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투게임은 극도로 경쟁적인, 그래서 모든 경쟁 게임 장르 중 가장 스트레스가 심한 장르일겁니다. 이 격투게임 특유의 스트레스와 진입장벽 때문에 많은 이들이 막연하게 격투게임을 '죽어가는 장르'로 취급하거나, 격투게임의 입지를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면서 얕잡아보곤 합니다. 하지만, 여러 지표를 보면 격투게임은 오히려 아케이드 게임의 쇠퇴기때 크게 침체되었던 후, 요즘엔 다시 제 2의 전성기를 맞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상상하던 대결구도를 쉽게 현실화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격투게임은 언제나 꾸준히 개발되던 스테디 셀러 장르였고, 요즈음에는 넷코드 노하우의 발전과 다양한 프랜차이즈의 등장으로 오히려 전반적 판매량과 출시되는 타이틀의 종류도 함께 성장하고 있습니다. 2017년 콘솔판이 발매된 철권 7은 최전성기 시절이던 철권 3의 판매량을 거의 다 따라잡아 800만카피 이상이 판매되었으며, 모탈컴뱃 11은 1200만 카피, 2018년작 드래곤볼 파이터즈는 800만카피를 판매하였습니다. 특히 철권7이나 드래곤볼파이터즈는 소위 '오픈빨'로 출시 당해에만 많이 팔리고 식은것이 아니라, 출시 이후 2021년까지도 꾸준히 매년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갱신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는 점이 눈여겨 볼 만 합니다. 스매시 브라더스 얼티밋은 뭐 말할 필요도 없고요. 왠만하면 판매량을 잘 공개하지 않던 길티기어 시리즈의 최신작 길티기어 스트라이브는 이례적으로 판매량 50만장 돌파 소식을 공개하며 샴페인을 터트리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도 니켈로디언의 <니켈로디언 올스타 브롤>, 워너브라더스와 DC 유니버스의 <멀티버서스>가 올스타형 격투게임으로 제작되었으며, 던전앤파이터, 리그오브레전드 같은 초 대형 게임 프랜차이즈가 격투게임화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사무라이 쇼다운이나 버츄어 파이터 시리즈 같은 고전 명작 격투게임 프랜차이즈들도 다시 오랜 공백을 깨고 시장에 뛰어들고 있고요. 여러 시장 지표를 따져보았을 때, 격투게임을 죽어가는 장르 취급하것 자체가 소울라이크 장르를 죽어가는 장르 취급하는것과 비슷한 어불성설입니다. 태생적으로 코어한 장르일 지언정, 다른 장르로 대체하기 힘든 고유의 매력이 있기때문에 항상 시장이 유지되어왔다는 것이지요.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장르인 RTS장르가 지금 얼마나 쪼그라들었나 비교해본다면 그 차이는 더더욱 명확합니다.
[톰&제리와 배트맨의 대결이라니... 정말 가슴이 웅장해 진다... 현재 개발중인 워너브라더스와 DC유니버스 기반 격투게임 멀티버서스]
RTS나 보드게임과 같은 다른 1:1 장르와 달리 격투게임은 운이나 정보전 등의 변수가 끼어들어갈 여지가 거의 없이, 순수하게 플레이어의 신체적 능력과 전술로 승부가 결정됩니다. '내가 이길때만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격투게임만큼 스트레스를 주는 장르는 아마 없을겁니다. 실력을 올리기 위해 나를 분석하고, 게임의 구조를 분석하고, 상대를 분석하는 그 모든 과정에서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격투게임에 매료되지요. 사실, 그 모든 과정을 즐기기 시작하면 격투게임처럼 매력적인 장르도 없을겁니다. 운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순수한 실력대 실력의 격돌이 격투게임이니까요.
[라이엇 게임즈]가 개발하는 격투게임
저는 라이엇 게임즈 게임들의 개발과 패치방향을 보면 언제나 일관성이 있다고 느껴왔습니다. 라이엇 게임즈는 절대로 게임을 '기존보다 더 단순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리그오브레전드의 신규 챔피언과 아이템, 룬 패치방향도 게임플레이에서 더 많은 이동수단과 더 많은 조합 가능성을 고려한 티가 역력히 드러납니다. 레전드 오브 룬테라는 경쟁작 하스스톤에 비해 운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상대 턴에 관여할 수단을 더 많이 제공했고, TFT는 시즌이 갈수록 다양한 시너지와 변수를 첨가하는 방향으로 패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발로란트는 고전 밀리터리 FPS의 테크닉과 깊이를 상당부분 그대로 가져오면서 스킬에 의한 변수 등을 더하였고요. 그 결과가 성공적이냐 그렇지 못하냐를 떠나서, 라이엇 게임즈의 개발기조에는 이렇듯 코어 게이머가 게임의 구조를 연구 분석하여 새로운 플레이를 발견하는 재미를 항상 놓치지 않는 '코어 게이머 마인드'가 깔려있습니다.
