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1일 So1배 스타리그 A조 테란 임요환 대 프로토스 박지호 경기
프롤로그 가장 훌륭했던 스타리그 에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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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트 815,.. "근성“
2세트 네오포르테... “해법”
3세트 라이드오브발키리 “무리수”
4세트 알포인트 “타이밍”
5세트 다시 815 “무아지경”
5세트 815 “무아지경”
임요환 테란 11시 VS 박지호 프로토스 7시
임요환 승
“이쯤되면 둘 다 무아지경이죠” 엄재경은 흥분한 목소리다. 수없이 어지러운 국면이 펼쳐졌다가 사그라지길 반복했다.
마지막 경기 초반 박지호는 판세를 읽지 못했고 무작정 치받았다. 어쩌면 기세에만 기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잠깐은 그가 들이받는 기세만으로도 황제가 움찔할 정도였다. 그에겐 초반부터 승기를 잡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실리를 챙긴 뒤엔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한 발 빨랐던 앞마당을 바탕으로 세력을 두텁게 쌓아갔다면 어땠을까. 긴 호흡으로 운영하는 게 정석이었다. 이를 건너뛰다니. 시합장 외곽에서 지켜보는 관중들이 일순 술렁였다.
그때 그는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 거두는 작은 이득조차도 허방을 딛고 선 것 같다. 내 진영과 모서리에서 착실히 실리를 따냈지만, 이는 상대가 그리는 큰 그림에 갇힌 것은 아닐까, 불안감이 스민다.
게다가 그의 머릿속엔 허무하게 내준 이전 두 시합의 잔상이 어른거리고 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던 그가 뒤미처 두려움에 휩싸인 것일까. 그는 어둠 속에서 그동안은 막연하고 보이지 않았던 윤곽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환상에 시달린다. 이 시합이 그토록 무거운 것인가. 책임과 중압감마저 서서히 그를 옥죄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의심을 지워야만 한다. 승부, 오로지 승부다. 의심의 늪이 깊어질수록, 그는 숨가쁘게 세력을 펼쳤다. 훗날 그는 초반 수가 완착이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돌이킨다고 해도 다른 수를 쓸 순 없으리라. 손끝이 의지하는 어떤 경향성. 그는 그때 불가사의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강렬한 감각에 쏠리고 몰입한다. 상처를 입으면서도 덤벼든다. 이는 본질적으로 속수무책이다. 이 시합에서 박지호는 자신의 감각과 직관에 붙들려 있었다.
1.
박지호는 초반 한 가지 과제에 매달리고 있다. 상대의 진영에 부딪혀 깨부수고 돌파하는 것. 단단하게 내 진영을 쌓는다는 생각을 선택지에서 지운 것처럼 보인다. 지금 기세에서 밀리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시합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황제가 그 초조함을 눈치 못 챘을 리 없다. 실수하지 않는 곳에만 수를 펼친다. 묘수도 악수도 없다. 한없이 기계 같은 착수다. 단 실수엔 어김없이 응징한다. 수비를 통해서 득점을 올린다.
날카로운 공격과 기습 명수가 스타일이 변한 것인가. 아니, 한없이 실리를 좇는 태도는 예전이나 이때나 마찬가지다. 그땐 찌르기가 옳았다면, 지금은 버티기다. 정수는 바뀌는 법이라고. 더 이상 한 가지 승부수에 의존하는 외골수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반면 신예는 돌파와 기세가 전부를 걸고 있다.
노련한 정석과 기세가 맞붙는 형국이다. 노장은 성채를 높게 쌓은 채로 벽에 다가오는 적만 떨어트린다. 이러한 전략이 신예를 더 초조하게 만든다. 황제는 신예의 행마를 차근차근 맞받아주면서, 시합을 길게 끌어간다. 지리한 승부로 끌어들이는 것만으로도 박지호를 기진맥진하게 만든다는 점을 알고 있어서다.
서산이 낙조로 물들고, 가야할 길은 아득하게 멀어진다. 신출내기가 서두르기 시작한다. 손끝은 이제 머리가 아니라 기질에 이끌린다. 그의 행마는 점차 우격다짐이자 막무가내다. 막다른 벽을 온 몸으로 밀고 있다. 오늘 이후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지금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고.
