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로 꼽히는 이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입니다. 그는 한국축구 팬들 사이에서 ‘우리 형’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날강두’가 된 인물입니다. 우리에게 비호감 선수가 되긴 했지만, 고트(GOAT)가 된 리오넬 메시(Lionel Messi)의 라이벌이었다는 점에서 축구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임은 틀림없습니다. 놀라운 건 1985년 생으로 한국 나이로는 사십을 앞두고 있음에도 여전히 현역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이기도 합니다. 사우디 리그에서 뛰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액수이긴 하지만, 과거의 여느 축구 선수라면 이미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입니다. 심지어 그의 주치의는 호날두의 신체가 여전히 20대의 것이기에 은퇴는 한참 미래의 일이라고 장담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요?
호날두는 개인 영양사를 고용하여 자신의 신체에 가장 적합한 식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철저히 관리된 운동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하 200도의 낮은 온도에서 인체 조직을 치료하고 재활할 수 있는 욕조를 사용하는 등 신체 최적화 의료 서비스를 받고 있습니다. 최첨단 의료는 노화와 싸우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투 중입니다.
이와 같은 기술을 추동하는 이론이 있으니, 바로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입니다. 이 이론의 신봉자들은 노화를 사망 원인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첨단 의료 기술을 이용하는 사람은 호날두와 같은 부유한 사람이지만,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것이 적용되는 경우가 있으니, 바로 장애 치료 분야입니다. ‘스텐트로드(Stentrode)’ 칩을 루게릭병 환자에 삽입하여 컴퓨터를 통해 자신의 의사 표현을 가능하게 한 싱크론(Synchron)의 서비스가 한 예입니다. 이러한 연구를 하는 기술자들은 이것이 신체가 마비된 장애인에게 희망이 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리고 이를 지원하고 후원하는 이들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입니다. 타고난 인간 조건을 거스르고자 하는 그들은 기계와 융합되어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이상적인 모습으로 개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마크 오코널, 『트랜스휴머니즘』, 문학동네, 2018, 15쪽.) 그렇기에 기계와 인간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융합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무척 중요합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에게 장애인은 자신들을 구원할 기술을 먼저 적용해 보는 실험체에 가깝습니다. 겉으로는 이들의 복지와 안녕을 위한 치료 기술로 정당화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욕망이 숨어있습니다. 사실 구글(Google)의 엔지니어링 이사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이나 테슬라의 CEO인 일론 머스크의 경우를 보면 딱히 숨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운동의 차원에서 함께 나아가길 촉구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레딩 대학의 인공두뇌학과 교수인 케빈 워릭(Kevin Worwick)은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사이보그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재 인간인 상태로 만족한다면, 지금 그대로 머무르면 된다. 하지만 잊지 말라. 우리 인간이 아주 오래전 침팬지에서 분리되었던 것처럼 사이보그도 인류로부터 분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으로 남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류가 될 것이다. 그들은 ‘미래세상의 침팬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케빈 워릭,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 김영사, 2004, 24쪽.)
이들은 장애 치료의 일환으로 적용되고 있는 기술들의 성과를 확인하며, 테크노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이 모든 인류에게 매끄럽게 상호호환 될까요? 청각 장애인이기도 한 김초엽 작가는 SF적 상상력을 통해 이 질문을 탐구합니다. 그의 단편 소설 「마리의 춤」은 해양오염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되었던 과학기술이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은 곳을 배경으로 합니다.
“광범위한 해양오염을 해결하기 위해 단 몇 달간 사용되었던 테트라마이드는 한 세대에 걸친 시지각 이상증 아이들을 만들어냈다. 부작용은 생태 순환을 통해 널리 확산되었는데, 특히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증상 발현이 높았다. 최초 증후군 규명자의 이름을 따 ‘모그’로 불리게 된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시지각 회로에 결함을 안고 있었다. 모그들은 시각 자극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이상이 없지만, 그 개별적인 자극을 하나의 구체적인 형상으로 조합하는 일에 실패한다. 인간이 보는 세계는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인지 체계를 통해 재구성된 세계이기 때문에, 재구성에 실패한 모그들의 세계는 파편화된다.”(「마리의 춤」, 『방금 떠나온 세계』, 한겨레출판, 2021, 67쪽.)
