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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1/04 00:12:54 |
Name |
Kai |
Subject |
승천한 황제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패배까지가 유쾌하오. |
두번째 GG가 나오는 순간, 나는 화면에서 눈을 거두었다.
밀랍으로 만들어진 날개를 펄럭였지만 태양의 열기에 녹아내려 추락해버린 이카로스의 모습을... 그런 절망의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각이 없이 하루를 멍하니 보내다보니 고등학생 시절에 모아두었던 책들이 눈에 띈다. 이상의 소설과 시가 담겨져 있는 그것을 다시금 펼치고 깨알처럼 채워진 글자에 시선을 훑었다.
시제 1호
十三人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第一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十三人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의 시를 곱씹으며, 오늘의 첫 경기를 다시금 떠올렸다. 도박적인 레이쓰의 움직임, 세로방향으로 달리는 탱크, 상대의 앞마당에서 견제를 계속하나 결국엔 단번에 밀려버리고 레이쓰의 사용으로 인해 생긴 자원적 압박과 적은 수의 팩토리가 만들어낸 패착... "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라는 귀절은 마치 그의 경기에서 오히려 사용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레이쓰와 내일 있을 프리미어리그 결승, 갑작스러운 박용욱의 입원등과 겹쳐지면서 착찹했던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이상의 책을 책장에 밀어넣고서 그 옆에 있는 단편소설집을 펼쳤다. 이청준의 소설인 줄이 눈에 들어온다.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까지 봤던 것이다.
승천한 광대. 줄타기 한길만을 걸어온 장인인 허 노인과 그의 아들 운. 잔재주는 용서하지 않고, 오로지 줄타기에 있어서의 장인정신을 중히 여기는 허 노인의 가르침 아래서 장인의 경지에 오르는 운...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여인... 운이라는 한명의 남자가 아닌, 줄을 타고 있는 모습을 동경할 뿐인 여인...
문득 소름이 돋았다.
저 여인의 모습은 지금 나의 모습이 아니던가?
임요환이라는 프로게이머가 펼치는 플레이 자체가 아닌, 승리하는 모습에만 연연하고 있는 모습은 나 스스로 깨닫기에도 옹졸하고, 허무했다. 그를 추락시키는 것은 그가 아닌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자기혐오가 일었다.
프로게이머에게 있어서 승리라는 것은 절대가치. 하지만 과연 그의 승리만이 나에게 있어서 가치있는 일인가? 대답은 No였다. 승리만을 가치있게 생각했더라면 시즌이 끝날 때 마다 좋아하는 선수가 바뀌었을테니까.
자조의 웃음. 결국 내가 선택한 그의 가치는 그의 존재와 그의 플레이였다. 비록 승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나에게 있어서 황제이고, 전사이고, 꿈이니까. 승리라는 것은 결국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수적인 것, 승리하면 즐겁지만 패배하더라도 또다른 내일을 기다릴 수 있다는건 언제나 두근두근한 일이다.
아직은 보름달이 되지 못한 달이 추위에 떨며 대지를 비치고 있는 밤. 오늘의 자신감 없던 모습은 훌훌 털어내고서 새로운 내일을 열어 나갈 것을 기대하며,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의 완벽함이 아닌, 당신다움입니다.
Boxer 4 U...
P.S. 글을 쓰다보니 어느새 자정을 지남.
P.S.2. 늦게나마, PGR식구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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