롤격 project L이 태그 기반 격투게임이라는것이 공개되고 여러 게임 및 격투게임 커뮤니티에선 꽤나 여러가지 갑론을박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발현황 공개 비디오에서 롤격의 개발 철학을 설명할때 개발자 톰 캐논이 미소를 띄우며 던진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This isn't about building a game where new players have a chance to beat the pros, it's about unlocking the fun at all skill levels' '초심자가 고수를 이길 확률이 있는 게임을 만드는게 아니라, 모든 실력구간에서 고유의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
사실 올드 격투게임 팬들에겐 상당히 의미심장한 농담이기도 하면서, 최근 몇년간 장르가 겪었던 시행착오와 실패의 인정을 함축하는 뼈가 있는 발언이기도 합니다. 스트리트 파이터 5의 발매 전에 벌어졌던 여러가지 해프닝을 살짝 건드리는 발언이기도 하거든요.
스트리트 파이터5는 출시 전 마케팅과정에서 초심자가 접근하기 쉬운 게임임을 상당히 강조하면서 여러 무리수를 두어 논란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마블 vs 캡콤 시리즈의 프로게이머였고 캡콤의 격투게임 개발자로도 근무했던 플레이어 Combofiend는 '스트리트파이터5는 초보자가 고수를 잡을 수 있는 게임'이라는 발언을 해 격투게임 커뮤니티에서 갑론을박이 있었고, 스파5 발매 시기즈음에 벌어졌던 래퍼 루페 피아스코와 레전드 프로게이머 우메하라 다이고의 이벤트매치에서 루페 피아스코가 3:2로 승리하는 매치를 '연출'하면서 논란이 된적도 있거든요. 마치 한국에서 남규리 vs 무릎의 이벤트매치와 비슷한 양상이었죠. 144만의 구독자로 격투게임 카테고리에서는 현재 가장 많은 구독자수를 가지고 있는 격투게임 전문 유튜버도 이 구절이 나올 때 스트리트파이터5를 언급하며 발언을 쏟아냅니다. 스트리트 파이터5의 해프닝으로부터 참 멀리도 돌아왔다면서요.
[9:40 자동재생. 유명 격겜유튜버/스트리머 MaximilianDood의 project L 개발자 코멘트에 대한 반응. 톰 캐논의 코멘트에 깊게 공감하며 '격투겜에서 초심자가 고수를 잡을 수 있게 설계하는건 불가능하다. 그딴 헛수고 그만하라. 그냥 플레이하기 재밌게 만들고, 많은 플레이 옵션을 줘서 각자가 플레이하는 과정을 즐기게 만들라'라고 말합니다.]
재밌는건, Project L을 개발중이며 현재는 라이엇에 인수된 래디언트 스튜디오의 대표이자 project L 개발노트 등장인물인 톰 캐논과 토니 캐논 형제는 다름아닌 세계 최대의 격투게임 이벤트 EVO의 초기 창립멤버라는 겁니다. 누구보다도 격투게임이 진심인 사람들, 누구보다도 격투게임에 대한 짬밥을 많이 먹은 사람들, 누구보다 코어 격투게이머의 마음가짐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거죠. 라이엇이 왜 래디언트 스튜디오를 인수했는지, 왜 롤격이 지금과 같은 개발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캐논 형제의 발언과 라이엇의 개발기조를 대치시켜 본다면 그 배경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
대전이 쉬우면 격투게임이 많이 팔릴까?
많은 이들이 '격투게임이 너무 어려우면 필연적으로 대중성이 떨어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 ['어려우면']이라는 단어엔 상당히 많은 의미가 함축적으로 담겨있기에,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명제이기도 합니다.
레버를 돌리고 버튼을 조합하는 기본적인 조작이 어려워도 '어려울' 수 있고
게임이 제공하는 변수와 조합이 많고, 숙지해야 할 개념이 많아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무엇이 게임을 '어렵게' 만드는가에는 상당히 많은 원인들이 관여합니다.
안타깝게도, 최근 수년간 수많은 격투게임 메이커들과 격투게임 플레이어들이 저 '어렵다'는 말을 단순하고 일차원적으로 해석해왔고, 그래서 대전의 깊이을 무의미하게 희석(tone down)시키는 방향으로 수많은 헛발질을 해왔습니다. 시스템을 단순화하면 초보가 고수를 잡을 확률이 올라가겠지 같은 막연하고 검증되지 않은 판단에 의한 결과물이었죠.