파상공세를 펼치지만, 두터운 방어가 속도를 늦춘다.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박지호의 마음속에선 확신과 회의가 번갈아 일어났다. 내 손 안에 상대의 진영을 가르는 날카로운 칼이 있다는 확신과 내 수가 상대에게 훤하게 읽힐 것이라는 의심이다. 이 칼로 정말 상대를 가를 수 있을까. 어느덧 물음이 점점 커져 그를 잠식한다. 의심과 스스로 낸 질문 속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오히려 이날 앞선 승부에선 신예의 판단이 황제보다 한발씩 더 빠른 편이다. 그럼에도 의심을 떨쳐내고 자신에게 확신을 갖는 것은 실력과는 다른 문제다. 당대의 최고수들과 교류하며 수를 나누는 이들이 유리한 건 그래서다. 상대는 되레 신예보다 새로운 수를 빠르게 흡수해왔고,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왔다. 반면 스스로의 역량과 직관에 좀 더 기댈 수밖에 없던 신예다. 그점에서 상대와 이미 격차가 벌어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2.
이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쪽은 황제다. 대체로 이날 관전 포인트는 황제가 다시 한 번 결승 무대에서 설 수 있느냐에 맞춰져 있다. 그러니 사실 덜덜 떨리는 쪽은 황제여야 한다. 이날 첫 시합에서 그의 전체적인 플레이는 경직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노장은 신예의 초조한 행마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아간다. 먼저 승부수를 걸기 보다는 신예의 선수에 맞받아치는 수순으로 응수한 것도 사실 시작이 곤궁했기 때문이다. 맞은편에 몸을 기대 위기를 벗어나는 노련함이다. 그 사이 황제로 불리는 상수는 강공을 맞이하면서도 신예의 약점을 객관적인 위치에서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다.
절정의 승부사였던 무하마드 알리와 불굴의 인파이터 조 프레이저가 1975년 10월 1일 필리핀 마닐라 아라네타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치른 통산 세 번째 승부와도 닮아있다. 신성으로 떠오르던 조 프레이저가 무패의 복서 알리를 강펀치로 몰아간 끝에 처음으로 패퇴시킨 1차전, 절치부심한 알리가 노련한 운영으로 만회한 2차전에 이은 둘 간의 마지막 경기였다.
조 프레이저는 맞으면서도 상대 몸쪽으로 파고드는 강골의 인파이터였다. 저돌적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스타일로 상대를 위협했다. 그날 경기서도 조 프레이저는 마치 연속 사격을 하듯 알리를 두드렸다. 선천적으로 오른쪽 팔이 짧고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 조 프레이저는 자신의 치명적인 결점을 의식하면서,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투지를 불사르는 전사였다. 약점과 강점이 뚜렷하게 공존했다.
알리는 초중반 난타전에서 몸이 뒤로 밀리자 로프에 기댄 채로 조 프레이저의 주먹을 흘려보냈다. 그러면서 상대의 빈틈을 살폈다. 그가 찾은 약점은 조 프레이저 부어오른 오른쪽 눈두덩이였다. 안면에 데미지가 쌓인 탓에 조 프레이저의 시야는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알리는 상대 눈가로 주먹을 뻗으면서 공세로 전환했다. 경기가 후반에 접어들 무렵부터 그는 조 프레이저의 약점을 집요하게 노렸다. 저돌적인 인파이팅에 밀려 스스로 죽음 근처까지 갔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위기를 맞은 알리는 그렇게 기사회생했다. 조 프레이저의 약점이 들춰진 시점부터 승부는 기울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박지호의 약점은 무엇인가. 지금 신예가 점차 다급해졌다는 것만큼은 훤하게 보인다. 아무런 리듬감 없이 그저 몰아치는 강수 일변도는 받아내기 수월하다. 신예는 지금 어떤 생각인가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녀석이 스스로의 결점을 의식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장기전에 이를 만한 체력이 바닥난 것인가. 아님, 수읽기에 자신을 잃은 것일까. 첫 4강의 부담이 그리도 크단 말인가. 황제는 차츰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이라는 점을 직감한다.
