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10/29 12:55:12
Name 칭찬합시다.
Subject [일반] 어떤 과일가게 (수정됨)
고향집에서 걸어서 3분 가량을 가면 작은 청과점이 있었다. 내가 그 앞에서 유치원 승합차를 타던 시절도 있었으니 20년은 족히 넘었다. 인도를 오가며 내부가 훤히 보이는 커다란 창을 통해 안을 보면 주인 아저씨는 늘 높은 선반 위의 텔레비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손님이 오면 주섬주섬 일어나 과일 바구니의 과일들을 봉투에 담아 주었다. 누군가는 사과를 어떤 이는 배를, 과일을 사지 않는 이들은 담배를 사갔다.

수십년을 봤지만 그 아저씨는 매일 아침 일찍 가게를 열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 집결지에 일찍 모이기 위해 새벽녁 집을 나섰는데 벌써부터 부산스럽게 장사 준비를 하시던 모습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가게는 작았고 과일을 특별한 것이 없었다. 작은 소쿠리에 사과나 배, 바나나, 딸기 같은 것들이 가득했고 최근 유행한 샤인머스킷이 구석에 보였다.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다던 애플망고 같은 과일은 들여놓지 않았다. 갈수록 단골만 가는 그런 집이 되어갔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몇 번 구매를 한 것 말고는 방문한 적이 없으니 나는 그에게 손님이라기보단 행인이나 주민이었다.

그곳은 어떤 특별한 추억이 있는 장소라기보단 그냥 풍경 같은 곳이었다. 집 근처에 늘 존재하던 가로등이나 전봇대, 멀리 보이는 붉은 십자기의 불빛 같은거. 대학시절 오랜만에 집에 들렸다 그곳에 진열된 과일들이 너무 반듯하게 놓여있는 것을 보고 싱숭생숭했던 기억이 난다. 새벽녘에 신경써서 과일을 예쁘게 놓았을 주인아저씨의 모습이 상상되며 그의 최선과 고심이 타인에겐 수십년 간 알아채지도 못할 일이었다는게, 아마 나의 최선도 타인에겐 그러할 것이라는 게 마냥 우울했었다.

오랜만에 간 고향집에서 앞 과일가게에서 이제 문을 닫는다는, 정갈한 손글씨로 쓰인 벽보를 읽었다. 그래서 이 글은 과거형으로 쓰여졌다. 내가 집에 머문 고작 며칠 사이에 과일가게는 뜯겨나가고 그 자리엔 어디서나 보이는 편의점이 들어섰다. 편의점이 새로 생기는게 일주일도 채 안 걸린다는게 놀랐고 누군가의 수십년이 정리되는 시간도 찰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한테 말하니 웃으며 우리도 늙었다고,  그래서 이제 그런게 보인다고들 하더라.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어느새아재
23/10/29 15:55
수정 아이콘
저희는 랜드마크 개념이었던 중국집이 간판내리길래
아..여기도 바뀌는구나 했는데
그분들이 다시 고깃집을 딱! 크크크
한동네 오래 사니까 그런게 잘 보이는 듯합니다.
윤니에스타
23/10/30 10:4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요새 가게들 없어지는 거 정말 순간이더라요. 특히나 자주 가던 가게가 그렇게 폐업을 하고 엄한 가게가 들어온 걸 볼 때는 살짝 마음이 먹먹해지는..
과수원
23/10/30 12:11
수정 아이콘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오랜 시간동안 장사 열심히 하셨으면
이제 쉴 때가 되셔서 닫으신 것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원호문
23/10/30 15:17
수정 아이콘
풍경으로 남아있던, 당연하던 공간이 바뀔 때 문득 허무해지는 순간이 있더군요. 그 풍경 속에 있던 나 자신의 시간까지 사라진듯 하여 그런걸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0741 [일반] <사랑은 낙엽을 타고> : 낙엽처럼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10] 오곡쿠키6776 24/01/19 6776 6
100740 [정치] 이쯤에서 다시보는 연설에 끼어든 한인 학생을 대하는 오바마의 자세 [53] 종말메이커17979 24/01/19 17979 0
100739 [정치] 결국 헝가리식의 파격적 현금지원 출산장려책은 민주당이 선점했네요. 지지합니다. [136] 홍철19957 24/01/19 19957 0
100738 [정치] 올해 신년 기자회견은 없다는군요 [74] 또리토스14956 24/01/18 14956 0
100737 [정치] “국정기조 바꾸라” 지적에 야당 국회의원 입막아 끌어낸 대통령실 [598] Crochen33634 24/01/18 33634 0
100736 [정치] 정부, ‘음주 수술’ 금지 추진… 의사협회 반발 [231] Davi4ever18173 24/01/18 18173 0
100735 [정치] 이준석 기자회견 : 65세 이상 지하철 공짜 폐지 추진 [325] Croove22427 24/01/18 22427 0
100734 [정치] 오늘 0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라북도... '전북특별자치도' (+기사 추가) [41] Davi4ever14396 24/01/18 14396 0
100733 [일반] 뉴욕타임스 12.28일자 기사번역 (미국의 아동노동 문제) [7] 오후2시8795 24/01/17 8795 2
100731 [일반] SVIP들을 엿 먹이는 CJ CGV의 만행(스페셜 기프트 사태) [40] SAS Tony Parker 10603 24/01/17 10603 1
100730 [일반] 두 번이나 아내를 잃어도 [8] 계층방정10728 24/01/17 10728 11
100728 [일반] 친구 없는 해외여행은 힘들다 (feat. 건보는 신이야) [30] 하카세10185 24/01/17 10185 2
100727 [정치] 대통령, 야권 방심위원 2명 해촉 재가. 방심위 여4: 야1 구도로 [81] 빼사스13326 24/01/17 13326 0
100726 [정치] 미투 광풍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다 망한 민주당과 서지현 [32] 홍철17371 24/01/17 17371 0
100725 [일반] 성범죄 관련 새로운 판례가 나왔군요. [37] 時雨15930 24/01/17 15930 51
100724 [정치] 국민의힘 경선룰 지역별 차등 적용 검토가 떴네요 [102] 쀼레기15071 24/01/16 15071 0
100723 [정치] 한동훈, 김건희 모녀 23억 차익 의견서에 "문재인 정권 때 문서" [120] Crochen16073 24/01/16 16073 0
100722 [정치] 한동훈, 국회의원 정수 250명으로 줄이겠다 [162] 계층방정14768 24/01/16 14768 0
100719 [일반] 양주시에서 허위 출장 공무원 공식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67] Leeka13816 24/01/16 13816 4
100718 [일반] RTX 40 슈퍼 커스텀 모델 가격 유출 [43] SAS Tony Parker 9370 24/01/16 9370 1
100717 [일반] 테일러 스위프트 콘서트에 갑니다. [17] 간옹손건미축8082 24/01/15 8082 12
100716 [일반] 시대유감, 서태지와 에스파 [43] Taima10578 24/01/15 10578 16
100715 [일반] 나는 15살에 무엇을 했는가.. (tuki.- 만찬가, 한 송이 꽃) [6] 대장햄토리6555 24/01/15 6555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