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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8/16 20:03:54
Name 타임머슴
Subject <이야기>그때, 스타의 신이 있었다
휴가 가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최연성, 임요환, 이윤열 선수를 다 합친 극강의 테란선수가 나타난다면..?’하는 생각에 몇 자 끄적거려보았습니다. 등장하는 선수들은 현존 선수들의 이름과 비슷해도(?) 전혀 허구의 인물들입니다.^^


<그 때, 스타의 신이 있었다>
젠장. 또 이기고 말았다.
대 저그전 15연승, 대 프토 20연승, 그리고 마침내 대 테란전 25연승…당장이라도 다른 경기가 더 있다면 그것도 쉽사리 이길 것 같았다. 상대가 누구든, 어떤 전략을 쓰든, 내겐 그들의 전략이 아니 머릿속이 훤히 보인다.
그래서 좋냐구? 천만에.
물론 처음엔 으쓱하기도 했다. 아주 처음엔 말이다. 모두 날 강자라고 불러주니까. ‘테란의 신’이라고 하니까,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게임 때문에 학교도 그만두었고, 집도 나왔다. 올인이었다.
“더 이상 게임하려거든 나가버려!”
아버지는 게임을 싫어하셨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컴퓨터를 던져버린 적도 있었다. 7남매의 장남으로 성실한 은행원으로 살아오신 아버지에게 게임은 너무나도 한심하고 유치한 짓거리였다. 그런 유치한 장난 때문에 아들의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과도 같이 되먹지 못한 일이었다.

“아버지, 건강하세요.”
짧은 편지 한 장 남기고 나는 지금의 윤 감독의 집으로 가출해버렸다. 윤감독과는 우연히 배틀넷에서 만난 사이였다. 그는 나와 딱 5판의 게임을 해보더니 제안을 해왔다.
선수가 되어보지 않겠냐고. 진짜 전쟁터에 나가보지 않겠느냐고.
“넌 크게 돼. 반드시 크게 키워 주마!”
다행히 윤 감독의 집에는 여분의 방과 여분의 컴퓨터가 있었고, 영양가 있는 식사를 챙겨줄 사모님도 있었다. 그러나 내겐 그의 용기와 격려가 밥보다도 고마웠다.
윤 감독은 나를 내세워 스폰을 구해보겠다고 했다. 내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 아니 입상만 하면 스폰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윤감독이 거느리고 있는 선수들은 아직 제대로 된 숙소도 없었다. 윤 감독의 사촌동생이 하는 PC방 한 구석이 그들의 숙소였다.
그중 나이가 가장 많은 변웅석. 그는 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보다 3살이나 많았지만 아직 우승 경력은커녕 입상경력도 없었다. 그런데 감독이 나를 내세워 스폰을 구해볼 작정이라는 것을 알고난 뒤, 눈에 띄게 적대적이 되어갔다.
자신들이 담배연기 자욱한 PC방에서 연습할 때 난 윤 감독의 집에서 연습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는 분노했다.
“야, 네가 뭔데 거기 짱박혀 있는 거야?나와! 나와서 해!”
사실 난 그들에게서 더 배울 것은 없었다. 그래도 변웅석은 못마땅해했다.
나도 처음엔 화가 났다. 마음같아서는 한 대 질러버리고도 싶었다.
남이 자기보다 낫다는 것에 대해 맹목적으로 질투하는 것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일이었으니까. 주먹으로도 난 그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렵게 자란 소년가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더 이상 그를 적대시하고 싶지 않아졌다.
스타실력, 주먹, 그리고 가정형편까지..단 한가지라도 그가 나보다 우월한 것이 있었다면 모르겠다. 얼굴조차 나는 그를 능가했다. 아주 많이….