그날 경기서 관중들은 무하마드 알리를 연호했다. 경기장 에어컨이 망가진 탓에 조 프레이저는 코너에서 쉬는 동안 눈가에 얼음찜질조차 하지 못했다.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핸디캡이 끝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왜 하필 이럴 때 땀이 이렇게…’ 신출내기 박지호는 긴장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시합은 어지러운 초반을 지나서 서로 세력을 만드는 단계로 나아간다. 박지호는 상대의 무심한 응수를 보며 백전노장을 마주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당혹감을 느끼면서 기세라는 단어를 바둑돌을 쥐듯 매만지고 있었다. 기세에서 밀리면 모든 것이 끝이다. 이기는 쪽이 결승에 가는 승부처였다. 살벌한 전쟁터로 나오라. 그의 착수는 지도 위에서 아우성치고 있었다. 뒤엉킨 난전이어야 오히려 숨통을 틀 수 있을 것만 같아서다.
그러나 상대는 고요하다. 황제는 이미 수차례 우승 영예와 자신의 팀을 창단하는 것으로 지난날을 보상받았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것은 신예 쪽이다. 팀원들과 코치는 어차피 잃은 것도 없으니 편하게 붙어보라고 했다. 잃을 것이 없다니. 게임이라는 한 가지 기예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나. 그럼에도 아무것도 이룬 것도, 얻은 것도 없다는 생각이 그를 촉박하게 몰아세우고 있었다.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패기가 벼랑 끝에 선 감각과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실력을 갖추고 특히 오랫동안 한 순간만을 준비해온 이들이 되레 절정의 승부처에서 종종 막막하다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동안 하나만 보고 달려온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면 좌절의 깊은 구렁으로 빠져들 테니까. 이들에게 승부처란 늘 막다른 길에 있다.
그가 그랬다. 격렬한 감정이 휘몰아친다. 상대를 넘어서지 못하면 열패감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할지 모른다. 지난날에 대한 상념, 미래에 대한 불안이 붙들려 있었다. 더구나 이는 계속 부풀어오른다. 그러한 생각에 머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으로선 치명적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조 프레이저의 왼손 훅이 허공을 가른다. 분전이었다.
3.
박지호가 실리를 찾지 못하는 데서 터무니없는 승부를 걸다가 손해를 본다. 중압감은 더 커진다. 막바지에 이른 시점에서, 그것도 먼저 두 번이나 승리하고도 이렇게 흔들리다니, 이해하기 어렵다는 수군거림이 나온다. 승부처를 넘기면 뒤따를 명예 같은 것들에 마음이 쓰였던 탓일까. 적잖은 사람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으므로?
해설자는 그의 방금 몇 번의 악수가 심리적인 요인이라고 짚어낸다. 대체로는 신예의 미숙함이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려 있다. 지금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의 격랑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리도 표현할 수 있다. 감정을 받아들이고 지난날을 회고하는 데 있어 그는 도무지 익숙해지기가 어렵다. 한없이 미숙할 수밖에.
그는 승부처에서 깨달았다, 그동안 대답하지 않고 넘겼던 질문들이 그토록 많았다는 점을. 이를테면 그가 부산을 떠나 프로팀에 입단하겠다는 생각만으로 서울로 건너왔을 때 그리고 이후로 이어지는 모든 순간들. 그는 순간마다 마음이 가는 쪽을 택했을 뿐이다. 그저 먼 곳으로 도피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마음 한켠에서 질문이 일어나자, 신예는 속앳말을 삼킨다. 아니, 도망치지 않았다고. 그저 이날의 승부만을 위해서 버텨왔다고. 그가 묘한 반발감을 느낀다. 세력을 펼치는 움직임이 잠시 거칠어진다. 일순 강한 파도가 바위를 친다.
모든 선택엔 책임이 따른다는 건 모르지 않았다. 다만 거기 무슨 책임이 있다고 한들 그게 어떤 형태가 될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마주해야 하는지 그는 그땐 정확히 알지 못했을 뿐이다. 때가 되면 외면하지 않겠다고, 그게 무엇이든 치러내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그리고 책임의 윤곽이 이번 경기에서 처음으로 드러났다. 대결이라는 아주 간명한 형태였다. 그는 자신이 무겁게 짊어지고 있었으되,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던 무거운 것의 정체를 처음으로 대면한 듯했다. 그동안 삶의 행적과 거기 수반하는 책임과 관련해 청구서를 일괄적으로 받아든 기분이다. 가격표를 치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라는 점도 잘 안다. 긴장을 놓을 수 없다.
4.
