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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1/08 09:22:02
Name Bar Sur
Subject [잡담] 받침대 씨의 실종.
  우리 집의 식탁 위에 얹는 받침대는 종종 실종되어 버린다. 한 번 사라져 버리면 보통 하루에서 3일 정도는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정말 이상한 건 막상 사라졌을 때는 어디를 뒤져도 찾아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러면 뜨거운 국이나 탕을 받칠 것이 없어서 한 동안 고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것을 살 생각도 감히 하지 못한다.(이점 또한 이상하다면 이상하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어느 순간 "돌아왔어."하고 새침하게 말하듯이 받침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받침대의 실종이라고 부르고 싶다. 분명 받침대는 스스로의 의지로 원래의 자리를 이탈하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받침대 씨는 대체 어디에 갔었던 걸까? 종종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어째서 거기에 있는 건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조용히 시간의 틈새 속에 빠져들 들어 먼 시공을 넘어 많은 것들을 보고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받침대의 실종에는 긴 침묵과 사소한 애수가 서려있다.


  분명 받침대 씨는 외로웠던 것이리라.

  "왜 나는 혼자일까? 내 짝은 없는 것일까?"

  "대체 왜 나는 항상 뜨거운 것들을 온 몸 위에 올려놔야만 하는 걸까? 왜 그을리고 더럽혀지기만 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나를 아껴주지 않을까? 왜 나의 소중함을 잊어버리는 걸까?"

  그는 오랜 시간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문해 왔음에 틀림없다. 뜨거운 찌개가 올려져 있을 때도 자신의 몸이 새까맣게 변할 때도. 그것이 자신의 평생의 업인 것처럼 고민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랜 고민 끝에 '여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말은 여행이지만 그것은 이를테면 정신적인 나들이, 혹은 가출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받침대 씨는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마는 작은 '틈새'를 이용해 여행을 했다. 거기에는 자신과 같은 불만을 가진 존재들이 의외로 많았다. 떨어진 단추 씨나 안경집 씨, 지우개 씨 등등. 그들은 작은 틈새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넘어 많은 곳으로 여행을 하곤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여행을 통해 자신이 머무를 새로운 장소를 찾는다. 자신을 아껴줄 주인이 있는 곳. 자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장소.

  단추 씨는 단추 사냥꾼에게 붙잡혀 새로운 주인을 찾았고, 지우개 씨는 모르는 틈에 이곳저곳의 때를 지우다가 승천하고 말았다. 안경집 씨와 받침대 씨만이 남았다. 그들은 자신들과 닮은 친구들조차 만나지를 못했다.

  "안경집 씨,자넨 어떻게 할거야?"

  "음, 난 여행을 계속하겠어. 내게 맞는 안경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자넨?"

  "난 잘 모르겠어. 돌아간다고 해도 난 또 무겁고 뜨거운 것들이 올려지고 검게 타버릴 거야."

  "하지만 사람들은 '가끔'은 자네를 '아주 절실히' 필요로 할 때가 있는 거야. 자네가 없으면 아주 슬퍼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그럴까?"


  받침대 씨는 일단은 다시 돌아왔다.하지만  긴 여행을 했음에도 주인에게는 하루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고 받침대 씨는 다시 혹사당하기 시작한다.


  "에잇. 다음 번엔 반드시 내게 어울리는 곳을 찾고 말겠어."

  받침대 씨는 오늘도 팔팔 끓는 라면 아래에서 의지를 다지고 있다.


  이렇게 받침대 씨는 불규칙적이지만 가끔씩 자신의 위치를 떠나 여행을 다니는 것이다. 작은 틈새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자신을 사랑해주는 장소를 찾아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여행을 떠나는 걸지도 모른다.


  미안해. 받침대 씨.

  하지만 인간은 널 볼 때마다 참을 수가 없는 거야.

  넌 괴롭히고 싶어지는 타입인걸?

  하지만 네가 사라지먄 괜히 슬퍼져. 그건 널 평소처럼 괴롭히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닐거야.