시지각 이상증을 겪는 모그는 현 미성년 인구의 5퍼센트 정도로 추정되는데, 소설 속 주인공인 마리도 모그입니다. 모그와 그의 가족들은 주로 편의 시설이 잘 구비된 특수 구역에서 폐쇄적 공동체를 이루고 삽니다. 그래서 마리의 무용 선생이 되는 작품 속 화자도 마리를 처음 보는 모그라고 말합니다. 한편, 이 세계는 싱크론과 같은 기술이 전면적으로 도입된 시대인데, 전뇌 기술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루트칩이 세계의 모든 연결망을 대체할 것처럼 다들 떠들어대던 시기가 있었다.(…) 루트칩은 피부 안쪽에 삽입하거나 머리에 부착하는 외장 장치를 이용해 감각 신경을 자극하는 신경 칩으로, 모든 사람을 상시적인 온라인 상태에 두는 기술이 상용화된 최초의 사례였다. 하지만 루트칩은 간편한 시술법과 저렴한 비용에도 불구하고 보편화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과도한 감각 자극에 적응하지 못했다.”(72~73쪽.)
루트칩을 장착한 사람들은 감각계로 직접 전송되는 과다한 신호로 인해 뇌에서 과부하가 일어나서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도 정상 인간의 보편적 인지능력이라는 생물학적 기초 때문에 좌절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적합 기술이 되어 적용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모그입니다. 루트칩은 플루이드로 개량되어 모그를 위한 감각 보조장치가 되는데, 그 효과가 극적입니다.
플루이드는 감각 신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각 정보를 생략하면서 루트칩의 부작용을 피해 갔는데, 모그는 어차피 시지각 이상 환자였기에 이것이 적절했습니다. 그렇게 모그의 감각 보조 장치로 재개발된 플루이드는 뜻밖의 기능을 발휘합니다. 모그는 이 장치를 통해 외부의 시각 정보를 다른 감각 정보로 변환하여 전달받을 뿐만 아니라, 광대한 넷에 실시간으로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루트칩을 통해 인류가 도달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지요.
모그는 플루이드를 통해 전뇌 호환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주류 사회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여전히 모그를 불쌍한 장애인으로 볼 따름입니다. 공연을 위해 무용을 배우러 화자를 찾아온 마리는 합창단 경험을 이야기해 줍니다.
“중학교 때 합창단에 동원됐거든요. 모그 교육원을 홍보하는 자선 행사에서 우리에게 공연을 하라고 했죠. 기분이 나빴지만,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어서, 우리는 연습을 대충 했어요. 보란 듯이 가사도 다 틀리고 엉망진창으로 무대를 마쳤어요. 그런데 막상 반응이 어땠는지 알아요?(…) 자선 행사에 온 사람들이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관객들이 훌쩍이고, 달려 나와 우리를 껴안았어요. 강당의 공기가 습해지는 것에 우리는 어리둥절해졌고요. 그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요? 정말 누가 들어도 엉망진창인 공연을 했지만, 우리는 열다섯 살이었고, 열다섯 살은 어린 나이지만 때에 따라 탁월함을 기대받기도 하는 나이잖아요. 그날 저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78~79쪽.)
마리가 일반인들을 위한 축제의 무대에 낄 수 있었던 이유도, 소수자를 올려서 윤리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획 의도’ 덕분이었습니다. 마리에게 춤을 가르치는 선생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리가 하는 일은 춤이라기보다는 목각인형의 기능적인 움직임처럼 보인다.’
그렇게 개인 교습을 하던 어느 날, 마리는 자신의 무대가 그룹 공연이라고 말합니다. 선생은 당혹스럽습니다. 그동안 훈련을 받았던 마리도 공연에 올릴 수 있을지 걱정인데, 집단 퍼포먼스라니. 속내를 들은 선생은 비용 걱정 말고 친구들도 부르라고 재촉하는데, 마리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그냥 평소대로 제게 가르쳐주시면 돼요. 그걸로 충분해요.(…) 제가 군무 동작을 배우면, 다른 사람들도 그걸 알게 돼요.”