박지호는 수년 전 처음 몸담았던 팀 연습장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순간들을 되새겼다. 시작은 플러스팀의 비좁은 숙소였다. 한 방에서 서너 명이서 비좁게 자는 곳. 저녁 어스름만 돼도 동굴처럼 어두워졌다. 그들에겐 마땅한 수익원이 없었고, 박지호는 앞날을 이렇게 맡겨도 좋은 것인지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발악하듯 더 좋은 환경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감독간의 협의를 통해 이적하게 된 POS 역시 열악하긴 마찬가지다. 월급은 기껏해야 용돈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어느 순간엔 감내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최고가 아니고선 생계도 어려운 게 이 바닥 인생이었다. 당분간 그의 목표는 적을 압도할 수 있는 절대수와 실력을 쌓는 데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대로 휘저을 뿐인데 적을 격파하는 스타일을 꿈꿨다. 바둑으로 치면 대체할 수 없는 기풍과 완벽한 수를 체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토록 그가 완벽하고도 만족스러운 전개에 집착했던 이유란 무엇이었을까. 우승을 해서 명예와 돈을 쓸어가기 위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에겐 자신을 증명하는 것 또한 중요했다. 내 안의 직관에 집중해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승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최고라고 인정받는 것. 그는 자신의 뮤즈를 실현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이점에서 스타일리스트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점을 알고, 최적화의 시대를 빠르게 열어젖힌 황제를 비롯해 절정의 테란들과는 묘하게 엇갈린 길을 걸었다.
박지호는 목표를 정한 이래 그는 생계나 생활에 대한 질문이라면, 일단 미뤄두었다. 자신의 힘으로 정상이 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불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순간, 이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결과였다. 그는 오래 전부터 큰 무대에 서는 순간을 기다려왔다고 되뇌었다.
어쩌면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집을 떠나올 때부터 모든 것을 이 승부에 걸었던 것은 아닐지. 과연 오래전부터 그러지 않았느냐고. 그동안 외면해왔던 질문을 이번엔 그가 먼저 스스로 던진다. 그러나 막막하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정작 앞날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땐 자신이 가는 방향을 의심한 적이 없다. 더구나 질문은 꼬리를 문다. 이 승부는 과연 나 자신에게, 또 팀에겐 어떤 의미일까. 4년 전 여기 입문하기 위해 대학을 그만둔 결정은 옳았던 걸까. 그런 질문 뒤엔 어김없이 적막이 감싼다. 한낱 기예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박지호는 막상 그렇게 원하던 무대를 앞두자 불안과 의문에 휩싸인다. 그는 밀려드는 생각에 서서히 적셔지고 있다.
특히 그는 시합장에서도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고향인 부산 전포동에서 작은 노점상에서 튀김가게를 하던 어머니는 프로게이머라는 길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가족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그때는 본인조차 미래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아연한 심정이었다. 그때 이후로도 종종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확신할 수 있는 길인가. 이 길을 가는 것이 맞을까? 제대로 된 대답을 내리지 못한 채 시작한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돈? 명예? 최강자에 오른다면 그런 것들이 정말 따를 것인가?
또래 주변인들에게 물은들 그의 실력이 최고라고 치켜세우기만 했다. 그게 한동안은 자신감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 고향 밖 다른 곳에 어떤 고수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을 굴릴수록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될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고향을 떠나왔다. 그때 그가 부여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였다. 자신과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팀 내 집단 연구를 통해서 종족별로 전략-전술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하는 시대에 박지호는 자신의 직관과 충동을 앞세운 스타일리스트로 뒤늦게 당도했다. 그는 가장 나다운 플레이로 누구든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쥔 채로 서울로 올라왔다.
