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종종 스파키 이야기를 올리는데, 요즘은 거의 6년간 꾸준히 해온 클래시로얄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바로 오늘 리뷰할 모바일 게임인 Slay the spire 때문입니다. (대체 왜 슬더스가 아닌 슬더슬 이라고 줄여부르는지 모르겠..)
얼마전에 바로 이곳 pgr에서 누가 유머게시판인가에 올려주신걸 보고 '오 800원이면 일단 무지성 구매지'라고 생각하고 사긴 했는데,
솔직히 별로 큰 기대는 안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쌓여있는 스팀/에픽 게임이 수십개 인지라...
그런데 그날따라 좀 오래 기다릴 일이 있어서 시간 때울겸 한번 해봤는데, 왠걸, 클래시로얄 상자까기를 차차 게을리 하게 되더니 지금은
출퇴근시간에 아예 폰을 잡고 삽니다. 저도 아직 대략 일주일정도밖에 안지났지만, 너무나 재밌고 또 왠지 익숙한 느낌에 가만 생각해보니 제가 즐겨하던 보드게임 '도미니언', 그리고 즐겨하던 PC게임인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와 많이 닮아있는 느낌에, 다른 분들께 소감을 이야기하고 싶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1. '도미니언'과의 유사성
<덱빌딩계의 시조새.. 아니 암모나이트.. 아니 코아세르베이트..
아니 운석..>
보드게임 도미니언은 소위 덱빌딩 류 게임의 원조 격인 게임입니다. 이 게임을 처음하는 뉴비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실수 중 하나가, 1원의 가치를 갖지만 살 때는 0원짜리인 '동(bronze)'을 생각없이 구매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내 손에 한턴에 들어올 수 있는 카드는 5장으로 정해져 있는 규칙에서, 동을 많이 산다는 것은 결국 손에 잘들어와봐야 5원까지만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게임을 끝내기 위한 8원짜리 속주를 살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동은 일종의 저주 취급을 받지요.
<젤 왼쪽에 동은 1원의 가치를 갖지만, 왼쪽 아래 살때 가격은 0원으로 언뜻 혜자처럼 보인다>
슬더슬에서도 정확히 똑같은 개념의 '타격', '수비'라는 카드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맨처음 주어지는 기본 카드로써 1코스트에 걸맞지 않은 낮은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어서 손패를 말리게 하는 주범이 되죠.
<악명높은 예배당... 아마 초기 개발자들도 폐기의 위력을 저평가해서 이런 사기카드가 탄생한게 아닐까?>
도미니언에서 초보들이 자주 하는 또다른 실수는 '예배당'카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 카드는 2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이고, 설명도 심플합니다: "손패에서 4장까지 폐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갖 흉흉한 사기 카드가 넘쳐나는 도미니언 카드풀에서도 예배당은 당당히 최상위권 사기 카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어느정도냐고 하면, 이 예배당 카드가 존재하는 판은 모든 전략이 예배당을 중심으로 짜여지게 되고 또 그렇게 해야 이길 수 있게 될 정도입니다. 내 덱에서 필요없는 카드를 다 없애줘서 내손에 5장이 잡혔을때 최대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폐기' 입니다.
슬더슬에는 '제거'라는게 있습니다. 이는 도미니언의 '폐기'와 같은 의미이며 도미니언보다 상대적으로 희소한 능력인듯 합니다. 대신 '소멸'이라고 해당 전투에서만 특정 카드를 없애줄 수 있는 능력도 있는데, 도미니언에도 비슷한 개념이 존재하긴 하는데 '폐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특성이지요. 아무튼 이 '제거'도 내 덱의 성능을 끌어올리는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2. 도미니언과 다른 점
어쩌면 둘다 덱빌딩에 기반한 게임이니 같은 원리가 작용하는 것이 특이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도미니언과 다른 점을 살펴보죠.