마침내 내게 있어 처음의 방송경기가 주어졌다.
상대는 막강한 신예 저그로 떠오르는 박세준. 폭풍처럼 몰아치는 스타일이 인상적이지만 이미 폭풍이나 토네이도는 다른 선수들에게 붙여진 별명이라 그에게는 ‘허리케인 저그’라는 별명이 허해졌다. 그는 유난히 수제비를 좋아해서 애칭으로 수제비라 불리기도 했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세준아, 수제비 사줄게-전국 얼큰수제비 체인-‘이라는 치어풀이 붙을 정도였다.
그와 반대로 나는 무명의 신예. 박세준, 박세준을 외치는 관객 속에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윤 감독 뿐이었다. 내가 착석하자, 아니 박세준이 착석하자 관중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서운하거나 움츠려 들지 않았다. 오기 전에도 그랬지만, 그냥 덤덤했다. 마음이 아주 멀리 가 있는 느낌. 난 그저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손을 풀었다.

맵은 노스텔지어.
가장 밸런스가 좋다는 맵. 그러나 밸런스는 별로 문제가 안 된다. 내겐 그렇다. 지금껏 그래왔다. 어떤 맵이든 해법은 있게 마련이다. 맵제작자가 미치지 않은 이상, 특정종족에게만 유리한 맵을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경기는 시작되었다.
난 1시. 비교적 빨리 SCV를 11시 방면으로 보냈다. 왠지 거기에 있을 것 같았고 거의 확인차 보낸 것이었다. 사실은 거의 대부분 예상이 딱딱 맞아서 ‘맵핵’이라는 오해를 받은 적도 많았다. 역시나 그곳에 크립이 펼쳐져 있었다. 반면에 저그는 오버로드를 대각선쪽으로 보낸 모양이었고 난 최대한 빨리 마린 2기를 뽑아 SCV 2기와 함께 저그 진영으로 달렸다. 소위 벙커링을 위해서였다. 안 그래도 해설진들은 내가 방송경기에 처음 나오는 신예 테란이라는 점을 누누히 강조해왔다.
그들은 내가 긴장하지 않으면, 떨지만 않으면, 무난한 경기를 할 것이지만 상대가 상대니만큼 무게는 박세준 선수에게 기운다는 내용의 해설을 했다.

내가 그렇게 만만히 보였을까. 그런데 어쩐다? 난 전혀 떨리지 않으니…
게다가 약간의 두통이 있어서 경기를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너무 일방적인 응원에 조금은 심사가 뒤틀렸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빠른 타이밍에 내가 들어가자 박세준은 잠깐 당황한 듯 하더니 드론을 죄다 몰고 나와 막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좀더 빨랐다. 난 SCV를 좀더 동원했고, 피아노치듯 가벼운 컨트롤로 드론을 꽤 많이 사냥해버렸다. 경기는 일순간에 기울었다.

GG.

다행히도 박세준 선수는 엘리되기 전에 GG를 쳤다. 카메라는 어안이 벙벙한 박세준 선수의 얼굴을 비추더니 곧바로 내게 돌려졌다. 하지만 난 바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정리해서 일어났다.
“이게 웬일입니까? 무명의 신예 테란 선수가 첫 방송경기에서 무서운 저그 박세준 선수를 단 3분만에 물리쳤습니다.”
윤 감독은 내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날 PGR게시판에는 ‘박세준, 너무 방심한 탓’’힘내요, 박세준’’수제비, 좀더 팔팔 끓여라’등등의 글들이 올라왔고 DC스갤에는 얼굴없는 귀신이 운전하는 우주선에 박세준 선수가 매달린 엽기적인 사진이 올랐다.

그러나 나에 대한 글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으니까. 난 그저 신예 테란, 무명의 선수일뿐이었다.