박지호는 지금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에 대해 단호히 대답한다. 입문할 때부터 줄곧 강자를 꺾고 결승으로 가는 순간을 기다려왔다고.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고. 지금 이 순간이 내게 중요하다고. 의식적으로 대답을 건져올린다. 뜻밖에도 그 작위적인 대답이 더 깊은 의심의 밑바닥을 뒤흔든다. 무엇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는가. 어려웠던 시절이 스쳐지나갈 때에도, 의지의 발화점은 흐릿하게 지워져 있다. 그게 과연 의지로 결정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저 고요한 물길이 흘러온 길을 따르듯 자연스럽게 걸음을 내딛은 게 아닌가. 생각해보니 목적이라곤 그때그때 눈앞의 상대를 꺾는 것 외엔 없었다. 우승이라는 목표가 구체화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가다가 고개를 뒤흔든다. 우승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상대를 누르고 결승에 올라 결국 최정상에 선다. 더할 나위 없는 영예와 보상이 기다릴 것이다. 왕좌에 등극하면 그를 둘러싼 대우도 달라질 것이다. 이점만이 중요하다. 지금은 그 생각만 해야 한다. 그가 속으로 다짐을 굳힌다. 잊자, 매달려야 할 일은 눈앞의 승부뿐이다. 삶에 있어 중요한 갈림길이다. 물러설 수 없다. 승부에서 다시 불꽃이 튄다. 그러나 그로선 불행히도 시합이 막바지로 흐르자 그동안 미뤄두었던 질문들이 수면 위에 차츰 오른다. 그땐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고. 박지호는 회고했다.
5.
시합은 장기전으로 흐를 조짐이다. POS 하태기 감독과 박용운 코치가 관중석에서 무거운 표정을 한 채 승부 양상을 살피고 있다. 박 코치는 좀 전 선수와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팽팽한 승부처의 빈틈으로 툭 터져나온 그의 한 마디가 맥없이 느껴져 곱씹게 됐다.
“우승하면 상금 나눠주고 싶어요”
승부가 원점으로 돌아간 네 번째 시합이 끝난 뒤였다. 박용운은 녀석의 긴장된 얼굴을 보며 적당한 격려의 말을 고심하던 중이었다. 지금 우승 생각은 이르다는 게 코치의 생각이었다. 그저 침착해줄 것을 당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시합에 들어간 지호는 무척이나 긴장에 짓눌린 것처럼 보인다. 녀석에게 이 시합의 의미는 무엇일까. 턱없이 흘러가 버린 세월에 대한 보상? 아니면 상대를 어떻게든 꺾고 말겠다는 승부욕의 실현? 우승자로서의 명예? 팀과 동료의 안정적인 후원 기반을 마련하는 것?
무대에서 박지호는 그러나 종류의 막중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박지호는 게임 중에도 어떤 상념에 이르렀다가, 떨치기를 반복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흔들릴 수밖에. 어쩌면 코치에게 한 말도 우승 뒤의 상금이든 무슨 종류의 보상이든 다 내려놓고만 싶다는 말일지 모른다. 그렇게라도 마음을 간신히 다잡으려는 것일까.
그러나 그의 말은 결국 자신이 해내야만 한다는 묘한 책임감으로 되돌아올 것이리라. 박용운 코치는 녀석이 그런 생각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느냐가 시합의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쉽진 않을 것이다. 어렵사리 찾아온 기회임에 틀림없으니까. 아무리 신예라고 한들 수년 동안 삶을 갈아 넣어서 내딛은 자리다.
동시에 박지호는 많은 이들의 기대까지 의식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만약 우승을 한다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될 터. 기업 후원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 동료들과 함께 더 안정적으로 연습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될 수도 있다. 맞은편 황제로 불린 사내도 그런 수순을 밟아 큰 후원을 이끌어내지 않았던가. 황제의 팀이 우승 이후 갑작스레 커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연습장에서 모든 것을 내걸고 함께 한 동료들의 얼굴들도 박지호로선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리라.
그런 생각이 스밀 때 허망하게 점수를 잃는 실책이 나온다. 박용운 코치의 표정이 굳어진다. 지호가 결국 자신을 짓누르는 헛깨비를 떨쳐내지 못했다는 점을 알아서다. 신예는 지금 앞에 마주한 적수 이외에 또 다른 무엇과 싸우고 있다. 이러다간 정작 눈앞의 상대는 놓쳐버릴 지도 모른다. 결국 우려대로 흘러간다. 초조함이 패착이 될 터였다.
어느덧 황제가 먼저 찌른다. 세력을 쌓아가던 신출내기가 반격해 오랜만에 실리를 따낸다. 그러나 박지호는 병력을 힘껏 상대편으로 밀어올리다가 그 작은 이익마저 잃는다. 일진일퇴. 방송 해설자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는 평을 남긴다. 그러나 실은 승부는 기울기 시작했다.