도미니언은 상대방이 사람이니 내덱의 전략을 읽고 그걸 파훼하거나 뛰어넘는 덱을 만들어나가는게 핵심입니다. 반면에 슬더슬은 점수랭킹이 존재하긴하지만 기본적으로 컴까기입니다. 비록 여러가지 다양한 시나리오와 변수덕에 매번 다른 느낌이긴하지만, 일주일만에 어느정도 몹의 패턴이 익숙해지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사람을 상대할때만큼의 변화무쌍한 상황은 아닌 듯 합니다. 따라서 interactive한 관점에서 본다면 슬더슬은 도미니언보다 좀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판의 다양성 만큼은 수많은 확장팩이 있는 도미니언이 우위인듯 하다>
대신 덱위력의 편차는 슬더슬이 도미니언보다 훨씬 큰 것 같습니다. 사실 어느정도 익숙해진 사람들끼리 도미니언을 하면, 매번 덱이 비슷비슷해지고, 결과적으로 나만의 독특한 덱으로 상대방을 쌈싸먹는 그런 쾌감을 얻기는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슬더슬은 다양한 캐릭터, 상황, 유물 등이 합쳐져서 매번 내가 원하는 대로 판을 설계하는게 훨씬 어렵습니다. 덕분에 운빨x망겜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긴 했지만, 운좋게 초반부터 좋은 유물과 카드로 이상적인 덱을 꾸려 몹들을 학살하는 쾌감은 확실히 도미니언보다 우월하다고 느껴집니다. 보통 사람들이 롤을 하면 10판 중에 9판 똥싸도 1판만 하드캐리하면 느낄수 있는 뽕맛에 한다는데, 그것과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어디한번 이것도 뚫어보시지 by 디펙터
탑의 그녀석>
3. 히마매와의 유사성
사실 제목 어그로를 위해서 히마매 대신 문명이라고 쓸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어차피 둘다 '한 턴만 더...'라고 외치게 되는 턴제 시간 마약상 게임이니 좀더 높은 인지도가 있는 문명을 써도 될 것 같았거든요.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밤새한 게임>
그럼에도 제가 굳이 히마매라고 쓴 이유는, 문명보다는 히마매를 더 닮아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슬더슬이나 문명이나 히마매나 '제발 딱 한턴만더...!'를 외치게 되는 턴제 전략게임이고 잘 짜여진 내덱 혹은 내 문명, 종족의 힘으로 후반부에 적들을 휩쓸어버릴 때 쾌감은 다 동일차원 선상에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문명보다 히마매가 슬더슬과 비슷한 부분은, 질것같은 전투를 기적같은 용병술로 끝내 승리를 거머쥐었을때의 쾌감입니다. 문명도 물론 전투할때
포지션과 전략이 중요하긴 하지만, 사실 딱보면 사이즈가 나오고 대개는 그 예상이 맞게 흘러갑니다. 그런데 히마매는 적재적소에 들어간 마법하나가 전투의 향방을 가르는 게임이라 전투가 훨씬 중요하죠. 슬더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이거 답없다 싶은 전투도 적절한 포션과 칼같은 계산, 예측을 통해 뒤집을 수도 있으며, 그럴때 쾌감이 이루 말할수 없습니다. 또, 히마매도 고난이도에서는 '무피해사냥'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병력손실에 민감한데, 슬더슬도 체력이 1도 안깎일려고 온갖 궁리를 다하는 것이 정말 비슷하다고 느껴지더군요. 그래서인지 슬더슬에 '스톨링'(이득을 보기 위해 전투를 질질 끄는 행위)이라는 용어가 있던데, 히마매 유저인 저는 이걸 따로 배우지 않고도 슬더슬하면서 자연스럽게 스톨링을 하고 있었습니다.
4. 결론
안드로이드 폰에서는 단돈 800원에 결제가능합니다. 솔직히 이정도 게임이면 8만원이라도 괜찮은 느낌인데요.(물론 8만원이면 지르지도 않았을테고 그랬으면 이 게임을 끝내 안해봤을테니 그때 pgr에 소개해주신 분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위에 도미니언보다 다양성이 좀 떨어진다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그거야 도미니언이 괴물같은거고, 이 게임도 정말 다양한 전략이 있고 파고들 구석도 많아서
승천20심장런연승챌린지같은... 앞으로도 한동안 즐겁게 게임할 것 같습니다.
"아니 덱빌딩계의 시초이자 갓겜인 도미니언에다가, 지금은 좀 위세가 덜하지만 한때 문명, FM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3대 막장게임의 일원을 섞었는데 그게 800원이라고? 그래서 안하쉴?"
============ 이하 현직 슬더슬 유저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약간의 스포 겸 자랑 ============
뉴비가 승천 6에서 드디어 진최종보스 심장을 잡았습니다! 그것도 체력 1남고요... 스샷에 체력이 7로 표기되어있긴한데 아클로 깬거라 전투끝나고 체력이 6 차오른 겁니다. 첫 심장트라이긴 했지만 불가침 카드 5장을 들고 덤빈거라 무난할 줄 알았는데 창방에서 체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져서 못깨는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