들을 가늠해 보는 것이겠지요.
No.99 AaronJudge
23/12/11 18:11
수정 아이콘
UN, UNESCO, IMF 등 수많은 국제기구들이 인류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과 한계도 함께…)을 배우다 보니 국제법에 따라, 국제 기구들의 운영에 따라 세계가 잘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현실은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그 사이 어딘가에 있어서, 국제법을 생까버리는 케이스도 지금 당장 생각해봐도 수두룩하네요.

그렇다고 국제법이 아예 쓸모 없냐 하면 그건 또 아닌것같은게, 국내에도 법이 있고 어기면 제재도 열심히 하지만 어쨌든 범죄자는 끝없이 생겨나니까….있긴 해야 한다 싶었어요
국제기구도 마찬가지로 유엔평화유지군이 하는 일이 뭐냐, IMF 그거 미국한테 휘둘리는거 아니냐? 각종 국제기구들은 돈 문제 어떻게 해결할건데? 하고 매번 비판받(고 또 맞는 말이기도 하고…)지만 여전히 국제기구들의 의의는 존재하니까…

민족주의와 종교, 문화 간 갈등이 여전히 지구에 산적해 있고 그로 인해 피는 끝없이 흘려지는 현실 속에서 머나먼 미래, 혹은 아예 망상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것같아요

그렇지만 환경, 자유무역 활성화, 문화예술 보존/진흥 등 국가의 핵심적 이익(vital interest..?)을 가급적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국방, 중앙은행, 입법 등 국가가 꼭 쥐고 있는 이익도 국제기구 안에서 움직이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있습니다

물론..그리스/로마 문명과 기독교라는 핵심 가치들을 공유하는 EU도 중앙은행까지는 통일했지만 국방은 통일하지 못한걸 보면, 세계의 완전 통합은 아직 많이 먼 것 같긴 해요
두괴즐
23/12/11 22:41
수정 아이콘
네. 맞아요. 공감합니다. 사실 우리의 뇌는 효율적 사고를 위해 행위자를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고 덩어리로 묶어 버리곤 하는데, 실상은 같은 국가 구성원 혹은 공동체 멤버라 해도 다양한 생각과 신념 속에서 활동하고 있고, 국제기구도 마찬가지이지요. 인권이 어떻게 확대되어 왔는지, 국제 기구가 탄생하고 그 활동 속에서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 갔는지를 확인해보면, 굉장히 놀랄 때가 있습니다. 현실 논리도 있고, 자조적인 전망들도 많고 여러 한계들도 있지만, 돌아보면 그럼에도 현실을 넘어서고자 했던 이상주의자들의 꿈이 여러 굴절과 굴곡 속에서도 살아남아 현실을 바꾸어 온 것이 지금의 세계이기도 하니까요.
23/12/14 20:34
수정 아이콘
개인들은 양심적일 수도 있고 인정이 넘칠 수도 있고 이타적일 수도 있지만
그게 집단이 되면, 그리고 큰 집단일수록 그런 게 희석되며 대놓고 자기 이익만 찾게 되고
현재로서의 가장 큰 집단 단위인 국가라는 것들의 상호작용을 보면 그냥 사이코패스들의 집합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개인으로 드러나는 그것이 인간성인 걸까 집단으로서 드러나는 그것이 진짜 인간성이라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지금까지의 인류가 겪어온 경향을 보자면 언젠가는 국가가 폐지되고 세계정부 같은 게 등장 할 것 같기는 합니다.
본문에 말씀하셨듯이 인류는 이전에 불가능해보이는 일들을 얼마든지 이루어내며 살아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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