상대는 1시부터 중앙에 이르기까지 길게 연결된 형세를 만들었다. 이를 무너트리기 위해 수시로 덤벼들던 박지호도 힘이 다하는 것을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그 사이 견제를 당한 것도 뼈아팠다. 승부가 늘어지자 기세좋게 덤벼들던 박지호가 차츰 도망치는 모양새가 된다. 형세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느 순간에도 최선의 수는 있기 마련이다. 사는 길로 나아가는 수가 분명 있으리라. 아직 묘수가 나올 여지마저 봉쇄된 것은 아니다. 최선의 수는 패착까지도 한 번에 바로잡기도 한다. 이번에 찾아야 할 묘수는 더욱 각별한 것일지 몰랐다. 이 시점의 묘수는, 이번 승부의 의미를 생각할 때, 박지호의 지난 날들을 모두 되돌릴 수가 될 터였다.
그는 3년 전 첫 프로팀 숙소에 들어올 때를 떠올린다. 어떤 수는 정작 둘 때엔 묘수인지 악수인지 보이지 않는다. 경기가 끝난 뒤에야 무릎을 치는 탁월한 수였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바둑에서도 종종 고수의 수는 착수 땐 너무도 엉뚱하고 돌연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수가 보기엔 종잡을 수 없는 포석이다. 판세가 굳어질 쯤엔 왜 그 수가 특별했는지 드러난다.
그날 게이머 길을 선택한 게 정수였는지 악수였는지 아직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 옳았는지 아닌지는 이 승부에서 판가름 난다. 그날의 결정이 묘수인지 악수인지 여부는 여전히 가려져 있다. 잡기 따위에 왜 인생을 거느냐고 말리던 사람들조차 승부수였음을 알아차리며 뒤미처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때가 됐다고 생각한 것일까. 잠시 숨고르기를 하던 박지호가 적의 진영을 어지럽게 넘나든다. 이를 악물고 다시 큰 싸움을 건다. 흐름을 끊지 못하면 더 이상의 승부는 의미없다. 더 이상 확장을 펴릴 곳도 마땅치 않다는 판단도 깔려있다.
상대는 지금 대제국을 펼쳐놓았다. 이미 중앙까지 도모했다. 거기마저 끊지 못하면 살 길이 없다. 지금 찌르는 것은 묘수인가. 악수인가. 일단은 내친걸음이다. 병려글 적진 깊숙한 곳에 밀어넣는다. 대형 스크린 위에서 신예의 병력이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코치를 비롯해 관중들은 숨을 죽인다.
‘아차’
불현듯 정신이 든다. 사방에서 울리는 둥둥 북소리를 듣고서다. 이는 상대의 덫이다. 병력을 몰고 온 황제가 언덕위에 선다. 신예가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형국이다. 이제 온 사방이 막혔다. 북소리가 점점 커져간다. 신예는 이를 악 문다. 죽음의 그늘이 그를 덮쳐온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이었단 말인가.
박지호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다음 수를 더듬어가고 있었다. 결국 손끝은 기질에 이끌린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 공격으로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병력은 점점 더 사지로 들어가고 있다.
6.
무엇이 패착이었나. 고집스러운 스타일? 과연 그동안 박지호가 추구해온 완벽한 수란 철저하게 자신의 흥과 개성을 따르는 것이었다. 확고한 자기 확신의 실현이었다. 대회 4강에 이르기까지 빠르고도 압도적인 공격 일변도로 적을 깨트리는 데 집중한 이유 중 하나는 스타일의 실현이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당대의 패권을 쥐겠다는 자신감이 그를 강하게 추진했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적을 갈랐다.
그는 상대방을 숨 막히게 밀어붙이며 자신의 세력은 화려하게 펼쳐냈다. 모든 게 그가 꿈꾸고 그리던 이미지였다. 직관적인 수읽기와 한 발 빠른 공격으로 판세를 쥐고 흔드는 게 그의 특징이었다.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화려한 기예와 감탄을 이끌어내는 예리한 창끝이었다. 필화라면 붓으로 굵은 획으로 거침없이 내달리는 지옥도의 스타일리스트이리라. 이를 마주하는 상대로선 숨쉴 틈도 없이 막아내다가 지치게 된다.