“네가 안무를 친구들에게 가르쳐준단 얘기야?”
“정확히 말하면 가르치는 건 플루이드예요. 이제 플루이드는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어요. 자기수용 감각을 매끄럽게 전달할 수 있어요. 공간상에서 몸의 위치를 인지하고 신체를 제어하는 감각이요.”(80쪽.)
의심하는 선생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마리는 플루이드에 접속해 볼 것을 권합니다. 하지만 선생은 장애가 없기에 감각 보조장치가 필요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다 지속적인 강권에 호기심이 동하여 접속기를 통한 제한된 조건 속에서 첫 접속을 해봅니다. 그리고 “공간 속에서 모든 목소리가 동등한 무게를 가지고 충돌”하고 있음을 경험합니다. 이는 새로운 차원의 인지적 개방이었습니다. 마리는 첫 접속 이후 후천적 모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그가 되기를 선택하기도 해요. 전환은 간단하거든요. 의학 용어로는 ‘감염’이라고 부르는 것 같지만, 간단한 캡슐 하나로도 시지각 이상증을 경험할 수 있죠. 다회 복용으로 후천적 모그가 될 수도 있어요.”
“모그가 된다니, 이상한 사람들이네.”
마리는 내 대답을 듣더니 항의하듯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보통은 플루이드를 우연히 경험한 사람들, 모그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전환을 고민해요. 플루이드는 모그가 된다는 게 결핍이 아니라는 걸 알려줘요. 변화인 거죠. 어쩌면 진보일 수도 있어요.”(84쪽.)
마리의 주장에 ‘나’는 선뜻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인공적 진화를 주장하는 트랜스휴머니스트라면 어떨까요? 플루이드 모그로의 변신이 증강일까요? 결손이 진화의 전제가 된다면 기꺼이 훼손에 동참해야 할까요? 마리는 증강의 전도사가 되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 주류 사회는 모그가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진화한 인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의 외각에서 없는 취급을 받았던 모그야 말로 실은 진보의 적자인 것입니다.
마리는 공연 날 페스티벌 무대에서 전환 물질을 방출하는데, 특수효과 안개로만 생각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를 흡입하여 시지각 이상증을 겪습니다. 증상은 일시적이었지만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은 치료를 받지 않은 채 모그로 살아가기를 선택했다. 그들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했고, 사회적인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시 시각을 회복했지만, 이제야 모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모그들의 존재를 갑작스레 알아차렸고, 그 사실에 놀랐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은 그 사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95쪽.)
「마리의 춤」은 이후 이 세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에 따라 열리게 된 가능성을 가늠합니다. 사람들은 모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화의 가능태로 이들을 인지하게 됩니다. 모그들 사이에서도 마리의 ‘테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증강의 필요에 대해서도 쉬이 합의에 이르기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궤적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장담에 제동을 가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표준 인간을 훼손해야만 가능한 증강은 제대로 된 증강이 아닌 걸까요? 이는 잘못된 경로인가요? 모그와 같은 장애인은 과학기술의 시혜를 받는 것에 그쳐야지 진화의 주도적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걸까요? 만약 이들이 증강의 주인공이 된다면, 표준 인간은 무엇이 되나요?