  어째서 일까? 어째서 네가 먼 여행을 떠나면 이렇게 슬프고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받침대 씨, 어쩌면 인간은 받침대 씨가 사라지는 걸 알면서도 그것이 두려워서 자신을 잊게 하지 않기 위해 상처를 주고 괴롭히는 건 아닐까? 난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어.

  


  (주) 받침대가 사라질 때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고 있으면 제법 재미있다. 혼자 놀기의 진수.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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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08 09:47
수정 아이콘
헐..대단하십니다;
04/01/08 10:09
수정 아이콘
받침대는 정말 가끔씩 사라져 버려서 곤란할 때가 많아요. 그러다가도 불쑥 돌아오고..
여하튼 재밌는 글이네요~!! ^^
하늘호수
04/01/08 10:12
수정 아이콘
받침대가 그 자리에 있을 땐 우린 그를 인식조차 하지 않죠. 받침대가 없어져야 그때서야 비로소 그를 생각합니다. 어쩌면 받침대씨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기 위해 가끔씩 의도된 외출을 하는게 아닌지...^^
04/01/08 10:4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정말 상상력이 뛰어나신거 같아요~
krumtrak
04/01/08 10:55
수정 아이콘
보통은 냄비 밑바닥에 잘 붙어있더군요...
외로워서 그런건지... -_-;
Endless_No.1
04/01/08 13:10
수정 아이콘
krumtrak님 답글에 오링..^^:
무계획자
04/01/08 13:11
수정 아이콘
무라콰뮈 하루퀴씨? 느낌이 비슷하군요.
후후 재밌네요
하하하
04/01/08 14:11
수정 아이콘
특히나 고무로만든 받침대씨는 라면냄비를 특히나 좋아하더군요 ㅡㅅㅡ;;
KILL THE FEAR
04/01/08 14:31
수정 아이콘
푸허허; 저도 맨날 냄비밑에 붙어있는 받침대를 못찾아서 헤매죠^^; 조금만 생각하면 냄비밑을 제일 먼저 찾을텐데, 눈에 안보이는건 생각하지 힘든지라TT..
04/01/08 14:31
수정 아이콘
마치 꿈 속 같아요...몽상은 강민 선수의 전유물만은 아닌 듯 싶네요... 잼있었습니다...
온리시청
04/01/08 14:43
수정 아이콘
역시....그런데 요즘엔 조금 뜸하신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04/01/08 15:27
수정 아이콘
이 글을 읽으면서......
핸드폰을 어디에 두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집전화기를 붙잡고 있습니다.
아마도...... 진동모드인 탓에.. 찾기 더더욱 어려울 것 같네요...
이 녀석..... 워낙 전화는 커녕 광고문자 하나 오지 않는 탓에 많이 외로웠나봅니다. ㅜㅜ
어디 있을까요.. ㅠㅠ
안전제일
04/01/08 21:00
수정 아이콘
받침대씨가 여행갔을 때에는 근처에 있는 쇼핑잡지를 애용합니다.^_^
phoenix님// 유경험자로서 말씀드리는데요..곧 나타납니다. 잊고 한 일주일정도 마음 편하게 생활해보세요. 나타난 핸드폰군이 전혀 안반가울 껍니다.(핸드폰없이 한 일주일 정도의 생활을 해보신다면 진정한 자유가 뭔지 아실수 있으실겁니다.)
토순이
04/01/08 22:30
수정 아이콘
아아..재밌습니다ㅠ_ㅠ 한 편의 동화를 읽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전 가끔 지갑이 사라지더군요..-_-;; 전 지갑을 이뻐라 해주는데 왜 사라지는 걸까요..이상해요..
안전제일님// 핸드폰을 충전하지 않고 사는 삶도, 꽤나 즐겁고 여유롭죠^^ (물론 친구들에겐 구박을 엄청 받습니다만;;)
ColdCoffee
04/01/09 01:47
수정 아이콘
냄비받침이 어때서 ? 고린내는 안맡잖어... - 욕실깔개
넌 나아 임마... 하루에 몇분만 맡으면 되잖아. - 방석
내 앞에서 고린내를 얘기하냐? - 변기깔개
니네들은 몸이라도 성치... 매일 컷터칼로 난도질 당하진 않잖냐. - 책상깔개

재밌게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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