다음 상대는 프로토스의 마법사라 불리우는 ‘장문’. 언제나 기발하고 대담한 전략으로 유명한 선수였다. 메이저 대회에서 이미 2번이나 우승한 선수였다.
우승자 징크스 탓인지 잠깐의 실수로 16강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나 같은 초짜와 경기를 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내게 너무 큰 기회였다.
앞서 이겼던 박세준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나와 같은 신예, 하지만 장문은 진짜 베테랑이다. 그를 이긴다는 것은 큰 강을 건넌다는 것.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미쳤나보다. 전혀 떨리지가 않는다.
“집사람이 네 밥에만 우황청심환을 넣었나보다”
감독님의 농담이었지만 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것. 아무것에도 떨리지 않는 것은 감정의 마비 상태가 아닌가. 이유는 있다.
엄마의 자살. 그리고 그 시체를 내가 발견했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서는 몇 가지 감정이 소멸되었다. 두려움, 슬픔, 그리움…
난 그것들을 전혀 모르겠다. 난 그저 내 눈앞에 닥친 것들을 쳐내며 앞으로 나아갈 뿐.
스타크래프트는 내가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승수’로 명백히 보여준다. 그래서 난 스타에 빠졌는지도.


맵은 기요틴. ’장문틴’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장문은 이 맵에서 강했다.
승률 90%. 그렇다고 프로토스가 유독 유리한 맵은 아니었다. 테란에게도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내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장문은 기요틴에서 항상 같은 패턴으로 건물을 짓는다. 넓은 입구를 2개의 게이트웨이로 막고 안쪽에는 포톤캐논으로 철벽수비. 도저히 마린이나 저글링따위가 돌파할 수가 없다.
따라서 2개의 게이트웨이를 완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 또는 드랍십을 통해 돌아서 들어가는 것. 난 그 2가지를 다 해볼 생각이었다. 우선 일꾼 한 기를 보내 끊임없이 게이트웨이 워프를 방해하고 빠르게 드랍십과 탱크를 생산해 성벽 위에 떨구는 것. 너무 이론적이라구?
그러나 어쩌지? 성공했는걸.

장문은 GG타이밍을 놓치진 않았다. 다만 해설진이 해설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았다.
“ 아, 이게 웬일입니까? 저 선수 첫경기에 이어 오늘 또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네요.”
“허허허허허허허허..기가 막히네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오오오옷!”
그들은 이제서야 내 이름 석자를 기억하려 하는 듯 했다.
임윤성을…

그렇게 달려왔다.
단한번의 패배도 없었다. 윤 감독은 스폰을 얻었고, 연습생들도 숙소를 갖게 되었고 변웅석도 더 이상 내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묵묵히 연습게임을 해주었다.
그러나 사실 난 그리 많은 연습을 할 필요가 없었다. 우선 미리 맵핵을 켠 듯, 경기만 시작되면 상대 진영의 위치가 파악된다는 것. 그리고 각 맵마다 또는 상대마다 어떤 식으로 경기를 풀어야하는 지가 바로바로 정리된다는 것. 이것은 연습의 결과가 아니었다.
억지로 설명한다면 본능 같은 것이었다.
내 목숨을 노리고 덤벼오는 자객의 존재를 느끼는 본능.