호모사피엔스는 단일종*으로 종 내 차이가 크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트랜스휴먼으로의 변모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트랜스휴머니스트들도 여러 버전의 트랜스휴먼이 나올 수 있음을 전망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이들의 기본적인 전제에는 의학적 정상 인간을 표준으로 삼는 관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마리의 춤」은 소위 소수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감각세계가 더 다채로울 수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들이야 말로 기술적 진화의 적자일 수도 있음을 보입니다. 어쩌면 인간증강의 비전을 위해 트랜스휴머니스트가 시급히 버려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표준’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끝>
* 유네스코는 모든 인간이 동일한 종에 속하며 ‘인종’은 생물학적 실재가 아니라 신화라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고, 인류학자 로버트 서스먼도 이렇게 말한다. “생물학적으로 인종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종 사이에 위계가 존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로버트 월드 서스먼, 김승진 역, 『인종이라는 신화』, 지와사랑, 2022,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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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손 신체의 보충, 신경 손상의 복구, 신체 능력 강화, 감각과 의식의 고도화.. 증강의 끝은 어디일까요. 사람은 결국 정보이며, 질량과 광속이라는 물리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육체를 버리고 우리의 의식을 업로드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을까요. 머나먼 우주를 늙지 않고 항해하며,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필요에 따라 새롭게 만든 아바타에 접속해서 우주를 다시 한번 느끼고. 정보로 치환된 의식은 다른 의식들과 한데 섞이며 보다 더 근원적으로 공감할 수 있게 되고, 개인의 의식은 복사도 가능해 여러 곳을 동시에 여행하고 다시 만나 정보를 합치고. 나아가 모든 의식을 하나로 합칠 수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더 크게 나아가 정보의 아카이브인 블랙홀이야말로 증강의 끝, 초월로 가는 길이며, 가속 팽창에 의해 분리된 중력(광속 이하)로 묶인 영역들 하나하나가 한데 뭉쳐 여럿의 거대한 정보 덩어리들을 생산해내는 것이 이 우주의 목적인지도 모르겠지요.
사람들은 성장기 이후 고착화되는 dmn이 수정되는 경험을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합니다. 내 자아가 수정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죽는 것과 동일시하는 성향이 있죠. 하지만 증강과 초월에 대한 깨달음은 자아가 해체되는 경험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쉽게 찾아오기 힘듭니다. 인간은 안타깝게도 자신이 경험해 본 영역 내에서만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항상 그렇기만 하다면 생물이란 존재는 각자도생만 하다가 멸절했겠지요. 릴랙스,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경험을 저항없이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아이들은 거리낌없이 늑대, 호랑이, 기린, 타조, 앵무새, 닭, 고양이, 개, 그리고 부모의 행동만이 아닌 모든 것을 따라하는 메소드 연기를 진심으로 수행합니다. 깨달음에의 갈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먼저 느낀 이후에야 찾아오지요. 그렇게 아이들은 사랑과 공감, 세상을 배웁니다.
나이를 먹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는 것에 대한 판단을 하기 전에 먼저 느껴야만 합니다. 다만, 마리의 춤에서는 테러라는 형식을 통해 강제로 장애를 체험하는 것으로 그것을 인식하도록 묘사된 탓에 굉장히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만들지만.. 이는 단순히 수단과 형식이 잘못되었을 뿐입니다. 사실 별 것 아닌 행위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만.. 릴랙스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행위는 생존을 위협하는 진짜 테러로 봐도 무방했을 것입니다. 현대예술이 난해하고 어려운 이유는 이것과도 통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랑하고 공감하자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심플한 주제이거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새로운 의식의 확장이라는 개념을 관객에게 주입시키기 위해서는 작품을 해체분석해 얻는 이해가 느끼는 것보다 우선되어서는 곤란해집니다. 엘리멘탈처럼 너무 쉬우면 아이들이 보는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어 진정한 메세지 전달에는 실패한 셈이 되지요. 아이가 밤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아빠 오늘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고수준의 소셜 스킬을 발휘해야 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결손의 복구라는 관점에서의 "표준"은 현실적으로만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용어라는 생각입니다. 막연하고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경지의 증강보다는 결손의 복구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좋겠지요. 사람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규정짓고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가상 세계에 존재하는 의식의 영역에서의 "인간 표준"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넓은 범위로 확장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우리가 복구해야하는 진짜 표준일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과 신성을 되찾는 과정, 즉 초월 말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플루이드는 저주가 될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까지 해야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프로토스가 칼라를 끊은 것과는 상반되는 의미를 낳으니까요.
좋은 지적 자극을 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이라는 종도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지구라는 행성에서 생존과 번식을 위해 부단히 적응해 온 종이기에, 그 지평을 넘어서는 일이 쉽지 않겠지요. '표준'이라는 관념은 그래서 푸코 같은 이론가는 지식은 알기 위함이 아니라 분리시키기 위함이다고 주장하기도 했고요. 지식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정당화 기제가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