경쟁게임의 DNA를 품고 있는 이상, 1:1 격투게임은 아무리 단순하게 만들어도 극복할 수 없는 플레이어간의 스킬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 명제는 다이브 킥, 니드호그같은 실험적 작품이나, 시스템을 단순화하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한 마블 vs 캡콤, 그랑블루 판타지 버서스, 드래곤볼 파이터즈등 수많은 격투게임의 사례를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즈음엔 많은 메이커들이 깨달은듯 합니다. 프레임을 다투는 공방전이 기본인 1:1 대전격투게임은 1) 태생적으로 실력격차를 요행으로 극복할 수 있게 만드는것은 불가능하며, 2) 단순화의 정도가 지나친 격투게임들은 커뮤니티가 길고 굵게 지속되지 못하며, 3) 사실 무작정 게임 메커닉을 단순하게 희석한다고 해서 판매량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사실요.
[어쩌피 한번 뜨면 죽창콤보로 죽을거 그냥 킥한방에 승부가 결정되게 만들자는 마인드로 탄생한 패러디성 게임 <다이브 킥>]
격투게임을 캐주얼 유저에게 어필하고 많이 구매하게 만드는것은 캐릭터와 컨텐츠이며, 대전 메커닉의 깊이와 판매량은 별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한번 뜨면 그대로 죽어버리는 데스콤보가 난무하는 마블 대 캡콤 시리즈가 북미지역 국민 격투게임이 된 이유는 울버린과 류의 대결구도를 볼 수 있기 때문이고, 캐릭터가 추가될때마다 새로운 메커니즘이 계속 추가되며 기본 게임의 규칙도 상당히 깊고 복잡하기로 유명한 스매시 브라더스 얼티밋이 역대급 판매량을 찍는 이유는 싱글플레이어 컨텐츠가 굉장히 충실하고 기존 로스터가 '전원 참전'했기 때문이며, 유명 메이커가 만든것도 아닌 <파이트 오브 갓>, <파이트 오브 애니멀즈> 같은 인디 격투게임이 눈에 띄는 이유는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로스터가 밈이 되어 어그로를 충분히 끌었기 때문입니다. 냉정히 말하면, 아무리 대전을 단순하게 만들려고 발악을 해봤자 격투게임의 경쟁적인 pvp 대전 환경 자체가 캐주얼 게이머들의 취향과 애초에 맞지 않습니다. 격투게임을 많이 팔고싶으면, 대전을 단순하게 만드는게 아니라 쉬운 조작으로 다양한 기술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드는 선에서 여러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흥미로운 대결구도를 그려내며 싱글플레이 컨텐츠를 충실하게 담는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말이죠.
대중들에게 어필한답시고 이상한 방향으로 격투게임을 '너프'하기 시작하면 캐주얼과 코어 게이머 모두를 잃게될겁니다.
[진짜 '신'들이 등장해 서로 결투하는 컨셉으로 어그로를 톡톡히 끌었던 진짜 '갓'게임 <파이트 오브 갓>]
격투게임을, 아니 어떤 게임이든 '너프'좀 하지 마라
제 이런 주장이 비단 격투게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논란거리도 많고 비판할 거리도 많은 제작사지만, 저는 라이엇 게임즈의 성공 비결을 '코어 게이머 마인드'를 항상 고려하고있다는데서 찾고 싶습니다. '이지 투 런, 하드 투 마스터'는 이제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얹을 정도의 표현이지만, 이걸 제대로 만들어내는 제작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드 투 마스터'를 만든답시고 어려운 게임이 아닌 어려운 게임플레이환경을 조성해놓는 게임들도 많고, 반대로 '이지 투 런'을 만든답시고 게임의 깊이까지 모조리 박살이 나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엔 라이엇 게임즈는 항상 전자와 후자의 밸런스를 훌륭하게 조절해왔고 언제나 '깊이있는 게임플레이'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을 기존의 공식을 '파괴하기만'하고, 새로운 히오스만의 깊이를 추구하지 않아 게임의 깊이까지 모조리 박살낸 최악의 케이스 중 하나로 꼽습니다.]
사실 라이엇이 격투게임을 개발한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때도 저는 롤격에 대해 상당히 시큰둥했었습니다. 우선 보이는 모양새가 심히 스트리트파이터 카피스러운 것도 있었을뿐더러, 격투게임같이 노하우 집약적이고 기존 강자들이 많은 판에 라이엇이 뛰어든다는 그림이 잘 상상이 안됐었거든요. 지금도 여전히 많은 게임 커뮤니티에서 롤격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이지만, 저는 이번 영상을 보고 생각이 상당히 많이 바뀌었고 어느정도 관심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발로란트때의 시나리오가 겹쳐보인다고나 할까요. 거부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올라오는 이상한 기분이에요. 여기 저기서 참고한 티가 참 많이도 풍기는 그 모습은 여전하지만, 적어도 라이엇은 게임을 '너프'하진 않을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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