그는 이러한 스타일을 스타판에서의 가장 유효한 해법이자 절대수로 만들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동료에 비해 아주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예에 수년을 매달렸다. 한 발 빨리 세력을 구축하고, 한 발 빠르게 찌르는 데 골몰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스타일이 곧 완벽한 행마이자 포석, 정수가 되는 형태를 꿈꾼 것이다.
완벽한 수에 대한 집착. 이는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달랐다. 그는 더 이상 자신만의 수라는 허울에 집착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완벽하고도 유효한 행마를 발굴했다면, 그것은 패러다임이 될 터였다. 이는 곧 정석이 된다. 정석을 완벽하게 체득해서 구현하는 자가 당대를 평정하는 것이다. 그는 적어도 이미 굳어진 정석을 의심하지 않는다.
황제는 이전엔 누구보다도 남들과는 독창적인 수싸움을 내건 스타일리스트였다. 기막힌 묘수로서 판을 흔드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그가 입문할 무렵엔 마땅한 정석이 정착하지 않았을 때였다. 스스로 정석이 됐으나, 이후로 그 자신만의 스타일에 매달리다가 침체를 겪기도 했다. 재기할 수 있었던 건 오랫동안 고수했던 자신만의 스타일, 묘수 중심의 플레이를 버린 뒤였다. 그가 새시대에 골몰한 것은 최적화다.
전년도에 오랜 라이벌 홍진호를 꺾어내면서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던 벙커링 역시 상대적으로 신인이었던 나도현의 스타일을 참고해 최적화를 연마한 덕분이었다. 그땐 그 전략이 가장 유효했고, 정석으로 통했다. 이는 언젠가 극복될 테지만, 그럼 또 다른 정석으로 건너가면 된다. 황제는 최적화를 의심하지 않는다. 자기 스타일로 밀어붙이며 우격다짐을 하는 쪽보다는, 그 시대의 가장 주류적인 패러다임을 빠르게 흡수하고 이를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나아간 것이다. 최적화 수순을 착실하게 따르는 것. 불확실성에 도박을 걸지 않는 것. 그저 차갑게 변수를 제거해나가는 것.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이영호식 무색무취 혹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절대강자의 시대를 누구보다 먼저 예비했던 것일지 모른다.
마치 알파고 이후의 바둑계처럼 말이다. 개별 기사의 기풍과 스타일이 중시되는 흐름에서, 한없이 완벽한 알파고처럼 변수를 없애는 방향으로 바둑은 진화해나가고 있다. 승기를 잡은 뒤 압도하며 옥죄는 것보다는 한 집 차이로 미세하게 이기더라도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는 식이다. 기계는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게끔 내버려둔다. 그리고 상대가 무너지더라도 끝까지 추격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일에만 매달린다. 변수를 만들지 않는 스타일. 스타에도 신이 있다면 꼭 그런 식이리라. 돌이켜 보건대 이날 시합은 그점에서 하나의 분수령과 같았다. 외골수처럼 매달리는 기풍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시합이기도 했다. SO1 당시에도 스타판은 초 단위까지 계산하는 최적화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박지호 스스로가 이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음에도 끝까지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한 것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마지막 경기서도 황제는 공격을 해야 한다는 마음을 누르며 두텁게 벽을 쳤다. 반면 신예는 너무도 고집스럽다. 빠르게 돌진해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를 뒤흔들겠다는 것. 그러나 자칫하면 스스로를 소진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게다가 서로가 세력을 교환하는 치열한 전투 국면에선 수읽기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허탈한 패배를 내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신예의 스타일은 힘싸움을 통해 병력을 수시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점수를 쌓아나가야만 이득이다. 그는 수읽기가 탁월했기에 이러한 스타일이 가능했다. 보통의 경우 싸움이 번번하면 실수도 잦아지기 마련이다. 스스로 자멸하기도 쉽다는 점에서 곡예와도 같았다.
7.
지금 신예는 막다른 길에 몰려 있다. 무엇이 자신을 여기까지 이끈 것일까. 여전히 그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 입문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움직이게 한 의지라고 할 만한 그것은 무엇인가. 박지호는 의식적으로 우승이며 승패과 같은 언어의 형태로 해답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바지에 이르러서 긴박해지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미지의 형태로 아무런 계통도 없이 흘러 지나간다. 부모님의 얼굴, 고향 집, 부산의 친구들과 같은 모습들.