그래서 난 승승장구했다. 그 탓인가.
게임에서의 적들이 실제 생활에서도 적이 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완전 신예에게 완벽한 패배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오가며 나를 보아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옆에 있어도 없는 듯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우리팀에서 경기출전하는 선수는 나 하나였기에 방송국 대기실 구석자리는 늘 내 차지였다. 그것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언제 어디에서도 적으로 만날 수 있는 그들과 평소에는 전혀 다른 모습인양 웃으며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 모두, 언젠가 내가 꺾어야 할 상대들일 뿐. ‘스플래시 이미지’라는 곳에서 내게 사진 찍을 포즈를 부탁해왔다.
“얼굴도 잘생기셨네요. 영화배우 조승우 씨 같아요.”
종종 들어온 말이긴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난 절대로 웃지 않는다는 것.
내겐 기쁨도 감정도 사라졌으니까. 나는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윤성아….문제가 좀 생겼다.”
“네?”
여전히 승률 100%를 달리고 있던 때였다. 거짓말 같은 기록이긴 하지만 내겐 너무 당연했다.
“네가 그렇게 계속 이기니까, 그게……다른 팀들이..네가 나가는 경기에 불참선언을 했다는구나.”
“그래서요? 그래서 저더러 져 달라는 건가요?”
“방송국에서도 난처해하구..”
그날 처음 윤 감독이 작게 보였다.
아니, 이 나라의 스타 시장이 너무나 작고 초라해보였다. 내가 뭐 그리 대단해서 나를 못이기고, 그것도 모자라 보이코트를 하다니.
“그래요, 알았습니다. 내일 경기는 져드릴게요. 결승전 5전 3선승제에서 무참히 져드릴게요.”
“그게 아니구…이기더라도 좀 힘겹게 이기란 말이다! 지금껏 너는 너무 강했어. 그게 오히려 비현실적일 정도로. 이상한 소문도 돈다. 내가 너에게 상대편 위치를 몰래 알려주는 암호를 갖고 있다고 말이다. ”
그날 난 밤을 꼬박 새웠다. 그동안 내가 했던 경기 리플레이를 보면서.
보다보니 웃음이 나왔다. 모두 다 너무 싱겁게 이긴 게임들. 정말 맵핵이라도 켠 듯, ‘Show the money’라도 한 듯. 그렇게 보고 또 보면서 아침을 맞이했다.

처음 올라간 결승전. 상대는 토네이도 테란, 이용열. 그는 한동안 부진을 겪은 탓인지 많이 긴장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일주일간 거의 모든 경우의 수에 대처하는 훈련을 했다고 한다.
극초반 벙커링이든, 후반 물량전이든..안 해본 것이 없었단다. 그만큼 나를 두려워했던 것인가.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난 이길 생각이 없는데.

난 지극히 편안하게 경기를 하기로 했다. 정찰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본진에서 자원 조달하고 지극히 정석적인 경기, 방어적인 경기, 전략 없는 경기…
그런데 그렇게 또 3승을 하고 말았다. 우승이었다.

경기장 내는 정적이 흘렀다. 관중이 환호하지 않는 우승자, 그게 나였다. 나는 비틀거리며 타임머신에서 걸어나왔다. 간간히 박수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우르르 나가버리는 팬클럽 회원들이 더 많았다. 그때였다.

“윤성아, 잘 했다!”
엄마의 목소리였다.
“엄마?”
나는 두리번거렸다.
“장한 내 아들…정말 잘했어. 이제 엄마도 맘 편히 떠날 수 있을 거야. 대신 이젠 집에 들어가겠다고 약속해줘. 네 아빠도 이젠 많이 달라졌단다. 너를 많이 그리워하고 계셔..”
난 죽었던 것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난 팀을 떠났고 스타를 그만두었고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같은 은행원이 되었고 평범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고 아이에게 ‘게임은 하지 마라, 공부해야지’하고 잔소리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아직까지도 나의 무패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나 역시 내가 그 그 전설의 주인공임을 밝히지 않는다. 아직은 ‘내기 스타크래프트’로 점심값을 해결하는 재미가 쏠쏠하니까 말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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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갈래요
04/08/16 20:28
수정 아이콘
'임'요환,이'윤'열,최연'성' = 임윤성.. 괜찮은 이름인데요 -_-b 재미있네요 잘보았습니다.
i_beleve
04/08/16 20:53
수정 아이콘
하하 다봤다 ~
녹차빵
04/08/16 21:42
수정 아이콘
재밌네요. 저런 고질라급 (!!)선수가 나온다면 난감하겟지만 그 또한 스타의발전에 한몫 단단히 해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60연승은... -_-;;
04/08/17 00:00
수정 아이콘
하핫^^
100퍼센트^^ 쿠쿠~
04/08/17 10:13
수정 아이콘
제 얘기를 이렇게 친절하게 소설로 정리해 주시니 난감.. 하하.. ^^@(퍽)
타임머슴
04/08/17 10:31
수정 아이콘
아...[shue]님이 바로 그 전설의 주인공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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