또한 그가 압도당한 하나의 이미지도 하나 있다. 줄지어 달려가는 자신의 병력들. 그는 이를 통해 맞수를 압도하는 쾌감을 또렷하게 느꼈다. 스타크래프트를 접한 초기에도 그랬다. 그는 이후로도 그 감각을 자꾸만 되살리고자 했다. 다음에도 비슷한 구도를 다시 그려볼 수 있을까. 그는 이 감각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그만의 스타일이 굳어졌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그는 그때의 쾌감을 떠올린다. 다시. 또 다시 손끝이 가장 익숙한 경향성에 이끌린다. 서예가가 자신만의 굵기와 농도를 반복하듯이. 미술가가 특정한 터치에 매달리듯 말이다. 누군가는 붓을 들고, 정으로 돌을 쬐고, 혹은 문장을 퇴고하듯. 완성된 형식은 그 자체가 의미이자 가치다. 그 역시도 어떠한 감각에 붙들린다. 바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쾌감이다. 그는 지금까지 추구하는 대로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해 최강이 되고자 했다. 스타일을 완성하면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그점에서 그에게 스타일은 그 자체가 절대가치다.
그가 마지막 남은 한 줌 세력을 가지고 부나방처럼 돌진한다. 병력이 적의 진영에서 방향을 잃고 어지럽게 흩날린다. 진영이 불타고, 모든 것이 증발하자 그의 입가가 다시 움찔거린다.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언덕이다. 수없이 많은 적들이 언덕 위에서 할시위를 당겨 그를 겨누고 있다.
그 와중에도 박지호는 마지막 돌진을 통해 가능성의 빈틈을 보고 왔다. 그것은 정말이지 찰나였다. 몇 수가 부족했구나.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가장 완벽한 기풍이되, 그것을 운용하는 이의 실책이었다고. 사람의 실책이 완벽한 초식을 세우지 못했을 뿐이라고. 모든 것이 부족했다고. 완벽한 스타일과 자신 사이에서 낙차를 체감할 떄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순간적인 경이와 좌절, 흥분과 패배감은 감각으로 선명했고 그는 그 순간들을 충실하게 느끼면서 흘려보냈다. 만약 그게 예술이었다면 그 순간적인 감각은 미적인 것으로 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승부의 영역이었고, 훗날 이를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언어로, 그것도 몇마디로 갈무리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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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죠. 그 게임은 아쉬웠죠"
2019년 4월 13일 대전역 KTX 플랫폼에서 박지호의 말이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대전역 KTX 플랫폼으로 걸어나갔다. 결과적으로 그는 2006년 SKY프로리그 그랜드파이널서 MBC게임 히어로즈 소속 주장이자 절정의 에이스로 우승을 이끌었고, 명장면을 만들어낸 프로게이머였다. 더구나 그를 좌절시켰던 T1이라는 팀을 꺾고서였다. "게임을 한 것 후회할 리가요. 게임을 한 덕분에 많은 사랑을 받았고 결혼도 했는데요" 그가 옛날을 떠올리며 웃었다. 이날 인터뷰는 메시지를 통한 나의 인터뷰 요청에 의해 성사된 자리였다. 서울행 기차가 올 동안 같이 기다리겠다며 그가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기차에 오르기 전에 나는 악수를 건넸다. 나는 당신의 게임을 보면서 누군가는 위안을 받았을 것이라고 선선히 말했다. 승리와 패배가 갈리는 승부의 국면에서도 내 마음이 끌리는 것의 정체를 좀 더 바라보는 일이란 무엇이느냐고, 그건 묻지 못하고 돌아왔다. 객실 안에선 예전 게임들을 보면서 묻지 못한 질문을 그저 삼켰다.
***주***
게임 내 상황 등은 당시 게임과 선수들의 증언을 토대로 했던 방송(리얼스토리 프로게이머, 복수용달, 스타리스마스터 등)을 기초로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지호 선수를 비롯해 몇몇 방송 관계자, 당시 기자 등을 만났고 그들의 증언도 참고했습니다. 임요환 선수에 대해서 알기 위해선 기욤 패트리 선수의 증언이 특히 큰 도움이 됐습니다. 다만 게임 내에서 이들의 심리는 다소간 상상에 기대고 있습니다. 풍부한 이야기거리를 남겨준 당시의 스타 게임판에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